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09 21:39:17

낙랑공주(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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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태조의 왕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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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 920년[1] ~ ?
재위기간 고려 제후왕비
935년 12월 20일 ~ 미상
본관 개성 왕씨
부왕 태조
모후 신명순성왕후
배우자 낙랑왕(신라 경순왕)
자녀
2녀(추정)[ 펼치기 · 접기 ]
장녀 : 헌숙왕후
차녀 : 신란궁부인 김씨[2]
봉호 안정숙의공주(安貞淑義公主)
→ 낙랑공주(樂浪公主)
→ 신란궁부인(神鸞宮夫人)

1. 개요2. 가족관계(추정)3. 자녀 등장
3.1. 《김은열 묘지명》3.2. 《고려 평장사 보국대안군 김은열 묘지명》
3.2.1. 《묘지명》 내용의 진위 여부
3.3. 《신라경순왕전비》
4.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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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 태조 왕건의 장녀로 제3비인 신명순성왕후 유씨 소생이다. 혼인 전에는 안정숙의공주(安貞淑義公主)[3] 혼인 후에 낙랑공주(樂浪公主)라고 불려졌고 또한 신란공주(신란궁부인)[4]라고도 불려졌다. 고려 제3대 정종, 제4대 광종과는 친남매 사이다.

935년 10월 30일[5] 신라 경순왕고려에 입조(入朝)의 뜻을 밝힌 후 12월 1일 경주를 출발하여 12월 10일 개성에 도착했으며 이어서 12월 20일 낙랑공주와 혼인하여 태조의 사위가 되었다. 이후 경순왕은 태조와 성무부인 박씨[6] 소생의 아홉째 딸인 부인 왕씨와도 혼인을 하였다. 둘은 이복자매 지간이다.

낙랑공주 왕씨는 경순왕이 아직 신라왕이던 935년 12월 그와 혼인하였기 때문에 잠시나마 신라 왕비였다. 부인 왕씨가 경순왕에게 출가한 때는 기록이 없다. 936년 1월 8일[7] 신라가 고려에 합병되고 경순왕도 고려 정승(政丞)으로 격하되었지만 낙랑공주 왕씨는 신라의 왕비로 간주되는 경우가 많다. 《신라경순왕전비》[8]는 신라 경순왕의 왕후였던 죽방부인을 전비(前妃)로, 신라 멸망 이후 경순왕과 혼인한 낙랑공주를 후비(後妃)[9]로 적었다.

자명고 전설에 나오는 고구려호동왕자최씨낙랑국낙랑공주와는 훨씬 후대의 별개 인물이다. 낙랑(樂浪)이라는 호칭도 낙랑군을 뜻하는 것이 아닌 신라의 별칭으로 쓰인 것이다.

2. 가족관계(추정)

《신라경순왕전비》나 경주 김씨 대동보에는 경순왕의 세 딸들 중 장녀는 경종의 제1비 헌숙왕후이고, 차녀는 고려 삼한공신 이금서(李金書)[A]에게 출가한 딸이며, 3녀는 신라 시중 황경(黃瓊)[B]에게 출가한 딸이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 세 딸의 순서는, 897년생으로 추정되는 경순왕의 나이 및 955년생인 경종의 나이, 경종과 헌숙왕후가 혼인한 해가 975년이라는 점, 황경이 신라가 멸망한 936년 이전에 신라의 시중이었다는 점, 이금서가 신라가 고려에 합병된 936년 이후에 고려에서 벼슬을 시작한 점[12] 등을 감안할 때 연대상 문제가 있다. 경순왕의 세 사위의 혼인 순서는 황경(936년 이전?)[13], 이금서(951년 이후?)[14], 경종(975년) 순으로 보는 게 자연스럽다.[15] 헌숙왕후의 경우 경종의 왕비라는 점을 고려하여 딸들 중 가장 먼저 적은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고려 왕실 족보인 《고려성원록(高麗聖源錄)》에는 낙랑공주가 5남 2녀를 두었으며 장녀는 헌숙왕후로 경종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삼한공신이자 익재 이제현의 먼 선조인 이금서에게 출가하였다고 적혀 있다.
하늘색 부분은 연구가 필요하다.
* 신라 경순왕(고려 정승 김부)[16]
* 전비: 죽방부인 박씨[17]
* 장남: 마의태자(麻衣太子)[18] - 태자(太子)[C]
/ 김일(金鎰) → 태자(太子)
* 차남: 범공(梵空)[僧名:승명] - 계자(季子)[C]
/ 김굉(金鍠) → 김황(金湟) → 차자(次子)
* 장녀: 덕주공주(德周公主)[21], 황경[B]에게 출가
* 별빈[23]: 순흥 안씨[24]
* 장남: 김덕지(金德摯)[25] - 별자(別子)[26]
/ 김명(金鳴) → 김명종(金鳴鍾) → 영분공(永芬公)
* 후비: 낙랑공주 왕씨[27]
* 장남: 김은열(金殷說)
* 차남: 김중석(金重錫) → 김석(金錫)
* 3남: 김건(金鍵)
* 4남: 김선(金鐥)
* 장녀[28]: 헌숙왕후 김씨[29], 고려 경종에게 출가
* 차녀[30]: 신란궁부인 김씨[31], 이금서[A]에게 출가
* 5남: 김종(金鍾) → 김추(金錘)

3. 자녀 등장

경순왕의 자녀 중 낙랑공주 왕씨와 관련된 경우만 서술했다.

3.1. 《김은열 묘지명》

1784년(정조 8) 성북(城北) 십리(十里) 밖 어느 종암(鍾巖) 아래 오룡산(五龍山) 기슭에서 발견되었다는 《김은열 묘지명》을 김노규(金魯奎)가 근기(謹記)하였는데, 경순왕은 고려에 항복 후 슬하에 8남을 더 두었다고 한다. 이들의 이름은 일(鎰), 굉(鍠), 명(鳴), 은열(殷說), 중석(重錫), 건(鍵), 선(鐥), 종(鍾)이라 한다. 또 차남 굉(鍠)과 4남 은열(殷說)은 국구(國舅, 태조의 장인)의 아들(낙랑공주 소생)로 평장사를 지내고 공(功)이 있는 신하여서 특별히 장지(葬地)를 하사해 주었다고 한다.
  • 장남: 일(鎰)
  • 차남: 굉(鍠) - 낙랑공주 소생, 고려 평장사
  • 3남: 명(鳴)
  • 4남: 은열(殷說) - 낙랑공주 소생, 고려 평장사
  • 5남: 중석(重錫)
  • 6남: 건(鍵)
  • 7남: 선(鐥)
  • 8남: 종(鍾)

3.2. 《고려 평장사 보국대안군 김은열 묘지명》

高麗平章事輔國大安君金公殷說墓

新羅敬順王金傅第四子侍中侍郞有高麗平章事殷說卒于戊辰三月初四日己丑葬于城北十里鍾岩下五龍山南麓雙龍合金壬坐之原兄則鎰次湟次鳴鍾弟曰重錫曰鍵曰鐥曰鍾子江陵君泰華

고려 평장사 보국대안군 김공 은열 묘

신라 경순왕 김부(金傅)의 넷째 아들로 시중시랑이고 고려 평장사인 은열(殷說)이 무진년 3월 초4일 기축일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성의 북쪽 10리 되는 종암 아래 오룡산 남쪽 기슭 쌍룡합금의 임좌[33] 언덕에 안장하였다. 형은 일(鎰)이고, 다음은 황(湟)이며, 그 다음은 명종(鳴鍾)이다. 아우는 중석(重錫), 건(鍵), 선(鐥), 종(鍾)이다. 아들은 강릉군(江陵君) 태화(泰華)이다.

1785년(정조 9) 경주 김씨 김사목(金思穆)이 족보를 수보(修普)하면서 《고려 평장사 보국대안군 김은열 묘지명》을 추기(追記) 하였는데, 차남 굉(鍠)을 황(湟)으로, 3남 명(鳴)을 명종(鳴鐘)으로 개명하고, 4남 김은열(金殷說)의 시호를 보국대안군(輔國大安君)이라 작호(作號) 하였다. 또 차남 황(湟)과 4남 은열(殷說)을 국생(國甥, 태조의 사위)의 아들(낙랑공주 소생)이라 변경하는 등 가필(加筆)을 심하게 하였다. 이후 경주 김씨 일문 족보류에 경순왕 8자들의 이름 및 서차가 쓰이기 시작하였다.
  • 장남: 일(鎰)
  • 차남: 황(湟. 개명) - 낙랑공주 소생, 고려 평장사
  • 3남: 명종(鳴鍾. 개명)
  • 4남: 은열(殷說) - 낙랑공주 소생, 고려 평장사 보국대안군
  • 5남: 중석(重錫)
  • 6남: 건(鍵)
  • 7남: 선(鐥)
  • 8남: 종(鍾)

3.2.1. 《묘지명》 내용의 진위 여부

《김은열 묘지명》은 그 형태에 있어 누가 기록하였는지 찬(撰)한 자도 없고, 배위(配位) 및 생애 등이 누락되어 있다. 단지 형제 서차만 기술했을 뿐 상세한 내용은 없다. 아들들의 이름 또한 《고려사》 등의 문헌(文獻)은 물론이고, 그 어떤 금석문(金石文) 자료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또 족보에 옮기는 과정에 자녀 이름을 개명(改名)하고, 시호를 작호(作號)하는 등 내용을 변조(變造)하고 가필(加筆)을 심하게 하여 해당 족보의 사료(史料)로서의 가치를 떨어뜨렸다.

3.3. 《신라경순왕전비》

1784년(정조 8) 발견된 《김은열 묘지명》을 바탕으로 1814년(순조 14)에 후손 강릉 김씨 김계락(金啓洛)이 찬하고 경주 김씨 일문들이 세운 《신라경순왕전비(新羅敬順王殿碑)》에는 전비 죽방부인은 3남 1녀를 두었는데, 태자(太子), 차자(次子), 영분공(永芬公)이라 하며, 딸(경순왕의 장녀)은 고려 경종에게 출가하였다고 적혀 있다. 장녀에 대한 기록은 고려사의 내용을 참고한 듯하다. 또한 후비 낙랑공주는 슬하에 5남 2녀를 두었는데, 5남은 은열(殷說), 석(錫, 개명), 건(鍵), 선(鐥), 추(錘, 개명)이며, 장녀(경순왕의 차녀)는 경주 이씨 이금서(李金書)에게, 차녀(경순왕의 3녀)는 장수 황씨 황경(黃瓊)에게 출가하였다고 한다. 딸 2명[34]에 대한 기록은 《김은열 묘지명》에는 없는 내용으로 《이제현 묘지명》, 경주 이씨 족보 및 장수 황씨 족보의 내용을 반영한 듯하다.

장수 황씨 족보에는 시조 황경(黃瓊)이 신라 시중(侍中)을 지냈고 배위가 경순왕의 장녀라고 기록되어 있다. 경주 이씨 족보에는 고려 삼한공신(三韓功臣) 이금서(李金書)의 배위가 경순왕의 3녀로 기록되어 있다. 이금서는 고려에서 벼슬을 시작했기 때문에 《신라경순왕전비》와는 다르게 경순왕의 장녀는 황경에게, 3녀는 이금서에게 출가한 것이 맞을 듯싶다. 한편 《이제현 묘지명》에서는 경순왕이 고려 태조의 딸인 낙랑공주(樂浪公主)에게 장가들어 딸을 낳았고 그 딸이 이금서에게 출가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제현 묘지명》은 1375년 고려의 대학자 이색이 찬한 것이다.# 이는 현전하는 가장 앞선 족보인 안동 권씨 성화보(1476)는 물론이고 고려사(1451)보다도 기록 연대가 앞서는 것이다. 게다가 2007년 묘지석이 실제로 발굴되기까지 했다.# 따라서 경순왕에게 헌숙왕후 외에 딸 2명이 더 있고 각각 황경과 이금서에게 출가한 부분은 사실일 가능성이 크다.

한편 《신라경순왕전비》에서는 《김은열 묘지명》에 등장하는 장남 일(鎰), 차남 굉(鍠)(또는 황(湟)), 3남 명(鳴)(또는 명종(鳴鍾))을 모두 배척하고, 태자(太子), 차자(次子), 3남 영분공(永芬公)으로 하였고, 4남 중석(重錫)을 석(錫)으로, 8남 종(鍾)을 추(錘)로 개명하는 등 가필(加筆)이 심하다. 또한 전비 죽방부인 소생의 장녀를 헌숙왕후 김씨로 기록하였다.

역사학계에서는 대체로 헌숙왕후 김씨를 후비 낙랑공주 소생으로 보고 있다. 경주 김씨 대동보에서도 헌숙왕후 김씨를 후비 낙랑공주 소생의 장녀로 적고 있다. 고려사에는 헌숙왕후가 975년(경종 즉위년)에 경종과 혼인한 것으로 되어 있다. 경종이 955년생인 것을 감안할 때 헌숙왕후를 전비 죽방부인 소생으로 보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 975년에 경종은 20살이었고 헌숙왕후의 나이는 15~20살 사이로 추정할 수 있다. 낙랑공주가 대략 38살의 경순왕과 혼인한 것은 935년 말이므로 낙랑공주는 대략 15살 이상인 920년 이전 출생자일 것이다. 낙랑공주 소생의 딸이 975년에 혼인적령기인 15~20살이 되려면 955~960년에 출생해야 한다. 출산 당시 낙랑공주의 나이가 15~40살이라고 한다면 낙랑공주는 대략 915~945년생으로 추정된다. 앞에서 봤듯이 낙랑공주는 대략 920년 이전 출생자이므로 결국 915~920년생이라는 것이 된다. 대략 897년생인 경순왕과는 18~23살의 나이차가 난다. 어쨌든 출산에는 지장이 없다. 한편 897년생으로 추정되는 경순왕의 전비 죽방부인은 917년경 15~20살 나이로 혼인했을 것으로 추정된다.[35] 따라서 897~902년쯤 출생한 죽방부인이 975년에 혼인적령기에 도달하는 955~960년생의 딸을 낳으려면 출산시 나이가 53~63세가 되어 자연스럽지 못하다.
  • 전비 박씨 소생 (3남 1녀)
  • 후비 왕씨 소생 (5남 2녀)
    • 장남: 은열(殷說)
    • 차남: 석(錫. 개명)
    • 3남: 건(鍵)
    • 4남: 선(鐥)
    • 5남: 추(錘. 개명)
    • 장녀: 이금서(李金書)[A]에게 출가
    • 차녀: 황경(黃瓊)[B]에게 출가

4. 대중매체


[1] 대략 915~920년에 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자세한 것은 3.3《신라경순왕전비》 항목 참조.[2] 神鸞宮夫人 金氏. 경주 이씨 고려 삼한공신(三韓功臣) 중원태수(中原太守) 이금서(李金書)에게 출가.[3] 조선 후궁의 품계 숙의(淑儀)와는 전혀 관련이 없으며 한자도 다르다.[4] 신란궁은 신라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면서 받은 궁전의 이름이다.[5] 음력 935년 10월 1일.[6] 호족 박지윤(朴智胤)의 딸[7] 음력 935년 12월 12일.[8] 1814년(조선 순조 14년)에 경주 김씨 가문에서 세운 비석이다.[9] 왕의 둘째 정실이다. 자세한 내용은 차비(次妃) 문서 참고.[A] 경주 이씨. 고려조 문하시중 이제현(李齊賢)의 14대조, 조선조 영의정 이항복(李恒福)의 22대조. 아버지는 신라 병부령 이금현(李金現), 조부는 신라 소판 이거명(李居明). 이금서는 고려에서 벼슬을 시작했다고 하므로 신라에서 이미 벼슬이 시중에 이른 황경과 나이차가 꽤 날 듯하다.[B] 장수 황씨 시조. 조선조 영의정 황희(黃喜)의 선조.[12] 이금서는 신라 병부령(兵部令) 이금현(李金現)의 아들이다. 이금현은 신라 경순왕의 측근이었을 것으로 보이며 936년 1월 경순왕과 함께 고려에 귀부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이금서가 고려에서 벼슬을 시작한 때도 고려가 건국한 918년 이후가 아니라 936년 1월 이후일 가능성이 크다.[13] 장수 황씨 족보에 의하면 황경의 배위가 경순왕의 딸이라고만 기록되어 있을 뿐 그 어머니가 누구인지 기록되어 있지 않다. 황경이 신라(936년 1월 멸망)에서 시중을 지냈다고 하므로 그때 나이가 최소 40세 이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경순왕의 후비 낙랑공주 왕씨 소생의 딸의 출생은 빨라야 936년 말이기 때문에 황경의 배위가 낙랑공주 소생이라면 15세에 혼인했다고 하더라도 황경의 나이가 최소 55세가 되므로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따라서 장수 황씨 족보의 기록이 사실이라면 황경의 배위는 경순왕의 전비 죽방부인 소생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14] 《이제현 묘지명》 및 경주 이씨 대동보에 따르면 경순왕과 낙랑공주 왕씨 소생의 딸과 혼인했다고 하므로, 935년 경순왕과 낙랑공주의 혼인으로 바로 태어난 딸이 15세에 혼인했다고 가정하더라도 951년은 되어야 한다.[15] 연대상 신라 말 전비 죽방부인 소생의 딸과 혼인했을 것으로 보이는 황경이 가장 앞서고, 고려 초 후비 낙랑공주 소생의 딸과 혼인했을 것으로 보이는 이금서와 경종의 혼인순서는 바뀔 가능성도 있다.[16] 935년 10월 경순왕이 고려에 입조할 뜻을 알렸고, 동년 11월 개성에 입성한 직후 고려 태조의 장녀 낙랑공주와 혼인했으며, 동년 12월 신라가 고려에 합병되었다. 즉 낙랑공주는 신라왕(新羅王)과 혼인한 것이다. 이후 신라가 고려에 합병되면서 경순왕(敬順王)도 고려의 정승(政丞) 김부(金傅)로 격하된 것이다. 다만 관광순화위국공신 상주국 낙랑왕(觀光順化衛國功臣 上柱國 樂浪王 政丞)에 봉해졌다. 975년 김부의 딸(헌숙왕후)이 경종에게 출가하면서 경종은 김부에게 상보 도성령(尙父 都省令)의 호를 더하고 추충순의숭덕수절공신(推忠順義崇德守節功臣)의 호를 주었다.[17] 다수 족보에서는 김은열 묘지명의 내용을 반영하여 3남 1녀를 낳았다고 적고 있다.[18] 김일(金鎰)과 동일인물로 추정된다. 부안 김씨 무술보에서는 태자 김일의 배위가 신라 시중(侍中) 김유렴(金裕廉)의 딸 김영란(金英蘭)으로 4남을 낳았다고 적고 있다. 그녀는 신라 시중(侍中) 김유렴(金裕廉)의 딸이고, 조부는 김억렴(金億廉)이며, 고려 태조의 제5비 신성왕후가 고모이다.[C] 삼국사기, 삼국유사, 증보문헌비고, 조선씨족통보.[C] [21] 부안 김씨 무술보에 전비 소생의 장녀 덕주공주(德周公主)의 남편이 황이재(黃以載) 혹은 황경(黃瓊)이라고 적혀 있다. 부안 김씨의 시조는 경순왕의 장남 김일(金鎰)의 4대손 김춘(金春)이다. 다수의 족보는 장녀를 헌숙왕후라고 적고 있으나 이는 연대상 모순으로 장녀는 황경에게 출가한 딸일 것이다. 덧붙여 장녀가 황경에게 출가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지 호칭이 덕주공주인지는 확실치 않다.[B] [23] 別嬪. 혹은 별비(別妃).[24] 경주 김씨 세보(1920)에 별빈(別嬪) 순흥 안씨가 1남을 낳았다고 적고 있다. 부안 김씨 무술보에서는 별비(別妃) 순흥 안씨(順興 安氏)가 1남 김덕지를 낳았다고 적고 있다. 《김은열 묘지명》을 기초로 한 다수 족보에는 김덕지를 8형제 다음에 적고 있고 순흥 안씨는 적고 있지 않다.[25] 울산 김씨 시조이다. 울산 김씨 족보에서는 김덕지를 경순왕의 계자(季子) 범공(梵空)(*僧名:승명)과 동일시하고 있다. 문헌상으로는《하서 김인후 가장》(1561, 양자징)에서 처음으로 경순왕의 왕자로서 김덕지(金德摯)의 이름이 등장하였고, 《하서 김인후 신도비문》(1682, 송시열)에서는 김덕지를 경순왕의 별자(別子)로 적고 있다. 위조 논란이 있는 《김은열 묘지명》(1784 발견)을 기초로 하는 다수 족보는 대체로 계자 범공을《김은열 묘지명》에 나오는 차자 김굉(혹은 김황)과 동일시하고 김덕지를 9남으로 적고 있다. 《김씨 분관록》(1887, 김창희)에서는 《김은열 묘지명》에 나오는 8자를 모두 배척하고 김덕지의 경우 경순왕의 왕자로 적고 있다. 《증보문헌비고》(1908, 칙명)에서는 범공을 계자로 김덕지를 별자로 구별하고 《김은열 묘지명》을 일부 원용하였다. 《조선씨족통보》(1924, 윤창현)에서는 《김은열 묘지명》의 3~8자는 인용하되 1자, 2자는 태자, 계자 범공으로 적고 있고, 김덕지는 별도로 언급하지 않았다. 한편 부안 김씨 무술보에서는 김덕지를 별비(別妃) 순흥 안씨 소생으로 적고 있다.[26] 하서 김인후 신도비문, 증보문헌비고.[27] 다수 족보에서는 김은열 묘지명의 내용을 반영하여 5남 2녀를 낳았다고 적고 있다.[28] 부안 김씨 무술보에서 다섯째(序五)라고 적고 있다.[29] 조선조 말 1814년 경주 김씨 일문들이 세운 《신라경순왕전비》에는 전비 죽방부인 소생이라 적혀 있는데, 역사학계에선 후비 낙랑공주 소생으로 추정하는 것이 정설에 가깝다. 경순왕이 대략 897년생인 점, 경종이 955년생인 점, 헌숙왕후가 혼인한 해가 975년이라는 점 등을 감안할 때 헌숙왕후가 전비 소생이 되려면 전비가 40~50대의 노산이 되어아 한다. 불가능하진 않지만 쉬운 일도 아니다.[30] 부안 김씨 무술보에서 여섯째(序六)라고 적고 있다. 경주 이씨 대동보에서 경순왕의 3녀라고 적고 있다.[31] 神鸞宮夫人 金氏.[A] [33] 임좌오향(壬坐午向) : 북쪽<壬>을 등지고<坐> 남쪽<午>을 바라보는<向> 자리.[34] 마의태자와 관련된 전설에 그와 혼인하여 금나라의 시조가 되었다는 또 다른 딸인 덕주공주가 나오지만 경순왕의 후손과 관련된 기록에선 나오지 않아 진짜 경순왕의 딸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35] 1987년 10월 31일 부안 김씨 대종회에서 건립한 강원도 인제군 남면 신풍리 소재 마의태자 유적비에는 경순왕의 장남 마의태자를 김일(金鎰)이라고 하며 917년생으로 적고 있는데 얼추 연대가 적절하게 맞아 떨어진다. 부안 김씨 족보에 전해져 내려오는 기록인지 경순왕이 897년 출생한 것으로 추정되므로 역산해서 맞춰넣은 것인지는 모르겠다.[A] [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