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우스 안토니우스 라틴어: Gaius Antonius | |
생몰년도 | 기원전 81년 ~ 기원전 42년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마케도니아 속주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오라토르(조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크레티쿠스(아버지) 율리아 안토니아(어머니) 마르쿠스 안토니우스(형) 루키우스 안토니우스(동생) |
참전 | 카이사르의 내전 |
직업 | 로마 공화국 마케도니아 속주 총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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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의 군인, 정치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동생으로, 카이사르의 내전 시기에 형을 따라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편에 섰다. 카이사르 암살 후 마케도니아 속주 총독을 맡았으나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에게 잡혀 처형되었다.2. 생애
저명한 노빌레스 가문인 안토니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할아버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오라토르는 기원전 99년 집정관을 역임했고 기원전 97년 감찰관을 맡은 당대 최고의 웅변가였다. 삼촌인 가이우스 안토니우스 히브리다는 기원전 63년 집정관을 맡았고, 이후 마케도니아 속주 총독을 역임했지만 속주민을 가혹하게 대했다는 혐의로 고발되어 로마에서 추방되기도 했다. 아버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크레티쿠스는 기원전 74년 법무관으로 선출되었으나, 기원전 71년 크레타 해적들을 토벌하는 임무에 실패하여 대부분의 함선이 침몰되는 참사를 겪고 곧 사망했다.어머니 율리아 안토니아는 고대 로마의 저명한 귀족 가문인 율리우스 씨족의 일원으로, 그는 기원전 90년 집정관을 역임한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외손자이고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먼 친척이기도 했다. 형으로 그 유명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있었고, 동생으로 루키우스 안토니우스가 있었다. 아버지가 크레타에서 사망한 뒤, 어머니 율리아는 기원전 71년 집정관을 역임한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수라와 재혼했다. 그러나 양아버지 수라는 루키우스 세르기우스 카틸리나의 음모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현직 집정관 키케로에게 처형되었다.
기원전 54년 동생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와 함께 시리아 속주민을 핍박한 혐의로 기소된 아울루스 가비니우스를 탄핵했지만, 폼페이우스가 가비니우스를 비호하는 바람에 패소했다. 이후 형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기원전 49년 호민관을 맡았고, 루키우스 안토니우스는 기원전 44년 호민관을 맡았지만, 그가 호민관이 되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기원전 49년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하자, 형 마르쿠스, 동생 루키우스와 함께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편에 섰고, 일리리쿰에서 형의 부관으로서 복무했다.
이후 새로 모집된 24군단과 신편 28군단의 절반을 맡아 일리리쿰으로 수송하다가 마르쿠스 옥타비우스와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에게 가로막혀 쿠릭타 섬에 피신했다. 옥타비우스와 리보는 해상에서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의 함대를 격파한 뒤 쿠릭타 섬에 있던 가이우스 안토니우스의 부대를 포위했다. 가이우스 살루스티우스 크리스푸스가 그를 지원하고자 수송선을 보냈지만 적 함대에게 가로막혔고, 그는 기아에 시달리다가 15개 코호트들과 함께 항복해야 했다.(쿠릭타 공방전)
기원전 45년경 포로 신세에서 벗어나 로마로 돌아와 사제단의 일원이 되었고, 기원전 44년 카이사르가 암살된 뒤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와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등이 로마를 등진 뒤 로마 시의 치안관이 되었다. 그해 11월 28일 마케도니아 속주 총독으로 선임되었다. 한달 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갈리아 키살피나 현직 총독 데키무스 브루투스를 공격하자, 원로원은 마르쿠스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하고 그의 권한 역시 무효화했다. 그는 사임을 거부하고 원로원에 대항했다. 당시 마케도니아와 일리리쿰은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의 손아귀에 있었고, 그는 일리리아 산맥에서 항전했다.
그러나 기원전 43년 2월 말 아폴로니아에서 브루투스의 군대에게 포위되었고, 결국 3월 중순에 항복했다. 처음에는 브루투스에게 귀한 대접을 받았고, 휘하 부대를 계속 이끌 수 있었다. 키케로가 브루투스에게 그를 처형하라고 요구했지만, 브루투스는 무시했다. 그러나 그가 병사들에게 반란을 부추겼다는 정보가 들어오자, 브루투스는 그의 지휘권을 박탈하고 감시를 엄하게 했다. 기원전 42년 초 제2차 삼두정치를 결성한 옥타비아누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그리고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많은 인사를 숙청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브루투스는 자기가 임명한 마케도니아 총독 퀸투스 호르텐시우스 호르탈루스에게 그를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호르텐시우스는 백인대장 가이우스 클로디우스에게 처형을 집행하도록 했다.
훗날 필리피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호르텐시우스를 체포한 뒤 동생 가이우스의 무덤으로 끌고 가 참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