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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 누미디아 왕국 2-2대 군주 ⴳⵓⵍⵓⵙⵙⴰ | 굴루사 | ||
제호 | 한국어 | 굴루사 |
베르베르어 | ⴳⵓⵍⵓⵙⵙⴰ | |
라틴어 | Gulussa | |
가족 | 마시니사(아버지) 미킵사(형) 마스타나발(동생) 마시바(아들) | |
생몰 년도 | 미상 ~ 기원전 145년 | |
재위 기간 | 기원전 148년~기원전 14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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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통합 누미디아 왕국 2-2대 군주.2. 생애
누미디아의 통합과 번영을 이끌어내며 54년간 집권한 명군 마시니사의 차남이다. 형으로 미킵사, 동생으로 마스타나발이 있었다. 기원전 172년, 그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로마 원로원에 출석했다. 이때 누미디아군이 카르타고를 침략하여 70개의 마을을 정복한 것에 비난하는 카르타고 사절단의 주장에 대한 질문을 받자, 그는 대답을 회피하고 시간을 끌었다. 기원전 171년, 그는 다시 로마를 방문하여 카르타고인들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당시 원로원은 마케도니아 왕 페르세우스와의 전쟁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기에 카르타고와 누미디아의 분쟁에 별 관심이 없었고, 마시니사의 영토 확장을 허용했다.기원전 151년, 그는 로마에 카르타고가 징병제를 실시하고 함대를 건조하고 있는 등 의심의 여지없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고 알렸다. 이후 형 미킵사와 함께 카르타고를 방문하여 카르타고에서 추방되어 누미디아 궁정에 머물고 있는 친 누미디아 정치인 40명이 도시에 돌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단호히 거부당하고 도시에서 쫓겨났다. 이때 그는 삼니움인 하밀카르라는 사람에게 공격을 받았다. 이리하여 양자의 갈등은 폭발했고, 카르타고군이 누미디아를 전격 침공했으나 대패했다. 로마는 카르타고가 허락없이 전쟁을 일으킬 수 없다는 조약을 어긴 것에 분노하여 카르타고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했다. 이리하여 제3차 포에니 전쟁이 발발했다.
그는 제3차 포에니 전쟁 동안 로마 군단과 함께 싸웠다. 당시 로마군은 파메아스라는 카르타고 지휘관의 유격 전술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그가 부하들을 이끌고 파메아스의 은신처를 찾아내는 데 성공한 덕분에 파메아스를 체포하여 처형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얼마 후 누미디아 장군 비티아가 800명의 기병을 이끌고 카르타고에 귀순해버리는 사건이 벌어졌다. 카르타고인들은 비티아의 설득에 따라 도시를 로마 대신 굴루사에게 넘기려 했다. 이에 로마군 장성들이 그를 의심의 눈길로 바라보자, 굴루사는 "카르타고는 멸절되어야 마땅하니 받을 수 없다"라며 요구를 단호히 거부해 이를 불식시켰다. 기원전 147년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의 네페리스 요새에 대한 원정을 지원했으며, 카르타고측 총사령관 하스드루발(Hasdrubal the Boetharch)이 카르타고 함락 직후 스키피오에게 항복할 때 중재를 맡기도 했다.
기원전 148년 아버지 마시니사가 사망했다. 마시니사는 사망하기 전에 세 아들에게 영토를 삼분한다는 유언을 남겼고,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를 유언 집행인으로 지정했다. 왕권 역시 세 왕자에게 분배되었다. 미킵사는 수도 키르타의 통치를 맡았고, 그는 군대의 지휘권을 맡았으며, 마스타나발은 법률 집행과 봉신 부족 지도자들과의 관계를 조율하는 일을 맡았다. 그러나 그는 기원전 145년에 사망해 이러한 권력을 오래 누리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