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1-22 08:06:35

자의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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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거세 후 남해 후 유리 후
알영부인 운제부인 이리생부인 사요왕의 딸 김씨
탈해 후 파사 비 지마 후 일성 후
아효부인 사성부인 애례부인 지소례왕의 딸 박씨
아달라 후 벌휴 후 내해 후 조분 후
내례부인 석골정의 모후 아루부인 아이혜부인
조분 후 미추 후 흘해 후 내물 후
운소부인 광명부인 석공한의 모후 보반부인
실성 후 눌지 후 자비 후 소지 후
아류부인 차로부인
1
복호의 딸 김씨
2
미사흔의 딸 김씨
1
습보의 딸 김씨
2
선혜부인
3
벽화부인
지증왕 후 법흥왕 후 진흥왕 후 진지왕 후
연제부인 보도부인
1
사도부인
2
소비 부여씨
지도부인
진평왕 후 무열왕 후 문무왕 후 신문왕 후
1
마야부인
2
승만부인
문명왕후 자의왕후
폐비 김씨
2
신목왕후
성덕왕 후 효성왕 후 경덕왕 후
성정왕후
2
소덕왕후
1
왕비 박씨
2
혜명부인
3
정종의 딸 김씨
사량부인
경수태후
혜공왕 후 선덕왕 후 원성왕 후 소성왕 후
1
신보왕후
2
창창부인
구족부인 숙정부인 계화부인
애장왕 후 헌덕왕 비 흥덕왕 후 희강왕 후
왕후 박씨 귀승부인 정목왕후 문목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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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용왕후 정계부인
1
소명왕후
2
장보고의 딸
문의왕후의 모후
경문왕 후 헌강왕 비 효공왕 후 신덕왕 후
1
문의왕후
2
차비 김씨
의명부인 왕비 박씨 의성왕후
경명왕 후 경애왕 후 경순왕 후
왕비 김씨 왕비 죽방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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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a2d5b><colcolor=#fbe673>
신라 문무왕의 왕비
자의왕후 | 慈儀王后
출생
(음력)
620년대 추정[1]
신라
사망
(음력)
연대 미상
신라 금성
능묘 미상
재위기간 신라 왕비
661년 6월 ~ 681년 7월 1일[2] (2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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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a2d5b><colcolor=#fbe673> 성씨 김씨(金)
불명
부모 부친 김선품
모친 미상
부군 문무왕
자녀 태자 김정명
시호 자의왕후(慈儀王后)
별호 자눌왕후(慈訥王后) }}}}}}}}}

1. 개요2.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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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라 중대의 왕후. 제 30대 문무왕의 비이자 제 31대 신문왕의 모후. 아버지는 파진찬 김선품(金善品)[3]이다.

2. 내용

부친의 관직이 해양 업무를 관장하는 파진찬인 것으로 볼 때, 아마도 태종 무열왕이 해양세력과 연대하기 위해서 선품 집안의 딸을 며느리로 들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실제로 문무왕은 바다와 관련된 업적을 다수 남겼으며 여기에 처가의 지원이 있지 않았을까 추정하는 것.

삼국시대 군주들 중에서 가장 기록이 많은 남편 문무왕과 달리 자의왕후 본인의 기록은 거의 없는 편. 특히 전임 왕비인 문명왕후는 김춘추와의 연애결혼이 역사 기록으로 남을 정도였고, 후임인 신목왕후 역시 최초의 중국식, 유교식 혼인과 태후로서 섭정한 기록이 남은 것을 보면 자의왕후는 그냥 왕비로써 무난하게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여담으로 문무왕과 자의왕후는 신라 중대 왕실에서 거의 유일하게 이혼과 재혼을 거치지 않은 부부다. 중대 왕들은 대다수가 이혼과 재혼을 했는데[4] 16살, 어린 나이에 죽어서 아예 결혼을 하지 않은 효소왕을 제외하고는 신문왕을 시작으로 줄줄이 이혼과 재혼을 반복한다(...). 신라는 일부다처제인 고구려, 백제와는 달리 일부일처제가 원칙[5]이기 때문에 왕비 자리가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자주 변동했기 때문이다.

울산광역시에 있는 대왕암이 문무왕비, 즉 자의왕후의 무덤이라는 설화가 있지만 말 그대로 설화일 뿐이다. 이는 문무대왕릉(경주 대왕암)에서 파생된 것으로 추정되며 스토리도 동일하다. 단, 경주 감포 앞바다에 있는 대왕암은 직간접적 문헌기록이나 이런저런 인공적 가공이 명확해 문무왕의 무덤 내지는 장례 장소가 맞고, 정식 명칭도 문무대왕릉이다.

[1] 당시 결혼연령이 10대 중반이 혼인적령기였다는 것을 감안하고 문무왕626년에 태어났는고 문무왕이 혼인한 시점이 10대 중반이었던 641년에 한 것으로 보아 자의왕후도 그때 같이 평군 혼인나이에 결혼을 했다면 자의왕후는 620년대에 태어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2] 양력 7월 21일[3] 삼국유사에 따르면 선품은 진흥왕의 셋째 아들인 구륜의 아들이라고 나온다. 이에 따르면 7촌 고모-조카간 원친인 것.[4] 신라 중대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굉장히 이례적인 경우라 이를 신라 중대의 특징이라고 보는 학자들까지 있을 정도다.[5] 정확히는 일부일처다첩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