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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와라노 테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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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치조 덴노의 제1황후
1.1. 생애1.2. 대중매체에서
2. 제76대 고노에 덴노의 중궁

1. 이치조 덴노의 제1황후

藤原定子
977년 ~ 1001년

일본 이치조 덴노의 제1황후. 데이시, 테이시로 표기하며 훈독한 사다코로 읽기도 한다.

1.1. 생애

관백 후지와라노 미치타카의 딸이다. 990년 고종사촌 이치조 덴노[1]의 여어로 입궁한 뒤 황후로 책립되었다. 사실 이 때 율령에 따르면 테이시는 황후가 될 수 없었지만 딸의 권위를 높이려는 미치타카가 무리하게 법령을 억지해석해서 밀어붙였는데 이 때문에 미치타카 일족은 귀족들 사이에서 평판이 악화되었고 후에 미치타카 일족이 몰락하는 원인이 되었다. 한편 이 시기에 궁녀 세이 쇼나곤이 테이시를 보좌하였다. 입궁 당시 이치조 덴노는 겨우 11살로 첫사랑에 가까웠고 아름답고 교양있어 금슬도 좋았다.

하지만 아버지 미치타카의 사후 정권이 숙부 미치나가에게 넘어가면서 든든한 배경을 잃는다. 급기야 오빠 코레치카와 남동생 타카이에가 여자 문제로 무려 카잔 상황에게 화살을 쏘는 역모에 가까운 사건을 저지르면서 테이시의 형제들은 전부 체포되어 관직을 잃고 유배되었다. 이 과정에서 테이시도 무려 덴노의 명을 거역하고 형제들을 숨겨주다가 급기야 집안을 부술 정도로 대대적인 수색을 당했고 여기에 충격을 받아 그 자리에서 스스로 삭발하고 출가해버리고 만다.

이 때 출가는 정식 절차를 거친 것이 아니라 혼자 삭발한 것이었지만 당시 관습상 여자가 머리카락을 자르는 일은 출가 이외에는 없었기에 귀족사회에서는 그녀가 비구니가 된 것으로 간주되었다. 비구니가 되면 당연히 속세의 연이 끊어지는 것이었기에 더 이상 궁으로 돌아갈 수 없었고 황후 지위의 정당성도 잃으면서 자신의 입지를 스스로 약화시키고 말았다.

한편 이때 이미 임신 중이던 테이시는 딸 유시 내친왕을 낳자 이치조 덴노는 어떻게든 테이시를 환궁시키려고 했으나 출가해버린 그녀에 대한 귀족들의 반감은 거셌고 덴노도 결국 테이시를 궁 옆 외진 곳에 위치한 관청에 두고 주변 눈치를 보면서 몰래 만날 수밖에 없는 처지로 전락해버렸다.[2] 황후에서 천황과 몰래 통정하는 사실상의 정부로 추락한 셈. 테이시에 대한 평판이 얼마나 나빴는지 그녀를 무리하게 불러들인 이치조 덴노의 평판까지 덩달아 나빠졌고 미치나가의 정적이었던 후지와라노 사네스케를 포함한 이들조차 비구니를 궁에 불러들이는 전대미문의 사태라며 비난했다.[3] 이치조 덴노 또한 그녀를 지극히 사랑했다고 하나 현재의 권력자인 미치나가의 딸 후지와라노 쇼시를 황후로 맞을 수밖에 없었다.[4] 이에 일종의 타협책으로 쇼시는 중궁이 되고 테이시는 황후로 불렸지만, 친정이 몰락한 테이시는 늘 주변의 눈치를 보아야 했고 미치나가의 압박을 받았다.[5] 엄연히 이치조 덴노가 처음 들인 황후이자 그의 자녀까지 낳았는데도 늦게 들어온 쇼시에게 공식 석상에서도 서열이 밀렸다. 심지어 자녀들도 푸대접을 받았는데 장녀 유시 내친왕의 탄생 50일 기념연회마저 원칙대로라면 현 덴노의 첫 자식이니 성대했어야 했지만, 후견인 하나 없는 테이시의 상황 때문에 흐지부지 되어버리고 대신과 대납언들도 테이시에 대한 반감과 미치나가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죄다 불참석했다.

테이시를 모시던 궁녀 세이 쇼나곤은 이 시기 <마쿠라노소시>라는 수필을 써서 테이시의 곁에서 일어나는 궁중 생활의 일상과 그녀의 우아함 등을 찬양하는데 테이시가 몰락한 이후의 정황은 되도록 감추고 화려한 일상과 즐거운 놀이 등으로 포장해 추억하듯 남겼다.

이후로도 덴노의 총애는 여전해서 마침내 대망의 황자 아츠야스 친왕을 낳고 연이어 1001년 딸 비시 내친왕을 낳았으나 산후열세상을 떠났다. 이후 미치나가는 테이시의 아들을 쇼시에게 입양시키는 강수까지 쓰며 이치조 덴노의 환심을 사려고 노력했고 마침내 9년 만에 쇼시는 이치조의 아들인 아츠히라 친왕아츠나가 친왕을 낳는다. 쇼시의 시녀였던 무라사키 시키부가 그 때의 광경을 글로 남겼다. 그러나 테이시의 사후 오빠 코레치카는 승려 엔노와 이모 타카시나노 미츠코와 함께 쇼시와 아츠히라 친왕을 저주했다는 혐의에 간접적으로 연관되어 불명예스럽게 조정에서 퇴출되고 쓸쓸하게 병사했다. 코레치카의 아들들도 미치나가의 견제와 방해 때문에 인생이 꼬이면서 테이시의 아버지 후지와라노 미치타카의 후손 계열인 나카노관백가(中関白家)는 완전히 몰락하지만[6][7], 그와중에 코레치카의 딸들은 미치나가의 차남 요리무네와 사남 요시노부와 결혼하고 이중 요시노부와 결혼한 차녀는 쇼시의 궁정시녀가 되기도 했다. 이런 테이시의 가족들의 만행에도 이치조 덴노는 테이시의 아들 아츠야스 친왕을 동궁으로 삼고 싶었으나 권신 미치나가의 외손이 우선일 수밖에 없었고[8], 완전히 소외된 테이시의 자식들 중 유시 내친왕은 평생 독신으로 살다 세상을 떠났고[9] 막내딸 비시는 어린 나이에 죽었으며 아츠야스 친왕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10]

교양이 매우 뛰어나서 한시와 와카를 많이 남겼고 관련된 일화도 많았으나 아버지의 때이른 죽음, 무능한 형제, 그녀 자신의 경솔한 행동 때문에 불행한 결말을 맞았다. 세이 쇼나곤이 남긴 마쿠라노소시에서는 매우 이상적인 여성으로 그려지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상당히 생각없고 경솔한 면이 많아서 문제를 일으킨 적도 여러번 있다. 다만 이치조 덴노와 나눈 열렬한 사랑과 비극적인 최후 때문에 미화되는 감이 많으며 황후로서의 자격이라는 측면에서는 경쟁자이자 친사촌이었던 후지와라노 쇼시에게 확실히 밀린다.

산후열로 사망했다는 점, 후임자인 쇼시와는 친척이 된다는 점, 그리고 후임자에게 한동안 아들이 없었다는 점에서 조선의 이 분과 비슷하다.

공교롭게도 밑의 두 동복여동생들(겐시, 미쿠시게도노) 또한 1002년에 차례로 요절하면서 이로써 나카노관백가 여계는 완전히 대가 끊겨져버린다. 이 중 겐시는 이치조 천황의 후임자 산조 천황의 동궁비였다가 남자 형제들의 대형사고로 후견인을 잃으면서 남편 산조 천황에게 외면당하고 살다가 무려 피를 토하면서까지 죽었고, 원래 언니 테이시의 궁정시녀로 일하는 미쿠시게도노는 언니 사후 이치조 천황의 후궁이 되면서 사실상 언니의 대리인 역할을 해오면서 나름 이치조 천황에게 총애도 받고 회임도 하나 뱃 속에 아이를 가진 상태에서 요절해버렸다.

1.2. 대중매체에서

파일:attachment/초역_백인일수_우타코이_10.avi_000256708.jpg

초역 백인일수 우타코이에서 세이 쇼나곤이 비중 있게 나오는 만큼 그녀도 등장한다. 직접 얼굴을 보인 것은 쇼시가 들어온 이후.

Fate/Grand Order에서 세이 쇼나곤이 실장되었는데, 대사에서 그리워하며 자주 언급한다.

NHK 대하드라마 빛나는 그대에게에서 타카하타 미츠키가 맡았다.

2. 제76대 고노에 덴노의 중궁

藤原呈子

쿠조인(九條院)

제76대 고노에 덴노의 중궁으로 시메코라고도 한다.

후지와라노 다다미치의 양녀. 입궁해 고노에 덴노의 중궁이 되었다. 후지와라노 타이시가 황후였기 때문에 지위는 더 낮았을 것으로 보인다. 남편을 일찍 잃어 과부가 되었지만 재입궁해 다시 황후가 된 후지와라노 타이시와 달리 재가하지 않았다.

[1] 고모 후지와라노 센시의 아들.[2] 당시 테이시가 머무르던 관청은 황후의 일을 맡아보는 부서였는데 너무 외진 곳이어서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3] 테이시의 환궁에 비난여론이 너무 거세지자 테이시의 궁녀들은 사실 그녀는 출가한 적이 없다는 소문을 퍼트렸지만 현장에서 출가를 목격했던 증인이 있는 마당에 이건 무리수였고 오히려 테이시의 평판만 더 악화시켰다.[4] 사실 따지고보면 쇼시가 새로운 황후가 된 것 또한 테이시 본인이 초래한 자책골에 더 가까웠다. 이 당시 일본의 황후들은 궁궐의 안주인으로서 신궁의 제사를 담당하는 의무가 있었는데 문제는 테이시처럼 한번 출가한 이는 신토와의 인연이 끊어졌다고 여겨져서 더이상 이 임무를 수행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환속되고 나서 한동안 황후의 신궁제사는 이루어지지않고 있었는데 문제는 이 당시 지진, 홍수 등 온갖 자연재해가 겹쳐버렸다는 점. 결국 ”이게 다 테이시가 환속되어서 제사가 지내지지 않은 탓이다“라는 여론이 생겨져버렸고, 결국 미치나가의 친딸 쇼시가 황후가 되고 신궁제사가 치루어지고나서야 여론이 잠재워진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정황 때문에 쇼시가 테이시를 밀어내고 새로운 황후가 된 게 단순히 미치나가의 과욕 때문이 아니라 어찌되었든 조정의 1인자로서 난국을 타개할 책임이 있었기때문에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쇼시를 시집보낸 걸로 해석하기도 한다. 실제로 전대미문이었던 쇼시의 황후 책봉은 미치나가의 정적들에게도 지지를 받았을 정도였고 그만큼 테이시는 공공의 적이었다.[5] 원래 중궁은 황후를 가르키는 또다른 표현인데 이미 있는 테이시를 폐할 수 없어 중궁과 황후를 별개의 지위로 분리해서 쇼시를 책립하여 테이시와 동등한 지위로 만든 것이다. 말도 안되는 꼼수였지만 사실 미치타카가 먼저 이 방법을 써서 테이시를 황후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녀 쪽에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6] 그나마 미치타카의 차남이자 테이시의 남동생인 타카이에는 형제들에 비해 어느정도 장수하고 자손을 많이 남겨서 대를 이었는데 훗날 겐페이 전쟁기 때도 등장하는 고토바 덴노의 생모 후지와라노 쇼쿠시타이라노 키요모리의 계모 이케노젠니가 타카이에의 6대손이고, 가마쿠라 막부 3대 쇼군 미나모토노 사네토모의 정실 니시하치조젠니는 타카이에의 7대손이다.[7] 별개로 코레치카의 장남 미치마사는 미치나가의 차남 요리무네와 처남과 매부관계였기때문에 친분이 꽤나 두터웠던 편이었다. 후지와라노 사네스케의 일기 <소우기>에는 이 둘이 서로 친목질을 일삼으면서 누군가의 뒷담을 까대고 있었다고 기록이 되어있는데, 일각에서는 이 둘의 뒷담 대상이 요리무네의 동복동생인 아키노부로 추정하고 있기도 하다.[8] 사서에 따르면 테이시의 남동생 타카이에도 조카인 아츠야스 친왕을 동궁으로 옹립시키려는데 꽤나 혈안이었지만 결국 아츠히라 친왕이 차기 동궁으로 결정나자 대놓고 매형인 이치조 덴노에게 저러고도 인간이냐고 험담까지 깠다는 기록이 있다.[9] 별개로 부황이었던 이치조 덴노의 총애를 장녀로서 독차지하며 살다가 막대한 영지를 물려받았고 이후 출가하여 비구니 황녀가 되었는데 외사촌인 코레치카의 장녀와 미치나가의 차남이자 오촌 숙부인 요리무네의 딸 엔시를 양녀로 삼으며 나름 천황의 장녀로서 권위는 있었다.[10] 다만 아츠야스 친왕은 왕위는 빼앗겼지만 어쨌든 쇼시의 양자로 미치나가 일가로부터 나쁘지 않은 대우를 받았다. 그가 결혼할 때는 미치나가 일가가 주도하여 엄청나게 화려한 결혼식이 치러졌고 고명딸 겐시 여왕은 미치나가의 아들 요리미치에게 입양되어 고스자쿠 덴노의 중궁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