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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공화국 로마 | |
{{{#fecd21 사망}}} | 기원전 54년 |
로마 공화국 로마 | |
{{{#fecd21 지위}}} | 노빌레스 |
{{{#fecd21 국가}}} | 로마 공화국 |
{{{#fecd21 가족}}} |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아버지) 루틸리아(어머니) 푸블리우스 루틸리우스 루푸스(외삼촌)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사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코타(사촌)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사촌)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남편)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아들) 대 율리아(딸) 소 율리아(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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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의 귀부인. 독재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어머니다.2. 행적
노빌레스[1]인 아우렐리우스 가문 출신이다.아우렐리우스 씨족 가문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노멘의 그 아우렐리우스 집안이다.[2] 이 가문은 로마의 오래된 플레브스 씨족으로, 사비니계이며, 공화정 초기 이후 등장한 대표적인 노빌레스 가문이다. 뜻은 황금(金)을 뜻한 아우레우스(AVREVS)를 어원으로 한 변형 형태로, 머리색이 황금처럼 빛이 난 것에서 의미했다는 주장이 있으나, 사비니계 가문이고 집안 성씨 역시 사비니어 중 태양 빛에 비춘 황금 상자에서 기원함이 확실해 황금 궤짝 혹은 태양빛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아우렐리아 코타는 기원전 119년 집정관을 역임한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와 루틸리아의 딸로 출생했다. 어머니의 남자 형제는 기원전 105년 집정관을 지낸 청렴하고 공정한 로마인 푸블리우스 루틸리우스 루푸스이다. 따라서 아우렐리아 코타는 외삼촌 푸블리우스 루틸리우스 루푸스의 아내인 외숙모 리비아를 통해 마메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리비아누스, 소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형제와도 멀게나마 연이 있는 사이였다. 그녀의 사촌인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코타,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 역시 각각 기원전 75년, 기원전 74년, 기원전 65년에 집정관을 역임했다.
그녀는 알려지지 않은 시기에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결혼하여 적어도 세 자식을 낳았다. 아들은 그 유명한 율리우스 카이사르이고, 두 딸의 이름 모두 율리아인데 후대 역사가들이 구별을 위해 '대 율리아', '소 율리아'라는 이름을 붙였다. 대 율리아는 피나리우스와 페디우스라는 남자들과 잇따라 결혼했으며,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유언장에서 상속인으로 지명된 루키우스 피나리우스 스카르푸스[3]와 퀸투스 페디우스의 어머니였다. 또한 소 율리아는 법무관 마르쿠스 아티우스 발부스와 결혼해 옥타비아누스와 소 옥타비아의 어머니인 아티아, 기원전 56년 집정관을 역임한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4]의 아들인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와 결혼하여 마르키아라는 딸을 낳은 성명 미상의 여인, 그리고 기원전 10년 집정관을 역임한 가이우스 유니우스 실라누스의 어머니인 아티아의 아버지로 전해지는 마르쿠스 아티우스 발부스를 낳았다.
남편은 매부인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지원에 힘입어 기원전 92년 법무관을 역임한 데 이어 기원전 91년부터 수년간 아시아 총독을 지내는 등 정치 경력을 순조롭게 이어갔고 마리우스에 이어 민중파를 이끌었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를 추종했다. 이후 에퀴테스 신분의 부유한 집안 출신인 코수티아를 아들과 약혼시켰지만, 기원전 85년경 샌들을 신던 중 갑작스럽게 사망해버렸다. 이후 카이사르의 유산을 물려받았고 아들을 코르넬리우스 킨나의 딸인 코르넬리아 킨나와 결혼시켰지만, 술라의 내전에서 민중파를 꺾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유산을 몰수해버렸다. 여기에 아들 카이사르는 코르넬리아와 이혼하라는 술라의 권고를 거부했다가 보복을 피해 망명해야 했다.
아우렐리아는 아들을 구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녀는 베스타 신전의 여사제들과 자신의 친척들, 특히 사촌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와 마메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리비아누스를 설득해 술라에게 카이사르를 구명해줄 것을 탄원하게 했다. 코타와 레피두스는 내전 당시 술라의 편에 섰고 집정관을 역임한 인물들이었으며, 베스타 여사제들은 로마인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이들이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던 술라였지만 이들의 압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 결국 술라는 카이사르를 숙청 명단에서 제외시키고 공직을 계속할 수 있게 해줬다. 일설에 따르면, 술라는 카이사르를 옹호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대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겠네. 하지만 그대들은 알아야 할 걸세. 자네들이 그렇게도 구하려고 한 그 젊은이가 언젠가는 나와 자네들 모두가 지켜온 옵티마테스를 파괴하고 말 거라는 사실을. 카이사르 안에는 마리우스가 여럿 들어 있다네."
타키투스에 따르면, 아우렐리아는 그라쿠스 형제의 어머니 코르넬리아, 옥타비아누스의 어머니 아티아와 함께 "어떤 악도 왜곡시킬 수 없는 순수하고 유덕한 본성"을 지니고 자녀를 훌륭히 길려낸 대표적인 여인으로서 세간의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플루타르코스 역시 그녀를 엄격하면서도 상식적이며, 매우 현명하고 독립적이며 존경할 만한 여성으로 묘사했다. 그녀는 남편이 부재한 동안 가정을 훌륭히 이끌었고, 로마 최고의 웅변가 중 한 명이었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그리포를 카이사르의 가정교사로 삼았다. 남편이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아들은 망명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할 때도 절망하지 않고 가족을 계속 돌봤다. 카이사르의 아내 코르넬리아가 출산 중 사망한 후, 아우렐리아는 어린 손녀 율리아를 카이사르 대신 키웠다.
기원전 63년, 카이사르는 로마의 최고 사제직인 폰티펙스 막시무스 선거에 출마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그는 어머니에게 작별 키스를 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어머니, 저는 폰티펙스 막시무스가 되지 못한다면 영원히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카이사르가 당시 아내로 삼은 폼페이아 술라를 제치고 어머니에게 이런 말을 한 것을 볼 때, 그녀가 카이사르의 인생에 미친 영향이 적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카이사르에게는 다행히도, 두 후보들이 표를 나눠먹는 통에 당선될 수 있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카이사르의 두번째 부인 폼페이아 술라는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와 밀통하고 있었지만, 아우렐리아가 폼페이아를 예의주시했기 때문에 쉽사리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던 기원전 62년 12월 4일에서 5일 사이의 밤, 폰티펙스 막시무스 직책을 역임하고 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집에서 보나 데아(Bona Dea: 출산의 여신) 여신을 기리는 행사가 열렸다. 남자는 이 행사에 절대로 참여할 수 없었고, 오로지 여자만 참석할 수 있었다.
그런데 클로디우스는 행사 준비가 진행될 때 여자로 변장한 채 카이사르의 집에 몰래 들어갔다. 카이사르의 둘째 아내 폼페이아와 밀회하려고 그랬다고 한다. 그러나 하녀 하나가 그의 존재를 눈치채고 비명을 질렀고, 다른 여인들이 곧바로 그 쪽으로 달려들었다. 이때 일이 커질 걸 우려한 아우렐리아가 여인들을 진정시킨 뒤 클로디우스를 쫓아냈다. 카이사르는 클라우디우스 가문과 마찰을 벌이고 싶지 않았기에 사건을 덮으려 했지만, 소문이 점차 퍼지면서 사건이 세간에 알려졌다. 이로 인해 열린 재판에서, 아우렐리아는 증인으로 출석해 자신은 클로디우스를 만난 적이 없다고 진술했다. 이후 카이사르는 폼페이아와 이혼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카이사르는 브리타니아 원정을 치르고 있었을 때 "처음에는 어머니를 잃고 다음에는 딸을 잃었으며, 그 다음에는 손자를 잃었다"고 한다. 카이사르의 딸 율리아가 출산 도중에 태아와 함께 죽은 시기는 기원전 54년이었으니, 아우렐리아 역시 그 즈음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 평민 출신으로 파트리키와 동등한 위상을 갖춘 집안[2]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본래 혈통적 가문(본가)은 이탈리아의 오래된 평민 가문으로 노빌레스에 속한 안니우스 가문 출신으로, 그 가계는 히스파니아로 이주했다가 증조부 시절에 이탈리아로 재정착한 1세기 로마 귀족 집안 출신이다. 즉, 본래 안니우스 가문 사람으로 아우렐리우스 가문 출신이 아니다. 그럼에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이 성씨를 갖게 된 것은 고모부이자 장인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양자로 입양되면서,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본가인 아우렐리우스 성씨를 쓰게 되어 얻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는 갈리아 혈통 로마인으로, 그 조상은 아우렐리우스 가문 남성에게 노멘을 하사받은 갈리아 부족장이 중시조인 아우렐리우스 풀부스 가문 사람이다. (외가는 에트루리아계 로마 노빌레스 가문인 안토니누스 가문으로 출신 가문은 '아우렐리우스 풀부스 안토니누스 가문'이었다.) 따라서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 성씨가 아우렐리우스 가문이라고 하더라도, 그 역시 클리엔텔라에 따라 아우렐리우스 성씨를 쓴 아우렐리우스 가문 사람일 뿐 혈연상으로는 아우렐리아 코타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3] 카이사르의 조카로, 외삼촌 카이사르를 따르다가 카이사르 암살 이후 외삼촌 복수를 위해 가장 적합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지지한 원로원 의원이다. 이부동생 퀸투스 페디우스와 함께 외삼촌 카이사르에게 상속받은 카이사르 재산의 4분의 1을 모두 포기해 카이사르의 양자 옥타비아누스에게 물려주고, 옥타비아누스가 카이사르의 아들로 정통성을 확보하는데 힘을 줬다. 안토니우스 지지자였지만, 옥타비아누스에게도 호의적이었다. 따라서 안토니우스가 아내 소 옥타비아에게 일방적으로 이혼을 통보할 때 본인의 딸 뻘 조카를 버린 일에 분노해 사실상 지지를 철회했고,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패배한 안토니우스가 군대를 보내달라고 사절을 보내자 그 자리에서 죽이면서, 공식적으로 외삼촌의 양자 옥타비아누스(후일의 아우구스투스) 지지를 선언했다. 이후 그는 옥타비아누스의 요청으로 옥타비아누스 군에 합류해, 옥타비아누스를 도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이집트를 멸망시켰다. 안토니우스를 지지할 때부터 소 옥타비아, 옥타비아누스 남매의 어머니 아티아와 친척이고 이들 남매를 아껴 살아생전 유언장을 통해, 외삼촌의 양자로 혈연상 친척인 옥타비아누스에게 상속자 자격으로 재산을 물려줬다.[4] 아티아와 재혼하고 옥타비아누스와 소 옥타비아를 보살펴준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