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22 15:37:45

프로타고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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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31123><colcolor=#FCCD87> 압데라의 프로타고라스
Πρωταγόρας ὁ Ἀβδηρίτης | Protagoras Abderites

파일:Ribera_-_Protagoras,_1637.jpg
《프로타고라스》, 호세 데 리베라, 1637년
출생 기원전 490년[1]
아케메네스 제국 트라키아 압데라
사망 기원전 420년경 (향년 70세)
지중해
직업 짐꾼, 철학자
스승 데모크리토스
제자 프로디코스, 이소크라테스, 페리클레스

1. 개요2. 생애3. 사상4. 기타5. 플라톤의 대화편
5.1. 개요5.2. 등장인물5.3. 줄거리
5.3.1. 도입부: 프로타고라스를 찾아가다5.3.2. 소크라테스의 질문과 프로타고라스의 '위대한 연설'5.3.3. 덕의 단일성 논쟁1: 덕이란 나누어질 수 있는 것인가?5.3.4. 시모니데스의 시 해석5.3.5. 덕의 단일성 논쟁2: 용기와 지혜의 동일성 논쟁과 지덕합일
5.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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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Πάντων χρημάτων μέτρον ἐστὶν ἄνθρωπος: τῶν μὲν ὄντων ὡς ἔστιν, τῶν δὲ οὐκ ὄντων ὡς οὐκ ἔστιν.
모든 사물들의 척도는 인간이다.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존재한다는 것의 척도요,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것의 척도다.
― 『진리』 시작 부분.

세상의 진리란 상대적인 것이라 주장한 고대 그리스소피스트.

2. 생애

프로타고라스는 압데라 사람이며,[2] 짐꾼[3]이었다. 그는 데모크리토스의 제자로 들어가 논변을 배웠고, 그렇게 배운 논변을 가지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돈을 받았다. 그는 최초로 수업료로 100므나[4]의 수입을 받기도 했다. 얼마나 말을 잘했던지 사람들은 그를 '지혜(소피아)'라고 불렀다고 한다. 또한 그는 최초로 시제를 구별을 했고, 적절한 시점 파악 능력을 강조했다. 논변 시합을 개최하고 논쟁을 벌이는 사람들에게 소피스트 논변을 전수하기도 했다. 심지어 그는 다른 사람이 세운 주장을 질의응답을 통해 논박하는 변증론적 추론을 최초로 고안하고 도입한 사람이다.

그는 "모든 것에는 서로 상반되는 2개의 논변이 있다"는 주장을 최초로 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는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 있는 것에 대해서는 있다는, 있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있지 않다는 척도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플라톤 역시 감각 이외에는 영혼은 아무것도 아니며 모든 것이 다 참되다라고 말했다"[5]고 했으며, 다른 책에서는 "신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있는지도 있지 않는지도 나는 알 수 없다. 앎을 가로막는 것이 여럿이기 때문이니, 불분명함과 인생의 짧음이 그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런 말들 때문에 그는 400인회[6]의 한 사람인 퓌토도로스에게 고발당했고[7] 결국 아테네에서 추방당했다. 그리고 시중에 퍼진 그의 책들은 압수당해 아고라에서 불태워졌다.

그는 여행 중 시칠리아로 가던 그의 배가 침몰해서 죽었다고 한다. 프로타고라스는 소피스트로서 40년간을 활동했으며 70세에 사망했다.

3. 사상

소피스트의 대표적 인물로 소피스트를 대표하는 많은 특징이 그에게 귀속하고 있다. 특히 유명하고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이중 논변이다. 프로타고라스는 이중 논변을 이용해 활약함은 물론, 그에게 교습받는 사람들에게도 이를 전수했다. 어떤 하나의 이슈에 대해서 찬성 입장에서도, 반대 입장에서도 강력한 논리를 세우는 것이 바로 이중 논변으로, 이들은 이와 같은 기술을 이용해 민회에서 활약했다. 즉 돈만 지불된다면 그들은 어떤 이슈에 대해서건 그것이 옳다고도 강력하게 진술하고, 또 그르다고도 강력하게 진술하는 기술이다.

"그 자신이 만물의 척도"라는 상대주의를 주장한 것으로 유명하다. 어떤 것일 수 있는 한에서 그것은 그것이며, 어떤 것이 아닐 수 있는 한에서 그것은 그것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쉽게 말해서 맛있고 맛없고는 사람에 따라서 다르다. 재미있고 없고도 사람에 따라서 다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맛없다고 느끼거나 재미없다고 느끼는 것에 대해서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절대적인 진리는 존재한다고 할 수 없다.[8]

그런데 그렇다면, 소피스트로서의 그의 활동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가 의문시될 수 있다. 참과 거짓이 없고 모든 게 다 사람 나름이라면 세상에는 현명한 사람도 없고, 또 소피스트들의 조언이나 법정에서의 활동 역시 가치가 없을 것이다. 게다가 세상에 존재하는 사물들과 언어의 정확한 관련지음을 주장하는 소피스트들의 학설과도 양립시키기 어렵다. 소피스트를 비롯한 당대 그리스 현인들의 보편적인 주의주장에 따르면 언어라는 것은 실제의 사물과 연관이 있어야 하고 실제의 재현이어야 한다. 그 특징이나 정의는 다음과 같다.

그것은 ~과 같은 특성들을 지니고 있으며, 동시에 ~과 같은 특성들은 지니고 있지 않다. 예를 들어 보자면, 축구공은 둥글고, 가죽으로 만들어졌다는 특성을 지니고 있으며, 동시에 금속으로 만들어졌다는 등의 특성들은 지니고 있지 않다.

헌데 엘레아학파부터 이어진 소피스트 자신들의 교설에 따르면 부정은 가능하지 않다. 왜냐면 언어는 세계를 지정해야 의미가 있는 것이다. 저 사과라고 한다면, 어떤 공간에 있는 사과를 지정한다. 저 사과라고 했는데 저기 사과가 없으면 그 언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런데 부정어라는 것은, ~가 아니다라는 것은, 무엇인가를 부정하고 있을 뿐이지 현실에 있는 무엇인가를 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부정어는 의미가 없다.

이에 대해 소피스트들은 아예 부정에 의미가 없다고 간주했다. 그 귀결로, 거짓은 존재하지 않고, 반론 역시 가능하지 않다. 그런데 이 경우 소피스트들의 말을 포함해, 수많은 말들이 동등하거나 비슷한 가치를 가지게 되는 문제에서는 벗어나지 못한다. 프로타고라스는 이에 대해 강한 로고스[9]와 약한 로고스를 제시한다. 틀린 것은 없지만, 더 효율적이고 이로운 것은 있으며 이에 따라서 로고스의 강약이 정해진다. 그가 말하는 이중논변의 핵심은 강한 로고스를 만들어서 약한 로고스를 꺾으라는 것이다. 또, 좋은 로고스와 이로운 로고스로서 나쁘고 해로운 로고스를, 그가 느끼고 지각하고 경험하는 바를 갈아치워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 좋은 로고스라는 것은 자연적이고 건강한 상태의 것이다.[10]

또, 언어의 사용에도 관심을 보였다. 로고스의 뜻을 세분화하기도 했고, 몇몇 단어들의 경우 여성형과 남성형의 적용이 잘못되었다면서 바꿔야 한다고 언급했다.

4. 기타

  • 이른바 법원의 역설(paradox of the court)이라고 불리는 양도논법에 관한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당대 소피스트들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여론이 많았으나 프로타고라스는 대표적인 소피스트였으며, 수업료가 비쌌다고 했다. 누가 봐도 자기 자신이 첫째 가는 소피스트였기에 차라리 그는 자신이 소피스트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고 떳떳하게 그래 나는 소피스트다 그게 뭐가 나쁘냐고 선언해 버리면서 당당한 태도로 수업하고 돈을 벌었다고 한다.[11] 그리고 자기 자신이 가르친 학생한테 제대로 통수를 맞았다. 그의 제자 중 에우아틀로스를 가르칠 때, 에우아틀로스는 처음으로 소송에서 이기고 나서 수강료를 내겠다고 했고, 프로타고라스는 이를 수용했다. 그러나 에우아틀로스는 수료 후 어떤 소송도 맡지 않고 빈둥거리다가, 끝내 참지 못한 프로타고라스가 에우아틀로스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
    • 에우아틀로스의 주장은 자신이 소송에서 이기면 판결에 따라, 져도 계약에 따라[12] 수업료를 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반면 프로타고라스의 주장은 자신이 소송에서 이기면 판결에 따라, 져도 계약에 따라[13] 수업료를 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14]

5. 플라톤의 대화편

5.1. 개요

<프로타고라스>는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이다. 부제는 '소피스트들'.

5.2. 등장인물

  • 동료 : 소크라테스의 친우. 소크라테스에게 '알키비아데스 따먹다 왔냐' 수준의 농담을 스스럼없이 건넬 정도로 허울없는 친구로 묘사된다.
  • 소크라테스 : 노인으로 등장하는 다른 대화편과는 달리 30대의 젊은이로 묘사된다.
  • 히포크라테스 : 유명한 의사 히포크라테스와는 동명이인. 히포크라테스라는 이름 자체가 당시 그리스 세계에서 흔한 이름이었다. 프로타고라스를 동경해 그의 가르침을 받고 싶어한다.
  • 프로타고라스 : 상대주의적 관점을 일부 드러내는 장면이 있으나 이 대화편에서는 인간척도설 같은 실제 사상이 제대로 묘사되진 않았다. 인간척도설은 다른 대화편 테아이테토스에서 심도깊게 다뤄진다.
  • 알키비아데스 : 소크라테스의 소년애 상대이자 제자. 훗날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정적들의 공격으로 궁지에 몰리자 스파르타로 망명가 배신 행위를 저질러 스승 소크라테스 사형의 원인이 된다.
  • 크리티아스 : 소크라테스의 제자이자 플라톤의 외가쪽 친척. 후일 펠로폰네소스 전쟁 패전 후 악명높은 30인 참주정의 우두머리가 되어 소크라테스 죽음의 원인이 된다. 카르미데스에서도 등장한다.
  • 히피아스 : 엘리스의 히피아스. 유명한 소피스트. 지혜와 논변술 뿐 만 아니라 음악, 수학 등 여러 기술 또한 가르쳤다. 플라톤 대화편 중에 그의 이름을 딴 것도 두 편 존재한다.
  • 프로디코스 : 언어 용법의 세분화를 주장한 걸로 유명한 소피스트.
  • 칼리아스 : 아테네 최고 부자 중 한사람. 소피스트 후원을 즐겨하다 이후 파산한다. 당대 희극 작가들의 단골 풍자 대상이 될 정도로 행실에서 좋은 평가는 못받았다. 이 대화편의 배경이 칼리아스의 집이다.

5.3. 줄거리

5.3.1. 도입부: 프로타고라스를 찾아가다

동료와 만난 소크라테스가 방금 있었던 이야기를 전해주는 식으로 내용이 전개된다. 동료는 친구 소크라테스를 보고 알키비아데스의 젊음을 느끼다 왔냐고 농을 던지고[15] 소크라테스는 알키비아데스와 만난 건 사실이지만 그런 건 아니고 프로타고라스와 대화를 나누고 왔다고 하며 썰을 풀기 시작한다.

어느 날 새벽에 소크라테스의 집에 프로타고라스의 방문 소식에 흥분한 히포크라테스가 방문한다. 히포크라테스는 그리스에서 가장 지혜롭다는 프로타고라스에게 가르침을 받고 싶어하고 소크라테스가 만남을 주선해줬으면 좋겠다고 요청한다. 소크라테스는 우선 히포크라테스가 무엇 때문에 프로타고라스의 제자가 되고 싶어하는 지를 따지며 그를 일깨우려 한다. 히포크라테스에게 의사에게 배워 의사가 되고 건축가에게 배워 건축가가 되듯 소피스트의 제자가 돼서 소피스트가 되려는 거냐고 묻는다. 히포크라테스가 당연히 그건 아니라고 손사래치자[16]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전문 기술이 아니라면 일종의 교양을 가서 배우려 하는 거냐고 묻는다. 히포크라테스가 맞는 것 같다고 이에 수긍하자 소크라테스는 그럼 영혼을 보살펴달라 맡기러 가는 건데 프로타고라스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정확히 알고 신중히 가야 하지 않겠냐고 물으며 프로타고라스의 직업, 즉 소피스트가 정확히 무엇인지 묻는다. 히포크라테스가 이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자[17] 소크라테스는 그가 얼마나 무모한 행동을 하고 있었는지 꾸짖으며 자신이 보기에 소피스트는 일종의 지식의 행상으로 물건을 파는 행상에게 물건을 살때 신중해야 하는 것처럼, 아니 몸보다 더 중요한 영혼을 맡기니만큼 더욱 신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일단 날이 밝았으니 프로타고라스에게 가보자 한다.

프로타고라스가 머무르고 있는 칼리아스의 집에 당도하자 페리클레스의 두 아들과 알키비아데스, 크리티아스 같은 젊은이, 프로타고라스, 프로디코스와 히피아스 같은 소피스트들, 소피스트의 추종자들이 각자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18] 소크라테스는 프로타고라스에게 다가가 히포크라테스를 소개하며 자신이 묻고 싶은 것이 이것저것 있는데 우리끼리만 대화할지 아님 모두 불러모을지 편한 대로 결정해달라 한다. 프로타고라스는 자신은 남들과는[19] 달리 지혜로운 이, 즉 소피스트 임을 숨기지 않고 당당하게 돈을 받고 제자들을 가르친다며[20] 모두 불러 모을 것을 제안한다.

5.3.2. 소크라테스의 질문과 프로타고라스의 '위대한 연설'

칼리아스의 집에 있는 이들이 모두 모이자 소크라테스는 프로타고라스에게 그의 직업이 정확히 뭔지 묻는다. 프로타고라스는 이에 자신은 소피스트이고 숙고하는 방법, 즉 시민적 덕을 가르친다고 답한다. 소크라테스는 이에 만족하면서도 질문이 끝나지 않았다고 하며 세가지 질문을 던진다. 첫째는 배에 관해 조언을 구할 땐 조선공을, 몸에 관해 조언을 구할 땐 의사를 찾아 조언을 구하는 것이 당연한데 왜 정치는 전문가가 아닌 모두가 참여하는가[21], 둘째는 자기는 시민적 덕을 가르칠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자신이 틀렸고 가르칠 수 있는 것인가, 셋째는 시민적 덕을 가르칠 수 있다면 어째서 시민적 덕을 체육이나 음악을 가르치 듯 자식에게 가르치지 않고 그로 인해 훌륭한 자의 자식 중에 훌륭하지 않은 이가 나오는가로 구성된 이 질문을 프로타고라스는 신화와 고사를 곁들인 긴 연설의 형식[22]으로 답한다.[23]

프로타고라스는 우선 첫째 질문을 프로메테우스 설화를 인용하며 프로메테우스가 가져다 준 전문 기술과 제우스가 인간 사회 유지를 위해 준 절제, 정의, 분별, 경건 등의 덕을 구분해 시민적 덕은 모두가 가지고 있기 때문에[24] 민주주의는 정당하다 답한다. 시민적 덕을 가르칠 수 있냐는 질문에는 장애나 추함 같은 선천적인 결핍은 부족함이 있더라도 오히려 연민하지 않느냐면서 시민적 덕을 가르칠 수 있기 때문에 덕을 결핍하고 있는 이를 힐난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형벌 또한 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문제삼는게 아니라 덕을 가르쳐 다시 범죄를 저지르지 않게 하는 게 목적이라며 이를 보충한다. 끝으로 마지막 질문은 소크라테스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라며 실제론 모두가 자식이 어렸을 때부터 덕을 교육하고 국가도 법률과 형벌 등을 통해 시민들을 교육한다고 주장하며 야만인들이랑 비교하면 소크라테스가 생각하는 덕을 결핍한 이들은 시민적 덕의 전문가나 다름없다고 한다. 그리고 예시로 모두가 악기 연주를 잘 해야 하는 사회를 생각해보라며 모두가 자식에게 악기 연주를 가르치겠지만 꼭 훌륭한 연주자의 자식이 훌륭하리란 법은 없고 보잘 것 없는 연주자의 자식이 훌륭한 개인별 역량 차이는 존재하겠지만 악기 연주를 아예 안 배운 사람에 비하면 모두 전문가 아니겠냐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주장에 매료되어 거의 넘어갈 뻔 하나 마음 속에 걸리는 질문 하나를 던진다.

5.3.3. 덕의 단일성 논쟁1: 덕이란 나누어질 수 있는 것인가?

소크라테스는 프로타고라스가 연설 중에 언급한 절제, 정의, 분별, 경건 등이 덕 그 자체인지, 아니면 덕의 일부인지 묻는다. 프로타고라스는 이들은 얼굴을 구성하는 눈, 코, 입, 귀 처럼 덕을 구성하는 각 부분이고 서로 구별된다고 답한다. 소크라테스는 이에 이들이 덕 그 자체임을 증명하는 논쟁을 벌이기 시작한다. 우선 정의는 정의롭고 경건은 경건해야 하지 않냐고 묻고 프로타고라스는 동의한다. 소크라테스는 이에 경건이 부정의하고 정의가 불경할 리 없지 않느냐며 경건이 정의롭고 정의가 경건한 것이니 경건과 정의가 같은 것 아니냐 묻는다. 프로타고라스는 조금 걸리긴 하지만 네가 그렇다고 주장하면 그렇게 치자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태도에 발끈해 그렇게 치자는 식으로 넘기지 말고 당신 생각을 확실히 말하라 요구한다. 프로타고라스는 이에 경건과 정의가 유사한 면이 있고 유사한 것이 동일한 것은 아니지 않냐 한다. 흰 색과 검은 색 같은 서로 반대되는 것들도 유사점을 찾으려면 찾을 수 있다는 말도 덧붙인다.[25]

소크라테스는 이번엔 분별하는 것의 반대는 어리석은 것이고 지혜로운 것의 반대도 어리석은 것이 아니냐 하고 빠름과 느림, 차가움과 뜨거움 처럼 서로 반대되는 것은 한 쌍이어야 하는 것을 동의시킨다. 그리고 그렇다면 지혜와 분별이 동일한 것이 아니라면 반대되는 것이 한 쌍이라는 방금의 논변이 틀린 것 아니냐 주장한다. 이 논리가 먹히자 소크라테스는 내친 김에 분별과 정의의 동등성도 증명하려 한다. 부정의하면서 분별있는 사례가 있냐고 묻자 프로타고라스는 자신이 그렇게 주장한다면 부끄러운 일이겠지만 세간에 그렇게 주장하는 이가 있다 한다. 소크라테스는 그럼 그런 세간의 입장으로 답해달라 하며 분별이 있다면 그것은 좋은 것이고 사람들에게 이득이 되는 일 아니냐 묻는다. 하지만 분별과 정의의 동등 논증은 여기서 막힌다. 프로타고라스가 좋은 것이란 단어에 주목해 누군가에겐 좋은 것이 누군가에겐 나쁠 수 있다는 상대주의 논증을 장황하게 펼쳤기 때문이다.[26]

소크라테스는 프로타고라스의 말하기 태도에[27] 빈정이 상해 볼 일이 있다고 하며 자리를 뜨려 한다. 이에 집주인 칼리아스가 논쟁을 계속 해달라 요청하지만 소크라테스의 요청은 옳지 못하다 여긴다. 알키비아데스가 이런 칼리아스한테 반발해 소크라테스 편을 들자 크리티아스와 히피아스, 프로디코스가 저마다 한마디씩 거들며 중립적인 중재자를 세워 논쟁을 이어가자 한다. 소크라테스는 중재자가 자신들보다 어리석거나 자신들 수준이면 중재의 의미가 없으니 자신들보다 현명한 이를 세워야 하는데 자리에서 프로타고라스보다 현명한 이는 없으니 의미없다고 중재 제안을 거절한다. 하지만 논쟁을 계속 이어가겠다 하며 이번엔 자신이 대답하는 쪽이 되는 것으로 타협하자 한다.

5.3.4. 시모니데스의 시 해석

프로타고라스는 이에 동의하고 시를 읽고 올바르게 이해하는 능력은 교양인의 기본 소양이라 하며 당시 유명했던 시모니데스의 시구[28]를 아냐고 묻는다. 소크라테스는 물론 알고있고 자신이 이미 많이 연구해본 시구라고 답한다. 프로타고라스는 그렇다면 시구가 잘 지어졌냐고 묻는다. 소크라테스가 시구가 훌륭하다고 답하자 프로타고라스는 시구 속 '진실로 좋은 사람이 되기 어렵다'는 구절과 '탁월하기 어렵다'는 피타코스의 경구에 반박하는 구절이 모순되지 않느냐며 공격한다.[29] 소크라테스는 이에 단어 의미 세분화를 연구한 것으로 유명한 프로디코스를 끌어들여 논답술을 벌이며 '되다'와 '하다'의 차이, 즉 성취와 유지의 차이를 지적한다. 좋은 사람이 '되는' 것과 영원히 탁월한 채로 '있는' 것은 다르다는 것이다. 프로타고라스는 덕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무엇보다 어려운 것임은 세상 모두가 아는 것인데 그러한 해석은 터무니없는 것 아니냐 반박한다. 소크라테스는 이번엔 자신이 프로디코스에게 강의를 들었을 때 무섭도록 지혜롭다는 표현을 할 때마다 무섭다는 표현은 부정적 의미로 쓰여야 한다고 프로디코스에게 혼났다며 시모니데스가 '탁월하기 어렵다'는 피타코스의 경구를 '탁월하기 나쁘다'는 식으로 해석해서 이를 비난하는 것 아니냐고 주장하고 프로디코스가 이에 동의한다. 프로타고라스가 당연히 어렵다는 나쁘다가 아니라 힘들다로 해석해야 한다고 바로 반박하자[30] 소크라테스는 이는 프로디코스와 자신이 프로타고라스를 시험해 보기 위한 농담이었다고 발뺌하고 자신의 시 해석을 소피스트처럼 장황하게 연설하기 시작한다.

소크라테스는 7현인 같이 지혜로운 이들은 스파르타인의 라코닉 화법처럼[31] 짧은 경구로 자신의 지혜를 드러내는 것을 즐기고 피타코스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경구를 이용했다 주장한다. 그리고 시모니데스가 이 시를 쓴 이유 자체가 바로 피타코스를 논파하기 위함이고 우선 '진실로 좋은 사람이 되기 어렵다'는 구절은 문법적으로 '좋은 사람이 되기 진실로 어렵다'라는 뜻으로 읽어야 한다고 (억지) 주장한다.[32] 좋음의 등급은 구분할 수 없어 '진실로' 좋은 것이 있을 리 없다는 것이다.[33] 그리고는 자신이 했던 '되다'와 '하다'의 차이를 다시 끌어들여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어려울 지언정 가능한 일이지만 영원히 탁월한 채로 '있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게 시모니데스의 원 뜻이라 한다. 그리고 시구 다른 부분을 인용하며 탁월한 이도 어쩔 방도 없는 재난에 쓰러져 나빠질 수 있으며[34] 오히려 원래 나빴던 이는 이미 쓰러져 있으니 재난에 쓰러질 수 없고 그러니 시모니데스가 재난에 쓰러진다고 표현한 건 탁월한 이들을 일컫는다고 주장한다. 아무리 탁월한 이라도 어찌할 수 없는 재난엔 쓰러지니 탁월한 채로 영원히 '있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결국 시모니데스는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진실로 어려울 지언정 가능하나 좋은 사람인 채로 영원히 있는 것은 어쩔 방도 없는 재난을 이겨낼 수 있는 신이 아닌 한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이에 더해 시구 나머지 부분의 대부분을 가져오며 시를 전체적으로 해석하기 시작한다. 우선 '모든 이를 나는 칭찬하고 사랑하네,/ 기꺼이 어떤 추한 일도 행하지 않는 자는 누구나.'라는 구절은 시모니데스가 의도적으로 저지른 나쁜 일이 아니면 비난할 수 없다[35]는 멍청한 생각을 할 리 없다고 주장하며 그렇게 보통 해석하기 쉬운 부분의 내용은 좋은 이들이 자기 조국이나 부모의 이상한 행동을 변명하는 등의 좋지만 잘못되었다고 볼 수 있는 행동을 가리키는 것이고 비슷한 내용의 시구 마지막 부분인 '지나치게 무법적이지 않은 사람,/ 나라에 이득이 되는 정의를 아는/ 건전한 사람, 그런 사람을 나는 흠잡지 않으리,/ 바보들의 무리는 무수히 많으니./ 추한 것이 섞이지 않은 것은 모두 아름답도다.'라는 구절은 의도적으로 나쁜 짓을 한 이가 아니면 나쁜 이라 할 수 없다 주장하는게 아니라 관대한 시모니데스가 좋다고 볼 수 없지만 나쁘다고 볼 수도 없는 회색에 가까운 이들 또한 포용하겠노라고 선언한 것이라 (억지) 해석한다.[36] 히피아스는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궤변에 호평을 내리며 자신의 해석도 한번 들어보겠냐고 하지만 청중들은 소크라테스와 프로타고라스의 논쟁이 우선이라며 이를 거부한다. 소크라테스는 시구 해석은 의미 없는 일이라고 비하하며 진정 훌륭한 이들은 음악이나 시 같은 꾸밈 없이 자신의 연설만으로 분위기를 만들수 있다며[37] 시구 인용 없이 생각과 논리만으로 맞붙어보자 제안하며 다시 덕의 단일성 논쟁으로 돌아올 것을 요청한다.

5.3.5. 덕의 단일성 논쟁2: 용기와 지혜의 동일성 논쟁과 지덕합일[38]

프로타고라스는 소크라테스와의 논쟁 재개를 꺼리지만 소크라테스 빠돌이인 알키비아데스가 "그럼 패배 인정하고 소크라테스는 다른 이들과 더 다양한 주제로 떠들게 할까?"라며 도발하자 마지못해 논쟁을 재개하고 그냥 소크라테스 편한대로 자신이 대답하는 쪽이 되겠다고 한다. 소크라테스가 지난 논쟁동안 프로타고라스가 생각을 바꿔 덕의 부분은 금덩어리의 부분처럼 덕 그 자체라고 생각하게 되었냐고 묻자 프로타고라스는 덕의 부분인 지혜, 경건, 분별, 정의가 상당한 유사성이 있음은 인정하나 용기만은 눈에 띄게 다르다고 주장한다. 어리석고 불경하고 분별없고 부정의하지만 용기있는 자도 있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이를 반박하기 위해 용기있는 자는 대담하다는 것을 동의시키고 의술에 관해 알면 수술을 하는 데에 대담해지고 전투술에 관해 알면 싸움을 하는 데에 대담해지듯이 앎이 대담함을 증진시켜주니 용기가 곧 지혜 아니냐고 주장한다.[39] 하지만 프로타고라스는 자신은 용기있는 자가 대담하다고 했지 대담한 자가 용기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꼬집으며 소크라테스의 말처럼 용기가 곧 지혜이면 레슬링에 익숙해진 이는 레슬링에 관해 대담해지니 용기란 곧 근력이고 그것이 곧 지혜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지 않냐고 반문한다. 그리고 용기있는 이가 대담한 건 맞지만 용기와 대담함은 기원이 다르다 한다.

소크라테스는 일단 프로타고라스의 반론을 제쳐두고[40] 즐거움(쾌락)이 곧 좋은 것(덕)이라 생각하는지 묻는다. 프로타고라스는 즐거운 것과 좋은 것은 달라 좋은 것 중 즐거운 것도, 고통스러운 것도, 둘 다 아닌 것도 존재한다는 상식적인 대답을 한다. 소크라테스는 이어서 지혜가 쾌락이나 고통과 같은 다른 것들을 지배한다고 생각하는지, 아니면 지혜가 다른 것들에게 지배받는자고 여기는지 묻는다. 소피스트를 자처하며 지혜를 중시하는 프로타고라스는 당연히 전자라고 답하나 소크라테스는 대중들은 쾌락을 좇아 나쁜 일을 행하는 것 처럼 쾌락과 고통이 지혜를 지배한다고 생각하더라고 하며 그런 대중들과 가상으로 논답을 펼쳐보자고 제안한다. 프로타고라스가 이에 동의해 가상 논답이 시작된다.

보통 과식이나 색욕 등 즐겁지만 좋지 않다고 여겨지는 것은 사실 당장은 즐겁지만 미래에 그 이상으로 더욱 괴롭기 때문에 좋지 않다고 여기는 것이다. 반대로 쓴 약과 같이 고통스럽지만 좋게 여겨지는 것은 당장은 고통스럽지만 미래에는 그 이상으로 즐겁기 때문에 좋게 여겨지는 것이다. 대중들은 즐겁지만 좋지 않은 것과 고통스럽지만 좋은 것 중 이에서 벗어나는 사례를 찾을 수 없을 것이라는 점에 프로타고라스도 동의한다. 그러니 좋은 것과 즐거운 것은 근본적으로 같은 것이고 과식과 색욕같이 좋지 않은 일을 저지르는 것은 그것이 즐거우면서도 나쁜 일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함으로 인해 일어날 더욱 고통스러운 미래를 '모르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라는 결론이 난다.[41]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가상논답을 통해 덕이란 곧 앎, 정확히는 미래의 쾌락을 예측할 수 있는 측정기술이라고 정의내리고 프로타고라스와 프로디코스, 히피아스 모두 이에 동의한다.[42]

소크라테스는 여기서 용기와 지혜의 동일성 논증을 다시 시작한다. 우선 세 소피스트들에게 무서움과 두려움이란 미래의 나쁜 것을 예측하는 것이라는 것에 동의를 받아낸다. 그리고 용기있는 자와 비겁한 자의 차이는 올바른 길을 예측하는 능력, 즉 덕의 차이 아니냐고 묻는다. 용기있는 자는 전투에 참여하는 쪽이 당장의 안위를 생각해 달아나는 것 보다 결국 더 좋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기꺼이 참여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지 않냐는 것이다. 프로타고라스가 떨떠름해 하면서도 동의하자 그렇다면 용기 또한 미래를 예측하는 지혜이니 지혜와 용기는 동일한 것이 아니냐고 묻자 프로타고라스는 납득하지 않은 얼굴로 그렇다고 수긍한다. 그런데 덕은 가르칠 수 없다 주장하던 소크라테스가 어느새 덕이 곧 앎이라 주장하고 덕은 가르칠 수 있다던 프로타고라스가 덕이 앎임을 부정하게 되었다. 소크라테스는 논의가 뒤죽박죽되었다고 선언하고[43] 여세를 몰아 그렇다면 논의를 이어가는 대신 덕이 정확히 무엇인가 정의내리고 이를 통해 덕을 가르칠 수 있는지 따져보자고 한다. 프로타고라스가 그냥 다음에 당신이 내킬때 하자고 반응하자[44] 소크라테스는 안그래도 아까 가봐야 했다고 말하며 논의를 마치고 칼리아스의 집을 떠나 동료에게로 향한다.[45]

5.4. 여담

그리스 희극의 익살스러운 느낌을 살린 프로타고라스는 향연과 함께 가장 문학성이 뛰어난 플라톤 대화편 중 하나이다. 하지만 그만큼 실제 대화의 비규칙성이 강하게 드러나 얼핏 보면 의미없는 뒤죽박죽 대화에 불과해 행간 읽기가 무엇보다 중요한 대화편이기도 하다. 내용이 비일관적으로 보인다고 가치가 낮은 대화편은 아닌 것이 지덕합일과 덕의 단일성으로 대표되는 소크라테스, 혹은 초기 플라톤의 사상을 가장 잘 집대성한 것 역시 이 프로타고라스이다. 그러다보니 여러 해설 시도가 있어왔고 철학자들 사이에서도 프로타고라스의 해석은 사람마다 갈리기도 한다. 이 대화편을 좀 더 깊이 알아가려면 여러 해설들을 읽어보고 자기만의 생각을 확립해 나가는 편이 좋다.

대화편 속 소크라테스는 유독 경박하고 억지와 궤변을 많이 내뱉는다.[46] 반대로 프로타고라스는 소피스트의 이미지와는 달리 말돌리기나 좋지 않은 토론태도를 보일지언정 상식적으로나 논리적으로나 틀린 주장을 하는 모습은 잘 안보인다. 글 전체를 살펴봤을때 논쟁의 승자는 소크라테스 쪽에 가깝지만 이런 면 때문에 왠지 상식적인 프로타고라스가 소크라테스의 궤변에 휘말려 패배한 듯한 인상도 든다. 프로타고라스라는 캐릭터는 플라톤 대화편에 나오는 소크라테스의 대적자중 가장 논리적이고 역으로 소크라테스에게 한방 먹이기도 한다는 것[47]이 특이점이다. 플라톤이 어째서 이런 식의 대화편을 썼는지를 분석해보는 것도 프로타고라스 독해의 묘미일 것이다.


[1] 생몰년 모두 각각 5년이 이르다는 설이 있다.[2] 에우폴리스는 프로타고라스가 테오스 사람이라고도 했다.[3]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가 《교육에 대하여》에서 말하듯이 그는 최초로 그 위에 짐을 얹어 나르는 이른바 어깻바대를 발견했다. 왜냐하면 에피쿠로스도 어디선가 이야기하듯이 그는 짐꾼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그는 장작들이 묶인 상태를 본 데모크리토스로부터 칭송받았다."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 2》 2021. 나남출판. p.270》)[4] 1므나 = 100드라크마 인데, 1드라크마가 일반 노동자 하루 품삯인 것을 생각해본다면, 100므나는 일반 노동자 10000일(약 27년)치 품삯에 해당한다.[5] 플라톤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이데아'만이 참되다고 했을 뿐이다.[6] 400인회는 기원전 411년에 있었던 아테네의 과두정부를 말한다.[7]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퓌토도로스가 아니라) 에우아틀로스라고 말했다.[8] 두 사람이 동일한 것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 재미있는 김씨의 a영화와 재미없는 이씨의 a영화가 다 각기 존재하는데 서로 그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혹은 영화는 그냥 영화고 재미 있고 없고는 따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혹은 영화 a가 동시에 재미 있을 수도 있으면서도, 재미가 없을 수도 있다고 얘기하는 것이 틀린 게 아닐 수도 있다. 혹은 소피스트적으로 한 사람은 맞는 얘기를 하고 있고 한 사람은 틀린 얘기를 하고 있다 할지라도 틀린 얘기는 어차피 아무 의미도 없으므로 모순이 아니라고 얘기할 수도 있다.[9] logos. 그리스어. 영어의 logic의 기원.[10] 그런데 플라톤은 그러면 이로운 로고스와 해로운 로고스 사이에서는 참과 거짓이 있다는 얘기가 아니냐고 반박한다. 또, 다 맞는 말이면 다른 사람들이 프로타고라스의 주장이 틀리다고 한다면 그건 어떻게 되는 거냐고 반박한다. 또, 모든 판단이 참이라는 논리는, 만약 어떤 사람이 모든 판단이 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모든 판단이 참이라는 논리에 따라 참이면서도 그 내용이 모든 판단은 참이 아니라는 것이니 모순에 빠진다고 반박했다. 플라톤은 그 답이 궁금하니 프로타고라스가 되살아났으면 한다고 얘기한다.[11] 그와 같이 대표적인 소피스트로 꼽히는 고르기아스는 이와 반대로 자신은 지혜를 가르치지 않고 수사학 기술을 가르칠 뿐이라 주장했다.[12] 아직 첫 승소를 달성한 것이 아니므로[13] 제자가 이겼으니, 제자가 첫 승소를 달성한 것이 된다.[14] 기판력을 키워드로 하는 박현석 (2013). 프로타고라스 대 에우아틀로스 사건: 論理的 逆說의 法的 解決. 홍익법학, 14(2), 247 - 272.에서는 다음과 같은 소송의 결과를 추론한다. 첫 번째 소송에서는 조건이 성취되지 않았으니 에우아틀로스 승소, 확정 판결 이후 조건이 실현된 다음 프로타고라스가 두 번째 소송을 걸면 프로타고라스 승소. 이후 에우아틀로스는 다시 수강료에 관한 소송을 할 만한 사유가 없다.[15] 고대 그리스에서 어린 남성을 사랑하며 지혜를 전달하는 소년애는 보편적이었고 알키비아데스는 실제 소크라테스의 소년애 상대였다. 향연 등 다른 대화편에서 관련 묘사도 많이 나온다.[16] 소피스트의 이미지는 당대에도 좋지 않았다.[17] 지혜를 가르치는 것이라 답하자 건축가도 건축에 관한 지혜를 가르칠 수 있다며 이는 전문 기술자들도 마찬가지라는 반론이 온다. 이에 말하는 것에 관한 지혜를 가르친다고 하자 건축가나 화가도 건물이나 그림에 관해서 말하는 법을 가르칠 수 있다고 반박한다. 이러한 논변은 다른 대화편 고르기아스에도 등장한다.[18] 이 장면을 묘사하며 마치 저승(하데스)에 들어가는 그리스 희극처럼 칼리아스의 집을 저승인 마냥 묘사한다. 프로타고라스는 그리스 희극적인 분위기를 채용해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19] 다른 지혜를 가진 이들은 시기나 박해를 우려해 시나 종교, 음악 등으로 자기 지혜를 숨겼다고 말한다.[20] 실제 프로타고라스의 행적과 일치한다. 반대로 고르기아스는 자기가 소피스트임을 부정하며 수사학을 가르칠 뿐이라 주장한다.[21] 플라톤 대화편에서 여러번 반복되는 아테네 직접민주주의 비판이다.[22] 대답 전에 형식에 관해 양해를 구한다.[23] 이 연설을 '위대한 연설'이라고 부르고 당대 그리스에서 나온 최고의 아테네 민주주의 옹호 논리로 꼽는다. 실제 프로타고라스의 논리가 아닌 플라톤의 창작으로 추정되며 민주주의에 회의적이었던 플라톤이 최고의 민주주의 수호 논리를 만들어 낸 것이 역설적이다.[24] 모두가 이러한 덕을 지니고 있지 않다면 인간 사회 유지가 되지 않기 때문에 프로메테우스가 각자에게 다른 기술을 나눠준 것과 달리 제우스가 모두에게 나눠줬다 주장한다.[25] 실제 프로타고라스의 인간척도설 (세상에 절대적인 기준은 없고 선악과 흑백 등은 사람이 생각하기 나름이다.) 사상이 어느정도 드러난 부분이다.[26] 논점이탈의 오류로 보아야 할 지 뒤이었을 소크라테스의 논리(부정의한 것이 좋은 것, 즉 사람들에게 이득이 되는 것일 수 있느냐)를 미리 예측하고 반박하기 위함인지는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27] 짧게 문답식으로 말해달라는 요청을 거부하고 계속 연설조로 말하는 데에 대한 반발이다. 이는 유도심문 목적이라기보단 소피스트들의 주특기인 말돌리기와 논점 이탈을 막기 위함이지만 대화편 후반부에 소크라테스가 좋음의 상대성 연설보다 길게 말하는 장면도 있다. 여담으로 고르기아스에서 고르기아스는 짧게 말해달라는 요청에 성실히 응하고 논쟁에 패한 뒤엔 신사답게 인정한다. 아니면 참된 선을 추구하는 소크라테스가 프로타고라스의 좋음은 상대적이라는 주장에 불편함을 느꼈거나 아니면 프로타고라스의 주장과 실제 그의 속마음이 다른 것을 대화 뉘앙스에서 눈치채고 이를 혐오했다는 해석도 존재한다.[28] 당대엔 유명하고 교육받은 자들 사이에서 널리 암송되었으나 현재는 이 대화편에 인용된 부분만이 남아있다. 실제로 이 시의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구절을 단어 분별을 통해 모순 없이 해석하는 것이 소피스트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것으로 보인다.[29] 갑자기 시구 해석을 시작하는 게 앞에 있던 논쟁과 유리된 생뚱맞은 비약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소크라테스가 한 '되다'와 '하다'의 차이가 아닌 '좋다'와 '탁월하다'를 변별하는 것으로 모순을 해결한다면 프로타고라스가 앞에서 장황하게 연설하다 소크라테스의 반발을 불러온 좋음의 다양성을 입증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소크라테스가 주장하는 덕의 단일성을 반박할 수 있다는 점에서 미루어 보아 소크라테스가 만일 시구의 모순을 인정한다면 덕의 단일성을 논파하고 논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계산이 깔린 행위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적인 궤변을 프로타고라스보다 더 잘 활용하는 방법으로 이를 비껴나갔고 결국 프로타고라스는 비록 마지막에 소크라테스를 논파해내지만 정작 자신의 주특기인 소피스트술에서 오히려 소크라테스에게 패배해버린다.[30] 애초에 '진실로 좋은 사람이 되기 어렵다'는 구절에도 어렵다는 단어는 등장한다. 번역으로 인해 같아진 것도 아니라 그리스어로도 동일하다.[31] 스파르타인이 사실은 지혜로움으로 인해 우월한데 자신의 지혜를 숨기기 위해 (자신과는 달리 지혜를 숨기는 이들이 많다 했던 초반부 프로타고라스의 발언을 떠올리게 한다.) 지혜가 아닌 군사 훈련으로 우월해진 척 한다는 억지 주장도 곁들인다.[32] 소크라테스의 주장은 그리스어 문법을 보자면 굉장히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이 뒤로도 시구를 해석하면서 이런 억지 주석을 다는 부분이 많다.[33] 이러한 주장을 하는 이유는 프로타고라스의 좋음의 다양성과 상대성 주장을 봉쇄하기 위함인 것으로 보이나 메논, 파이돈, 국가 등 다른 대화편에서 참된 좋음을 추구하는 모습과는 대조된다.[34] 소크라테스는 여기에 자신의 지덕합일 사상을 끼워넣어 쓰러짐을 앎의 상실로 해석한다.[35] 보통은 소크라테스가 반박하는 이 주장이 시모니데스 시의 원래 주제로 생각된다. 아무리 탁월한 이라도 어쩔 방도 없는 재난에 쓰러질 수 있으니 의도적으로 나쁜 이 아니면 함부로 나쁘다 보면 안된다는 것이다.[36] 프로타고라스 속 소크라테스의 시모니데스 해석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의적인 해석과 부정할 수 없는 억지와 궤변으로 점철되어 있다. 보통은 소피스트들의 시구 인용과 궤변을 풍자하며 이러한 행태가 쓸모없음을 그리스 희극적인 분위기로 익살스럽게 표현했다는 해석이 일반적이지만 소크라테스가 소피스트들의 주특기인 언어의 분별과 장황한 궤변 연설을 소피스트 본인들보다도 더 잘한다는 것을 보인 것으로 볼수도 있다.[37] 이온국가의 시인추방론으로 이어지는 플라톤의 시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작내에선 프로타고라스와 소피스트들의 주특기인 시구 인용을 비판하는 역할을 한다.[38] 프로타고라스 안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렵고 중요한 부분으로 꼽힌다.[39] 앎 없이 대담한 이는 용기있는 이가 아니라 정신나간 이에 불과하니 용기있는 이는 곧 지혜롭고 대담한 이 아니냐는 것이다.[40] 갑자기 주제를 트는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지덕합일을 증명하고 이를 통해 용기와 지혜의 동일성을 주장하려는 빌드업의 시작이다.[41] 소크라테스의(혹은 초기 플라톤의) 대표적인 사상으로 불리는 지덕합일을 가장 제대로 설명하는 부분이다.[42] 재밌는 것은 용기를 다룬 다른 대화편 라케스에서 니키아스는 이 대화편 속 소크라테스가 주장하는 용기란 곧 지혜임을 주장하나 소크라테스가 (역시 프로타고라스에서 덕의 단일성을 주장하는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덕의 부분과 덕을 구분하며 이를 반박한다.[43] 정암학당 번역자는 이 시점의 소크라테스가 정의가 아닌 것은 전부 부정의라는 이분법적인 윤리관을 지니고 있었고 이것이 논의가 뒤죽박죽이 된 원인이라고 추측한다. 소크라테스의 이분법적 세계관은 이 대화편 여기저기서 드러나나 억지 시구 해석에서 가장 극명하다. 이러한 추측에 따르면 후대의 대화편인 메논에서 이러한 이분법을 버리며 모순을 해결해내게 된다. 그렇지만 역자 본인도 이는 추측성이 너무 강한 자기 사견이라고 일축하고 이런 해석에 연연하지 말라고 한다.[44] 소크라테스가 나중에 지혜로 이름을 떨칠 거라고 덕담을 해준다.[45] 물론 동료한테 썰 풀면서 노가리 까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볼 일은 논의를 끝내고 떠나겠다고 협박했을 때 든 핑계일 뿐이다.[46] 플라톤이 소크라테스 사후 스승을 이렇게 경박하게 묘사할 리 없다면서 소크라테스 생전에 만들어진 것 아니냐는 주장이 있을정도.[47] 파르메니데스의 파르메니데스는 오히려 본인이 주인공의 가까우니 예외로 치자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