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2 17:58:51

키르기스스탄/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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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키르기스인 정착 이전 키르기스스탄 지역사
2.1. 고대사2.2. 중세사
3. 키르기스스탄 정착 이전 키르기스인의 역사
3.1. 고대사3.2. 중세사
4. 근세 : 키르기스인들의 키르기스스탄 정착5. 근대6. 현대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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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니세이강 유역에서 기원한 키르기스인 민족사 및 중세 말 키르기스인이 이주하게 된 오늘날 키르기스스탄에 해당하는 지역사를 다루는 문서.

키르기스인은 유목민족에 관한 중국 최초의 기록에서부터 등장하고, 그 이후 역사 기록 속에서 끊임없이 등장하나, 단 한 번도 유목제국을 건설해보지 못했다.[1] 그럼에도 나타났다 사라진 수많은 민족들과 달리 끝까지 살아남아 현대에까지 그 이름으로 국가를 세웠다.

키르기스인들의 조상은 원래 시베리아 중부 예니세이 강 상류 삼림지대에서 수렵민 집단으로 생활해 왔다. 이 중 중세에 중앙아시아로 이주한 집단은 오늘날의 무슬림 키르기스인이 되며 러시아의 하카시야 공화국에 잔류하거나 만주로 이주한 이들은 하카스인이 된다.

2. 키르기스인 정착 이전 키르기스스탄 지역사

파일:키르기스스탄 지도.jpg

키르기스스탄은 고산지대에 위치한 국가로 별명이 중앙아시아스위스인데, 전근대 스위스가 가난한 나라였다가 근대 들어 부흥하게 된 것처럼 키르기스스탄 역시 고산지대 특성상 농경이나 도시가 발전하지 못하고[2] 유목 생활이 주로 이루어졌다.

2.1. 고대사

과거 오늘날의 키르기스스탄에 해당하는 지역의 원주민은 인도-유럽어족 유목민, 정확히는 사카족(스키타이계) 유목민이었다. 당나라 기록을 참고하면 서기 7세기 무렵에도 이 지역 주민 대부분은 적발녹안이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고대 중앙아시아 지역에는 아케메네스 왕조헬레니즘 제국의 지배를 받던 스키타이의 일파 마사게타이족 및 그 동쪽의 사카족, 토하라인[3]인도유럽어족 유목 민족들이 주로 거주했다. 인도유럽어족의 청동기 시대 문화인 안드로노보 문화아파나시에보 문화가 동부로 진출하면서 인도유럽어족 백인종과 예니세이어족우랄어족[4] 민족들 간의 통혼이 이루어진 것으로 밝혀졌다.

오늘날의 키르기스스탄 땅에는 당시 샤카족 계열 유목민 오손이 거주했다. 기원전 2세기 무렵 월지가 흉노 연맹에 패해 서쪽으로 이주했으나 오손에게 밀려 박트리아로 남하했다 한다. 서기 5세기 무렵 에프탈 이른바 백흉노족이 이들을 흡수, 정복하고 다시 박트리아 일대로 남하했다. 이후 오호십육국시대선비가 강성해지자 선비에 복속했고, 남북조시대에는 유연에 복속했다. 투르크어족[5]들은 스키타이로부터 기마 유목 문화를 받아들인 후 계속 서진하여 에프탈돌궐 제국 등을 건설했다. 돌궐 제국을 건설한 투르크인이나 철륵인이나 같은 투르크어족으로 정치 연맹체만 달랐을 뿐 많은 공통점을 공유했다.

이후 키르기스스탄 땅에는 튀르기시 부족연맹이 자리를 잡는다. 토번 제국당나라 사이에서 동맹과 배신을 반복하던 이들 부족들은 카를루크 부족 연맹에게 흡수되었다. 이 카를루크 부족들은 고선지가 이끄는 당나라 군대의 서역 원정 당시 당나라 군대를 배신하고 압바스 왕조에 투항하여 탈라스 전투에서 고선지의 군대를 패배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산길을 4백여 리 가다 보면 이식쿨 호(대청지; 大淸池)에 이르게 된다. 둘레는 천여 리에 달하는데 동서로 길고 남북으로는 좁다. 사방이 산에 둘러싸여 있어서 수많은 물줄기들이 교차하며 모여든다. 물은 청흑색을 띠었고 쓴맛과 짠맛을 함께 지니고 있다. 호탕하게 흐르는 물은 큰 파도가 사납게 일어나 물보라를 일으키며 흐른다. 과 물고기가 뒤섞여 살고 있으며 신령스럽고 괴이한 일들이 이따금 일어난다. 그러므로 오고 가는 나그네들은 그 복을 빌며 기도를 한다. 비록 어류가 많으나 감히 물고기를 잡지 않는다.

이식쿨 호에서 서북쪽으로 5백여 리를 가다 보면 소엽수성(素葉水城; Tokmok)에 이른다. 성의 둘레는 6∼7리이고 여러 나라에서 온 외국인 상인들(商胡[6])이 뒤섞여 살고 있다. 땅은 기장보리, 포도에 적합하며 숲은 우거져 있지 않다. 바람이 차서 사람들은 모직 옷을 입는다.

소엽성에서 서쪽으로 4백여 리를 가다 보면 천천(千泉)에 이른다. 천천은 그 땅이 4방 2백여 리에 달하는데, 남쪽으로는 설산을 바라보고 다른 3면은 평지에 접하고 있다. 그 땅은 물이 많아서 비옥하고, 숲은 울창하여 나뭇가지가 4방으로 퍼져 있다. 음력 3월에는 온갖 꽃들이 피어나 아름다운 비단과 같다. 샘이나 연못이 천 곳이나 있어서 천천(千泉)이란 이름이 붙었다. 돌궐의 카간이 언제나 더위를 피해 이곳으로 왔는데, 그 속에는 사슴떼들도 있었다. 그런데 사슴들은 방울과 고리 등으로 갖가지 장식을 했으며, 길이 들어서 사람들과도 잘 어울렸고 놀라 달아나지도 않았다. 카간은 이 사슴들을 사랑하여서 군속들에게 명하기를, 사슴을 살해하면 그 죄를 물어서 용서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런 까닭에 사슴떼들은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다.

천천의 서쪽으로 140∼150리 가다 보면 탈라스성(呾邏私城)에 도착한다. 성 둘레는 8∼9리이고 여러 나라에서 온 외국인 상인들(商胡)이 한데 뒤섞여 살고 있다. 땅과 기후는 소엽과 거의 같다.

남쪽으로 다시 10여 리를 더 가다 보면 작은 외딴 성이 나온다. 이곳에는 3백여 가구가 살고 있는데, 이들은 본래 중국인들이다. 옛날에는 돌궐족에게 약탈당했지만 후에는 마침내 힘을 하나로 모아서 나라를 세워 함께 이 성을 지켰다. 그 성 안의 사람들의 주거나 의복, 행동거지는 돌궐족과 같지만 말이나 의례 등은 여전히 중국의 것을 유지하고 있다.
대당서역기 / 현장[7]

2.2. 중세사

파일:burana-tower-it-is-a.jpg
발라사군 유적지 전경

중세 키르기스스탄의 도시 발라사군은 늦어도 서기 8세기 무렵 소그드인에 의해 건설된 교역 거점 도시로 카를루크 부족 연맹과 그 뒤를 이은 카라한 칸국의 수도였다. 여타 이슬람 도시들처럼 발라사군 역시 수도관과 이슬람식 목욕탕인 함맘을 갖추었으며, 다층 주택들에는 난방 시설이 설치되어 있었다.

카라한 칸국은 이슬람으로 개종한 이후 불교와 마니교를 탄압했으나 기독교는 관용했다. 이 덕분에 중세 키르기스스탄 일대에는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가 번성했던 듯한 유적들이 몇 가지 남아있다. 잘랄아바트 근교에는 성경 욥기에 나오는 인물인 의 성묘가 있으며 오시 근처에는 솔로몬의 무덤이 있는데, 욥이나 솔로몬은 이슬람에서도 유명한 예언자이니까 수피 무슬림들이 조성했다 쳐도, 알려지지 않은 모종의 과정을 거쳐 마태복음의 저자로 알려진 마태의 유골이 이식쿨호 근방의 네스토리우스파 수도원에 안치된 것은 당시 이 지역에 기독교 신도가 많았다는 확실한 증거로 남는다.[8] 왜 마태, 솔로몬, 욥이 키르기스스탄에 묻혀있냐고 물을 수도 있는데 중세시대는 성경에 나온 인물들과 그 분신들의 성묘가 세계 각지 신도들이 있는 곳이라면 그 어디든지 널려있던 시대였다.

한편 카라한 칸국과 종종 교역하던 동방의 요나라여진족들에 의해 멸망했다. 요나라의 왕족 중 한 명이었던 야율대석은 요나라의 최북방 가돈으로 도주하여 난민들을 모아 인근의 키르기스 연맹을 공격했다. 키르기스 공격에 실패한 이후 야율대석은 서쪽으로 진격하여 발하슈 호을 근거지로 삼았고, 이후 카라한 칸국을 공격하여 카슈가르호탄을 정복했다. 요나라 난민들이 건국한 카라 키타이 이른바 서요는 1142년 서쪽으로는 아무다리야 강, 동쪽으로는 서하나이만족과 국경을 맞대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카라 키타이야율대석 역시 발라사군을 정복한 후 크질오르도(견고한 야영장)라는 이름으로 개명하고 수도로 삼았다. 카라 키타이는 카라한 칸국을 속국으로 삼고 코초 위구르로부터 조공을 받았으며 서쪽으로 나아가 셀주크 제국과도 맞붙었다.[9] 전성기를 달리던 카라 키타이는 쿠츨루크가 무슬림들을 박해하면서 내분에 시달리게 되었고 수도였던 크질오르도에서도 무슬림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이 와중에 동쪽에서 온 몽골 군대가 쿠츨루크의 군대를 공격하면서 순식간에 무너졌다. 이후 이 지역은 몽골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한 때 카라한 칸국 그리고 카라 키타이의 수도로 번영하던 발라사군은 무슬림들의 폭동을 쿠츨루크의 군대가 진압하는 과정에서 황폐화되었고, 이후 흑사병이 번지며 폐허가 되었다.

3. 키르기스스탄 정착 이전 키르기스인의 역사

3.1. 고대사

키르기스인은 한자 기록에서는 주로 견곤(堅昆) 혹은 격곤(鬲昆)이라는 이름으로 표기된다. 가장 이른 기록은 사기 흉노열전의 기록인데, 기원전 209년에 흉노의 묵특 선우가 아버지 두만 선우를 죽이고 권력을 장악한 뒤 주변 유목집단들을 병합해 나가는 과정에서 북쪽 바이칼 호 방면으로 혼유, 굴사, 정령, 격곤, 신려 등을 복속했다는 내용에서 등장한다. 기원전 60년 흉노허려권거 선우가 사망한 이후 흉노는 동서로 분열했는데, 동흉노의 호한야 선우내몽골로 내려가고, 외몽골에 남았던 서흉노의 질지골도후 선우는 북방 여러 민족들을 정복하고 다녔다. 이때 오걸의 군대를 동원해서 격곤을 격파했다는 기록에서 다시 한 번 등장한다.

돌궐이 등장한 이후에는 돌궐에 복속되었는데, 돌궐의 3대 무한 카간 때 "서쪽으로 에프탈을 격파하고 동쪽으로는 거란을 패주시켰으며 북쪽으로는 키르기스를 병합하여 새외의 모든 나라를 복속시켰다"는 《주서》(周書)의 기록에서 이를 알 수 있다. 이를 전후하여 6세기 무렵부터 일찍이 튀르크화되었다. 돌궐이 당나라에 의해 멸망한 이후에는, 646년 당에게 격곤 도독부라는 이름으로 복속되어 기미지배를 받았다. 이후 돌궐 제 2제국 시기에는 일테리시 카간에 의해 격파당하고 복속되었다. 위구르 제국이 돌궐 제 2제국을 멸망시키고 중앙아시아의 패자로 등장하자, 다시 위구르에 복속되었다. 계속 격파당한다

3.2. 중세사

위구르 카간국의 알프 빌게 카간이 사망한 뒤 위구르 제국 내부의 권력 다툼 와중에, 840년 카사르 테긴 카간과 대립하던 한 수령이 키르기스인들을 불러들였고, 키르기스 군대는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들어와 카간을 살해하고 위구르 제국의 수도를 점령한 뒤 약탈을 자행함으로써 위구르 제국을 멸망시켰다. 하지만 키르기스인들은 이를 대신하여 새로운 제국을 건설하지 못하고, 다시 자신들의 땅(예니세이 강 상류)으로로 돌아갔다.[10][11] 키르기스인들이 위구르의 중심지를 약탈한 뒤 몽골 고원을 버리고 떠난 것은 그 이후 역사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다. 키르기스의 약탈로 다수의 위구르인들은 몽골 고원을 이탈하여 남쪽과 서쪽으로 이주하는데, 이중 남쪽으로 간 위구르인들은 항복하지 않고 물자를 요구하다가 당군에 의해 학살당해 사라졌고, 방테긴의 지휘 하에 서쪽으로 간 무리 중 일부는 하서회랑에 들어가 하서회골을 세웠으며, 다른 일부는 더 서진하여 고창회골을 세웠다. 이러한 위구르인의 이주는 동투르키스탄, 더 나아가 중앙 유라시아의 튀르크화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또한 위구르 칸국의 멸망 이후, 위구르인들은 몽골 고원밖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키르기스인들 마저 예니세이 강 상류로 돌아가버리자, 몽골 초원에는 힘의 공백이 생겼고, 이에 따라 위구르 제국의 동북부 변경지역에 살던 타타르 부족, 그리고 '몽올실위' 등 몽골계 집단이 몽골 초원 중심부로 이주해들어왔다. 몽올실위는 '몽골'이라는 이름이 역사상 최초로 알려진 사례인데, 바로 여기에서 칭기즈 칸이 출현했다. 즉, 키르기스에 의해 초래된 힘의 공백에 의해, 몽골계 부족들은 비옥한 몽골 초원에 진입할 수 있었고, 칭기즈 칸과 그 후손들의 정복활동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이다.[12]

키르기스 부족들은 1207년 칭기즈 칸의 통일 몽골에 의해 복속되었다. 1260년 몽케 칸의 사망 이후 쿠빌라이 칸아리크부카의 칸위 계승 전쟁에서 아리크부카가 키르기스로 피난하기도 했다.

4. 근세 : 키르기스인들의 키르기스스탄 정착

키르기스인들이 현재의 키르기스스탄의 위치인 톈산 산맥 북방으로 언제 이주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15세기 전반에는 오이라트 연맹의 지배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 제국의 동양학자인 바실리 바르톨트는 오이라트가 모굴 칸국과 전쟁을 할 때 키르기스도 동참하여 모굴리스탄으로 왔다가 1470년대에 전쟁이 끝난 뒤 키르기스스탄 산악 삼림지대 일대에 남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키르기스인들의 유명한 서사시 『마나스』에는 이들이 '칼미크에센 칸'의 공격과 학살에 직면하여, 고향을 떠나 톈산 지방으로 이주했다는 내용이 보인다. 즉, 키르기스인 본인들의 기록에 따르면 1440~50년대 에센 칸 치하 오이라트의 압력을 피해 지금의 위치로 남하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16세기 오스만 제국의 세이피 첼레비(Seyfi Çelebi)라는 사람은 키르기스인들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카슈가르 근처에는 이 외에도 키르기스라는 부족이 있다. 이들은 유목민이며 모굴리스탄 사람들과 비슷한 민족이다. 이들은 규모가 큰 부족으로 은 없고 이라는 수령들이 다스린다

비슷한 시기를 다룬 미르자 하이다르의 『라시드사(Tarikh-i-Rashidi)』의 기록에 따른다면 키르기스인들은 야르칸드 칸국의 압둘 라시드 칸과 서로 공격을 주고 받았다. 야르칸드를 약탈하던 키르기스인들은 준가르 칸국의 공격을 받았고, 많은 키르기스인들이 준가르의 노예가 되어 중가리아 평원의 농장에서 노동을 하고 성벽을 쌓는 일을 하게 되었다. 이슬람을 믿던 야르칸드 칸국과 대치할 당시까지 이슬람 대신 텡그리 신앙 등을 믿던 키르기스인들은, 티베트 불교를 믿는 준가르 칸국의 공격을 받게 된 이후에 이웃 국가나 부족집단들과의 협조를 위해 이슬람으로 개종하기 시작했다. 키르기스 부족들이 수피 이슬람으로 개종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무렵부터이다.

청나라가 준가르 홍타이지국을 정벌할 때 백산당 지도자인 호자 형제 부르하누딘과 지한 호자 형제가 카슈가르에서 청나라 군대와 대치하면서 청군을 성공적으로 포위했을 당시, 키르기스인 전사들이 카슈가르를 약탈하면서 호자 형제의 군대를 공격했고, 결국 호자 형제의 군대는 포위를 풀고 바다흐샨으로 도주했다. 도주한 호자 형제는 바다흐샨에서 피살되어 건륭제에게 수급이 인도되었다.

상술한 것처럼 준가르 홍타이지국은 키르기스인 전쟁 포로들을 잡아 농노로 이용하거나 요새를 축조하는 노동을 시켰는데 이들은 준가르 멸망 이후 해방되었다. 고향에서 가깝지 않은 장소에서 준가르 홍타이지국의 포로가 된 다른 여러 민족들과 살아가는 동안 이들은 기존 키르기스어와 문화를 잃어버리고 중가리아 평원에서 농사를 짓게 되었는데, 이들은 타란치라고 불렸다. 이 외에도 청나라는 준가르 칸국을 정벌하는 과정에서 키르기스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키질수 지역을 정복했고, 해당 지역의 키르기스 유목민들은 청나라의 신민으로 편입되었다.

준가르족들이 청나라의 학살로 사실상 멸족당하자, 청나라가 장악하지 못한 준가르 칸국 서부 영토를 두고 키르기스인들과 카자흐인들 사이에서 여러차례 접전이 벌어졌다. 하지만 통일된 부족 연합체를 이루지못한 키르기스 부족들은 카자흐 칸국과의 전쟁에서 힘이 소진된 이후 코칸트 칸국에게 차례로 병합당하기 시작했다. 페르가나 계곡 일대의 키르기스 부족들은 청나라에 편입된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 코칸드 칸국에게 합병당했다.

5. 근대

키르기스인들은 주변 무슬림 민족들과 생계 방식이 달랐다. 동쪽의 위구르인들과 서쪽이 우즈베크인들은 농경을 주로 했고, 남쪽의 타지크인들과 파미르인들은 반농반목 경제였다. 북쪽에 이웃한 카자흐인들은 대초원에서 유목 생활을 한 것과 다르게 키르기스인들은 고산 삼림지대에서 유목 생활을 유지했다. 근대 카자흐 유목민들이 러시아에서 내려온 타타르 무슬림들의 영향으로 급속히 근대화될 당시에도 키르기스인들은 전근대 그대로의 유목 생활을 유지했다.

1864년 신강무슬림 봉기 시기에도 많은 키르기스인들이 휘말렸는데 카슈가르 지역에서 키르기스의 수령 시디크와 퉁간(Tungan)[13]들이 연합하여 봉기한 후 코칸트에서 백산당계 호자 부주르그를 초치했다.

이후 얼마 안가 중앙아시아로 세력을 확장하던 러시아 제국에 코칸드 칸국을 비롯한 키르기스스탄 전역을 점령했다. 러시아 제국은 여세를 몰아 위구르인 봉기가 일어난 동튀르키스탄의 동부 영토 상당부분을 병합했고, 1881년 청나라와 러시아 제국 사이에 체결된 상트 페테르부르크 조약을 통해 해당 지역의 영유권을 인정받는다. 이를 통해 과거 야쿱 벡 정권 이전 청에 귀속되었던 키르기스인 상당수가 러시아 제국에 귀속되었다.

1858년 러시아 군대에서 복무하던 쇼칸 왈리카노프라는 이름의 카자흐인 장교는 키르기스 부족민들로부터 키르기스인들의 구전 역사 서사시인 『마나스』를 듣고 기록하여 러시아어로 번역해 출간했다. 왈리카노프는 서구식 교육을 받고 이슬람에서 배교했지만 이슬람을 배교한 사실과는 별개로 범튀르크주의와 카자흐 민족주의에 심취한 사람이었고,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의 구전 문학을 발굴하고 알리는 일에 적극적이던 사람이다. 쇼한 왈리카노프는 듣보잡 카자흐인 군인이 아니라 나름 도스토예프스키와도 친분이 있던 유명 인사였고, 그의 소식이 알려지자 러시아 제국의 민속학자들은 곧 공책을 들고, 그리고 소련 시대의 민속학자들은 녹음기를 들고 키르기스인들의 마을을 찾아다니며 마나스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키르기스의 마나스 낭독자들이 이 마을 저 마을을 돌아다니며 관중들 앞에서 마나스를 암송하면서, 키르기스인들에게 부족의 가치를 확인시켜줌과 동시에 용맹과 도덕성을 교육하는 역할도 맡았다는 점을 주목했다.

여담으로 과거 러시아에서는 카자크카자흐를 쉽게 구분하기 위해서, 카자흐인들을 키르기스라고 부르던 편이었는데 이 때문에 역사 기록에 나오는 키르기스가 카자흐인을 지칭하는 단어인지 키르기스인들을 지칭하는 단어인지 혼동하기 쉽다. 오늘날 학계에서는 혼동을 피하기 위해 카자흐인들을 "키르기스 카자흐"라고 지칭하고 있다.

6. 현대

러시아 제국 투르키스탄에 속하게 된 키르기스스탄 일대는 러시아 혁명 이후에는 소련의 지배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1936년부로 키르기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들어선다. 스탈린의 대숙청은 키르기스스탄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1937년 스탈린에 의하여 민족주의 인사 137명이 학살당해 비밀리에 매장되는 일이 있었다. 이들의 시신은 1991년에서야 발굴되었는데, 키르기스스탄의 경우 몇몇 목격자가 계속 입으로 그 장소를 알렸다가 소련에서 독립하자마자 시신을 파내고 성지화했다. 20세기 중반에는 중국 내 문화대혁명대약진 운동의 여파로 중화인민공화국 내 키르기스인 상당수가 소련 영토로 탈주했다.

1991년 소련에서 독립한 후 2005년 튤립 혁명이라 불리는 민주화 혁명으로 아스카르 아카예프 독재정권이 축출되고 쿠르만베크 바키예프가 키르기스스탄 대통령이 된다. 2008년 지진이 일어나 69명이 사망했다. 하지만 이 당시 보여진 정부의 무능한 대비와 여전히 비리가 넘치는 현실. 그리고 우즈베크인들이 대거 와서 경제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에 여론이 분노했다.

결국 2010년 4월 7일, 바키예프의 오른팔이었던 로자 오툰바예바의 주도 하에 다시 민중봉기가 일어나 열두 시간 만에(...) 바키예프 정부가 뒤집어지고 키르기스스탄 대통령은 망명했다. 더불어 두 달 후인 6월, 남부 지방 대다수 키르기스인들이 우즈베크인들을 마구 집단공격하면서 우즈베키스탄과 갈등이 크게 벌어졌다.

2010년혁명이후 헌법 개정을 통하여 중앙아시아 국가로는 최초로 의원내각제를 도입했다. 여성 임시 대통령 로자 오툰바예바는 이후 각종 평화상을 수상한다.

2011년 12월 1일, 중앙아시아 최초의 민주적인 절차를 거친 대통령 선거로 알마즈베크 아탐바예프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대통령은 명예직에 가깝고, 총리가 행정 관련 업무와 모든 권한의 위임 등을 차지하고 있는 내각의 실질적인 수장이다.

2015년 5월 1일에는 경제부 장관을 역임한 바 있는 테미르 사리예프가 총리로 취임했다. 2016년 4월 13일 총선에서는 독립당과 소론바이 젠베코프가 이김으로써 정권 이양을 했으며 그는 전 총리의 실권을 그대로 물려 받아 실질적인 의회의 수장이 되었다.

2016년에, 2010년에 작성된 헌법 원본이 사라지는 소동[14]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알마즈베크 아탐바예프가 2016년 12월 11일에 치러진 국민투표로 개헌이 통과됨에 따라 자신의 임기 연장을 노리려고 한다는 것이 점점 우려되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2017년 대통령 선거에서 아탐바예프 대통령은 출마하지 않았고, 같은 당 소론바이 젠베코프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2017년 12월 1일부터 임기를 시작했다.

하지만 그 후에 알마즈베크 아탐바예프 전 대통령과의 갈등이 있더니 2019년 8월에 전격 체포했다. 이후 재판에서 징역 11년형을 선고했다. 이후, 하술하게 될 사건 의해 석방되었다.#

2020년 10월 4일에 총선에서 집권 여당이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유럽안보협력기구(OSCE)에 의하면 선거가 후보자들이 자유롭게 선거운동을 하는 가운데 치러졌으나, 유권자 매수가 심각하게 이루어졌다고 밝혔고, 야당 측 참관인들은 투표소로 유권자들을 미니버스로 실어나르거나 투표소에 범죄단체를 동원해 야권 참관인을 공격하는 등의 부정 행위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총선 직후 야권에 의해 선거 과정의 부정을 규탄하는 반정부시위가 발생하여 시위대가 대법원과 의회를 점령해 방화로 1명이 사망했다.##

2020년 10월 6일 키르기스스탄 중앙선관위에서 선거결과를 무효화하기로 결정했다. 기사 대통령 탄핵 철자에 들어간다.# 결국 9일. 대통령이 사의 표명했다.# 15일에 사퇴를 했다.#

12월 총선, 2021년 1월 대선을 실시한다.#

2021년 1월 10일에 대선이 실시됐다.# 대선에서 사디르 자파로프 후보가 당선됐다.#


[1] 후술할듯 제국설도 있지만 제국설 지지자들도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고 본다.[2] 키르기스스탄에서 역사가 오래된 대표적인 도시 오시잘랄아바트 모두 우즈베키스탄페르가나 계곡 근교 비교적 해발고도가 낮은 곳에 위치한 도시들이다.[3] 언어학 상으로는 켈트족과 동계에 해당하는 민족이다.[4] 고대에는 투르크어족과 매우 밀접한 관계였다.[5] 영어로 Turkish tribes라고 한다.[6] 현장의 대당서역기에서 胡라는 글자는 대개 소그드인이나 여타 중앙아시아 백인을 의미한다.[7] 번역본 출처 : #[8] 출처 : 잃어버린 계몽의 시대 / 프레더릭 스타[9] 이로 인해 벌어진 전투가 바로 카트완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아흐마드 산자르가 이끄는 셀주크 제국군을 패퇴시키면서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게 된다.[10] 제국을 건설하였다는 제국설도 존재한다.다만 제국설 지지자들도 제국이 그리 오래가지 못하고 철수했다고 생각한다.[11] 이는 때마침 몽골 고원에 닥친 혹한 및 폭설과 같은 자연재해와도 관련있다. 혹한과 폭설로 인해 가축들이 집단으로 폐사한 것. 몽골어로는 이런 종류의 재해를 조드라고 하는데, "전사는 화살 한 방에 죽고, 부자는 조드 한 번에 망한다"는 속담이 몽골에 있을 정도로 그 위력은 엄청나다.[12] 참고로, 후일 몽골 제국을 세우는 칭기즈 칸의 보르지긴 씨족이 본디 키르기스부에서 나왔다는 설도 있다.[13] 당시 신강 지역에 있었던 한회(漢回), 즉 무슬림화된 한족(漢族)이다. 현대에는 둥간(Dungan)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 지방에서 집단을 이루어살고 있다.[14] 한국 또한 제헌 헌법 정본을 분실하여 지금까지 찾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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