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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32A62><colcolor=#fbe673> 신라 문성왕의 정혼자 | |
신라 장보고의 딸 | |
생몰년 | 미상[1] |
성씨 | 장(張) |
부모 | 부친: 장보고 |
부군 | |
자녀 | 슬하 1남? 아들 - 궁예추정 |
봉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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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라의 여성. 문성왕의 차비가 될 뻔했지만 협상이 결렬되어 사서에서 어떠한 공식 직함도 갖지 못하게 된 비운의 여성이다.김우징(후일 신무왕)이 장보고의 군대를 통해 민애왕을 몰아내고 왕위를 빼앗는 대신, 그의 딸을 맞아 왕비로 삼는 것을 장보고에게 제안했고, 이로서 왕위 탈환에 성공했다. 그러나 약속한 신무왕은 즉위 후 얼마 되지 않아 사망했고, 뒤이어 즉위한 문성왕은 그의 딸을 차비[2]로 삼으려고 했으나 신하들이 장보고 가문의 미천한 신분을 문제로 삼아 혼인은 결렬되었다. 이에 장보고는 신무왕이 약속을 어긴 것을 원망하여 반란을 시도하였으나 장군 염장에 의해 결국 암살당한다.
2. 궁예의 어머니?
일반적으로는 위와 같이 알려져 있으나, 사실 그녀가 궁예의 생모라는 설이 있다.##이는 궁예의 아버지가 헌안왕 또는 경문왕의 서자라는 기록이 있다는 점과 궁예가 갓난아기였을 때 유모가 궁예를 데리고 도망쳤다는 기록, 장보고의 본명인 궁복과 궁예가 궁(弓)이라는 성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나온 가설이다. 문성왕이 장보고의 딸을 차비로 들이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되자 보상 차원으로 대신 이복 숙부였던 김의정(헌안왕)의 첩으로 주었고,[3] 궁예가 태어나고 얼마 뒤 장보고의 난이 터져 궁예의 생사를 장담할 수 없게 되자 유모가 궁예를 데리고 도망쳤다는 가설이다.
궁예는 보통 축(丑)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는데 해당 가설대로라면 845년생이 되며, 문성왕이 장보고의 딸과 혼인 논의가 있던 해이기도 하다. 이 경우 궁예는 사망 당시 73세가 된다. 그런데 김의정이 즉위한 해는 857년이며 삼국사기 헌안왕의 서자설에서는 빈어(嬪御:후궁의 작호 중 하나)와의 사이에서 낳았다고 명시되어 있다. 이는 궁예의 어머니가 헌안왕 즉위 때까지 살아있었으며 정식 후궁이었다는 뜻이 되는데, 정말로 장보고의 딸이 헌강왕의 빈어가 맞다면 장보고의 딸은 아버지와 청해진이 몰락한 이후에도 폐출당하거나 살해당하지 않고 김의정이 즉위한 뒤까지 김의정의 첩 신분을 유지했을 수도 있다.
868년 경문왕에게 반란을 일으켰다가 사형당한 이찬 김예(金銳)와의 관련성도 있다. 이찬 김예는 855년 문성왕이 만든 국왕경응조무구정탑원기에서 '문성왕의 사촌동생'으로 나오는데, 삼국사기에서는 문성왕의 할아버지 김균정이 정교부인과의 사이에서 신무왕을, 조명부인과의 사이에서 헌안왕을 낳았다는 기록밖에 없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헌안왕의 아들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헌안왕 사후 즉위한 것은 헌안왕의 아들이 아니라 사위인 경문왕이었고,[4] 경문왕은 재위기간 내내 왕위를 노린 진골들과 치열한 다툼을 해야 했다. 그런데 예(銳)의 통자가 예(裔)라서 궁예의 본성(本姓)이 김씨가 맞다면 김예와 궁예는 동명이인이 되기 때문에 둘의 관계가 미심쩍다는 평을 듣는다.
다만 궁예는 경문왕의 서자라는 기록도 있으며, 궁예의 주 활동 시기와 안성시 측 구전 때문에 경문왕과 차비 김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설도 있다. 경문왕과 차비 김씨의 아들이라면 궁예는 장보고의 외손자가 아니게 된다. 학계에서는 궁예가 891년부터 활동을 시작했으며 궁예의 유년기 특성상 경문왕의 아들이 더 유력하다고 보고 있다. 김예와 궁예가 동명이인임을 고려하면 장보고의 딸이 낳은 아들은 궁예가 아니라 이찬 김예일 수도 있다.
[1] 김우징과 장보고의 사돈 약속이 838년이니 그녀 또한 빨리 잡아도 822년/823년 생으로 추정된다.[2] 후궁이 아니라 두 번째 정실 부인이다. 동아시아 사회에서 임금은 여러 명의 정실 부인을 둘 수 있었고 정실 부인을 반드시 한 명만 두어야 한다고 정한 것은 조선 태종 이후의 일이다.[3] 김의정이 문성왕의 이복 숙부지만 문성왕은 810~820년대생이고 김의정은 822년 전후생이라서 의외로 둘의 나이는 가깝다.[4] 경문왕 : 원성왕-김예영-김헌정-희강왕-김계명-경문왕 / 문성왕 : 원성왕-김예영-김균정-신무왕&헌안왕-문성왕. 경문왕은 신무왕의 외손자이자 헌안왕의 사위로서 즉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