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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프탈 ηβοδαλο Ebodalo | ||
6세기경 에프탈의 최대 강역 | ||
기원전 228년 ~ 기원후 224년 | ||
성립 이전 | 성립 이후 | |
키다라 | 돌궐 | |
사산 왕조 | ||
사산 왕조 | 알촌 | |
준빌 | ||
수도 | 쿤두즈 발흐 | |
언어 | 박트리아어[1], 소그드어[2], 호라즘어[3], 프라크리트어[4], 튀르크어(?), 산스크리트어 | |
종교 | 마니교, 조로아스터교, 네스토리우스교, 불교, 에프탈 다신교 | |
군주 칭호 | (불명) | |
주요 군주 | 아흐순와르 (458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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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언어별 명칭 | |
박트리아어 | ηβοδαλο (에보달로) |
파슈토어 | هپتالیان (압달리) |
코이네 그리스어 | Ἐφθαλῖται (헤프탈리테) |
한자 | 嚈噠 (엽달) 悒怛 (읍달) 滑 (활) |
산스크리트어 | श्वेतहुन् (스웨타후나) |
백훈족이라고도 불리는 에프탈(Hephthalites)은 5세기 중엽부터 약 1세기 동안 중앙아시아의 박트리아를 중심으로 페르시아와 아프가니스탄 일대 그리고 서북 인도방면으로 세력을 떨친 유목 민족, 혹은 그들이 세운 유목제국을 일컫는다. 중국 사적에는 엽달(嚈噠), 읍달(悒怛), 활(滑)이라고 기록되었고, 서방 사료에는 Ephthalites, Abdel, Haital 등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인도에서는 후나족(Huna people)으로 불렸다.[5] 지배층은 알타이 산맥 일대에서 서쪽으로 이동한 튀르크 계통의 민족으로 추측되나, 피지배층은 인종·언어로 볼 때 인도유럽어족계의 토하라인이었으며, 왕족 또한 이들과 많이 혼혈되어 있었다.[6]
상술했듯이 박트리아를 중심지로 삼은 에프탈인들은 동쪽으로는 유연과 경쟁하면서 타림 분지에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며, 서쪽으로는 사산 왕조를 쳐서 실크로드의 주요 거점들을 장악하였다. 한편 이들의 분파로 추정되는 알촌 훈족은 힌두쿠시를 넘어 인도 아대륙 방면으로 쳐들어가 전성기를 누리던 굽타 왕조를 대략 반세기만에 멸망시키기도 하였다.
2. 이름
"에프탈"이라는 이름의 기원은 정확하게 알려지진 않았는데, '강함'이라는 뜻의 호탄어 단어 *Hitala, 가설적 소그드어 *Heβtalak의 복수형인 Heβtalīt, 또는 중세 페르시아어 *haft āl, 7개의 아리아인)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들 스스로는 자신들을 '에보달로(ηβοδαλο)'라고 칭했고, 동전에다가 이를 '에프(ηβ)'로 축약하여 표기하였다. 이 명칭은 에프탈에게 복속되었던 롭 왕국의 박트리아어 문서와 비문에서도 발견되었기 때문에 교차검증이 가능하다.동로마 제국의 그리스 문헌들은 그들을 '헤프탈리테(Ἐφθαλῖται)', 압달(Abdel) 또는 아브델(Avdel)이라고 불렀다.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에프탈인들은 헤프탈(Hephthal), 헵탈(Hep't'al), 테탈(Tetal) 등으로 불렸는데, 가끔씩 쿠샨인들과 혼동되기도 하였다. 한편 이들의 적대국이었던 사산 왕조의 페르시아 사료에서는 헤프탈(Hephtal), 헤브탈(Hēvtāls) 등으로 기록되어 있고, 아랍에서는 '알하야틸라(هياطلة)' 혹은 헤야텔라이트(Heyâthelites)로 불렀으며 튀르크인의 분파라고 기록하였다.
엽달국(嚈噠國)은 대월지와 유사한 종족이며, 고차[7]의 별종(別種)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들은 본디 새북(塞北)[8]에서 기원하였는데, 금산(金山)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우전의 서쪽ㅡ 즉 오허수(烏許水) 남쪽 200리 되는 곳에 도읍을 정하였는데, 그곳은 장안과 10,100리 떨어진 곳이다...(중략) 이는 북위 문성제보다 약 80년에서 90년 전의 일이다.[9] 그 사람됨은 흉폭하며 싸움에 능하다. 서역의 강거, 우전, 사륵(沙勒), 안식[10] 및 다른 소국 30여 개가 모두 그들에게 복속하며 ‘대국(大國)’이라고 칭한다. 연연과 혼인관계를 맺고 있다. 태안(太安)[11] 연간 이후 매번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으며, 정광(正光)[12] 말년에는 사신을 보내 사자 한 마리를 바쳤는데, 고평(高平)에 이르렀을 때 묵기추노(万俟醜奴)의 반란이 일어나 그로 인하여 억류되었다가, 난이 평정되자 경사로 보내졌다. 영희(永熙)[13] 연간 이후 조공이 마침내 끊어졌다.
『위서』102권 제90 서역열전
중국 사료에서는 '엽달(嚈噠)' 혹은 '활(滑)' 등으로 기록하였으며, 이전에 장건이 찾아갔던 대월지와 유사한 종족이라고 기록하고 있다.[14] 재미있는 점은 표준중국어 발음보다 중고한어 발음이 더 잘 보존되어 있는 광둥어와 한국어 명칭이 그리스어 및 박트리아어 원음과 더 유사하다는 것이다.『위서』102권 제90 서역열전
3. 기원과 특징
에프탈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설들이 있는데, 그중 가장 대표적인 주장 2가지는 이란계 민족이라는 설과 알타이계 민족이라는 설이다. 현재 가장 신빙성 있는 이론은, 에프탈인들이 처음에는 튀르크계 유목민에서 기원했으나 나중에 박트리아 지역에 정착하면서 이란화했다는 것이다.[15]1995년, 일본의 역사학자 에노키 카즈오는 에프탈을 언급한 고대 사료들이 공통적으로 그들이 소그디아나와 힌두쿠시 사이에 위치했다고 기록한 점, 그리고 에프탈인들의 외모 묘사에서 부분적이지만 이란계 민족들의 특성이 드러났다는 점에 근거하여 그들이 박트리아에서 기원한 인도유럽계 동이란인이라고 제안했다. 이에 대해 미국의 중앙아시아사 연구가 리처드 넬슨 프라이는 에노키의 가설을 조심스럽게 수용하면서도, 동시에 '에프탈은 아마도 혼혈집단이었을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비교적 최근에 편찬된 이란 백과사전(encyclopædia iranica)이나 이슬람 백과사전 등은 에프탈을 아프간계 민족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다른 역사학자들인 요제프 마르크바르트(Josef Marquart)나 르네 그루셰(René Grousset)는 에프탈이 원시 몽골족일 가능성을 제안했다. 중국의 역사학자인 유태산(余太山)은 에프탈의 기원을 선비족, 더 나아가서는 고구려까지 추적하기도 했다.
드 라 바시에르(de la Vaissière) 등 다른 학자들은 중국측 사료에 대한 최근의 재평가를 근거로, 에프탈이 처음에는 원시 튀르크족에게서 기원했지만 나중에는 여러 목적으로 박트리아어를 사용하게 되었다는 가설을 내놓았다.
사실 에프탈은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다양한 민족들의 연맹체였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리처드 넬슨 프라이는 저서에서 한 페이지를 할당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후대의 유목 제국들이 수많은 민족들의 연합이었던 것처럼, 우리는 잠정적으로 이 침략자들의 지배층들이 동쪽과 북쪽에서 온 튀르크어를 사용하는 민족이거나, 적어도 그들이 이 연합에 포함되어 있다고 제안할 수 있지만, 대부분의 시온족 연합에 속한 민족들, 특히 에프탈인들은 이란어를 사용했을 것이다. 이러한 경우, 유목민들은 기존에 그랬던 것처럼 정주민들의 언어, 제도, 문화를 채택하였다.
3.1. 훈족과의 관계
역사학자 마틴 쇼트키(Martin Schottky)에 따르면, 에프탈인들은 동시대에 유럽을 휩쓴 훈족들과 관련은 없었지만, 이들의 이동에는 인과적으로 관련이 있을 수 있다고 하였다. 다른 학자들은 에프탈이 그들의 적들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스스로를 '훈'이라고 자칭했다고 말한다.이와는 반대로, 드 라 바시에르와 같은 학자들은 다른 가설을 제안한다. 에프탈이 알타이 지역에서 기원하고 궁극적으로 유럽에 도착한 유목민 이주물결[16]의 일부였으며, 이들이 '정치적, 부분적으로 흉노의 후예'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유목민들의 이주물결은 4세기의 기후변화에 의해 촉발되었으며,[17] 알타이 산맥과 중앙아시아의 초원 및 목초지에 엄청나게 파괴적인 영향을 미쳤다. 아만다 로마조프(Amanda Lomazoff)와 아론 랄비(Aaron Ralby)에 따르면, 훈족과 에프탈 사이에는 '광범위한 영토적 중복'이 있었으며 서쪽 아틸라의 '공포의 통치'와 남쪽의 에프탈 사이에는 높은 동시성이 존재했다고 한다.
한편 북흉노의 잔존 일파가 세운 열반국을 다룬 중국 사서에서는 흉노족의 또다른 잔존세력이 중앙아시아로 들어갔다고 기록하였는데, 훈족-흉노 동계설의 주장에 따르면 이때 이주한 흉노족[18]이 알타이 산맥과 중앙아시아 북부의 초원지대에서 살아가다가 이상기후로 인해 각각 서진, 남진하여 훈족과 에프탈이 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이들 민족의 이름이 일부분이지만 일치한다는 점, 동양인스러운 외모와 서양인스러운 외모가 혼재한다는 점, 대대적으로 이동하기 전에 거주하던 지역이 대부분 겹친다는 점 등에서 상당히 가능성있는 가설일수도 있다.
6세기의 동로마 역사가 프로코피우스는 저서 <전쟁의 역사>에서 에프탈이 유럽의 훈족과 관련이 있지만, 이들의 차이점을 언급하면서 서로의 문화적, 사회적인 괴리를 기록하였다.
백훈족이라 불리는 에프탈 훈족[...] 그들은 이름에서 훈족과 연관성을 가지고 있을뿐만 아니라 혈통적으로도 훈족이지만, 그들은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어떠한 훈족들과도 어울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과 인접하지도 않고 심지어 그들과 매우 가깝지도 않은 땅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영토는 페르시아의 바로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그들은 다른 훈족과 같이 유목민은 아니고, 오랫동안 좋은 땅에서 정착 생활을 해왔다. 훈족들 가운데서 추하지 않은 하얀 몸과 얼굴을 가진 사람은 오직 그들뿐이다. 또한 그들의 삶의 방식이 그들의 친척들과 같지도 않고, 그들처럼 야만적인 삶을 살지 않는 것 역시 사실이다. 그들은 한명의 왕에 의해 통치되고 있고, 합법적인 헌법을 가지고 있으며, 로마인과 페르시아인에 못지 않게 서로와 이웃들간의 거래에서 옳고 그림과 정의를 준수한다.
4.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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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프탈 기병 |
에프탈족에 관한 역사 기록은 에프탈족의 적이었던 사산 왕조와 사산 왕조의 적이었던 동로마 제국의 역사가, 그리고 당시 탄압받던 중국인 불교 승려들의 기록을 통해 알려져 있다.
쿠샨 왕조의 붕괴에 편승하여 5세기 중엽 토하리스탄 지방을 지배하던 키다라족을 무너뜨리고 그 땅을 빼앗은 다음, 서쪽으로는 사산 왕조를 쳐서 위와 같은 광대한 판도를 만들었고 북쪽으로는 소그디아나를 제압하여 시르 강에 이르렀으며, 동쪽으로는 타림 분지에 이르렀다. 인도로 진출한 에프탈은 알촌 훈족(Alchon Huns)이라고 불렸는데, 530년경 북인도의 굽타 왕조와의 결전에서 패배하여 카슈미르로 쫓겨났고, 중앙아시아의 에프탈은 567년 사산 왕조의 호스로 1세와 돌궐에 의해 큰 타격을 입었으며 이후 여러 소국으로 나뉘어 잔존하다가 멸망했다.
이런 나름 강해진 세력을 기반으로 인도·중국·페르시아·남러시아를 연결하는 무역 노선을 거의 장악하다시피 하며 중앙아시아에서 일대 세력을 일구었다. 남북조시대 북위의 승려인 송운(宋雲)과, 알렉산드리아의 상인 코스마스가 남긴 이 나라에 대한 견문기는 꽤나 유명하다. 초기 왕들인 킹길라와 토라마나 시대에는 불교를 후원했으나, 펀자브 방면의 통치자였던 미히라쿨라 왕의 시대가 되면 불교 박해로 악명이 높았다. 미히라쿨라의 불교 탄압으로부터 1세기 후 현장이 방문했을 때 불교는 크게 쇠퇴해 있었다. 한편 천신(天神)과 화신(火神)을 믿는 토속 신앙이 있었다.[19] 다만 동로마 측의 기록에 의하면 에프탈족들 사이에서 이마에 십자가 모양의 문신을 새기는 풍습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를 두고 에프탈족 사회에 기독교가 퍼져 있었던 것이라고 추정하는 의견도 있다. 실제로 로마제국에서 이단으로 분류되어 페르시아로 달아난 기독교의 일파인 네스토리우스교가 동방으로 선교를 하면서 중앙아시아에 퍼져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5. 유사 민족
인도인들은 당시 중앙아시아에서 새로 등장한 여러 부족들을 후나족으로 불렀고, 에프탈은 후나족 중 하나였기 때문에 동일 부족이거나 친연관계에 있을 것으로 보이는 부족들이 여럿 기록에 남아 있다. 우선 알촌 훈족(Alchon Huna)는 인도로 진출한 에프탈로 알려졌는데, 최근 에프탈과 알촌이 별개의 세력이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다른 후나족으로 카불 일대에 정착한 네자크 훈족(Nezak Huns)이 있으며, 에프탈이 멸망시킨 키다라족(Kidarites, Kidara Huns)도 후나족의 일부로 포함하기도 한다. 후나족의 명칭은 훈족과 비슷하지만, 그 이름이 훈족에서 따온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후 튀르크계의 돌궐이 중앙아시아에 진입한 이후 아프가니스탄 일대에 생긴 토하라 야브구(Tokhara Yabghus)[20], 투르크 샤히(Turk Shahis), 준빌(Zunbils)[21] 같은 군소 세력들은 튀르크와 에프탈의 혼혈로 보인다.6. 여담
편두 풍습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들의 은화를 살펴보면 은화속 왕들의 이마는 모두 평평하게 묘사되어있다.아프가니스탄의 파슈툰족은 중세부터 근세까지 주로 압달(Abdal, Abdali)이라고 칭해졌는데, 말 그대로 '에프탈족(의 후손)'이라는 뜻이다. 심지어 19세기 무렵까지 아프간 북동부 산악지대의 누리스탄인들은 파슈툰족들을 압달리라고 불렀다.
만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 등장하는 에프탈 연맹은 에프탈에서 이름을 따온 것으로 보인다.
<토탈 워: 아틸라>에서는 백훈족이란 이름으로 등장하며, 만들어진 목적도 패왕이라 불리던 사산 왕조의 난이도 올리기라 그런지 실제 역사보다 더 먼치킨이다.[22] 특히 백훈족 궁기병은 근접전 최강인데 겉보기보다 방어력이 상당히 높아서 백훈 건담(...)이라 불리며 완전체 취급받는다.[23]인게임에서의 백훈은 에프탈과 인도쪽으로 진출한 알촌을 동일시하여 내놓는 고증오류가 있다.
중세 페르시아의 전설을 모은 문헌인 《샤나메》를 보면 페르시아의 샤한샤(황제)가 북쪽에 사는 백귀(하얀 귀신)들을 정복하러 원정을 나섰다가 백귀들의 마법에 속아 병사들을 모두 잃고 사로잡혔다는 내용이 언급되는데, 이는 실제로 페르시아의 사산군이 에프탈 원정 도중에 에프탈군의 매복에 걸려 참패하고 샤한샤가 사로잡혔던 일을 묘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1] 공용어. 에프탈족의 언어가 아니라 그들이 정복한 박트리아 지역의 토착 언어이다. 본래는 피지배층에서만 사용되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사회 전반에서 널리 쓰였다.[2] 소그디아나 지역의 토착 언어로서, 상인 계층이었던 소그드인들의 활동에 힘입어 널리 사용되었다.[3] 호라즘 지역에서 사용되었다.[4] 인도 방면의 영토에서 사용되었다.[5] 이 명칭이 비슷한 시기에 유럽을 휩쓸었던 훈족과 연관성이 있다는 주장이 있는데, 자세한 것은 후술할 '기원과 특징' 문단 참고.[6] 다만 에프탈을 다룬 역사적인 사료가 매우 희박할 뿐더러, 역사학자들끼리도 이들의 기원과 민족적인 구분 등의 의견에서 서로 의견이 갈리므로 에프탈에 대해 자세히 알기란 매우 어렵다. 심지어는 이들 지도자의 이름과 가계도조차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 문서에서 다루는 에프탈의 행적은 이들의 침략을 받은 주변 국가들(특히 사산 왕조와 굽타 왕조)의 기록에 의존하여 서술함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7] 튀르크계 유목민족 중 하나로, 정령 혹은 철륵이라고도 한다.[8] 중국에서 전통적으로 북방의 초원지대를 일컫는 단어이다.[9] 이를 통해서 360년경, 혹은 그 이전에 에프탈이 중앙아시아로 이주했음을 알 수 있다.[10] 본래 안식은 아르사케스조 파르티아 제국을 가리키는 말인데, 여기서는 시기로 보아 파르티아 멸망 이후에 들어선 사산 왕조를 가리킨다.[11] 북위 문성제의 연호.[12] 북위 효명제의 연호.[13] 북위 효무제의 연호.[14] 이는 에프탈이 쿠샨 왕조의 중심지였던 박트리아를 정복한 이래로 그곳의 문화와 풍습에 점진적으로 동화되어 사실상 쿠샨화(=박트리아화)되었기 때문이다.[15] 실제로 에프탈은 박트리아어를 공용어로 사용했는데, 이는 이전의 쿠샨 왕조나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이 사용했던 언어였을뿐만 아니라 현지 주민들의 언어이기도 했다. 또한 에프탈은 그들이 발행한 동전에 야브구[24] 등의 칭호를 박트리아어로 새겼다.[16] 혹은 유목민 대이동[17] 4세기경에 일어난 대규모 민족 이동의 원인으로는 화산 폭발, 인구 증가 등 다양한 요인들이 지목되고 있지만 가장 유력한 가설은 바로 '기후 변화'였다. 특히 3~4세기의 중앙아시아에 이상 고온으로 인한 극단적인 가뭄이 덮쳤는데[25] 이는 엘니뇨 남방진동(El Nino-Southern Oscillation, ENSO)의 패턴이 더욱 뚜렷해지면서 유라시아 대륙의 계절풍이 약화되어 구름이 잘 생성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 책의 표현을 빌리자면 '세계 기후가 전반적으로 더 힘겨운 방향으로 이행하였다'. (펠리페 페르난데스아르메스토 외, <옥스포드 세계사> 출판: 2020.12.02.)[18] 영문 위키피디아에서는 '시온족(Chionites)'라고 서술하고 있다.[19] 이 천신과 화신이 어느 신인지를 두고 연구자들마다 논란이 있는데, 튀르크·몽골 계통의 텡그리이거나 아니면 조로아스터교의 아후라 마즈다라는 의견이 분분하다.[20] 지배자의 이름이 '야브구'였던 토하라인들이라는 뜻[21] 투르크 샤히 출신이 세운 나라로 투르크 샤히의 일종.[22] 특히 동방 제국 상대시 사기 보너스를 주는 동방의 채찍과 기독교 상대 보너스인 신의 채찍 특성을 둘 다 갖고 있어서 더욱 무섭다.[23] 총 아머 수치가 75로 어지간한 중기병 급인데 이는 방패 방어력이 50인게 한 몫했다. 실제 갑옷 자체 수치는 25로 타 팩션에도 있는 어지간한 중무장 궁기병 수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