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 |
언어 | 라틴어: Bulla Aurea |
그리스어: Χρυσόβουλλος λόγος | |
독일어: Goldene Bulle | |
이탈리아어: Bolla d'oro | |
체코어: Zlatá bula | |
헝가리어: Aranybulla | |
크로아티아어: Zlatna bula | |
폴란드어: złota bulla | |
영어: Golden Bull, Chrysobull | |
프랑스어: Bulle d'o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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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황금문서, 황금헌장, 황금칙서 등으로도 불린다. 당시 주로 서신에 인장을 찍을 때 쓰던 밀랍이나 실링 왁스 대신 귀한 금을 사용했기에[2] 이러한 이름이 붙었는데, 대개 금의 권위가 필요한 외교문서나 칙령, 특별법 반포 등 중요한 곳에 쓰였다. 유럽의 의례와 율법의 원류인 동로마 제국에서 먼저 쓰기 시작하여 지중해 세계로 퍼져나갔고, 나중에는 다른 국가의 군주들도 종종 사용하였다.동로마 제국의 황제인 콘스탄티노스 7세의 '의전에 대하여(De Ceremoniis)'[3]를 살펴보면 쓰여야 할 금의 양도 규정되어 있었다. 세력의 흥망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파티마 왕조와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가 4 솔리두스로 가장 높은 대우를 받고있었고, 아르메니아의 바그라투니 왕조와 하자르 칸국은 3 솔리두스, 로마 교황 및 주변국은 1~2 솔리두스였다. 10세기의 동로마 제국이 주변국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2. 유명한 예
2.1. 1082/92년[4]
2.1.1. 개요
동로마 제국의 황제 알렉시오스 1세가 노르만인들의 침공에 대응하여 베네치아 공화국에게 요청한 해군 지원을 받은 대가로 반포한 것. 주로 통상 우대에 관한 내용을 다루었다.2.1.2. 배경
이미 베네치아 공화국은 바실리오스 2세에게 함대를 지원해주면서 기존 10%였던 수출입 관세를 완화받은 바 있었고, 10세기 최후반 즈음에는 달마티아 공작 작위를 받아 동로마 제국의 제후국임을 인정하면서 자신들의 생명선인 아드리아해의 방위를 대신 맡고 그 동안(東岸)인 달마티아의 보호권을 확보했다. 역사적으로 보나 문화적으로 보나 여느 이탈리아 반도의 도시들보다 동로마 제국에 가까웠던 베네치아인들이었기에 가능했고, 제국 역시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멀리 떨어진 아드리아해 끝자락까지 통제가 닿기는 힘들었으므로 서로 Win-Win인 조치였다.그러나 11세기 말인 1081년이 되면 상황이 상당히 달라져 있었는데, 베네치아 공화국은 해상무역을 바탕으로 꾸준히 성장해 도시국가 중 수위의 해군력, 외교력, 자본력 등을 갖추었던 반면 동로마 제국은 아나톨리아를 거의 상실하면서 상황이 굉장히 나빠진 상태였다. 심지어 4월에 쿠데타로 집권한 황제 알렉시오스 1세는 아나톨리아 전역과 북방 유목민 문제를 후순위로 밀어두고 로베르 기스카르의 침공에 대응하여 남은 군대를 끌어모아 친정에 나선 상황이었다.
이때, 신성 로마 제국 등과 함께 외교적 대응책의 대상으로 고려된 것이 베네치아 공화국이었다. 베네치아 역시 명목상 제후국이었고, 노르만인들이 성공할 경우 아드리아해의 입구 양안을 모두 차지하는 적대적 세력이 생기는 셈이었으므로 함대를 동원하여 1081~1085년의 로마-시칠리아 전쟁 기간 동안 해전을 통해 노르만군에 큰 타격을 입히는 공을 세워 동로마 제국을 도왔다. 때문에 제국 정부는 대가로 이 금인 칙서를 통해 베네치아에 통상 혜택을 부여하게 된다.
2.1.3. 내용
대략1. 무역관세의 상당한 감세 혹은 면제
2. 기존에 금지되어 있던 금을 비롯한 전략자원의 교역 허가
3. 주요 항구의 개항
4.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조계지 임대
5. 베네치아의 원수(Doge)를 비롯한 공훈자들에게 칭호 부여
라는, 엄청난 혜택들이었다.2. 기존에 금지되어 있던 금을 비롯한 전략자원의 교역 허가
3. 주요 항구의 개항
4.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조계지 임대
5. 베네치아의 원수(Doge)를 비롯한 공훈자들에게 칭호 부여
당시 제국은 동방영토를 대부분 상실하고, 서방영토도 전장이 되어 기존에 제국이 유지하던 보호무역 경제권이 붕괴한 상태였다. 게다가 11세기 중반부터 화폐의 순도가 꾸준히 하락하면서 인플레이션이 제국 경제에 가하는 압박도 한계에 달하자 경제 재건을 위해 제국 정부도 새로운 방법을 모색해야만 하는 상태였다. 때문에 제국의 중심이 유럽으로 더욱 이동한 차에 지중해 교역에서 상당한 지분을 차지하고 있던 베네치아에 보상을 할겸 제국의 경제권을 전보다 자유무역적으로 재설정하는 한편, 베네치아로부터 자금을 유입시키기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이러한 혜택을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
2.1.4. 영향
베네치아는 그야말로 대박을 쳤다. 당시 상황이 여러모로 나빠졌어도 유럽은 물론 중근동 전체에서 가장 선진적이고 부유한 국가가 동로마 제국이었다. 인구도 혼란기였던 11세기 말 최저추산치가 500만, 2차 중흥기(11세기 초중반)의 인구를 회복한 3차 중흥기(1160~70년대)의 인구가 1,200만 이상이고 도시화율도 높아 상업에 매우 유리한 환경이었다. 제국의 주요 수출품인 비단, 유리, 도자기 등은 매우 인기있던 사치품이었으며, 상아와 에나멜 예술품은 근방에서 최고급으로 취급받던 상품이기까지 했다. 게다가 남유럽 일대의 주요 작물인 밀, 올리브, 포도 및 그 가공품들도 제국산을 상등품으로 쳐줬으니 베네치아 입장에서는 수출입선 모두를 크게 확대할 기회를 잡게 된 것.다만 이 금인 칙서로 인해 확대된 무역으로 베네치아와 동로마 간의 해상충돌이 불과 수십 년 지난 요안니스 2세나 마누일 1세의 시대부터 발생하기 시작하여 무역분쟁이 후대까지 골칫거리가 되었고, 한편으로는 제국 출신 상인들이 기존에 누리던 상세(商稅)상의 우위가 사라져 제국의 쇠퇴를 불러왔다는 평도 있다. 제국이 국력을 완전히 회복했다고 평가 받는 1160~1170년대 들어 제노바 공화국이나 피사 공화국 등 다른 해상 도시국가를 끌어들이면서 일종의 경쟁을 유도한 점, 상세를 다시 10%로 되돌리려 제국 정부가 노력한 것을 보면 설득력 자체는 있다. 그러나 11세기 말 기존 제국 경제권은 완전히 붕괴한 상태였고, 이후 제국 재정 수입 중 상당 부분을 무역관세로 확보하게 되며, 12세기 후반 베네치아와의 전쟁으로 자금 유입이 끊겼을 때 베네치아의 자본에 의존적이던 그리스 일대의 몇몇 도시들이 불황을 겪었다는 기록을 보면 지나치게 단편적이고 결과론적인 해석이다.
2.1.5. 참고문헌
게오르크 오스트로고르스키, "비잔티움 제국사 324-1453"Peter Frankopan,. "Byzantine Trade Privileges to Venice in the Eleventh Century: The Chrysobull of 1092", Journal of Medieval History(2004)
2.2. 1166년
동로마 제국의 황제 마누일 1세가 반포한 것. 제국 내의 사법행정을 시대에 맞게 손댔다.2.3. 1136년
교황 인노첸시오 2세가 반포한 것.2.4. 1198년
동로마 제국의 황제 알렉시오스 3세가 반포한 것. 베네치아 공화국과의 통상마찰을 해소하기 위해 반포하여 통상, 군사 동맹 및 사법 문제 등 넓은 분야를 다루었다. 알렉시오스 3세는 이 조약으로 제4차 십자군 원정을 멈추거나 피하고 싶어하였지만...2.5. 1212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시칠리아 왕국의 국왕 프리드리히 2세가 반포한 것. 참고로 프리드리히 2세는 이외에 반포한 금인 칙서가 많다.2.6. 1222년
헝가리 왕국-크로아티아 왕국의 국왕 언드라시 2세가 반포한 것. 헝가리의 마그나 카르타 취급을 받는다.2.7. 1242년
헝가리 왕국-크로아티아 왕국 의 국왕 벨러 4세가 반포한 것.2.8. 135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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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1. 개요
금인 칙서 중 가장 유명하다. 본 문서의 내용이 보충되기 전에는 1356년의 금인 칙서에 대한 내용이 문서 그 자체였고, 서유럽 중심의 사관이 일반적이다 보니 아예 금인 칙서라는 말 자체가 1356년의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1356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보헤미아 왕국 국왕 카를 4세가 뉘른베르크 와 메츠에서 열린 제국 의회에서 반포한 칙서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선출 과정 등을 명문화하였다.
이때의 금인 칙서는 이후 신성 로마 제국 체제에 큰 영향을 미쳤다. 황제 선출 과정에 있어서 교황의 간섭을 축소하는 효과를 가져왔으나, 선제후의 배타적인 특권을 보장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황권을 약화시켰으며, 신성 로마 제국의 영방화, 분권화를 가속화시켰다.
2.8.2. 상세
표면적인 이유는 비텔스바흐 가문의 루트비히 4세와 합스부르크 가문의 프리드리히 미남왕과 같은 대립왕 사태[5]가 다시는 벌어지지 않도록 황제 선출 과정과 선제후에 대해 확실한 규칙을 만든다는 것이었다.과거 황제선거 때 선제후의 범위와 인원을 두고 갈등이 있었기 때문에 금인 칙서를 통해 7명의 선제후를 명문화시켜서 고정했다. 7명의 선제후는 마인츠, 쾰른, 트리어의 대주교가 겸임하는 3명의 성직 선제후와 작센 공작,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라인 궁중백, 보헤미아 국왕 4명의 세속 선제후로 고정되었다.
선제후들은 황제의 소집이 없어도 제국 의회를 개최할 수 있음을 규정하고 있다. 황제 선거는 다수결로 결정하되 마인츠 대주교가 가장 마지막으로 투표하도록 되어있다. 또한 단순히 선거 과정 뿐만 아니라 기타 의전의 상당수를 규정하기도 했는데, 예를 들자면 황제 선거는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하며 대관식은 아헨에서 거행하고, 재위 기간 중 첫 번째로 소집되는 제국 의회는 반드시 뉘른베르크에서 열려야 했다.
이 칙서의 결과 보헤미아 국왕이 선제후로 공인되며 바이에른 공국은 1623년 팔츠를 대체해 선제후가 되기 전까지는 이를 회복하지 못했다. 이는 당시의 팔츠와 바이에른이 같은 비텔스바흐 가문이었기 때문인데, 팔츠계와 바이에른계는 서로 으르렁거리는 험악한 사이였던 데다가 팔츠계가 장자 계열이어서 명분상 좀 더 우위에 있었다. 문제는 브란덴부르크도 당시에는 바이에른 비텔스바흐 가문이 통치하고 있었는데 카를 4세는 어차피 브란덴부르크를 비텔스바흐 가문에게서 빼앗아 자신의 룩셈부르크 가문으로 넘겨버릴 큰 그림을 그리고 있어서 일단은 남겨두고 1371년, 자신의 사위이기도 한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오토 7세[6]를 협박하여 연금을 지급하는 조건으로 퇴위시키고 맏아들 벤첼에게 수여하였다. 그리고 사실상 금인 칙서를 발표하게 된 원인 중 하나였던 작센의 선출권은 장자계열인 작센-비텐베르크에게 수여하여 논란을 막았다.
칙서는 선제후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특권을 보장했다. 7명의 선제후는 제국의 제후 중 가장 높은 제후이며 재판권, 광산 채굴권, 화폐 주조, 관세 징수 등의 특권을 가진다. 선제후의 영지는 장자가 상속하며 선제후를 공격하는 행위는 대역죄로 규정했다. 또한 페데(Fehde)[7]의 금지와 봉토 소유자들의 동맹 금지, 도시 확장 금지 등도 들어 있다.
2.8.3. 실질적인 의도 - 라이벌 견제
카를 4세가 금인 칙서를 공포한 실질적인 목적은 카를 4세 본인의 영향력을 증대하고, 자신의 정적인 교황, 합스부르크 가문, 비텔스바흐 가문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카를 4세는 신성 로마 제국 역대 황제 중 이색적으로 보헤미아 왕국을 기반으로 하고 있던 황제였다. 보헤미아는 신성 로마 제국 안에서 가장 큰 제후국 중 하나였지만, 이질적인 언어와 문화 탓에 제국 내에서 입지는 애매했다. 카를 4세는 금인칙서에서 자신의 본거지인 보헤미아를 선제후국으로 확정했고, 이후 신성 로마 제국 안에서 보헤미아 왕국은 선제후국으로서 그 입지가 확고해졌다.[8]
카를 4세는 이 칙서를 통해 황제를 견제하는 가장 큰 세력이었던 교황권을 견제했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가장 큰 목적은 교황이 직접적으로 황제 선출에 개입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13세기 말에 들어서면서 교황의 권위가 이탈리아 반도 밖에서 큰 의미가 없음은 점차 명백해져 갔고, 유럽 각국은 교황의 그늘에서 벗어나려 애쓰게 된다. 잉글랜드의 경우, 존 왕이 인노첸시오 3세에게 성무 금지령을 당한 이후로 국왕들은 파문을 받건 말건 무시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프랑스의 경우 이 시대에 아비뇽 유수가 일어났다. 1356년의 칙서 역시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 교황의 영향력을 제거하려는 시도 중 하나였다.
아울러 카를 4세는 제국 내에서 자신의 라이벌 가문인 합스부르크 가문과 비텔스바흐 가문을 견제했다. 당시 제국 안에서 가장 큰 세력을 가지고 있었던 합스부르크 가문은 오스트리아 공국, 슈타이어마르크 공국, 케른텐 공국, 크라인 공국, 티롤 후백국 등 오늘날의 오스트리아, 슬로베니아와 그 주변 일대를 아우르는 방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었고 비록 스위스 영토를 잃었지만 여전히 슈바벤과 알자스에서 외지오스트리아(Vorderösterreich)라는 넓은 영토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미 루돌프 1세와 알브레히트 1세, 대립 독일왕 프리드리히(Friedrich der Schöne 1289~1330)[9] 등을 배출한 합스부르크 가문은 호시탐탐 황제 자리를 노리며 카를 4세의 룩셈부르크 가문과 대립하고 있었다. 독일 왕국의 5대 공국에 비해 역사가 짧았던 합스부르크 가문은 선제후국이 아니었지만, 선제후국에 들어가기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나 카를 4세는 금인칙서를 통해 합스부르크 가문을 배제한 채 선제후국을 명문화했다. 결국 합스부르크 가문의 중심 영지인 오스트리아 공국은 이후 영구히 선제후국이 되지 못했다. 이러한 조치에 대해 당시 합스부르크 가문의 수장인 오스트리아 공작 루돌프 4세[10]는 격렬히 반대하였다.[11] 이후 프리드리히 3세 때 다시 제위를 차지한 합스부르크 가문은 곧바로 오스트리아를 제국에서 유일한 대공국으로 격상시켜 선제후국을 능가하는 특권을 부여했고, 이어 페르디난트 1세가 보헤미아 왕국을 재획득하여 선제후 자격을 획득했다.
카를 4세는 합스부르크 가문에 이어 제국 내에서 막강한 세력을 가지고 있던 비텔스바흐 가문도 견제했다. 비텔스바흐 가문은 바이에른 공국과 라인 궁중백령,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론상으로는 3표의 투표권을 행사할 수도 있었다. 이에 카를 4세는 한 개의 가문이 두 개의 투표권을 행사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논리로 차자계열인 바이에른 공국의 투표권을 박탈시켰고 브란덴부르크는 빼앗아 자신의 맏아들 벤첼에게 넘겨버렸다. 이로써 중세부터 유서 깊은 바이에른 공국은 선제후국의 지위를 상실하게 되었고[12], 30년 전쟁 이후에야 팔츠 선제후국의 투표권을 빼앗아 다시 선출권을 가졌다.[13]
2.8.4. 영향
신성 로마 제국에서 교황의 권한이 제거된다는 것은 반대로 말하면 이탈리아와 신성 로마 제국의 관련성이 줄어든다는 의미였다. 금인 칙서 이후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들은 이탈리아 경영 및 교황과의 관계에 무관심해졌으며 자연스레 제국의 이탈리아 내 영향력도 줄어들었다. 비록 신성 로마 제국 내에는 이탈리아인, 슬로베니아인, 체코인, 폴란드인, 덴마크인 등 다양한 민족이 있었지만 결국 16세기에 들어서는 신성 로마 제국의 공식 명칭에 '독일 민족의'라는 구절이 들어갈 정도로 신성 로마 제국은 독일인의 민족국가로서 성격이 짙어졌다.[1] 위의 이미지는 1242년에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벨러 4세가 반포한 것이다. https://en.wikipedia.org/wiki/Golden_bull[2] 실제로 녹인 금을 종이위에 부어 사용하진 않았고, 금화처럼 미리 찍어낸 봉인을 Hanging Seal 형식으로 문서 끝에 줄로 매달아 부착하였다.[3] https://en.wikipedia.org/wiki/De_Ceremoniis[4] 위키피디아의 항목은 익히 알려진 1082년설을 채택하고 있으나, 지원을 요청한 제국 측에서 미리 관련한 언질을 했을 수는 있어도 전후의 정황을 따져보면 노르만, 페체네그 전쟁을 모두 끝낸 Peter Frankopan의 1092년설이 더 적확하다고 보이므로 항목명에 병기한다.[5] 관습적으로는 작센 공작이 선출권을 가졌는데 문제는 당시 작센을 통치하던 아스카니아 가문이 작센-비텐베르크 가계와 작센-라우엔부르크 가계로 갈라져 있었고, 폐위된 전 보헤미아 국왕인 케른텐의 하인리히가 보헤미아 국왕으로서의 황제 선출권을 행사하는 등 혼란 그 자체였다.[6] 바이에른 공작으로서는 오토 5세.[7] 중세 독일어에서 전쟁을 일컫는 말. 다만 국가 대 국가의 전쟁만이 아닌, '침해된 권리의 회복을 위한 사적인 결투'의 의미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여기서는 결투의 의미.[8] 정작 보헤미아 왕국은 카를 4세의 장남 바츨라프 4세부터 후스 전쟁 등에 시달리면서 끊임없이 내부 분란에 시달렸고, 야기에우워 왕조의 루드비크가 오스만 제국 파디샤 쉴레이만 1세의 침공을 막으러 갔다가 모하치 전투에서 전사하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에게 넘어갔다.[9] 알브레히트 1세의 차남.[10] 독일왕 알브레히트 1세의 손자로 알브레히트 1세의 4남인 오스트리아 공작 알브레히트 2세의 장남.[11] 아이러니하게도 카를 4세와 루돌프 4세는 옹서관계였고, 장인의 통수에 빡쳤던 루돌프 4세는 반란까지 모의했다.[12] 그래서 바이에른 비텔스바흐 가문은 투표권을 다시 얻기 위해 성직 선제후국에 목숨을 걸었고, 결국 쾰른 전쟁을 통해 약 200여 년 동안 쾰른 선제후국을 숙질계승으로 준세습화하였다.[13] 다만 팔츠 선제후국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투표권을 되찾았다. 이후 팔츠와 바이에른은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당시 바이에른 선제후 카를 알브레히트의 황제 선출을 제외하면 카를 알브레히트의 아들 막시밀리안 3세 요제프가 후사 없이 사망해 팔츠 선제후 카를 4세 테오도어가 가장 가까운 친척으로서 바이에른을 상속받기 전까지는 내내 으르렁대며 불편한 감정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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