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블리우스 아티우스 바루스 라틴어: Publius Attius Varus | |
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45년 3월 17일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히스파니아 속주 문다 |
지위 | 평민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푸블리우스 아티우스(아버지) |
참전 | 카이사르의 내전 |
직업 | 로마 공화국 법무관 |
[clearfix]
1. 개요
로마 공화국의 군인, 정치인. 카이사르의 내전 시기 아프리카 총독으로서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맞섰다. 탑수스 전투 후 히스파니아 속주로 피신한 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휘하에서 카이사르에 대적했으나, 문다 전투에서 전사했다.2. 생애
평민 집안 출신이었다고 하며, 아버지는 푸블리우스 아티우스다. 기원전 53년 이전에 법무관을 역임했을 것으로 보이나, 자세한 행적은 정치 경력이 전해지지 않아 확실하지 않다. 기원전 52년에 전직 법무관으로서 아프리카 총독을 맡았던 건 분명하다. 기원전 49년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하자, 그는 상당한 병력을 이끌고 피케니움 일대에 주둔했다. 그러나 카이사르가 접근해오자 주민들이 "우린 카이사르와 싸우고 싶지 않으니 여길 떠나라"라고 요구했고, 그는 어쩔 수 없이 아풀리아에 있는 폼페이우스와 합세했다.폼페이우스가 아드리아 해를 건너 발칸 반도로 건너갈 때, 그는 별도로 아프리카로 가서 폼페이우스군을 위한 곡물 공급로를 확보했다. 또한 카이사르의 예상되는 침공에 대비하고자 2개 군단을 추가로 소집했으며, 누미디아 왕 유바 1세와 동맹을 맺었다. 카이사르는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를 아프리카에 보내 바루스를 물리치게 했다. 그는 코르피니움 공방전 후 카이사르에 넘어간 군대를 이끌고 우티카 근처에 성공적으로 상륙했다. 바루스는 즉시 군대를 이끌고 그와 대적했으나, 크게 패하고 퇴각했다.
바루스의 장교인 섹스투스 퀸틸리우스 바루스가 적군에 접근하여 "그대들은 폼페이우스를 위해 싸우겠다고 맹세했는데, 어째서 카이사르를 위해 복무하는가?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맹세를 지켜라."라고 요구하자, 코르피니움 공방전 때 복무했던 장병들이 동요했다. 이에 쿠리오가 전군을 집결시킨 뒤, "카이사르가 이기고 있고 폼페이우스는 지고 있는데 어째서 이기는 편을 버리고 지는 편에 들어가려 하는가? 이번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카이사르가 그대들에게 은총을 베풀 것이니, 나를 믿고 끝까지 따르라"라고 연설하여 군심을 다잡았다.
이후 바루스는 누미디아 기병대를 파견해 적을 공격하게 했으나, 쿠리오가 파견한 게르만 기병대가 누미디아 기병대와 격돌해 대승을 거뒀다. 그 후 쿠리오는 대대적으로 공격해 바루스의 군대를 크게 섬멸했고, 바루스는 본거지로 도주했다.(우티카 전투) 잇따른 승리에 자만해진 쿠리오는 잘못된 정보를 바탕으로 누미디아 왕 유바 1세의 분견대로 생각되는 부대를 공격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유바 1세의 본군이 인근에 매복하고 있었고, 쿠리오는 초반의 승리 후 곧 포위되었다. 쿠리오는 휘하 병력이 몰살당하자 "카이사르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다"라는 말을 남긴 뒤 전사했다. 가이우스 아시니우스 폴리오와 가이우스 카니니우스 레빌루스 등이 이끄는 잔여 병력만이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지고 시칠리아로 피신했다.
기원전 48년 파르살루스 전투 이후, 메텔루스 스키피오, 티투스 라비에누스, 루키우스 아프라니우스,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마르쿠스 페트레이우스, 그리고 소 카토 등은 전투를 이어가기 위해 아프리카로 도주했다. 바루스는 카토의 주장에 따라 메텔루스 스키피오에게 최고 지휘권을 넘겨주고 부관을 맡았다. 그는 폼페이우스 함대를 이끌었는데, 기원전 46년 4월 탑수스 전투에서 참패한 뒤 히스파니아로 피신했지만, 하데스의 카이사르파 제독 가이우스 디디우스에게 카르테이아 해전에서 참패한 뒤 배를 버리고 육지로 달아났다. 기원전 45년 3월 17일 문다 전투에 참전했다가 티투스 라비에누스와 함께 전사했고, 그와 라비에누스의 수급은 카이사르에게 인도된 후 매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