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울루스 플라우티우스 라틴어: Aulus Plautius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제국 |
가족 | 아울루스 플라우티우스(아버지) 비텔리아(어머니) 퀸투스 플라우티우스(형제) 플라우티아(누이) 폼포니아 그라이키나(아내) 아울루스 플라우티우스(아들?) 플라우티우스 라테리누스(조카) |
직업 | 로마 제국 집정관 |
로마 제국 집정관 | |
임기 | 29년 |
전임 | 가이우스 푸피우스 게미누스 루키우스 루벨리우스 게미누스 |
동기 | 루키우스 노니우스 아스프레나스 |
후임 | 루키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마르쿠스 비니키우스 |
1. 개요
로마 제국의 집정관. 클라우디우스의 브리타니아 침공에서 군공을 세웠다.2. 생애
아울루스 플라우티우스|기원전 1년 집정관 아울루스 플라우티우스와 미래의 로마 황제 비텔리우스의 친척인 비텔리아의 아들이다. 형제로 36년 집정관 퀸투스 플라우티우스, 19년 집정관이자 39년 시리아 총독 푸블리우스 페트로니우스의 아내인 플라우티아가 있었다.29년 루키우스 노니우스 아스프레나스와 함께 집정관이 되기 이전의 행적은 알려진 바 없다. 이후 클라우디우스 1세 치세 초기에 판노니아 총독으로 부임했다. 해당 지역에서 발견된 비문에 따르면, 그는 총독으로서 트라이에스테와 리예카 사이의 도로 건설을 감독했다고 한다. 43년 클라우디우스의 브리타니아 침공 원정에서 총사령관으로 선임되었다. 당시 원정에 동원된 병력은 4개 군단(제2 아우구스타 군단, 제4 히스파니아 군단, 제14 게르마니아 군단, 제20 발레리아 빅트릭스 군단) 2만 명과 비슷한 수의 보조병이었다.
플라우티우스는 갈리아 북부 해안에서 바다를 건너는 걸 꺼린 병사들의 봉기에 직면했지만, 클라우디우스 1세의 해방노예이자 비서인 나르키수스의 도움으로 진압했다. 그 후 현재의 켄트주에 상륙한 그는 카투벨라우니족의 지도자 카라타쿠스와 형제 토고둠누스의 브리튼군과 메드웨이 강변의 로체스터 부근에서 이틀 동안 교전했다. 이 전투에서 군단장 가이우스(또는 그나이우스) 호시디우스 게타가 생포될 뻔했지만 부하들의 분전으로 구출되었고, 로마군이 우월한 전투력을 앞세워 대승을 거두었다. 토고둠누스는 전사했고, 카라타쿠스는 템스 강쪽으로 후퇴했다. 로마군은 이들을 추격해 에식스 부근에서 카투벨라우니족을 다수 살육했다.
그 후 플라우티우스는 공세를 중단한 뒤 클라우디우스 1세에게 마지막 공세를 이끄는 데 합류해달라고 요청했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플라우티우스는 토고둠누스가 전사한 것에 분노한 브리튼인이 대대적인 복수를 할 걸 우려해서 클라우디우스 1세에게 지원을 요청했다고 기록했다. 반면 수에토니우스는 클라우디우스 1세가 단 한 번도 전투에 참전하지 않은 채 브리튼인에게 항복을 받아냈다고 기록했다. 디오 카시우스는 클라우디우스 1세가 제국의 먼 지역에서 전투 코끼리를 가져왔으며, 토착민들의 반란을 막을 만한 중무기도 가지고 왔다고 서술했다. 황제가 도착하자, 브리타니아 남동부의 부족들을 이끌던 11명의 지도자들이 황제에게 귀순했다.
한편 카라타쿠스는 브리간테스(오늘날 요크셔)의 땅으로 도망쳤으나, 브리간트 여왕 카르티만두아는 그를 쇠사슬로 묶고 로마군에게 넘겨줬다. 클라우디우스 1세는 카라타쿠스를 수도 로마로 압송한 뒤 개선식을 거행했다. 이후 플라우티우스는 초대 브리타니아 총독이 되어 47년까지 역임하다가 오스토리우스 스카풀라에게 총독직을 물려준 뒤 로마로 귀환하여 갈채 행렬을 받았고, 클라우디우스 1세와 함께 카피톨리누스 언덕으로 걸어갔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아울루스 플라우티우스는 16년 집정관 가이우스 폼포니우스 그라이키누스의 딸 폼포니아 그라이키나와 결혼했다. 폼포니아 그라이키나는 43년 발레리아 메살리나가 클라우디우스 1세를 부추겨서 자신의 친적이자 티베리우스 황제의 손녀인 율리아 리비아를 근친상간과 부도덕한 행위를 저지른 혐의로 처형하자, 클라우디우스 1세에게 공개적으로 항의하고 40년이 넘도록 그녀를 위해 애도했지만 처벌받지 않았다. 57년엔 "외국의 미신"을 신봉한다는 혐의로 기소되었지만 무죄 판결을 받았는데, 일각에서는 그녀가 기독교로 개종했다는 걸 암시한다고 주장했고, 고고학자 바티스타 데로시는 로마의 성 칼리스토 지하묘지에서 발견된 비문에서 "폼포니아"라는 이름이 적힌 것을 근거로 폼포니아가 기독교로 실제로 개종했고 이 묘지를 기증한 것으로 알려진 성 루시나가 폼포니아의 세례명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현대 학계에서는 당시 로마 시엔 기독교 외에도 미신으로 간주된 수많은 소수 종교 집단이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정말로 기독교 신자인지는 불확실하다고 본다.
아울루스 플라우티우스와 폼포니아 그라이키나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는 알려지지 않았다. 일부 학자들은 소 아그리피나와 불륜 관계를 맺었다가 처형된 아울루스 플라우티우스가 그들의 아들일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다른 학자들은 이 인물은 아울루스 플라우티우스의 형제인 퀸투스 플라우티우스의 아들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조카인 플라우티우스 라테라누스는 발레리아 메살리나와 불륜 관계를 맺다가 48년에 메살리나가 몰락한 뒤 그녀와의 관계가 들통나서 처형될 뻔했지만, 삼촌의 뛰어난 공적 덕분에 용서받았다. 그 후 65년에 네로를 타도하기 위해 피소 음모에 가담했다가 처형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