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13 20:24:12

정복왕

1. 개요2. 실존 인물
2.1. 동아시아사
2.1.1. 한국사2.1.2. 중국사2.1.3. 몽골사
2.2. 동남아시아사2.3. 인도사2.4. 중앙아시아사2.5. 중동사2.6. 유럽사
3. 가공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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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복왕( / The Conqueror)는 매우 넓은 영토를 정복한 군주를 높여 부르는 일종의 찬사이다.

2. 실존 인물

2.1. 동아시아사

2.1.1. 한국사

2.1.2. 중국사

2.1.3. 몽골사

2.2. 동남아시아사

2.3. 인도사

2.4. 중앙아시아사

2.5. 중동사

2.6. 유럽사

3. 가공 인물


[1] 한나라의 변경을 지켜준다는 명목으로 한의 지원을 받아서, 이웃의 작은 마을과 진번, 임둔을 공격하여 영토를 수천리로 늘렸다.[2] 비류국을 흡수했다.[3] 초기 고구려의 대표적 정복군주로 그의 치세에서 고구려란 국가의 기틀이 닦였다해도 과장이 아니다. 부여 본토가 이 임금 때부터 고구려에게 본격적으로 잠식되기 시작한다.[4] 고구려가 동북아 패자로 성장할 수 있는 밑바탕을 깔아준 군주. 낙랑과 대방을 정복하여 한반도 서북부를 장악했는데 이를 통해 영토 확장은 물론이고 이전 중국 직할지였던 한사군을 합병함으로써 고구려가 고급 인력을 확보하고 중원 문화를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배경을 마련해주었다.[5] 이름부터가 정복군주. 고구려의 체급을 완성한 태왕으로 이러한 체급을 바탕으로 고구려는 삼국 중 압도적인 전력을 구가하게 되었고 수비전에서나마 중국 통일왕조 , 과도 대등한 전쟁을 할 수 있었다. 요동, 부여, 한반도 중부 등의 알짜배기 땅들이 모조리 이 시기 확보되었다.[6] 선대인 광개토대왕의 적극적인 북진정책을 지켜보았으나 당시에 남부 2국의 움직임을 불안하게 생각하였다. 더이상의 북진은 국경이 너무 넓어서 진군 중에는 무조건 국군을 대부분 데려가야 했기 때문에 광개토대왕이 승하한 이후 즉위하자마자 남진 정책으로 시선을 돌린다. 이후, 적극적인 남진정책으로 백제와 신라를 몰아붙였으며 백제의 수도 한성을 차지하고 경상북도까지 영토를 넓혔다.[7] 북부여를 흡수했다.[8] 수나라와의 전쟁으로 유명하지만 정복 행보도 보였는데 그의 치세 때 고구려가 한강에 상당히 근접하는 수준으로 영토를 얻었음이 드러났으며 이는 이후 연개소문의 활약으로 이어진다.[9] 경기도 일대를 직접 지배화하고 국가 체제를 정비한 후 천안 청당동 목지국을 급습해 함락하면서 삼한 사회 전체의 서열을 뒤집어 엎어버렸다. 걸리적거리는 목지국 및 그 지지 세력 탓에 경기도, 충남 북부에서 잠깐 정체되던 백제가 이후 거침없이 충북, 전라 일대로 죽죽 뻗어나가기 시작한 게 이 임금 때부터다.[10] 침미다례 및 호남 동부 일대가 백제의 마한 맹주 자격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는데, 침미다례를 굴복시키고 침미다례가 그간 보유했던 왜, 가야, 신라와의 무역권 및 무역 경로까지 모조리 접수해 드디어 마한 전역의 패자 위치를 확립한다. 북으로는 황해도, 남으로는 전라남도까지 세력권을 크게 확장시켜 소위 3국 중 가장 먼저 전성기를 맞은 나라가 된다. 왜국에 사신을 파견하고 칠지도를 선물함으로써 한일관계의 역사를 열기도 했다.[11] 지배 영역 전체에 대한 직접 지배화를 완료하고, 가야로부터 호남 동부를 빼앗은 것에 더해 경남 서부 일대까지 제패하였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가야와는 호남 동부-경남 서부 축선을 놓고 무려 이십 년이나 걸친 뺏고 빼앗기는 격렬한 전진-후퇴를 반복했는데, 그 전후에 가야가 백제와 대체적으로는 우호적이었던 것에 비하면 상당히 험악한 관계였다. 한편 무령왕이 경기도 남부와 한강 유역 부근까지 재진출했다는 견해도 있어서, 무령왕기 백제의 북쪽 영토 경계선에 대해서는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 충주 고구려비가 장수왕이 아닌 광개토대왕의 비석일 가능성이 있어 광개토대왕 시기 고구려 영역에 대한 재논의가 이루어지는 것과 같이 무령왕 시기 한강 유역까지 백제가 다시 치고 들어갔다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기존 역사를 다시 수정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12] 위덕왕 시기부터 시작된 재정비와 개혁을 기반으로 신라를 향한 대대적인 집단공세에 나섰다. 참으로 백제로서는 망신스럽게도 가야에게서 힘들게 빼앗았던 영역 일부가 진흥왕의 신라에게 넘어가 있는 상황이었는데, 무왕 초기 백제는 대규모 토목공사를 단행하고 금마저, 현 익산으로 수도를 옮기려 하기도 하였으며 전쟁에서도 큰 성과를 거두었다. 무왕기 백제의 전방위 대공세로 신라는 호남 동부 내륙 일부, 옛 가야땅 등 40여개 성을 손실하는 등 다시 크게 위축되며 당나라에 지원을 요청하였다.[13] 거칠산국우시산국을 흡수했다.[14] 신라 전기의 대표적인 정복 군주로 경주시와 그 인근 일대 정도에만 국한된 신라의 영역을 현재의 경북 거의 전역으로 확장해 신라를 진한 최대 맹주로 성장시켰다.[15] 계립령과 죽령을 흡수했다.[16] 소문국을 흡수했다.[17] 감문국골벌국을 흡수했다.[18] 우산국을 흡수했다.[19] 탁기탄탁순국금관가야를 흡수했다.[20] 가야를 멸망시키고 고구려, 백제의 영토를 빼앗아 낙동강 이동의 경상북도 대부분과 경상남도 동부 일부 정도에 한정되던 기존 신라 영토를 몇 배로 늘렸고, 이후 삼국시대 최후의 승자가 되는 기반을 닦았다.[21] 백제를 멸망시켰다.[22] 고구려를 멸망시켰고 백제 지역을 온전히 흡수하는데 성공했으며 한반도를 완전히 지배하려는 당나라의 침공을 물리치는데 성공하여 신라의 자주성을 지켰다.[23] 그의 치세 때 2번에 걸친 당나라 원정이 있었으며 고구려의 고토를 대부분 수복했다.[24] 용흥강 주변을 흡수했다.[25] 교과서에 나오는 해동성국 발해 영역은 선왕 때 완성되었다.[26] 남으로는 후백제와 신라를 복속시키고, 북으로는 평안남도와 함흥 일대를 확보했다.[27] 쌍성총관부 수복으로 대표되는 동북지역 영토 수복과 함께 요동 정벌을 지시해 일시적으로나마 점령에 성공하며 발해시기 이후 400여년만에 한민족이 요동에 진출한 사례로 남았다.[28] 여진을 정벌하고 4군 6진을 설치했다. 세종이라는 묘호도 여진정벌을 했다는 이유로 문종이 강력하게 요청했기 때문이다.[29] 전국시대를 끝냈다. 이것으로 요약이 가능하다.[30] 흉노를 무릎 꿇렸으며 푸젠성 저장성을 중국의 영토로 만들고 남월도 정복했다. 한민족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도 그에게 정복되었다.[31] 팔왕의 난부터 시작해서 5호 16국 시대로 대표되는 분열기를 끝낸 장본인이다.[32] 동돌궐과 고창국을 정복했다.[33] 아버지가 북방과 서방을 정복했다면 이쪽은 고구려와 백제를 무너뜨리며 동방 정복에서 두각을 드러냈다.(물론 동방만 신경쓴 건 아니고 다시 흥기하려던 돌궐을 밟아놓기도 하고 토번과 충돌하는 등 북방과 서방도 나름 신경쓰긴 했다.) 문제는 이후 백제 지역은 신라가 빼앗아가고 고구려 지역에선 발해가 흥기하는 등 고종의 정복은 아무 실적도 없었다는 것. 그래서 고종은 태종과 달리 암군이라 자주 불린다.[34] 당나라 멸망 이후 벌어진 5대 10국 중 북한과 남쪽에 위치한 오월를 제외한 나머지 국가들을 흡수했다.[35] 당나라 멸망 이후 벌어진 5대 10국 시대를 끝내고 중국을 재통일했다.[36] 거란을 통일하고 돌궐, 탕구트, 발해를 정복했다.[37] 행정 조직을 정비하고, 신장된 군사력을 바탕으로 직접 군대를 이끌며 동 • 서 양방향으로 원정을 나가 서쪽으로는 티베트위구르 지역, 동쪽으로는 고려에 맞닿을 정도로 제국의 영토를 크게 팽창시켰다. 다만 송나라와의 전쟁에서는 황하 이북을 점령한 이후의 송나라의 반격으로 전연의 맹이라는 화평을 맺는 것에 그쳤으며 고려와의 전쟁에서는 1차 침공에서 서희의 언변에 놀아나 강동 6주를 고려에게 내주고 이후 수차례나 침공하여 크고 작은 전투를 벌였지만 이 강동 6주의 존재 때문에 보급의 난항을 겪었고 결과적으로 소득 없음 내지 큰 피해만 입었으며 특히 귀주 대첩 패배 이후 고려 정복에 대한 의지를 사실상 상실해 버리고 만다.[38] 사실상 요나라 정복. 금나라와 송나라의 공격 이후 요나라는 껍데기만 남았고, 금 태조가 사망한지 고작 2년 뒤에 멸망한다.[39]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이어서 송나라를 남쪽으로 몰아내면서 금나라가 화북의 신흥 강대국으로 우뚝서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40] 원나라=몽골 제국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미 끝난다. 몽골 제국이라는 요인을 뺀다면 고려 복속, 남송 정복 등이 눈여겨 볼만한 정복 행보.[41] 원나라를 다시 북으로 몰아내고 중원 전역을 다시금 정복했다.[42] 몽골 지역에 대해 자주 친정을 벌였으며 베트남을 정복했다.[43] 후금의 창업군주로서 분열되어 있던 여진 세력을 다시금 통일했으며 사르후 전투로 요동 지역을 정복했다.[44] 조선을 복속하고 내몽골 지역을 정복했으며 명에 대한 공세를 이어가 산해관 이북은 확실히 정복했으며 나머지 지역도 약탈 원정은 제대로 수행했다.[45] 그의 치세에 명나라가 정복되긴 했지만 정확히 말한다면 이는 섭정인 도르곤의 업적이다. 그걸 뺀다면 남명의 영토였던 윈난성을 정복해 명의 잔당을 미얀마로 몰아낸 정도가 있다.[46] 정씨 왕조가 지배하던 대만을 정복하고 준가르를 격파해 외몽골의 패권을 장악했으며 티베트 또한 정복한다.[47] 준가르를 멸망시켜 신강 지역을 정복, 청나라의 최대 판도를 이룩한다.[48] 사실상 정복군주의 대명사인 인물로 인류 역사상 최고의 정복군주.[49] 금나라동유럽 등을 정벌해 몽골 제국은 오고타이의 시대에 가장 서쪽 끝까지 넓어졌다.[50] 몽케의 시대에 동생 훌라구를 주축으로 중동을 정복했다.[51] 마우리아 제국의 최대 판도를 이룩했으며 이때가 아우랑제브 시기와 함께 인도 통일에 가장 근접했던 시기이다.[52] 영토를 오디샤와 스리랑카까지 넓혔으며 벵골은 물론 강력한 해군력으로 동남아시아인 스리위자야 제국까지 제압해서 촐라 제국의 전성기를 열었다.[53] 남인도까지의 영토 확장을 노리고, 수도도 델리에서 다울라타바드로 옮겨가며 정복 사업에 열중한 술탄이다. 투글루크 왕조를 시작으로 중남부 인도 데칸 지역에도 이슬람교가 본격적으로 전해진다.[54] 무굴 제국의 최대 판도를 이룩했으며, 그의 치세 때 인도는 통일에 가장 근접했었다. 그의 말년과 사후에 말아먹어서 문제였지...[55] 엄밀히 따지면 국왕은 아니다. '차트라파티'라는 왕위가 있어도 지역 군주에게 상당한 자치권이 있었고, 그 지역의 연합체가 마라타였다. 바지라오는 재상인 '페슈와'였고, 마라타 동맹의 실질적인 통치자였으며 마라타의 영토를 10배나 넓힌 인도 역사에 손에 꼽히는 정복자였다.[56] 동쪽으론 인도 델리, 서쪽으론 아나톨리아의 끝부분인 스미르나까지, 북쪽으론 킵차크 칸국을 제압했다.[57] 티무르 이후 나온 페르시아 지방의 정복자로 무굴 제국을 사실상 무너뜨린 장본인이다.[58] 정복왕의 원조라고 부를 수 있는 왕이다.[59] 동로마 제국을 봉신화시키고 불가리아 제국을 멸망 직전까지 몰았으며 세르비아 제국을 몰락시켰다.[60] 불가리아 제국을 멸망시켰고 뒤이은 니코폴리스 십자군 격퇴 및 동서부 아나톨리아 일대의 튀르크계 공국들 정복과 아나톨리아 최후의 동로마령인 필라델피아를 정복하는 등의 성과를 거두나 티무르에 의해 이 모든 걸 잃고 몰락하며 이후 오스만은 공위기라는 첫번째 시련을 겪게 된다.[61] 테살로니카를 정복하고 카라만을 제외한 모든 튀르크계 공국들을 정복했으며 바르나 십자군을 격파하며 발칸 지역에 대한 패권을 장악했다.[62] 이쪽은 2천년 역사의 로마 제국을 자신의 손으로 끝장냈다. 이후로도 세르비아, 보스니아, 알바니아, 트라페준타 제국, 크림 칸국, 테오도로 공국, 이피로스 친왕국을 모두 무너뜨렸으며 베네치아를 에게 해에서 몰아내어 동부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하고 심지어 이탈리아 남부의 오트란토를 일시 점령하기도 했다. 그 결과 얻은 칭호가 el-Fātiḥ (الفاتح, 엘 파티흐). 역시 '정복자'라는 의미다.[63] 이쪽은 당대 이슬람 최강국으로 인식되던 맘루크 술탄국을 쓰러트려 이집트를 정복했으며 사파비 왕조에게도 승리를 거두어 동부 아나톨리아와 북부 메소포타미아도 정복했다. 이슬람의 성지인 메카가 오스만의 치하에 들어온 것도 그의 치세때의 일.[64] 헝가리와 로도스 섬, 아라비아 반도를 정복해 오스만의 최대 판도를 사실상 만들어낸 장본인이다.[65] 칭기즈 칸과 함께 정복 군주의 대명사로 불리는 인물. 그의 치세때 페르시아 제국이 정복되었으며 인더스 강 지역까지 원정이 진행되었다.[66] 정복을 진두 지휘했다기 보단 국가가 활발히 정복한 시기의 군주라 일반적인 정복왕과 다르다.[67] 별명이 William the Conqueror(정복왕 윌리엄). 이곳에 기재된 정복왕들과 차별되는 점이라면 윌리엄은 출신자체가 영국 왕족 출신인 것이 아니라 프랑스 국왕의 신하 신분으로서 노르망디의 영주로 있다가 기존에 이미 존재하던 국가인 잉글랜드에서 왕위다툼이 벌어지자 바다건너 쳐들어가서 왕위를 차지한 왕이라는점이다. 참고로 그렇다고해서 윌리엄은 그냥 프랑스 영주지위도 갖고 별도로 잉글랜드 왕도 하게된 것이지 잉글랜드가 프랑스의 신하국인것으로 이해하면 안된다.[68] 포르투갈 백작 엔히크 드 보르고냐의 아들로, 1139년 포르투갈의 국왕으로 대관식을 치루면서 포르투갈을 건국했다. 별명으로는 o Conquistador(정복왕), o Fundador(창업왕) o Grande(대왕)[69] 그 평생 왕과 같은 지도자는 아니었지만 갈리아 정복, 브리타니아, 게르마니아 원정 등 외부 원정을 상당히 수행했다.[70] 내치 업적이 넘사벽이어서 그렇지 이쪽도 상당한 정복군주였는데 이집트와 이베리아, 팔레스타인, 아나톨리아의 구 폰토스령 등이 그의 치세에 로마의 속주로 편입되었고 달마티아, 게르마니아 원정도 수행했다.[71] 다키아 전쟁을 통해 다키아를 로마의 속주로 편입했으며 나바테아 왕국을 멸망시키고 파르티아를 공격해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정복해 제국의 최대 판도를 이룩했다.[72] 불가리아 제1제국을 멸망시켜 불가리아 테마를 재건했다.[73] 제천대성은 오래국에서 마족들을 통치한 이었으며 제1차 천상대전을 일으켜 천계를 차지하기 위해 싸웠다. 물론 제천대성은 제1차 천상대전에서 여래에게 패배해 실패하였으나, 제천대성이 환생한 진모리는 라그나로크에서 승리하고 절대신에 등극하면서 마침내 천계 전체의 주인이 되었다. 진모리는 천계를 차지하기 위해서 싸운 것은 아니었고 지구를 지키기 위해 싸웠으나, 오딘이 292화에서 진모리에게 항복을 선언하고 진모리를 천계 전체의 주인으로 인정하면서 진모리는 최초로 천계까지 정복한 마왕이 되었다.[74] 사탄은 제천대성과의 싸움에서 여래가 죽은 후에 천계의 최하층에서 시작해 1천계의 신들까지 제압하고 여래의 뒤를 이어 새로운 천계의 수장이 되었으며, 공식적으로 ‘신들의 왕’이 되었다. 사탄은 여래가 죽은 이후에 천계를 정복한 왕이라고 할 수 있다.[75] 여래는 신보다 한 단계 위의 존재인 절대신으로서 1천계의 상위신들과 천계의 모든 신들을 이끄는 왕과 같은 독보적인 존재였으며, 지구의 고대종을 죽이고 지구를 정복하면서 “지금부터 이곳은 천계의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즉, 여래는 다른 신들을 통솔하여 지구까지 정복하면서 신들의 영토를 더욱 넓힌 것이다.[76] 노말, 하드 스토리에서 니벨룽겐 대삼림과 플로렌스를 정복했다.[77] 정복 전쟁을 벌여 동부 대륙을 통일하였다. 물론 아발론 동맹군과 저항군 세력들의 반격으로 오래가지 못한다.[78] ‘엘 레이 콘키스타(El rey Conquista)’는 스페인어로 ‘정복왕’이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