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5 22:50:26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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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로마 집정관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Lvcivs Jvnivs Brvtvs
파일:1280px-Capitoline_Brutus_Musei_Capitolini.jpg
출생 기원전 545년
로마 왕국 로마
사망 기원전 509년 (향년 35~36세)
로마 공화국 로마 실바 아르시아 숲
재임기간 고대 로마 집정관
기원전 5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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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a00201><colcolor=#fbe673> 부모 父: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母: 타르퀴니아
배우자 비텔리아
자녀 2명
종교 로마 다신교 }}}}}}}}}

1. 개요2. 생애3. 평가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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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로마집정관.

2. 생애

리비우스에 따르면, 브루투스는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와 타르퀴니아의 아들로, 세르비우스 툴리우스의 딸이자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의 아내인 툴리아가 타르퀴니아의 자매라고 한다. 또한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라는 형제가 있었으며, 비탈리아와 결혼해 두 아들 티투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와 티베리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를 낳았다고 한다.

어느 날 타르퀴니우스의 궁전 기둥 하나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뱀이 나타났다. 타르퀴니우스는 중대한 의미가 있을 거라 짐작하고 델포이 신탁을 받기 위해 사절을 보냈다. 이 사절단에는 그와 타르퀴니우스의 두 아들 티투스와 아룬스도 있었다. 왕의 아들들은 신전에 공식적인 질문을 한 후 두 사람 중 누가 아버지를 계승할 수 있는지를 알고 싶어했다. 이에 무녀는 "어머니에게 먼저 키스하는 사람이 다음 통치자가 될 것이다"라고 답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브루투스는 의심 많은 성격인 왕이 자신을 경계할까 두려워서 그때까지 덜 떨어진 척 했다. 하지만 두 왕자가 어머니에게 먼저 키스할 권리를 놓고 논쟁을 벌이는 사이, 그는 신탁에서 가리키는 어머니가 대지의 신 가이아라는 걸 눈치채고 일부러 걸려 넘어진 척하며 땅에 키스했다고 한다.

전승에 따르면, 타르퀴니우스 왕은 부유한 도시 루툴레아를 차지하기 위해 그 도시의 주인인 아르데아인에게 전쟁을 선포했다. 이후 공방전을 벌이는 동안, 왕의 막내아들 섹스투스콜라티누스는 진영 내에서 잡담을 나누었다. 그러던 중 서로 각자의 아내가 낫다고 주장한 끝에, 휴가를 받아내서 로마로 돌아간 뒤 서로에게 아내의 진면모를 보이기로 했다. 두 사람은 곧 왕의 허락을 받아 로마로 돌아간 뒤 상대방의 아내를 면담했다. 이때 콜라티누스의 아내 루크레티아의 빼어난 용모를 목도한 섹스투스는 흑심을 품었다. 며칠 후, 섹스투스는 야밤을 틈타 루크레티아의 집에 침입했다. 그는 자신과 하룻밤을 지내라고 요구했으나 루크레티아는 절개를 지켜야한다며 거절했다. 이에 섹스투스는 "너를 강간한 뒤 남자 노예를 데려와서 둘 다 죽인 뒤 네가 노예와 놀아나다 죽었다고 하겠다."라고 협박했다. 루크레티아는 결국 협박에 못 이겨 섹스투스와 성관계를 맺었다.

파일:루크레티아의 죽음.webp
에두아르도 로살레스 작, 《루크레티아의 죽음》[1]

섹스투스가 도망친 후, 루크레티아는 아버지 스푸리우스 루크레티우스 트리키피티누스와 남편에게 당장 집에 와달라는 전갈을 보냈다. 두 사람이 브루투스와 함께 오자, 루크레티아는 그들에게 섹스투스가 자신을 강간했음을 알린 뒤 정절을 지키지 못한 책임을 지고 자결하겠으니 복수하겠다고 맹세하라고 청한 후 은장도로 가슴을 찔러 자살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스푸리우스와 콜라티누스가 슬픔에 못 이겨 울부짖고 있을 때, 브루투스가 은장도를 루크레티아의 가슴에서 뽑은 뒤 들어올리며 맹세했다고 한다.
"가증한 왕의 아들로부터 받은 모욕 전에는 순결했던 여인의 이 피를 보시오! 나는 내 힘이 닿는 모든 수단을 다해 오만한 타르퀴니우스와 그의 범죄한 아내,[2] 그리고 그의 모든 종족을 징벌할 것이며, 어떤 왕도 로마에서 다시는 군림하지 못하게 할 것이오!"

브루투스는 로마에서 무장 봉기를 일으켜 도시를 순식간에 장악한 뒤 민회를 소집해 왕권 폐지와 왕가 추방을 결의하게 했다. 그 후 루툴레아를 포위 공격하고 있던 군대 막사로 떠났다. 한편, 타르퀴니우스는 반란 소식을 전해듣자 소수의 추종자를 거느린 채 로마로 돌아갔다. 그러나 시민들은 성문을 걸어잠그고 입성을 거부했다. 이에 군대로 돌아가려 했으나, 브루투스가 이미 군영에 도착한 뒤 모든 병사들을 포섭해놓았다는 걸 알게 되자 어쩔 수 없이 에트루리아의 도시인 가비이로 피신했다. 그 후 로마인들은 1년간 통치를 맡을 2명의 집정관으로 브루투스와 콜라티누스를 선출했다.

파일:아들들의 처형을 명령하는 브루투스.gif

폐위된 타르퀴니우스는 왕위를 되찾기 위해 로마 내부의 동조자들을 은밀히 포섭했다. 그들은 타르퀴니우스가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군할 때 내부에서 호응하기로 했다. 그러나 한 노예가 이들이 밀담을 나누는 광경을 목격하고 정부에 이 사실을 고발했다. 그리하여 동조자들이 대거 체포되었는데, 그 중에는 뜻밖에도 브루투스의 두 아들 티투스와 티베리우스도 있었다. 브루투스는 즉시 동료 집정관 콜라티누스와 함께 적발된 음모자들을 마르스 광장에 세우고 심문했다. 옆에 있던 콜라티누스가 가족의 연이은 비극에 감정이 격해진 나머지 흐느꼈고, 많은 사람들이 두 아들 만은 용서하라고 청했지만, 브루투스는 단호히 음모자 전원을 처형하고 재산을 몰수하라고 명령했다. 릭토르들은 그들을 장대에 묶고 채찍질한 후 목을 베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그는 두 아들이 처형되는 동안 움찔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이후 음모를 고발한 노예에게 시민권과 금전을 줬다.

얼마 후, 동료 집정관 콜라티누스가 타르퀴니우스 왕과 가까운 인척이며 음모자들을 처형하는 과정에서 눈물을 흘린 일로 인해 민중의 의심을 사자 견디지 못하고 다른 도시로 떠나버렸다. 이에 원로원은 새 집정관으로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포플리콜라를 선출했다. 그 후 타르퀴니우스 왕이 에트루리아인들의 지원을 받고 로마로 쳐들어왔고, 두 집정관은 이에 맞서고자 진군했다.

양자는 로마 인근 실바 아르시나 숲에서 맞붙었다. 이때 타르퀴니우스의 아들 아룬스가 기병을 이끌고 있는 브루투스에게 결투를 신청하자, 브루투스가 응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달려들어 격투를 벌이다가 동시에 서로의 가슴에 창을 찔려 죽었다. 이후 벌어진 전투는 밤새 이어진 끝에 에트루리아군이 끔찍한 살육에 지쳐 달아나면서 로마군의 승리로 끝났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브루투스의 장례식은 로마에서 국장으로 치러졌으며, 로마의 모든 여인은 루크레티아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사력을 다한 그에게 고마움을 느껴 그가 자신들의 아버지였던 것처럼 애도했다고 한다.

3. 평가

브루투스는 왕정을 타도하고 공화정을 이룩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인물로서 후대 로마인들에게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았다.

4. 여담

  • 할리카르나소스의 디오니시오스에 따르면, 브루투스는 두 아들 티투스와 티베리우스 외에 다른 후손이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기원전 4세기경 삼니움 전쟁에서 활약하면서 역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평민 귀족 가문인 유니우스 씨족은 브루투스가 자신들의 선조라고 내세웠다.
  • 기원전 54년 《공화국》을 출간한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로마 공화국 건국 이야기를 다루면서 그의 정신을 받들어 왕정을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기원전 46년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에게 《브루투스 또는 유명한 연설가에 대한 대화》를 헌정했다. 그는 이 저서에서 마르쿠스가 수백년 전의 브루투스의 정신을 이어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등 카이사르를 타도하기로 마음먹은 음모자들 역시 마르쿠스에게 브루투스의 이름을 부끄럽게 해서는 안 된다고 독촉했다. 마르쿠스는 결국 이들의 뜻에 따라 독재관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타도하는 데 앞장서기로 마음먹고, 기원전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 암살을 주동했다.

[1] 중앙에 쓰러진 여인이 루크레티아, 맨 오른쪽에 칼을 들고 서 있는 남자가 브루투스.[2] 타르퀴니우스의 아내 툴리아는 남편이 아버지의 왕위를 찬탈하도록 부추겼으며, 아버지가 길바닥에 내팽개쳐졌을 때 마차를 타고 그 위를 질주해 짓밟히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