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0-26 22:26:56

파딜라

Fadilla
파딜라
<colbgcolor=#8b0000><colcolor=#fecd21> 전체 이름 안니아 아우렐리아 파딜라
Annia Aurelia Fadilla
출생 159년, 로마 제국 이탈리아 로마 팔라티노 황궁
사망 211년(52세)
직위 로마 황녀
가족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아버지)
소 파우스티나(어머니)
루킬라(여자형제)
안니아 갈레리아 아우렐리아 파우스티나(여자형제)
코르니피키아(여자형제)
콤모두스(남자형제)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 카이사르(남자형제)
비비아 아우렐리아 사비나(여자형제)
마르쿠스 페두카이우스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남편)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아들)
플라우티아 세빌리아(딸)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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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제국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황녀.

전체 이름은 안니아 아우렐리아 파딜라였으며, 일반적으로 알려진 이름은 파딜라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와 소 파우스티나 황후의 14명의 자녀들 중 유년기 이후까지 생존한 6명의 남매 중 셋째였다. 2살 아래의 남동생이 로마 제국 역사상 최악의 암군이자 폭군으로 유명한 콤모두스 황제였다. 혈연상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와 대 파우스티나 황후의 외손녀로, 부모 양쪽 모두를 통해 트라야누스 황제의 후손이었던 황녀였다.

남편은 아버지의 의형제이자 동생이었던 공동황제 루키우스 베루스의 친조카인 마르쿠스 페두카이우스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였다. 서기 182년 맏언니 루킬라가 벌인 콤모두스 암살미수 사건 이후 큰 충격속에서 온전한 통치 능력과 의지를 상실한 동생 콤모두스를 남편과 함께 보좌하면서, 콤모두스가 더이상 망가지지 않도록 노력했다. 따라서 그녀는 간신인 클레안데르가 몰락하도록 조언을 하고, 술에 취해 놀고 먹는 동생에게 쓴소리를 아까지 않아, 더 큰 존경을 받았다.

2. 생애

통상적으로 '파딜라'로 알려진, 안니아 아우렐리아 파딜라는 로마 제국의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황후 소 파우스티나의 14명의 자녀 중 유년기를 넘겨 생존한 6명의 남매 중 셋째였다. 그녀는 서기 159년 로마의 팔라티노 황궁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본래 출신 가문이며, 할머니 대 파우스티나의 친정에서 따온 '안니아'에, 어머니의 언니인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와 대 파우스티나 황후의 장녀 '아우렐리아 파딜라'를 기린다는 의미를 더해 지었다고 한다.

셋째 딸로 태어났지만, 맏언니 루킬라와는 11살이나 차이가 났다. 따라서 1살 아래의 여동생 코르니피키아, 2살 아래의 콤모두스와 그 사이가 더 각별했다. 파딜라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건강이 좋지 않고, 계속된 이민족의 침입 속에서 전장터로 나가야 했던 아버지가 로마를 비운 틈을 타서, 사람을 모으고 권력을 휘두른 루킬라 공주와 달리, 몸이 불편해진 어머니와 어린 동생들을 진심으로 도운 효녀였다. 그렇지만 그녀는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황녀인 소 안토니아처럼 조용하게 지내면서도, 여장부의 기질이 있었고, 정신력이 강했다.

일찍이 삼촌인 루키우스 베루스 황제의 친조카로 법적으로는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외증손자였던 마르쿠스 페두카이우스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와 약혼한 후 결혼했다. 남편이 된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는 언니 루킬라와 동갑 또는 그보다 조금 어렸는데, 정략 혼인임에도 불구하고 부부 사이가 좋았다. 둘 사이에는 아들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와 딸 풀라우티아 세빌리아가 있었다.

어머니 소 파우스티나 황후가 175년 혹은 176년에 사망했을 때, 큰 충격에 빠진 남동생 콤모두스에게 형부인 폼페이아누스, 남편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와 함께 최선을 다해 위로하고 그를 돌봤다. 아버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서거한 180년, 이 해에 겨울철 숙영지로 갔던 1살 아래의 동생 코르니피키아처럼 로마를 떠나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결혼 후, 남편과 함께 황궁 근처의 캄피돌리오 언덕에 있는 사저에서 살았다. 이 사저는 훗날 세베루스 왕조 시절에 엘라가발루스 황제와 그의 어머니인 율리아 소아이미아스가 무척 좋아해, 파딜라의 후손들에게서 빼앗아 호화로운 개인 궁전으로 개조해 살았다고 알려져 있다.

182년 언니 루킬라가 지극히 사적인 시기심으로 멀쩡히 제국을 통치하던 콤모두스 황제를 암살하려고 한 사건(콜로세움 암살미수 사건)이 터진 뒤, 정신적으로 불안 증세를 호소하고 대인기피증, 환청, 환각, 우울증 등에 시달린 콤모두스를 위해, 팔라티노 황궁과 사저를 오고 가며 살았다. 그러다가 콤모두스의 간곡한 요청으로, 가족들과 함께 팔라티노 황궁으로 들어갔는데, 이때 황궁에 딸린 작은 별궁에서 살았다. 당시 손윗동서였던 폼페이아누스와 함께 장인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유지를 지키고자 동분서주한 파딜라의 남편은 아내가 콤모두스의 안정을 되찾도록 힘쓰는 것을 돕고자, 폼페이아누스가 거의 내버려둔 콤모두스의 고문직까지 추가로 떠맡고, 장인의 유지를 지키고자 했다. 하여 퀸틸루스는 완전히 정사를 놓아버린 콤모두스 대신 격무를 처리했고, 원로원 의원들에게 협력을 요청하는 등 최선을 다했다.

간신 클레안데르가 침실 시종장에서 프라이토리아니 근위대장이 된 뒤, 매관매직을 벌이고, 콤모두스가 술과 여자에 빠지도록 하자, 파딜라는 술에 취해 있는 동생 콤모두스를 직접 찾아가서 크게 혼을 내고, 당장 클레안데르를 파면해 처형하라는 직언을 날렸다. 이때 일에 대해 헤로디아누스는 황제의 누나였던 파딜라가 동생을 혼내다가 펑펑 울면서 무릎을 꿇고 간곡히 호소했다고 기록했다. 그래서 누나 파딜라를 어머니 이상으로 따른 콤모두스는 누나에게 잘못을 구했고, 이때부터 정사를 형식상으로나마 처리했다고 한다. 이 일화 외에도 파딜라는 바로 아래의 코르니피키아와 함께, 콤모두스 암살 시도가 두 번째로 벌어진 189년에 미리 이를 알고 방어토록 하는 기지를 보여줬다.

하지만 클레안데르의 몰락 이후, 콤모두스의 정신 불안 증세는 심화되었고, 이는 콤모두스가 스스로 나약하지 않다는 열망 아래 '로마의 헤라클레스'를 자처하며 검투사로 활동하는 기행으로 발전했다. 그렇지만 파딜라는 남편인 퀸틸루스와 함께, 끝까지 남아 콤모두스를 도왔다. 허나 콤모두스의 기행은 멈추지 않았고, 그 사이에 다시 한 번 암살미수 사건이 터졌다. 그리고 191년 12월 31일 저녁 콤모두스는 결국 암살되었다. 콤모두스를 죽인 라이투스와 에클렉투스 등은 미리 페르티낙스에게 제위를 제안하고 다음날 그를 근위대 병영으로 데리고 가서, 황제로 옹립했다. 이때 이들은 콤모두스가 뇌졸중 증세를 호소하다가 급사했다고 둘러댔다.

그리고 비슷한 때인 192년 1월 1일, 원로원과 암살범들의 주장을 의심한 프라이토리아니 일부는 파딜라의 남편 퀸틸루스와 아들 그리고 언니 루킬라의 두 번째 남편이었던 폼페이아누스 부자에게 공동황제에 오를 것을 제안했다. 그렇지만 이들은 모두 본인과 자녀 모두 황제 자리에 뜻이 없다고 밝히면서 혼란해질 나라를 안정시키는 것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그래서 페르티낙스가 제위에 올랐는데, 그는 몇 개월 만에 살해되었고, 이후 콤모두스를 살해한 라이투스의 지휘하에 제위가 경매로 넘어가면서 다섯 황제의 해라는 초유의 내전으로 심화되었다. 그러면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등장했는데, 이때 세베루스는 수도 로마로 진격해 강압적으로 원로원을 제압하고, 이후 내전 과정속에서 경쟁자들을 지지한 이유 등을 내세워 살생부를 만든 뒤 사람들을 냉혹하게 학살했다.

이런 상황속에서, 파딜라의 남편으로 현실의 모습에 완전히 신물이 난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는 아내인 파딜라 및 자녀들과 함께 시골의 별장으로 은거해버렸다. 하지만 세베루스 황제는 205년, 근위대장 가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우티아누스와 카라칼라 사이의 갈등이 증폭되고, 자신과 카라칼라 사이의 미묘한 감정 대립이 심화되자, 이를 타개할 의도로 파딜라의 남편 퀸틸루스를 반역죄로 기소한 뒤 자살을 명령해 죽였다. 다만, 남편이 살해될 당시 세베루스 황제는 황녀 파딜라와 그녀의 자녀를 죽이지는 않았다.

대략 211년 경에 사망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