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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004년에 북송과 거란(요나라)이 전연(澶淵)[1]에서 맺은 외교 협정으로 전연의 맹약 또는 전연(澶淵)의 맹이라고도 한다.
1005년 1월 13일부터 18일까지 전연에서 북송과 요가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는 1005년설이 주류를 이룬다. 하지만 대부분의 역사 교과서들은 중국 음력을 근거로 해 1004년을 조약 체결의 년도로 설명한다.
2. 상세
요성종 야율문수노(야율융서)의 치세 때, 요나라는 동쪽으로 만주에 자리잡은 발해의 후신인 정안국을 무너뜨리고 여진 부족들을 제압했으며 서쪽으로는 몽골 초원의 유목민들을 복속시키고 서역의 제세력들 및 당항과 강족들로부터 조공을 받는 등 국력이 급속히 성장했다. 또한 993년에는 제1차 여요전쟁으로 고려와 사대 관계를 맺는데 성공하여 요나라는 더 이상 거칠 것이 없었다. 그리하여 요나라는 2차에 걸친 북벌이 실패해 군사력이 약화된 북송에 공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999년부터 1003년까지 총 3차례에 걸친 침공이 성공하자, 자신감이 생긴 성종은 모후인 승천태후 소작과 함께 200,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남하했다.거란군은 초기에 승세를 잡아 하북의 주요 거점을 빠르게 함락하고 수도 개봉이 눈에 보이는 전주까지 진군했다. 기세를 탄 거란군이 전주를 함락시키고 얼어붙은 황하를 도강해 개봉을 포위할 듯 했지만,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 구준이 송진종에게 친정을 건의하여 금군(禁軍)이 진종과 함께 북상했다. 전주의 방어군은 사기가 올랐고, 거란군은 예상 밖의 항전에 당황했다.
게다가 거란의 명장인 소달름(蕭撻凜)[2]이 정찰 중에 북송의 장교였던 장괴가 발사한 쇠뇌에 맞아 전사한 탓에 요군 전체가 충격을 받아 급격히 사기가 떨어지고 말았다. 이런 이유로 전황은 교착되었고, 이에 더해 하북의 송군이 재정비에 성공해 요군의 후방으로 진격하려 하자 요군 수뇌부는 난색에 빠지게 되었다.
하지만 송진종은 전투 의지가 강하지 않았고, 요나라의 실권자인 승천태후 역시 북송과의 분쟁이 완만히 해결되기를 바랐다. 송군은 200,000명이나 되는 기마 군단이 수도 앞에 버티고 있는 것이 부담스러웠고, 요군은 자칫 잘못하다가는 퇴로가 끊겨 전멸당할 수 있다는 위험을 안고 있었다. 이 때문에 양국의 이해관계는 적당히 맞아 떨어졌고, 남은 것은 협의하는 일뿐이었다. 요의 비룡사 한기(韓杞)와 북송의 우반전직(右班殿直) 조리용(曹利用)이 수차례에 걸쳐 교섭하여 1004년에 전연의 맹약을 맺었다. 맹약의 주요 내용은 북송이 요나라에게 30만의 세폐를 제공하는 것과 양국이 형제 관계를 맺는 것이었다.
2.1. 맹약의 내용
1. 송은 요에게 비단 200,000필과 은 100,000냥을 매년 세폐로 보낼 것.[3]
2. 국경선은 현재 상태로 유지할 것.[4]
3. 송과 요의 황제는 형제 관계를 맺는다. 송 진종이 요 성종보다 나이가 많으므로 요 성종이 동생이나, 후대에는 나이로 따져서 형과 동생을 정한다.[5]
2. 국경선은 현재 상태로 유지할 것.[4]
3. 송과 요의 황제는 형제 관계를 맺는다. 송 진종이 요 성종보다 나이가 많으므로 요 성종이 동생이나, 후대에는 나이로 따져서 형과 동생을 정한다.[5]
3. 맹약 체결 이후
전연의 맹을 체결한 뒤부터 북송 - 요 관계는 기본적으로 평화로웠지만, 국지전이나 영토 분쟁이 벌어져서 북송이 요나라의 군사적인 압력을 받기도 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북송이 탕구트족이 건국한 서하와의 전쟁으로 정신이 없는 것을 노려 요흥종이 소혜진으로 하여금 북송의 국경을 침범하도록 명령한 일이었다. 이에 북송은 요나라와 재협상하여 300,000냥의 세폐를 500,000냥으로 증액하는 조건으로 전연의 맹약을 갱신했다. 북송의 입장에서 500,000냥은 재정 규모에 비해 아주 적은 돈이었고, 요나라와 전쟁을 벌여 그 비용을 감당하는 것과 비교하면 훨씬 저렴했으나 재정 지출이 늘어나는 것이었기에 세폐 증액은 원하지 않았다.그러나 서하와의 전쟁이 급하고 요나라의 대군이 남하한 상황이라 요나라가 내건 일부 요구 사항은 거부하고, 세폐 증액과 세폐의 명칭 변경과 같은 요구는 수용하는 조건으로 맹약을 갱신했다. 이후의 북송은 255,000냥의 세폐를 지급하는 조건으로 서하와 강화했고, 신흥 강국인 생여진 완안부의 금나라와 해상의 맹을 체결할 때도 "요나라에 주던 세폐를 금나라에게 주겠다."는 조건을 제시하는 행보를 보였다. 그리고 요나라는 이러한 군사적 압박을 통한 허세를 부려 송 신종 연간까지 북송으로부터 영토를 할양받고 정세를 살피는 등의 이득을 누렸다. 북송 역시 요나라가 허세를 부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피해가 크다고 볼 수는 없고, 요나라가 진실로 전쟁을 일으키려 하는 것이 아님을 알았기에 적당히 양보해주었다.
요나라와 서하에 주는 도합 755,000냥의 세폐가 북송에게는 재정 압박으로 작용했다는 주장이 있는데, 북송은 국경 무역을 통해 세폐로 인해 발생하는 재정 지출의 상당 부분을 회수했다. 오히려 국경 무역을 통해 벌어들이는 상세와 관세가 세폐를 상회했다고 보는 의견도 있을 정도라서 세폐가 문자 그대로의 지출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북송은 이미 송 인종 연간에 1년 세입이 6,000만 냥이 넘었고, 북송 말기가 되면 세입이 1억 냥에 가까웠다. 서하와의 전쟁으로 재정의 80% 이상을 군비에 쏟고, 그러고도 이기지 못한 경험이 있는 북송의 입장에서 평화를 유지하는 대가로 매년 755,000냥을 지불하는 것은 엄청나게 저렴한 것이었다. 송 신종 시기에 재정에 문제가 생기기는 했어도 이건 세폐 말고도 군비, 관료제 비용, 황실 지출 비용 등이 늘어난 것이 큰 역할을 해서 세폐 문제만은 아니었다.
또한 세폐는 전쟁 억제재로도 기능했다. 요나라는 300,000냥의 세폐를 국가 발전과 세금 감면에 투입했는데, 북송과의 전쟁이 벌어지면 재정 누수와 혼란이 벌어지고 백성이 세금 인상과 전쟁세의 압박을 받게 되어 자칫 잘못하다간 대규모의 민란이 터질 수 있었다. 그래서 요나라는 세폐의 중요함을 알아 북송의 사신이 방문하면 지방 관리들이 영접하고 공손히 예를 취하도록 지시했으며, 북송의 사신단에게 숙박을 제공하는 곳에서는 백성들이 사신단으로부터 돈을 받지 못하도록 했다. 만약 이를 위반하는 자가 있으면 참수하도록 했다. 물론 요나라는 군사적으로 북송을 압박해 영토나 세폐의 증액, 정탐, 명분상에서의 이득을 취하기는 했으나, 세폐가 끊기는 것은 바라지 않아서 실제로 전쟁을 일으킬 의사는 없었다.
서하는 호전적인 군주인 이원호[6]가 등극한 뒤부터 수년에 걸쳐 북송과 전쟁을 벌였다. 이원호는 100,000명의 병력으로 100만 명에 가까운 북송군을 몰아붙였으나, 기나긴 전쟁으로 영토가 피폐해지고 아버지 이덕명[7]이 받았던 140,000냥의 세사(歲賜)와 북송과의 무역이 끊겨서 약탈한 물자로도 국가를 부양하지 못하는 처지로 전락했다. 결국 북송과 서하는 전쟁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강화를 체결했고, 경종 이원호는 아버지가 받았던 140,000냥의 세사를 255,000냥의 세폐로 증액하는 데 성공했다.
전연의 맹으로 평화를 이루기는 했지마는 요나라와 서하 같은 군사 강국들이 장성 이남에 진출해 장성의 보호를 받지 못하던 북송은 국가 안보를 위해 국경과 수도권에 대군을 상시 주둔시켜야 했다. 고질병인 문치주의로 인해 유능한 장교단을 확보하기 어려운 것도 있어서 북송은 병력 증강을 추진했으나, 강병을 자랑하는 요나라와 서하와 비교하면 병력의 질이 영 좋지를 못해서 어려움을 겪었다. 물론 이들도 기본적인 국력과 인구면에서 압도적인 북송을 아예 멸망시킬 수는 없어서 3자 간의 균형이 이루어졌다.[8]
전연의 맹으로 이뤄낸 평화 덕분에 북송과 요나라는 사절 교환과 무역 등을 활발히 벌였고, 북송 뿐만 아니라 요나라 역시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실제로 이 평화는 여요전쟁과도 엮여 한바탕의 소란이 일어난 뒤부터 동북아시아는 힘의 균형을 바탕으로 한 100여 년의 긴 평화를 누렸다.[9] 이 평화는 1125년에 북송이 금나라와 손을 잡고 쇠퇴하던 요나라를 협공해 결국 멸망시킴으로써 깨지게 되었다. 그리고 금나라를 끌어들여 연운 16주 전체를 회복하려던 북송은 금나라와의 관계 악화와 잘못된 정책으로 인해 정강의 변을 맞게 되어 수도 개봉이 함락당하고, 회수 이남으로 남천하는 비극을 겪게 되었다.
[1] 현(現) 허난성 푸양시[2] 북송과 요의 전쟁 때, 야율사진의 밑에서 북송의 명장 양업을 생포했다.[3] 당시 송나라는 연운 16주 중 막주와 영주, 즉 요나라에서 관남 10현이라 부르던 지역을 가지고 있었다. 당연히 요나라는 관남을 수복하여 연운 16주 전체를 차지하려 했고, 송나라는 관남을 필두로 연운 16주 전체를 되찾으려고 했다. 이에 Christian Schwarz-Schilling은 비단 200,000필과 은 100,000냥이 관남에서 거둘 수 있는 토지세를 대신한 것이라고 주장했다.[4] 송나라는 건국 초기부터 튀르크계 사타족 출신의 후진 황제인 석경당이 요나라에 내준 연운 16주를 빼앗으려고 했다. 그 정책의 일환으로 2번이나 출정했는데, 2번 다 실패했다. 그리고 이 전연의 맹약으로 송나라는 연운 16주를 못 찾게 되어 좀 아쉬웠을 것이다.[5] 송나라 측 기록에는 "요 성종이 송 진종을 형으로 부른다."고 서술했으나,《요사》에서는 송 진종이 요나라의 승천태후를 숙모로 부른다고 기록했다. 양측 모두 자신들에게 유리한대로 해석했던 것이다.[6] 이름은 중국어로 '이원호'고, 탕구트어로는 '외명낭소'다.[7] 사후 태종으로 추존되었다.[8] 참고로 서쪽에서 3자 균형을 이룬 것이 북송, 요, 서하였다면 동쪽에서는 북송, 요, 고려였다.[9] 이때 고려와 북송은 요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서로 친하게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