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0-02-24 16:01:31

룩셈부르크 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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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체: 대관식을 받은 적이 없는 로마왕이지만 사실상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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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us Luxemburg
Maison de Luxembourg
House of Luxembourg

1. 개요2. 룩셈부르크 백작3. 신성 로마 황제4. 보헤미아 국왕

1. 개요

중세 성기(High Middle Ages) 룩셈부르크, 보헤미아 및 신성 로마 제국의 귀족 가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보헤미아 국왕, 룩셈부르크 백작을 배출했다. 가문의 이름과 달리 실질적으로 보헤미아(체코)의 지배 가문으로 역사에 존재감을 남겼다. 참고로 오늘날의 룩셈부르크의 지배 가문은 나사우-바일부르크 대공가[1]이다.

룩셈부르크 가문은 원래 현재의 룩셈부르크와 그 서쪽의 벨기에 일부를 지배하던 유럽의 평범한 백작 가문이었다. 그러다가 1308년 하인리히 7세신성 로마 제국 황제(독일왕)로 선출되는 행운을 맞았다. 대공위 시대 이후 선제후들은 강력한 황제의 출현을 방지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명망가 공작 가문 대신에 한미한 백작 가문 출신을 황제로 선출하였고, 한 가문에서 독점적으로 제위를 세습하지 못하게 가문을 바꾸어 가며 황제를 선출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때를 잘 만나 신성 로마 제국 황제(독일왕)로 선출된 것이었다. 하지만 하인리히 7세 역시 당시 그렇게 황제로 선출되었던 초기 합스부르크나 나사우, 비텔스바흐 가문 출신 황제들처럼 실권이 미약한 단명 황제가 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1310년 와이프 가문이 통치하던 보헤미아 왕국의 왕관을 차지하면서 일약 유럽에서 가장 잘나가는 가문으로 급부상하는 반전을 맞게 되었다. 강력한 힘을 가지게 된 룩셈부르크 가문은 대공위 시대 이후 약해진 황권을 강화하고 나아가 대공위 시대 이전처럼 제위를 독점 세습하려 했고, 어느정도 성공하고 있었다. 아울러 보헤미아 왕국을 접수한 후 룩셈부르크 가문은 룩셈부르크를 떠나 보헤미아의 프라하로 이주하여 그곳을 크게 발전시켰다. 이렇게 잘나가던 룩셈부르크 가문은 1437년 지기스문트가 아들을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면서 역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단, 혈통 자체는 지금까지도 이어저오고 있다. 딸이 후손을 남겼기 때문에.)

2. 룩셈부르크 백작

룩셈부르크 가문은 10세기 경 아르덴 백작이었던 지그프리트 1세가 인근 도시 트리어의 성 막시민 수도원으로부터 지금의 룩셈부르크 땅을 얻어내 성을 건설하고 룩셈부르크 백작이 되면서 시작되었다.

룩셈부르크 백작은 이 가문이 소멸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하지만 룩셈부르크 가문이 1310년 보헤미아 왕국의 보위에 오른 후 가문의 중심지는 보헤미아의 수도 프라하로 옮겨졌다.

1354년 백국에서 공국으로 승격되었다.

3. 신성 로마 황제

대공위 시대 이후 신성 로마 제국의 유력 제후들은 특정 유력 가문이 제위를 세습하면서 세력이 강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일부러 한미한 백작 가문들을 교대로 선출하는 방법을 택했는데, 그 결과 합스부르크 백작과 나사우 백작에 이어 룩셈부르크 백작 하인리히 7세가 독일왕으로 선출되어 황제가 되었다.

하인리히 7세 사후 역시 다음 황제로 라인 궁중백작인 비텔스바흐 가문이 황제로 선출되었으나, 카를 4세 때 다시 황제로 선출되는데 성공했다. 이후에도 3명의 독일왕을 더 배출했다.

4. 보헤미아 국왕

하인리히 7세의 아들 요한(독일어: Johann von Luxemburg, 체코어: Jan Lucemburský 얀 루쳄부르스키)은 보헤미아의 국왕이었던 바츨라프 3세의 여동생인 엘리슈카(Eliška)와 결혼했고, 1310년 보헤미아 왕위를 승계받아 보헤미아 국왕이 되었다. 1310년 요한(얀)이 프라하에 입성하면서 가문의 중심지는 룩셈부르크에서 프라하로 이동하게 되었다.



[1] 원래는 제 8대 룩셈부르크 대공인 대공부터 부르봉-파름으로 바뀌어야 하나 보르보네-파르마 본가에서 장 대공의 아들들의 결혼을 귀천상혼이라 규정하고 반대하는 바람에 이에 화가 난 장 대공이 어머니 가문명을 계속 사용하기로 하고 단절을 선포하는 바람에 나사우-바일부르크라는 이름을 계속 사용하게 되었다. 이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진 장 대공 역시 파르바 가문의 일원으로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