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프가니스탄의 도시
가즈니 왕조 관련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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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원수 | 술탄 | |
역사 | 단다나칸 전투 | |
행정구역 | 가즈니 | 라호르 | |
문화 | 샤나메 | |
인물 | 피르다우시 |
파슈토어, 다리어 غزنی
페르시아어 غزني
영어 Ghazni
랜드마크인 바흐람 샤의 탑과 시타델
구도심 전경
아프가니스탄 중남부 가즈니 주의 도시. 수도 카불에서 서남쪽으로 110km 떨어진 평지에 위치한다. 인구는 19만명으로, 그중 상당수는 서쪽과 북쪽에 형성된 난민촌에 거주한다. 주민들은 절반의 타지크인을 필두로 하자라인과 파슈툰인이 각각 1/4씩 구성한다. 헤라트, 칸다하르, 발흐와 함께 아프가니스탄의 고도 중 하나로 라위크 왕조. 가즈니 왕조, 구르 왕조의 수도로 번영하였다. 13세기 몽골 제국에게 파괴된 후에도 재건되었으나, 전략적 요충지로써 종종 전장이 되며 서서히 쇠락하였고 21세기 아프간 내전을 겪으며 많은 유적들이 파손되었다. 도시 남쪽 외곽에 군사 기지와 가즈니 공항이 있다. 해발 2200m의 고지대에 위치하여 여름에도 35도를 넘지 않고, 겨울에는 영하 30도까지 떨어지는 서늘한 기후를 지닌다.
1.1. 역사
아케메네스 제국기부터 도시가 있었고, 기원전 329년 알렉산드로스 3세가 점령한 후 마케도니아 퇴역병들을 정착시킨 식민도시 알렉산드리아 오피아나 (Αλεξάνδρεια Ωπιανή)로 개편하였다. 기원전후 무렵 일대는 불교가 번성하였다. 644년 도시를 방문한 현장은 지명을 자구다라 기록하였다. 683년 우마이야 왕조가 일시 점령했으나 통치권을 확립하지는 못하였다.1.1.1. 중세
파일:가즈니 이란탑.jpg | ||
가즈나 왕조의 술탄 바흐람샤와 마수드 3세가 세운 미나렛 | 마수드 3세의 미나렛(1902년 지진 전) | 마수드 3세의 미나렛(1902년 지진 후) |
8세기 부터 일대에는 카불 샤히와 연관된 튀르크계 라위크 왕조가 있었고, 가즈니는 그 수도였다. 782년 2대 군주 카난 (카칸)은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다신교 신전을 모스크로 개조하였다. 존속 기간 내내 라위크 왕조는 펀잡의 힌두 샤히의 속국으로 있었는데, 877년 아부 만수르 아플라는 사파르 왕조의 야쿱에게도 복속하였다. 962년 사만 왕조의 맘루크 알프테긴이 가즈니를 4개월간 포위한 끝에 점령하였고, 라위크 군주 아부 바크르는 도주하였다. 965년 아부 바크르는 알프테긴의 사후 그의 아들 아부 이샤크 이브라힘에게서 가즈니를 수복했으나, 얼마후 이브라힘은 사만 군대와 함께 돌아와 가즈니를 재점령하였다. 975년 이브라힘이 사망하고 가즈니 총독으로 봉해진 뵈리테긴에 대해 현지 주민들은 반발하여 봉기하였고, 아부 바크르의 아들 아부 알리를 군주로 모셔왔다. 아부 알리는 힌두 샤히 세력과 연합하여 사만 군대와 맞섰는데, 사북테긴에게 대패하였다.[1]이로써 뵈리테긴이 가즈니 총독으로 복귀했으나, 977년 승장 사북테긴이 그를 축출하고 가즈니를 장악하였다. 사북테긴은 가즈니를 중심으로 자립하여 세력을 확장하였고, 이렇게 세워진 가즈니 공국은 그의 후계자인 술탄 마흐무드의 대대적인 세력 확장을 통해 가즈니 제국으로 편성되었다. 가즈나 제국은 호라산과 힌두스탄을 장악한 후에도 두 지역의 중간 지점인 가즈나를 수도로 삼았고, 따라서 11-12세기 무렵 가즈나는 매우 번영하여 세계 최대의 도시 중 하나였다. 따라서 당대의 많은 학자들이 모여들었고, 그중에는 알 비루니와 피르다우시 등이 있다. 단다나칸 전투 이래로 가즈니 제국은 점차 쇠퇴하였고, 본토인 아프간에서도 구르 왕조가 점차 힘을 키우고 있었다. 구르 조의 내전에서 패배한 쿠툽 앗딘 무함마드는 가즈니로 망명했는데, 술탄 바흐람 샤는 그를 독살해버렸다. 이에 쿠툽 앗딘의 형인 구르 군주 사이프 앗딘 수리는 복수를 천명하였다.
1148년 사이프 앗딘은 가즈니 전투에서 승리하고 도시를 점령하였다. 하지만 인도로 도주했던 바흐람 샤는 대군과 함께 돌아와 구르 군을 격파, 가즈니를 수복하고 상기 수라크에서 사이프 앗딘을 사로잡아 풀리 약 타크에서 십자가 형에 처하여 죽였다. 쿠툽 앗딘과 사이프 앗딘의 사후 두 동생 바하 앗딘 삼과 알라 앗딘 후세인이 연이어 즉위하여 복수를 꾀하였다. 1149년 집권한 알라 앗딘은 1150년 티기나바드 & 주쉬 아비 가름 전투에서 바흐람 샤를 연거부 격파하고 가즈니를 포위하였다. 바흐람 샤는 도시의 수비대까지 끌어모아 다시 싸웠지만 패퇴하고 인도로 도주하였다. 알라 앗딘은 남겨진 가즈니를 7일간 약탈하고 6만 주민을 학살하였다. 또한 형제의 복수로 명군으로 여겨지는 마흐무드, 마수드, 이브라힘을 제외한 모든 가즈니 군주들의 능을 파괴하였다. 그외에 가즈니 조의 궁전이 있는 보스트 (라쉬카르가) 역시 파괴하였다.
이로써 알라 앗딘은 '세계를 태운 자'란 의미인 자한수즈라는 별명을 얻었고, 술탄 알 무아잠을 칭하였다. 1152년 알라 앗딘은 셀주크 제국에게서 독립을 선포하며 발흐를 점령하였다. 하지만 그러자 셀주크 술탄 아흐마드 산자르가 개입하여 그를 격파, 사로잡고 가즈나 조의 가즈니 탈환을 도와주었다.
2. 아프가니스탄의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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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항목의 가즈니를 주도로 하는 아프가니스탄 남동부에 있는 주이다.
이곳에서 2007년 7월 19일에 탈레반에 의한 샘물교회 선교단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건이 일어났다.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과 제 2의 도시 칸다하르를 잇는 고속도로가 이 주를 지나가는데 그 도로에서 피랍되었다.
[1] 당시 7마리의 코끼리가 잡혔다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