최근 수정 시각 : 2023-10-13 01:36:24

김문택

1. 개요2. 생애3. 여담4.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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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19년 12월 29일~1988년 1월 8일

광복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1977년 건국포장)

2. 생애

1919년 12월 29일 평안남도 진남포부에서 김정선[1]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주오대학에 들어갔으나 1943년 여름 귀향하여 청년들을 규합해 반일 연설을 하는 등 항일운동을 하다 체포되었다.

그해 12월 25일 학병출정을 조건으로 석방되어 일본 규슈로 징집되었고 1944년 1월 20일 규슈 서부 제17사단에서 복무 중 그해 9월 26일 외출일을 틈타 부대를 탈출해 조선, 만주를 거쳐 1945년 1월 10일 중국 안휘성 부양현에 있는 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하였다.

광복군 제3지대에서 분대장을 역임하며 초모활동, 훈련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고, 차약도, 전이호 등과 함께 제3지대 훈련교관을 맡으며 광복군 훈련교제를 집필, 기존의 중국 국민혁명군, 일본군의 방식으로 혼재되었던 훈련용어 및 방식을 정립하고 "차렷". "앞으로 가" 등 한국어로 된 제식용어를 만들었다.

해방 후 중국에서 특파단 활동을 하며 일본군 무장해제 및 교포들의 국내 귀환 임무를 수행하다가 1946년 4월 귀국하였다. 1947년 서울대학교 법대에 들어가 1950년 졸업하였고, 6.25 전쟁 중 국군 장교로 복무해 1951년 중위로 전역하였다. 1951년 국립체신학교 교사, 국립체신대학 교수(국제법 전공)를 역임하였으나, 1961년 체신대학 및 체신학교 폐교 후 퇴직하고 1962년 한국전력공사에 입사해 지점장 등을 역임하다 1977년 퇴직하였다.

1963년 광복군 활동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을 받았고, 1966년 부터 1984년 까지 광복회 이사를 역임하였다. 1977년 건국포장을 받았고, 1988년 1월 8일 서울특별시 신림동 자택에서 사망했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그는 자신의 탈출 과정과 광복군 활동 및 해방 후 귀국하기 까지의 과정을 수기로 남겼는데 1995년 7월 "새벽으로 가는 길"로 출간되었고, 2005년 독립기념관에서 "광복군 김문택 수기"로 재출간 되었다. 현재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 정보시스템에서 열람이 가능하다.#

3. 여담

  • 아버지 김정선은 오산학교 졸업생이며 오산학교 교사로 근무하며 조만식의 총애를 받았다. 김문택이 일본 주오대학 재학 당시 방학 때 귀국해 조만식을 뵈었는데, 조만식이 무엇을 하며 지내는지 묻자 그냥 지낸다고 대답을 하니 "젊은이가 힘이 있으면 마당이라도 쓸어야지 이상은 높고 그냥 지내서야 되겠느냐"고 호통을 쳤다 한다. 이 조언을 들은 후 반일 활동으로 투옥되고 후에 일본에서 탈출해 광복군 활동에 참여하였다.
  • 광복군 출신 중 중국, 국내에서 탈출해 합류한 대원들이 다수 있었으나, 일본에서 탈출해 합류한 대원은 김문택이 유일하였다.
  • 김문택 수기에서 광복군 제3지대의 활동상이 자세히 나와있으며, 제2지대에서 실시한 것으로 알려진 국내 진공 작전이 제3지대에서도 실시한 사실이 알려졌다.
  • 광복군 활동 당시 김용관과 부양현 호수를 산책하던 중 한 여인이 같이 보트에 타자고 재촉하자 보트에 타기 위해 호수에 들어가려 했는데 김용관이 붙잡자 보트와 여인은 사라지고 정신이 들었다고 한다. 다음 날 호수에 한 여인의 시신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4. 참고자료



[1] 3.1운동에 참여했고, 후에 오산학교 교사, 교회 장로를 역임하며 신사참배 거부 등으로 옥고를 치루었다. 해방 후 월남해 국립철도학교 부교장을 역임하는 등 교육자로 활동했으나 6.25 전쟁 도중 납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