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8B0000><colcolor=#FECD21> 이름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클레안데르 (Marcus Aurelius Cleander) |
출생 | 미상 |
사망 | 190년 |
직위 | 근위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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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해방노예, 침실시종, 근위대장. 세야누스, 티겔리누스, 가이우스 님피디우스 사비누스, 퀸투스 아이밀리우스 라이투스, 에클렉투스, 가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우티아누스 등 제정 시대의 대표 간신 중 당대, 후대 로마인에게 세야누스, 티겔리누스, 라이투스, 플라우티아누스와 함께 최악의 인물로 반드시 거론된다. 최악의 인물로 평가받은 이들 네 사람과 비교할 경우, 현대에 이르러 밝혀진 진실만 놓고 보면, 세야누스와 동급이라고 재평가 받고 있다. 간단히 말하면, 만악의 근원 내지 간신의 전형.프리기아 출신의 그리스인 해방 노예로 이름의 뜻은 청소부일 정도로 비천한 집안 출신이다. 운 좋게 노예시장에서 황실에게 팔린 뒤, 특유의 교활함과 빠른 눈치로 자유를 얻었다. 이후 해방노예 신분의 관료로 재임용되어, 온갖 악행을 벌였다. 그는 궁중 음모로 모든 경쟁자를 제거하고, 근위대장 자리를 차지한 뒤, 콤모두스 황제의 아내 브루티아 크리스피나 황후에게 간통죄를 뒤집어 씌워, 콤모두스 이름으로 추방시켰고, 라이투스, 에클렉투스와 공모해, 콤모두스의 명을 위조해 크리스피나를 암살했다. 하지만 이보다 심각한 문제는 그가 일가족 전체와 함께 근위대장 재임기간 내내 매관매직을 공개적으로 벌여 제국의 공직 체계를 혼란에 빠뜨리고, 행정을 마비시키다시피 한 일이었다. 따라서 그가 벌인 악행으로 이탈리아 농촌 경제는 빈곤, 기아로 문제가 심각해졌다. 190년 4월 19일 벌어진 로마 폭동 속에서 위기를 느낀 콤모두스 황제의 명으로 아내, 아들들과 함께 처형된 뒤 비참하게 몰락했다.
2. 생애
라틴어식 표기에 따라 클레안데르로 알려져 있으나, 그리스인이기 때문에 헬라어로는 클레안드로스(Κλέανδρος)[1]로도 불린다. 프리기아 출신으로, 이름 클레안데르는 '청소부'를 뜻한다. 동시대 원로원 의원이자 같은 아나톨리아 반도 출신인 디오 카시우스의 증언에 따르면, 본래는 짐꾼 노예로 로마에 팔려갔다가 운 좋게 황실에서 사들여 황궁에서 노예 생활을 하게 됐다고 한다. 영리하고 성실한 까닭에 궁정의 노예였다가 해방된 후, 옛 주인이자 파트로누스인 안토니누스 가문에게 프라이노멘 '마르쿠스'와 노멘 '아우렐리우스'를 하사받고, 로마 라틴식 이름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클레안데르를 취하게 됐다.[2] 해방인이 된 이후부터는 대개의 황궁 해방노예들처럼 황궁 관료 생활을 했는데, 그는 콤모두스 황제의 비서로 일했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말년부터 이미 황궁의 해방노예들 중 상당한 지위까지 올랐고, 182년경 콤모두스의 애첩 중 한명인 그리스인 해방노예 다모스트라티아(데모스트라티아)와 결혼했다. 동시대 원로원 의원 디오 카시우스의 기록이나 일부 학자들의 발표에 따르면, 클레엔데르는 콤모두스가 총애한 시종이나 당시 근위대장들인 푸블리우스 타루테니우스 파테르누스, 페렌니스 모두에게 거만한 태도로 원한을 산 사오테루스가 다툼 중 암살되는 일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사오테루스를 잃고 충격에 빠진 콤모두스에게 접근해, 당시 비어 있던 침실시종장 자리를 꿰찼다고 한다. 그는 이후 콜로세움 암살미수 사건 또는 182년의 음모로 불린 사건의 혼란을 틈타, 단독 근위대장에 올라 권력을 쥐게 된 페렌니스 등장 속에서 페렌니스를 쳐내고, 프라이토리아니를 이끌면서 권력을 움켜쥘 야망 속에서 음모를 일찌감치 꾸미기 시작했다고 디오는 적고 있다.
185년, 오늘날의 잉글랜드, 웨일스 일대인 브리타니아에서 로마군 병사들이 항명한 사건이 벌어질 당시, 업무를 거의 놓고 있던 콤모두스에게 페렌니스가 반역을 한다는 것을 보고하는 식으로 근위대장 페렌니스가 반역죄로 아들들과 함께 처형되게 일을 꾸몄다고 한다. 이후, 클레안데르는 콤모두스의 비위를 맞추면서, 침실시종장에서 단독 근위대장으로 발탁되었다. 그는 주군의 향략을 돕고 개인적으로도 막대한 돈을 벌기 위해 원로원, 군 지휘관, 총독, 집정관 등 수많은 관직을 공개적으로 판매했다. 디오 카시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그가 몰락하기 직전이던 190년 한해에만 25명에 달하는 집정관이 선임되었다고 한다. 부패 외에도 클레안데르는 다양한 궁중 음모를 꾸며, 자신에게 위협이 될 사람들을 쫓아냈다. 그는 선황이 선정한 고문단 중 한명인, 원로원 의원이자 장군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에게 죄를 덮어 씌워, 반역재판에 회부시키는 일을 꾸몄다. 동시에 콤모두스 후계 생산을 방해할 목적 또는 콤모두스, 브루티아 크리스피나 부부 사이를 이간질해 188년 브루티아 크리스피나 황후를 카프리 섬으로 추방시켰다. 이때 클레안데르는 콤모두스의 서명을 위조해서(또는 거짓 보고를 해서) 콤모두스의 눈과 귀를 가리고, 이 음모를 꾸몄다. 따라서 참다 못한 파딜라 공주는 동생 콤모두스 앞에서 무릎을 꿇고 펑펑 울면서, 모두를 위해서라도 클레안데르를 쫓아내고 죽이라고 호소했다.
190년 4월 로마 시는 화재에 이어 곡물부족에 시달렸다. 전염병과 기근에 시달리던 주민들은 클레안데르가 막대한 부를 이용하여 모든 곡식을 사들여 곡물 부족을 조장했다는 소문에 격분했다. 후대 학자들은 실제로는 당시 곡물 담당관이었던 파피리우스 디오니시우스(Papirius Dionysius)가 곡물 부족 상황을 악화시킨 뒤 그 책임을 클레안데르에게 뒤집어씌웠을 거라고 추정한다. 시민들은 소문에 격노해 봉기를 일으켜 콤모두스가 머물고 있던 퀸틸라 빌라까지 들이닥쳤다. 클레안데르는 기병대에게 군중을 축출하라고 명령했지만, 군중은 힘으로 밀어붙여 기병대를 격파했다.
급기야 군중이 옥상에 올라가 기와를 던지고, 수도 경찰대까지 민중의 편에 서자, 콤모두스는 뒤늦게 사태를 파악하고, 자신이 살기 위해선 클레안데르와 그 일가 전체를 죽여야 한다고 깨달았다. 콤모두스는 클레안데르와 그 아들들을 참수하고, 이들의 수급을 군중에게 던져줬다. 이 모든 일은 4월 19일에 벌어졌다. 군중은 환호하며 콤모두스를 영웅으로 추앙하고, 클레안데르와 그 가족들의 시신을 짓밟고, 이들의 수급을 장대에 매달아 들고 시내를 돌아다녔다. 이후 콤모두스는 이제부터는 직접 나라를 통치하겠다고 선언했지만, 실제로는 애첩 마르키아, 해방노예 에클렉투스, 단독 근위대장 퀸투스 아이밀리우스 라이투스에게 위임하다시피 하고 자신은 검투사질에 몰두했다.
[1] Kléandros[2] 대개의 노예들은 주인에게 자유를 얻고 난 뒤, 주인의 개인이름과 씨족 성씨를 하사받아 그 가문에 클리엔테스로 예속됐다. 가령,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시대때 클라우디우스 황제에게서 자유를 얻은 나르키수스의 경우, 관습에 따라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나르키수스가 됐으며, 공화정 말 카이사르에게 갈리아 전쟁 중 해방된 갈리아인 포로 출신 리키누스는 자유를 얻은 즉시 가이우스 율리우스 리키누스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