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오토 브루너 Otto Brunner | |
출생 | 1898년 6월 21일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뫼들링 | |
사망 | 1982년 2월 6일 (향년 84세) |
서독 함부르크 | |
국적 | [[오스트리아| ]][[틀:국기| ]][[틀:국기| ]] [[독일| ]][[틀:국기| ]][[틀:국기| ]] |
모교 | 빈 대학교(역사학/박사) 빈 대학교(역사학/하빌리타치온) |
경력 | 빈 대학교 역사학 교수 함부르크 대학교 역사학 교수 함부르크 대학교 총장 |
직업 | 역사학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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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역사학자. 영방과 통치(Land und Herrscahft)라는 저작으로 독일 중세사 연구 및 사회사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라인하르트 코젤렉과 함께 개념사 프로젝트를 주도했다. 명실상부한 독일 중세사 연구 및 초기 근대사 연구의 가장 중요한 역사가 중 하나이나, 나치 협력 문제로 현재까지도 논란의 대상이 되는 인물이기도 하다.2. 생애
빈 근교 뫼들링에서 태어난 브루너는 10대 때 1차 세계 대전을 맞아 자원 입대하기도 하였고, 전쟁이 끝난 후 빈 대학교의 오스트리아 역사 연구소(IFÖG)에서 역사학을 공부했다. 빈에서 브루너는 1922년 오스발트 레틀리히(Oswald Redlich)의 지도하에 박사학위를 받았고, 1929년 테오도어 마이어의 지도하에 교수자격을 취득했다. 일찍이 두각을 드러낸 브루너는 1931년 33세의 나이로 빈 대학의 중세사 부교수로 선임되었다.한편으로 카를 슈미트의 사상에 강한 영향을 받고 있었던 브루너는 슈미트와 마찬가지로 근대 자유주의 시민 사회에 매우 비판적이었고, 전근대 유럽의 귀족적인 농촌 질서에 강한 향수를 갖고 있었다. 브루너는 슈미트가 그랬듯 나치의 이념에 매우 호의적이었고, 대독일주의와 안슐루스를 강력하게 지지하였다. 이후 1939년 대표작이자 현재까지도 독일 중세사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영방과 통치(Land und Herrschaft)를 출간했고, 1941년에는 이 저작으로 당시 5년마다 수여하던 독일 역사학계의 가장 권위 있는 상인 베르됭상을 수상하였다.
1945년 나치 패망 이후 브루너는 빈 대학 교수직에서 해임당했다. 그런 와중에 1949년 출간한 귀족적 농촌생활과 유럽 정신(Adeliges Landleben und europäischer Geist)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1954년 함부르크 대학교의 중세사 교수로 복귀하였다. 이 저작과 1956년 출간한 논문집인 헌법사와 사회사의 새로운 길(Neue Wege der Verfassungs- und Sozialgeschichte)[1]은 전후 독일 초기 근대 사회사 연구에 중요한 방향을 제시한 저작으로 평가받는다.
전후 브루너의 또다른 중요한 기여는 라인하르트 코젤렉, 베르너 콘체와 함께한 '개념사(Begriffsgeschichte)' 프로젝트가 있다. 브루너는 이미 영방과 통치에서 현재의 관점에서 중세를 이해하고자 하는 기존 연구자들의 시각을 강력하게 비판하면서 '사료에 기반한 개념어(Quellenmässige Begriffssprache)'로 중세사를 이해할 것을 요구한 바 있었고, 이는 코젤렉의 개념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개념사를 대표하는 용어인 '말안장시대(Sattelzeit)' 역시 그가 고안한 용어였다.
함부르크 이주 후 브루너는 서독 국적을 취득하였고, 1959년에서 1960년 사이 함부르크대의 총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1968년 정년 퇴임한 이후에도 함부르크에 머물렀고, 1982년 세상을 떠났다.
3. 업적
브루너의 <<영방과 통치>>는 독일 중세사 연구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여겨진다. 이 저작에서 브루너는 공적 영역을 관할하는 국가와 사적 영역으로서의 사회의 분리를 전제하는 '분리적 사고(Trennungsdenken)'는 19세기 이후 자유주의 시민 사회의 산물이며, 19세기 역사학자와 법학자들이 이러한 사고를 바탕으로 중세사를 이해하고자 했다고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브루너는 중세사를 근대의 언어가 아닌 중세 사료에 사용된 언어, 즉 '사료에 기반한 개념어'를 중심으로 재구축할 것을 요구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후기 중세 오스트리아와 바이에른 등 남부 독일 지역을 중심으로 영방(Land)의 형성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하였다.브루너 이전의 중세사가들은 중세 말 독일 영방의 형성을 황제 권력의 분할로 이해했다. 반면 브루너는 영방의 기원을 좀 더 원초적이고 '사회적'으로 접근했다. 브루너는 우선 중세의 정치 질서를 공적인 국가 권력과 사적인 시민 사회의 분리를 전제로 하는 근대 국가와 다르게 이러한 구분이 뚜렷하지 않은 통합적인 지배 형태를 가리키는 Herrschaft라는 개념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그러면서 브루너는 이러한 전근대적 통치 형태를 개인과 개인 사이의 '관계'를 중심으로 접근했다.
즉 브루너는 중세 후기 영방 군주권(Landesherrschaft)의 기원을 고대 게르만족의 가부장 지배(Hausherrschaft)에서 찾는데, 그 핵심은 가부장의 구성원에 대한 보호(Schutz)와 구성원의 가부장에 대한 충성(Treue)이라는 상호 의무 관계에 있었다. 중세 장원제(Grundherrschaft)와 영방 군주권(Landesherrschaft)는 이러한 가부장적 유대 관계와 상호성이 사회적으로 확대된 것이며,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영방 군주(Landesherr)와 영방 공동체(Landgemeinde)의 관계는 협력적이고 평화적이었다. 이는 중세 후기 독일 영방 제후들의 성장을 황제와의 갈등이라는 '위로부터의' 차원이 아닌, 개인과 개인의 관계 속에서 자생적으로 형성되는 '아래로부터의' 차원에서 접근하였다는 점에서 일대 혁신이었으며, 독일에서 '사회사'의 흐름을 선취한 것으로 평가받는다.[2]
브루너는 사상적으로 오토 폰 기르케로 대표되는 독일 법학계의 게르마니스텐 학파[3]와 카를 슈미트를 비롯한 독일 보수주의의 반근대주의적 성향에 강한 영향을 받았다. 브루너는 슈미트와 마찬가지로 근대 자유주의 시민 사회에 매우 비판적이었고, 전근대 유럽의 귀족적인 농촌 질서에 강한 향수를 갖고 있었다. 이는 근대 자유주의를 비난하며 민족공동체(Volksgemeinschaft)의 이념을 내세운 나치의 성향과 일치하는 바가 있었고, 영방과 통치의 초기판에는 Volk를 비롯한 나치의 언어가 상당히 포함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근대 사회를 현대인의 개념과 언어가 아니라 당대의 언어를 바탕으로 현재와의 이질성을 이해할 것을 요구하면서 근대 국가의 관점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전근대 통치의 인격적이고 협력적인 측면을 부각한 브루너의 지적은 현재까지도 매우 중요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브루너는 초기 근대로 시야를 넓힌 브루너는, <<귀족적 농촌생활과 유럽 정신>>에서 17세기 오스트리아 지방 귀족인 볼프 헬름하르트 폰 호베르크(Wolf Helmhardt von Hohberg, 1612-1688)의 전기를 다루면서 근대 유럽 귀족층의 문화적, 지적 가치에 주목했다. 이후 1956년 <<사회사의 새로운 길>>에 수록된 논문 "'전일적 가정공동체'와 구유럽 경제(Das „ganze Haus“ und die alteuropäische Ökonomik)"에서 브루너는 여기서 후기 중세와 초기 근대 유럽의 사회 문화적 연속성을 강조하면서 이를 '구유럽(Alteuropa)'으로 개념화하였고, 구유럽 사회의 기본 단위로 자급자족에 기반한 농촌 핵가족 공동체인 '전일적 가정공동체(Das ganze Haus)'를 제시하였다. 19세기 민속학자 빌헬름 하인리히 릴에게서 가져온 이 개념은 Haus(집)라는 단어에서 드러나듯 전전부터 브루너가 보여 주었던 전근대 농촌의 가부장적 질서에 대한 향수가 담겨 있다.
4. 명예
- 베르됭상(1941)
- 오스트리아 아카데미 정회원(1944)
- 마인츠 문학 과학 아카데미 정회원(1955)
5. 저작
- Land und Herrschaft. Grundfragen der territorialen Verfassungsgeschichte Österreichs im Mittelalter(1939)
- 영어 번역 Land and Lordship(1992)
- Adeliges Landleben und europäischer Geist. Leben und Werk Wolf Helmhards von Hohberg 1612–1688(1949)
- Neue Wege der Sozialgeschichte. Vorträge und Aufsätze(1956)
- Neue Wege der Verfassungs- und Sozialgeschichte(1968 2판, 1980 3판)
- Sozialgeschichte Europas im Mittelalter(1978)
- Hrsg. mit Werner Conze und Reinhart Koselleck: Geschichtliche Grundbegriffe. Historisches Lexikon zur politisch-sozialen Sprache in Deutschland(1972-1997)
[1] 원래는 사회사의 새로운 길Neue Wege der Verfassungs- und Sozialgeschichte로 출간되었다가 1968년 개정판에서 제목이 바꼈다.[2] 역사가 라인하르트 블랭크너(Reinhard Blänkner)는 포콕의 '마키아벨리안 모멘트'에서 따온 '브루너 모멘트'라는 말을 사용할 정도이다.[3] 독일법에 있어 게르만 관습법의 영향을 강조하는 전통으로, 기르케의 단체(Genossenschaft) 개념은 공동체 형성에 있어 개인과 개인 간의 자발적인 결사체로서의 성격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브루너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