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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실리 부족 6대 군주 통합 누미디아 왕국 초대 군주 ⵎⴰⵙⵏⵙⵏ | 마시니사 | ||
제호 | 한국어 | 마시니사 |
베르베르어 | ⵎⴰⵙⵏⵙⵏ | |
라틴어 | Masinissa | |
가족 | 젤라센(조부) 가이아(아버지) 오잘케스(삼촌) 마시바(누이) 페리엘(누이) 소포니스바(아내) 미킵사(장남) 굴루사(차남) 마스타나발(삼남) | |
생몰 년도 | 기원전 240년 즈음 ~ 기원전 148년 | |
재위 기간 | 마실리 부족의 군주 | |
기원전 206년~기원전 202년 | ||
통합 누미디아 왕국의 군주 | ||
기원전 202년~기원전 14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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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누미디아의 국왕. 제2차 포에니 전쟁 전반기에는 왕자의 신분으로서 카르타고군에 가담하여 로마군과 맞섰다가 후반기에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로마군에 가담하여 카르타고군과 대적했으며, 국왕으로 즉위 후에는 통합 누미디아 왕국을 이끌었다.2. 일생
2.1. 누미디아의 왕자
마시니사는 기원전 240년 전후로 마실리 부족의 왕인 가이아의 아들로 태어났다. 누미디아는 카르타고 서부 지역에 위치한 국가로, 크게 서부의 마사에실리 부족과 동부의 마실리 부족으로 나뉘어 있었다. 카르타고는 건국 이래 지중해의 해상 무역을 장악해 막대한 부를 벌어들이고 이를 통해 강력한 용병대를 구축해 주변의 부족들을 통제했다. 누미디아 부족들은 그들에게 신속하고 숙련된 기병을 제공했는데, 특히 마시니사가 태어난 마실리 부족은 카르타고와 우호 조약을 맺고, 그들의 협력을 받으며 현재의 튀니지 해안에 거주하던 강력한 라이벌인 마사에실리 부족과 경쟁했다.이집트 출신의 로마제국 시대 역사가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마시니사는 카르타고에서 자라며 그리스와 페니키아의 고급 교육을 전수받았다고 한다. 또한 그는 사막에서의 승마와 생존과 같은 유목민족의 전통적인 기술을 익혔다. 기원전 1세기의 그리스 역사가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마시니사는 이 시기에 카르타고의 유명 인사인 하스드루발 기스코의 딸 소포니스바와 약혼했다고 한다.
2.2. 카르타고군의 기병 지휘관
제2차 포에니 전쟁이 발발한 후, 마사에실리 부족의 왕 시팍스는 카르타고를 배신하고 로마와 손을 잡았다. 이에 마시니사는 아버지 가이아에게 카르타고군에 종군하게 해달라고 간청해 허락을 받아낸 뒤 누미디아 기병을 이끌고 참전했다. 이후 마시니사는 기원전 215년에서 212년 사이에 카르타고군과 마사에실리 부족군이 맞붙은 회전에서 탁월한 기마술을 발휘해 적을 격파했다. 마시니사는 시팍스를 멀리 쫓아낸 뒤 한니발 바르카의 동생인 하스드루발과 함께 3천 명의 누미디아 기병을 이끌고 스페인으로 건너갔다.기원전 211년, 마시니사는 베티스 고지의 전투에서 결정적인 순간에 로마군을 급습해 측면과 후방을 공격해 카르타고군이 완승을 거두는 데 일조했다. 이 전투에서 로마군은 괴멸되어 불과 8천 명 만이 가까스로 빠져나왔고,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와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칼부스 형제는 전사했다. 이후 기원전 210년, 푸블리우스 스키피오의 아들인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가 스페인에 도착하여 로마군을 지휘했다. 스키피오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카르타고군을 상대로 연전연승해 카르타고의 에스파냐에 대한 영향력을 빠른 시일 내에 소멸시켰다. 마시니사는 그에 맞서 유격전을 벌였지만 전세를 뒤집지 못했다.[1]
기원전 206년, 마시니사는 마고와 하스드루발 기스코의 카르타고군과 연합해 총 7만 이상의 대군을 결성하여 스키피오가 이끄는 로마군 4만 8천 명을 상대로 일리파에서 격돌했다.(일리파 전투) 그러나 카르타고군은 스키피오의 탁월한 전술에 휘말려 전멸에 가까운 참패를 당했고, 이로 인해 스페인의 카르타고 세력은 사실상 괴멸되었다. 마시니사는 전세가 완전히 기울었다고 판단하고 스키피오와 협상해 앞으로는 로마에 맞서지 않을 것이며 부족 지도자들과 협의해 카르타고와의 동맹을 끊겠다고 약속했다.
2.3. 스키피오와 손을 잡다
스키피오는 스페인을 장악한 뒤 카르타고의 본거지인 북아프리카를 직접 공격하자고 주장했지만, 로마 원로원은 한니발을 이탈리아에서 몰아내는 게 우선이라며 그의 전략에 반대했다. 이리하여 스키피오의 아프리카 공격 작전이 차일피일 미뤄지는 가운데, 마시니사는 기원전 206년 마실리 부족으로 돌아왔다. 마침 아버지 가이아가 기원전 207년 사망한 뒤 삼촌 오잘케스가 뒤를 이었지만 1년만에 사망하고 오잘케스의 아들 카푸사가 왕위에 올라 있었다. 그는 자신이 군주가 되기 위해 카푸사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마시니사는 가이아의 충직한 옛 부하들로부터 지지를 받아 카푸사를 물리쳤고, 카푸사의 동생 라쿠마제스마저 몰아낸 뒤 군주에 등극했지만, 곧 카르타고와 손을 잡은 시팍스의 역습에 직면했다.이 무렵 그의 약혼녀였던 소포니스바가 시팍스에게 넘어갔다. 그녀가 어떻게 넘어갔는지에 대해선 여러 설이 제기된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카르타고 원로원은 마시니사와 소포니스바의 약혼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소포니스바에게 시팍스와 결혼하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반면 카시우스 디오에 따르면, 시팍스는 처음부터 소포니스바를 사랑했고 마시니사에게 그녀를 넘겨주지 않는다면 계속 공격하겠다고 협박해 마시니사가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넘겨줬다고 한다. 시팍스는 본래 로마와 손을 잡고 카르타고에 대항했지만, 소포니스바와 결혼한 후에는 카르타고 편으로 돌아섰다. 결국 마시니사는 아내와 부하, 그리고 영토를 모두 잃고 몇몇 부하들만 대동한 채 사막에 숨어지냈다.
그러던 기원전 204년, 마시니사는 아프리카에 상륙한 스키피오의 로마군과 합세했다. 이후 그는 스키피오의 지휘를 받으며 우티카 전투와 바그라다스 전투에서 시팍스와 하스드루발 기스코가 이끄는 카르타고-누미디아 대군을 연거푸 격파하고 누미디아의 수도 키르타를 점령한 후 시팍스를 생포했다. 마시니사는 키르타에 입성한 뒤 누미디아의 군주로 재등극한 것은 물론이고 자신의 약혼녀였던 소포니스바와 재회했다. 소포니스바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마시니사는 그날로 소포니스바와 결혼했다.
소포니스바의 죽음. Giambattista Pittoni 작.
그러나 스키피오는 사로잡힌 시팍스로부터 자신이 로마를 배신한 것은 소포니스바가 자신을 유혹했기 때문이며, 그녀는 마시니사더러 카르타고와 손잡으라고 설득할 것이라는 경고를 접한 후 그녀에게 경계심을 품었다. 스키피오는 마시니사에게 소포니스바가 시팍스의 배신에 연루되었으니 로마로 끌고 가서 재판을 받아야 한다며 그녀를 넘길 것을 요구했다. 마시니사는 자비를 호소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결국 자신이 그녀를 처리할 테니 말미를 달라고 요청해 승인을 받아냈다. 그 후 마시니사는 충직한 하인에게 독약과 전말을 설명하는 편지를 건넨 후 소포니스바에게 전달하라고 지시했다. 소포니스바는 하인으로부터 이를 전달받은 직후 독약을 마셨다.
소포니스바가 자살한 뒤, 스키피오는 마시니사를 누미디아의 유일한 왕으로 선포했고 로마 원로원도 이를 추인했다. 그 후 마시니사는 로마의 충실한 동맹자로서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겠다고 맹세했고, 기원전 202년 자마 전투에서 4천 명의 기병대와 6천 명의 보병대를 이끌고 스키피오와 합세해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 바르카를 격파했다. 카르타고는 한니발이 패하자 전의를 완전히 상실하고 로마와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2.4. 통합 누미디아 왕국의 군주
알제리 엘 크루브에 있는 그의 무덤
제2차 포에니 전쟁이 끝난 후 누미디아의 유일한 군주가 된 마시니사는 카르타고의 앞선 농업 기술을 수용하고 상업을 권장했으며, 자신의 이미지를 반영한 동전을 주조했다. 그 결과 유목 민족의 국가였던 누미디아는 번영을 구가했다. 또한 그는 누미디아가 로마의 충실한 동맹국임을 과시하며 이를 이용해 영토를 늘렸다. 특히 그는 로마와 맺은 평화 협정에 따라 로마의 동의 없이는 전쟁을 벌일 수 없는 카르타고의 사정을 이용해 카르타고의 영역을 수시로 침략했다. 카르타고는 이에 보복할 수 없어서 로마에 호소했지만, 로마는 카르타고에 반감을 가진 반면 자신들의 충실한 동맹자인 마시니사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들의 요청을 매번 무시했다.
기원전 154년경, 마시니사는 카르타고가 확보하고 있는 영토의 1/6에 해당하는 5천 평방 마일에 달하는 영역을 탈취했다. 카르타고는 다시 로마에 누미디아의 만행을 설명하며 도와달라고 호소했지만, 로마는 또다시 무시했다. 이에 견디다 못한 카르타고는 마침내 로마와 맺은 조항을 무시하고 군사 행동을 하기로 결정하고 기원전 149년 대규모 용병대를 모집해 누미디아를 공격했다. 그러나 누미디아군은 카르타고군의 공세를 격파했다. 이 소식을 들은 로마 원로원은 즉시 무단으로 전쟁을 벌인 카르타고에게 선전포고했다.
이집트의 역사가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마시니사는 로마가 카르타고와 전쟁을 벌인 것에 격분했다고 한다. 이는 카르타고의 영역을 장기적으로 갉아먹어 종국에는 북아프리카의 패권을 확립하려던 자신의 야망이 로마의 개입으로 인해 좌절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그는 제3차 포에니 전쟁에 단 한 명의 병사도 파견하지 않으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하다가 기원전 148년 사망했다.
이후 누미디아 왕국은 장남 미킵사, 차남 굴루사, 삼남 마스타나발에 의해 분할되었다가 굴루사가 기원전 145년에 병사하고 마나스타발 역시 기원전 139년 이전에 사망하면서 미킵사가 유일한 군주로 등극했다. 기원전 118년 미킵사가 사망한 뒤, 미킵사의 두 아들인 히엠프살 1세, 아드헤르발, 그리고 마스타나발의 아들이자 미킵사의 조카인 유구르타가 누미디아를 분할했다. 그러나 얼마 후 유구르타와 히엠프살, 아드헤르발 사이에 분쟁이 벌어지고 로마가 여기에 개입하면서 유구르타 전쟁이 발발한다.
3. 미디어
아르슬란 전기에 나온 미스르 왕국 장수 마시니사는 누가 봐도 이 이름을 따왔다. 다만, 이름만 따온 것이지 전혀 다른 인물. 장수로서 무예는 갖추고 있으나, 성격은 군주인 호사인 3세조차도 실망할 정도로 도량도 좁다. 극중, 잔데를 속여 죽였으며 이걸 정당한 1:1 대결이라고 뻥치고 자랑했다. 하지만, 결국 잔데의 군주이던 히르메스에 의하여 암살당한 호사인 3세 범인으로 몰려 대역죄인으로 참수당하고 3대가 같이 몰살당하여 효수된다.[1] 이 시기 마시니사의 어린 조카 마시바가 로마군에게 붙들린 일이 있었다. 스키피오는 마시바를 아무런 조건 없이 돌려보냈고, 마시니사는 이 일로 스키피오에게 개인적으로 호감을 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