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아랍어 عانة시리아어 ܐܢܐ
영어 Anah / Ana
이라크 서부의 도시. 히트에서 서북쪽으로 120km, 시리아와의 국경 관문인 알카임에서 동쪽으로 60km 떨어져 있다. 유프라테스 강 중류를 막은 하디타 댐으로 인해 형성된 카디시야 호 남안에 위치하며, 인구는 약 2만명이다. 시가지는 본래 더 북쪽에 있었으나 1987년 댐 완공으로 현재의 위치로 이전되었다. 지명은 메소포타미아 문명기의 여신 아나트에서 유래되었을 정도로 유서가 깊다. 중세 시기 서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 중 하나였던 아나 미나렛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아나 미나렛은 2006년 이라크 내전기와 2014~17년 다에시 강점기에 파괴되었다.
2. 역사
11세기에 세워져 2006년, 2016년 파괴된 후 재건된 높이 28m의 아나 미나렛 |
기원전 18세기 마리 국왕 지므리-림 서신에서 처음 하나트로 기록되었고, 함무라비 시기 바빌론령 수후 (현 팔루자) 주의 일부였다. 기원전 9세기 아시리아 제국령이 되었고, 기원전 800년경 마리와 수후에서 자립한 샤마쉬-레샤-우수르 정권의 일부가 되기도 했다. 페르시아 제국기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와 동생 키루스의 내전에서 후자의 편을 들었던 1만의 그리스 용병대가 일대에서 재정비한 후 쿠낙사 전투에 임했다.
헬레니즘기 하나트는 아나토 (Άναθω)로 불렸고, 라틴식으로는 아나타 (Anatha)로 표기되었다. 사산 제국기 아나타는 서북쪽 약 150km 거리의 로마 제국령 두라 에우로포스 및 키르케시움을 마주하는 이란측 도시로써, 천혜의 조건인 하중도에 위치한 덕에 쉽게 요새화되었다. 363년 율리아누스의 페르시아 원정 당시 로마군은 아나타에서 첫 저항을 맞닥뜨리렸다. 이때 로마측 페르시아 황족 호르미즈드가 수비대에 안전을 보장하자 수비대장 푸세이가 항복, 호민관 계급이 주어졌다. 율리아누스는 주민들을 시리아로 이주시키고, 도시를 파괴한 후 동진하였다.
2.1. 중세
7세기 이슬람 정복 후 일대는 이슬람 제국령이 되었고, 아랍 지명인 아나로 불리게 되었다. 1차 피트나 당시 시리아 총독 무아위야를 응징하기 위해 서진하던 칼리파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의 부관 지야드와 슈라이흐는 아나에서 유프라테스 도하를 거부당하기도 했다. 1058-59년 겨울, 부와이 왕조 휘하에 있다가 파티마 왕조에 복속한 튀르크 군벌 아불 하리스 아르슬란 알 무자파르 알 바사시리가 셀주크 제국의 내전을 틈타 바그다드를 기습 점령하고 압바스 칼리파 알 카임을 아나에 유폐했으나 1059년 가을 토그릴 1세가 현지 우카일 왕조를 회유해 구출하였다.뒤이은 우카일 왕조 시기 아나에는 28m 높이의 미나렛이 세워졌다. 압바스 왕조를 거쳐 14세기 무렵 일 칸국 하에서 아나는 아시리아-페르시아 교회의 대주교구가 세워졌다. 14세기의 무스타피 등 중세 지리가들은 아나가 번성하는 상업 도시이고 대추야자와 정원으로 유명하다고 기록하였다. 시인들은 또한 아나의 포도주를 찬양했다. 일 칸국 시기부터 일대는 중앙 권력이 잘 미치지 않았고, 14-17세기 무렵 아나는 아랍 부족들의 거점이었다. 특히 1555년부터 아부 리쉬 베두인 부족의 중심지였고, 이들은 오스만 제국에게서 산작 베이 (총독)로 임명되는 등 협조했다.
1574년 아나를 방문한 레온하르트 라울로프는 (배로만 접근 가능한) 섬의 구시가지에 튀르크 인들이, 강변 중 하나의 더 큰 신시가지에 아랍인들이 거주한다고 기록했다. 1610년에 방문한 테헤이라와 델라 발레는 강의 양안 모두에 시가지가 있으며, 일대의 주요 아랍 도시이고 스코트인 조지 스트라챈이 현지 에미르의 주치의로 일하며 아랍어를 배운다고 기록했다. 또한 일부의 태양 숭배자 (알라위파)도 거주하며, 팔미라 ~ 바그다드 사이의 교역로를 통제하는 중요 거점이라 덧붙였다.
2.2. 근대
1837년 아나의 유프라테스 강변 유적 묘사도
근대화에 나서는 1750년경 무렵에야 오스만 조정은 아나에 임시 행정 기구를 설립했고, 19세기 후반에는 바그다드 빌라예트 산하 카자 (읍)의 치소가 되었다. 19세기 초반 아나를 방문한 프랑스의 생태학자 G.A. 올리비에는 현지 에미르 산하에는 25인의 병력 뿐이고, 베두인 습격을 막지 못하여 주민들은 거의 매일 도망다니며 시가지는 강과 바위 언덕 사이의 5km 가량 뻗은 길가에 듬성듬성 지어진 집들이 전부라 묘사하였다. 1835년 W. F. 아인스워스 등의 영국 탐사대는 시가지 북서부에는 아랍 무슬림, 중앙부에 기독교도, 동남부에 유대인이 거주한다고 기록했다. 같은해 증기선 티그리스가 과거 율리아누스가 폭풍을 겪었던 곳인 아나 바로 북쪽에서 풍랑을 만나 침몰하는 사고가 있었다.
1836년 영국 해군 탐사대는 아나에 가옥 1800채, 모스크 2개, 수차 16개가 있었고 섬에 세워진 모스크의 미나렛이 특히 오래되었다고 기록했다. 19세기 중반 시내 주택들은 과실수 정원들로 구분되었고, 강변 섬들도 과수원으로 활용되었다. 가장 동쪽의 섬에는 폐허가 된 성채가 있고 고대 아나타 유적은 강의 북안에 2km 가량 펼쳐져 있었다. 또한 강을 경계로 북안에서는 올리브, 남안에서는 대추야자를 길렀다. 1890년경부터 오스만 정규군이 배치되며 주민들은 더이상 베두인들에게 보호세 (후와)를 내지 않게 되었다. 20세기 초엽 주민들은 주로 거친 면직물 제조업에 종사했고, 1909년 기준 아나에는 2천채의 주택에 약 1만 5천여명이 거부했다. 주민 대다수는 아랍계 순니 무슬림이었고, 시가지 남쪽에 소수의 유대인이 거주했다.
2.3. 근현대
세계 1차 대전 중인 1918년, 영국군이 도시를 점령했고 1922년 이라크 왕국령이 된 후 라마디를 중심으로 한 둘라임 리와 산하의 카다에 편성되었다. 아나 카다 하에는 히트, 알카임, 줍바 등이 소속되었다. 아나를 기준으로 서쪽에는 아니자 계열 베두인, 동쪽에는 자르바 계열의 샴마르 베두인 부족이 주로 거주했다. 1921년까지 아나와 서북쪽의 인근 도시인 라와 주민들과의 케케묵은 분쟁이 외교적으로 중재되었다.수차 (노리아스)로 인해 관개되는 대추야자 숲 사이와 강변 섬들에 집들이 띄엄띄엄 있는 아나는 전원적인 풍경으로 인기가 있었다. 주민 중 여성은 미모와 면직/모직물 제조 실력으로 유명했고 남성들은 선원 혹은 바그다드로의 물 운송에 종사했다. 그중 다수는 주거지 혹은 일자리를 찾아 타지로 이주하기도 했다. 1946년까지 8개의 학교가 세워지는 등 아나는 교육 수준이 높은 편이었다.
1980년대 사담 후세인은 수자원 확보를 위해 여러 댐 간설을 추진했다. 그 일환으로 1984/85년경 하디타 댐 건설로 수위가 올라가자 기존 시가지와 섬들이 수몰되었고, 도시와 옛 미나렛은 강 남안의 언덕으로 옮겨졌다. 이렇게 세워진 새 시가지가 현재의 아나이다. 그 과정에서 다수의 주민이 실향민이 되어 바그다드, 라마디, 하디타 등지로 이주했다. 2014년 다에시가 도시를 점령했으나 2017년 9월, 이라크 군이 이틀 간의 전투 끝에 탈환하였다. 2023년 들어서는 전기 공급망 개선이 이루어지고 있다.
3. 아나 미나렛 (مئذنة عانة)
아나 미나렛의 옛 모습들 |
우카일 왕조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1836년 아나를 방문한 영국 해군 탐사대는 가옥 1800채, 모스크 2개, 수차 16개가 있었고 섬에 세워진 모스크의 미나렛이 특히 오래되었다고 기록했다. 동행한 학자는 주민들이 11세기라 하지만 12세기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이라크 정부는 1935, 1963, 1964년에 걸쳐 미나렛을 보수하였다. 이라크인 학자 무아야드 시이드 박사는 팔각 몸체에 양각 기법으로 64개의 벽감을 두었고, 일부 벽감은 깊히 파여 감춰진 것처럼 보인다고 분석했다.
2016년, 2022년에 복원한 모습
1984/85년경 하디타 댐으로 수위가 올라가자 미나렛은 28개 조각으로 해체된 후 새 아나 시가지 인근에 28m 높이로 조립되었다. 이라크 내전 중인 2006년, 미상의 세력이 미나렛을 완전 폭파해버렸다. 2013년까지 재건되었으나, 2016년 다에시가 또다시 파괴하여 아나 탈환 후 2022년까지 다시 복원되었다. 2차 복원 시에는 옛 석재를 일부 재사용하여 역사적 가치를 더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