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07 14:30:52

룩셈부르크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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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us Luxemburg

1. 개요2. 룩셈부르크 백작3. 신성 로마 제국 황제4. 보헤미아 국왕

1. 개요

중세 성기(High Middle Ages) 룩셈부르크 공국, 보헤미아 왕국의 통치 왕조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까지 배출했다.

룩셈부르크 가문은 원래 신성 로마 제국로트링겐 일대인 현재의 룩셈부르크와 그 서쪽의 벨기에의 일부인 뤽상부르 지역을 지배하던 유럽의 평범한 백작 가문이었다.

그러다가 1308년 하인리히 7세가 신성 로마 제국의 독일왕으로 선출되면서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처음 독일왕으로 선출되었을 당시 독일왕, 더 나아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는 자신의 영지를 제외하면 실권이 없던 허수아비였다. 13세기에 황제교황 간의 싸움의 후유증으로 대공위시대가 이어졌고, 이후 선제후들은 강력한 황제의 출현을 방지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명망가 공작 가문 대신에 한미한 백작 가문 출신을 황제로 선출했으며, 한 가문에서 독점적으로 제위를 세습하지 못하도록 가문을 바꾸어 가며 황제를 선출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때를 잘 만나 독일왕으로 선출된 것이었다. 하인리히 7세 역시 당시 그렇게 황제로 선출되었던 초기 합스부르크 가문이나 나사우 가문 출신 왕들처럼 실권이 미약한 단명한 군주가 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1306년, 보헤미아 왕국을 다스리던 프르셰미슬 왕조의 마지막 왕 바츨라프 3세가 16세의 나이로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의문의 암살자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리고 1310년 하인리히 7세가 곧바로 이 지역에 개입, 아들 요한[1]을 바츨라프 3세의 여동생인 엘리슈카 공주와 결혼시키며 보헤미아 왕위를 주장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고, 경쟁자들을 물리치며 보헤미아 왕관을 차지하면서, 일약 유럽에서 가장 잘나가는 가문으로 급부상하는 반전을 맞았다. 보헤미아 왕국은 뒤늦게 신성 로마 제국에 편입된 제후국으로 독일어가 아닌 체코어를 사용하는 이민족 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인구와 부유함, 천혜의 입지 조건 등으로 인해 왕국으로 승격될 수 있을 정도였기에 다른 공국들에 비해 그 위상이 매우 높아, 룩셈부르크 가문이 이곳의 주인이 되었다는 것은 매우 의미가 컸다.

강력한 힘을 가지게 된 룩셈부르크 가문은 대공위 시대 이후 약해진 황권을 강화하고 나아가 대공위 시대 이전처럼 제위를 독점 세습하려 했으며, 어느 정도 성공했다. 그리고 아예 고향 룩셈부르크를 떠나 보헤미아의 프라하로 이주, 영구 정착하여 그곳을 크게 발전시켰다. 때문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기의 룩셈부르크 가문은 룩셈부르크의 가문이 아니라 보헤미아 프라하 연고의 가문이었으며, 실제로 룩셈부르크 가문 또한 보헤미아 프라하 출신의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다. 카를 4세 등 룩셈부르크 가문의 대표적인 황제들은 지금도 체코의 위인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잘나가던 룩셈부르크 가문 역시 보헤미아의 전 주인이었던 프르셰미슬 왕조와 마찬가지로, 1437년 지기스문트가 아들을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면서 단절되었다. 단, 혈통 자체는 모계 혈통을 통해 지금까지도 이어져오고 있다.[2]

참고로 오늘날의 룩셈부르크의 지배 가문은 나사우바일부르크 대공가[3]이다.

2. 룩셈부르크 백작

룩셈부르크 가문은 10세기경 아르덴 백작이었던 지그프리트 1세가 인근 도시 트리어의 성 막시민 수도원으로부터 지금의 룩셈부르크 땅을 얻어내 성을 건설하고 룩셈부르크 백작이 되면서 시작되었다.

룩셈부르크 백작은 이 가문이 소멸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하지만 룩셈부르크 가문이 1310년 보헤미아 왕국의 보위에 오른 후 가문의 중심지는 보헤미아 왕국령의 수도이며 당시 룩셈부르크 가문이 신성 로마 제국을 다스리는 중심이었던[4] 프라하로 옮겨졌다.

1354년 백국에서 공국으로 승격되었다.

3.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대공위 시대 이후 신성 로마 제국의 유력 제후들은 특정 유력 가문이 제위를 세습하면서 세력이 강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일부러 한미한 백작 가문들을 교대로 선출하는 방법을 택했는데, 그 결과 합스부르크 가문루돌프 1세, 알브레히트 1세, 나사우 가문아돌프의 뒤를 이어[5] 룩셈부르크 백작 하인리히 7세가 독일왕으로 선출되어 황제가 되었다.

하인리히 7세 사후 차기 독일왕으로 비텔스바흐 가문바이에른 공작 루트비히 4세가 선출되었으나, 황권을 강화하려던 루트비히 4세의 말년, 하인리히 7세의 손자 카렐대립왕으로 선출되었고 루트비히 4세가 얼마 못가 사망하며 단독 독일왕이 되었다. 룩셈부르크 가문은 카렐 이후에도 3명의 독일왕을 더 배출했다.

4. 보헤미아 국왕

하인리히 7세의 아들 요한은 보헤미아의 국왕이었던 바츨라프 3세의 여동생인 엘리슈카(Eliška)와 결혼했고, 1310년 보헤미아 왕위를 승계받아 보헤미아 국왕이 되었다. 1310년 요한이 프라하에 입성하면서 가문의 중심지는 룩셈부르크에서 프라하로 이동했다.


[1] 체코어로는 '얀 루쳄부르스키'이며 별명은 '맹인'이다. 훗날 리투아니아 십자군 원정 때 병으로 눈이 멀어, 크레시 전투에서 전사하기 전까지 10년 동안 앞이 안 보였기 때문이다.[2] 왜냐하면, 지기스문트의 사위가 합스부르크 가문알브레히트 2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기스문트 본인도 이복 형 바츨라프 4세가 있어 적장자는 아니었고, 카를 4세의 두 아들 바츨라프 4세와 지기스문트 말고도 방계 가문은 많았다.[3] 원래는 제8대 룩셈부르크 대공인 대공부터 부르봉파름 가문으로 바뀌어야 하나 보르보네-파르마 본가(파르마 공작 필리포 1세로부터 시작하는 스페인 부르봉 왕조의 분가)의 카를로스 우고(Carlos Hugo de Borbón-Parma 1930~2010)가 장 대공의 아들들의 결혼을 귀천상혼이라 규정하고 반대하는 바람에 이에 화가 난 장 대공이 어머니 가문명을 계속 사용하기로 하고 단절을 선포하여 화해 이후에도 나사우바일부르크 정체성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 이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진 장 대공 역시 부르봉파름 가문의 일원으로 보았다.[4] 당시에는 명문화된 수도가 없었고 군주가 거처하는 곳이 곧 행정적 중심지가 되었다.[5] 정확한 순서는 루돌프 1세, 아돌프, 알브레히트 1세이다. 알브레히트 1세는 선제후들의 반대로 부왕 루돌프 1세의 뒤를 이어 독일왕으로 선출되지 못했고, 무력을 사용해 아돌프를 패사시키고 나서야 독일왕으로 인정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