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라틴어: Publius Claudius Pulcher | |
생몰년도 | 미상 ~기원전 248년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크라수스(조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아버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루수스(형)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켄토(남동생)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남동생) 클라우디아(여동생)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아들) |
참전 | 제1차 포에니 전쟁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249년 |
전임 | 가이우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 세라누스 루키우스 만리우스 불소 롱구스 |
동기 | 루키우스 유니우스 풀루스 |
후임 |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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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 드레파나 해전의 참패를 초래한 인물이다.2. 생애
사비니에서 로마로 이주한 이래 기존의 로마 파트리키과 대등한 권세를 누린 명문 귀족 가문인 클라우디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코그노멘인 '풀케르(Pulcher)'는 '아름다운', '잘생긴'이라는 의미가 담긴 별명으로, 그는 풀케르를 코그노멘으로 삼은 최초의 인물이었다.조부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크라수스는 기원전 337년 독재관을 역임했고, 아버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는 기원전 312~307년 감찰관을 역임하면서 아피아 가도를 건설하고 로마의 정치 및 행정 체계를 대대적으로 개혁했으며, 기원전 307년과 기원전 296년에 집정관을 역임하고 기원전 285년 독재관을 역임했다. 말년에 시력을 상실한 상황에서도 영향력은 여전했다. 피로스 전쟁에서 로마가 연전연패하면서 의원들이 피로스 1세와 평화 협약을 맺을 지를 놓고 논의하고 있을 때, 아들들의 부축을 받아 원로원에 출석해 동료, 후배 원로원 의원들에게 로마는 절대 항복하면 안 된다며 호통을 친 뒤 이렇게 외쳤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짓는 존재다."
의원들은 이에 감동해 피로스와 평화 협약을 맺는 대신 전쟁을 이어가기로 했고, 피로스 1세는 결국 패배해 에페이로스 왕국으로 물러났다.
그는 이렇듯 대정치가였던 아피우스의 둘째 아들이었다.[1] 형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루수스는 기원전 268년 집정관에 선임된 뒤 피케니족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개선식을 거행하고 리미니와 베네벤토 시를 건설했으나 집정관 임기 중에 급사했다. 남동생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켄토는 기원전 240년 집정관, 기원전 225년 감찰관을 역임했으며, 기원전 213년 한니발 바르카와 맞서 싸우느라 로마에 머물 틈이 없는 집정관들을 대신해 고위 행정관 선거를 주최할 독재관에 선임되었다. 또다른 남동생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는 이름만 알려졌다. 카이쿠스에게는 5명의 딸이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그의 여동생 클라우디아만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아피아 가도 주변에서 발견된 비문에 따르면, 그는 조영관을 역임했다고 한다. 캐나다의 고대 역사가 토마스 로버트 섀넌(Thomas Robert Shannon)은 그가 기원전 253년에 조영관을 역임했을 거라고 추정했다. 기원전 249년, 그는 루키우스 유니우스 풀루스와 함께 집정관에 오른 뒤 지난해부터 시작된 릴리바이움 공방전의 임페리움을 받았다. 그는 전년도 집정관들이 강력한 방어력을 갖춘 릴리바이움을 상대로 우직하게 공격하기만 하다가 막대한 피해만 볼 뿐 아무런 대책을 마련하지 않았다고 비판하면서, 자신은 릴리바이움을 공략할 비장의 계책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릴리바이움을 정공법으로 공략하긴 어렵다고 보고, 항구 도시인 드레파나에 기반을 둔 카르타고 해군을 섬멸한 뒤 릴리바이움의 해상을 봉쇄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드레파나를 기습 공격하기 위해 자정에 123척의 함대를 이끌고 드레파나 항구로 출진했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수에토니우스 등 로마 역사가들의 저서에 따르면, 풀케르는 전투가 벌어지기 전 전투의 향방을 알아보기 위해 닭들이 모이를 쪼아먹는 의식을 진행했다. 그런데 닭들이 좀처럼 모이를 쪼아먹지 않아 병사들이 불안해 하자, "먹기 싫으면 물이나 마셔라!"라고 외치며 바다에 던져버렸다고 한다. 일부 학자들은 포에니 전쟁에 관한 주요 사료인 폴리비오스의 <역사>에는 이와 관련된 기록이 없는 점이 의심된다며 후대의 로마 역사가들이 패배의 책임을 신들에게 불경을 저지른 풀케르에게 전적으로 물기 위해 이 일화를 지어냈을 거라고 추정하지만, 다수의 학자들은 웬만한 패장에게 만회할 기회를 주는 로마 정부가 그만은 법정에 소환해 책임을 물은 것을 볼 때 실제로 이런 행위를 저지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풀케르의 선두 함대는 해가 뜨기 직전의 새벽에 드레파나 항구 앞바다에 도착했다. 그러나 사전에 척후선을 통해 적선이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간파한 아드헤르발은 100척 내지 130척으로 구성된 전 함대에 항구를 떠나 바다로 항해하라고 명령했다. 당시 중앙 대열에 있던 풀케르는 적의 움직임을 뒤늦게 확인하고 전 함대에 항해를 중단하고 전투를 준비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로마 함대는 야밤에 이동하느라 대열이 흐트러졌고 항해술이 여전히 미숙했기 때문에 어떤 함선은 앞서가려 하고 어떤 함선은 멈추려고 하다가 서로 뒤엉키고 심지어 충돌하기까지 하는 등 혼란에 휩싸였다.
아드헤르발은 혼란에 빠진 적 선봉 함대를 그대로 지나쳐서 서쪽으로 계속 이동했다가 드레파나 시와 2개의 작은 섬 사이를 통과해 넓은 바다에 도착한 후 로마군이 해안을 따라 항해하던 남쪽으로 신속하게 이동해 로마 함대와 평행한 전선을 형성했다. 그 후 일부 함대를 적의 후방으로 이동시켜서 도주로를 차단한 뒤 총공격을 감행했다. 로마 함대는 순식간에 측면과 후방을 공격당했고, 많은 선박이 공격을 받아 침몰하거나 좌초했고, 일부 선원과 군인들은 공포에 질려 바다로 몸을 던졌다. 풀케르는 패배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30척만 챙겨 겨우 빠져나갔고, 나머지 전선들(93척)은 침몰하거나 나포당했다.
참패 소식을 전해들은 원로원은 풀케르를 로마에 소환했다. 당시 동료 집정관 풀루스는 카르타고군에 사로잡혔기에, 원로원은 상황을 수습할 독재관을 지명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풀케르는 자신의 전령이자 해방노예의 아들인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글리키아를 독재관으로 지명했고, 글리키아는 풀케르를 독재관으로 추대한 뒤 기병장관을 맡기로 했다. 그러나 원로원은 이를 무효로 처리했고, 시민들은 "경솔하고 무모하게 처신하여 참패를 초래한 주제에 참으로 뻔뻔하고 옹졸하다"라며 비난을 퍼부었다.
기원전 248년, 호민관 가이우스 푼다니우스 푼둘루스 등의 고발을 받았다. 첫 재판은 장대비가 내리는 바람에 취소되었고, 두번째 재판에서는 다른 호민관이 거부권을 행사해서 무산되었다. 그러나 결국 막대한 벌금이 부과되었고, 그는 그 해에 사망했다. 많은 학자들은 그가 명예가 손상된 것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한 것으로 추정한다. 그 후 풀케르의 여동생 클라우디아는 경기장에 참석했다가 평민들이 워낙 많이 있어서 좀처럼 빠져나가지 못하자 "오빠가 살아있었다면 이 쓸모없는 평민들을 다시 한 번 물속에 쳐넣었을 것을!"이라고 외쳤다가 고발당하여 거액의 벌금을 물어야 했다.
그의 아들인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는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맹활약해 아버지의 불명예를 씻어냈다. 그는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의 군대에 가담하여 기원전 213년부터 벌어진 시라쿠사 공방전에 참여했다. 뒤이어 기원전 212년 집정관을 맡아 로마와 동맹을 끊고 한니발 바르카와 연합한 카푸아를 응징하기 위한 원정을 이끌었다. 그는 동료 집정관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와 함께 2년간 카푸아 공방전을 치른 끝에 마침내 카푸아를 정복했으나, 그 과정에서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사망했다. 이후 그의 후손들은 대대로 로마 정계에서 활약하면서 클라우디우스 씨족 중 최강의 권세를 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