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1-27 10:35:07

단다나칸 전투

가즈니 왕조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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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a48252> 정치 <colcolor=#000,#fff>역대 가즈니 군주
국가원수 술탄
역사 단다나칸 전투
행정구역 가즈니 | 라호르
문화 샤나메
인물 피르다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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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단다나칸 전투.jpg

1. 개요2. 상세

1. 개요

1040년경 호라산 지역의 메르브 시(현재 투르크메니스탄의 도시 마르 인근 유적) 근방 단다나칸 평원에서 가즈니 왕조마수드 1세셀주크 제국토그릴 1세, 차그리 베이가 맞붙은 전투. 셀주크 제국은 이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호라산의 패권을 세울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대제국을 창건하게 된다.

2. 상세

호라산은 중앙아시아와 중동 사이의 일대로, 아무다리야 강 남부에 위치하며, 이란 동부와 아프가니스탄 서부, 투르크메니스탄 대부분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이곳은 예로부터 땅이 비옥하기로 유명해, 이집트, 메소포타미아와 더불어 아랍 세계 최고의 곡창 지대 중 하나로 손꼽혔다. 일찍이 파르티아 제국이 이 지역에서 시작되었고, 서기 749년 아바스 왕조가 이 지역에서 나라를 세운 뒤 이베리아 반도를 제외한 아랍 세계 전체를 지배하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9세기 중반에 아바스 왕조가 쇠퇴하자, 이슬람교로 개종했던 사산 왕조의 귀족들이 제각기 세력을 일으켜 타히르 왕조, 사파르 왕조, 사만 왕조를 세운 후 호라산의 패권을 놓고 치열하게 경쟁했다. 여기에 유목민족이 세운 카라한 왕조까지 이에 가세하면서, 호라산 일대는 혼란에 휩싸였다. 그러다 아프가니스탄의 가즈니에서 세력을 일으킨 가즈니 왕조가 세력을 급격하게 불려 호라산 일대를 석권했다. 하지만 술탄 마흐무드가 1010년부터 1025년까지 북인도 일대에 17차례의 원정을 감행하느라 호라산 일대에 큰 신경을 쓰지 않았고, 그 사이 셀주크 베이의 후손들이 세운 셀주크 투르크가 점차 세력을 키워 1028년~1029년 호라산의 핵심 도시인 메르브와 니샤푸르를 약탈했다.

술탄 마흐무드가 1030년 사망한 뒤, 튀르크의 공세는 더욱 거세졌다. 1037년 메르브가 튀르크군에게 완전히 공략되었고, 1038년 헤라트 및 니샤푸르도 뒤따라 무너졌다. 가즈니 왕조의 3대 술탄 마수드 1세는 계속되는 튀르크의 침략을 더는 두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1040년 5만에 달하는 군대와 코끼리 60마리를 이끌고 메르브를 탈환하기 위한 원정을 개시했다. 마수드의 군대에는 재상 아흐마드 쉬라지, 수석 비서관 아부 3일 자우자니, 대장군 알리 다야, 베그토그디, 수바쉬, (이전 재상 아흐마드 메이만디의 아들) 압둘라자크 메이만디 등 내각 대부분이 동행하였다.

그러나 튀르크군은 치고 빠지는 전술을 구사하며 정면 대결을 회피했고, 경기병대가 꾸준히 가즈니 왕조군의 보급로를 공격하여 큰 타격을 입혔다. 가즈니 왕조군은 이러한 적의 유격 전술에 지칠대로 지쳤고, 근방의 수원지로 접근하지도 못해 심한 갈증에 시달렸다. 그러다 그들이 메르브 근방의 단다나칸 평원에 주둔했을 때, 투르크 기병대 16,000명이 총공세를 가했다. 가즈니 왕조군은 제대로 된 저항도 못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단다나칸 전투는 가즈니 왕조에게 치명타를 입혔다. 술탄 마수드 1세는 기병 수 십명만 데리고 겨우 빠져나온 뒤 북인도로 도피했으나, 전투의 책임을 알리 다야 등 여러 장군에게 떠넘겼다가 군대의 반발을 사 폐위된 뒤 1041년 1월에 피살당하며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이후 가즈니 왕조는 북인도에서 근근히 세력을 이어가다 1152년 고르 왕조에게 완전히 멸망했다. 반면 셀주크 투르크는 이 전투의 승리를 계기로 호라산 전역을 석권했고, 이를 발판삼아 아랍 세계 최강의 대제국을 건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