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iki style="margin: 0 -1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bottom: -15px;" | 문화유산 | 1991년 모잠비크 섬 Ilha de Moçambique |
북쪽에서 내려다 본 모습
모잠비크 병원 및 총독부
| {{{#!wiki style="margin: -5px -10px -5px" | <tablewidth=100%><tablebordercolor=#000000> | 유네스코 세계유산 UNESCO World Heritage | |
| <colbgcolor=#000><colcolor=#FFF> 이름 | 한국어 | 모잠비크 섬 | |
| 포르투갈어 | Ilha de Moçambique | ||
| 영어 | Island of Mozambique | ||
| 프랑스어 | Île de Mozambique | ||
| 국가·위치 | 남풀라주 | ||
| 등재유형 | 문화유산 | ||
| 지정번호 | 599 | ||
| 등재연도 | 1991년 | ||
| 등재기준 | (ⅳ)[1], (vi)[2] | }}} | |
포르투갈령 동아프리카의 총독궁
1. 개요
포르투갈어: Ilha de Moçambique (일랴드모삼비크)영어: Island of Mozambique
모잠비크 북부 남풀라주의 섬으로, 1507년 ~ 1898년까지 4세기에 가까운 시기동안 포르투갈령 모잠비크의 중심지였다. 따라서 '모잠비크'란 국명 역시 이곳에서 유래했고, 섬 북쪽의 구도심인 스톤타운 (시다데 드 페드라, Cidade de Pedra)에는 포르투갈 인들이 건설한 상 세바스탕 요새와 옛 병원 및 총독 관저 (박물관) 등이 남아있다. 인구는 약 1만 4천명으로, 대부분 섬 남부의 마쿠티 마을에 거주한다. 또한 모잠비크 섬은 육지의 도시인 룸부와 다리로 연결되어 있어 왕래가 용이하다. 근세까지만 해도 주민 중 무슬림이 많았으나 포르투갈 시기의 전도로 지금은 기독교도가 우세한 편이다.
2. 역사
1598년에 묘사된 모잠비크 섬
상 세바스탕 요새에서 내려다 본 창고와 전통 배
세바스탕 요새의 유일한 성문
성 안토니오 성당
적어도 15세기에는 마을이 있었고, 전설에 따르면 킬와 키시와니 출신의 스와힐리 주민들이 도시를 세웠다 한다. 1498년 포르투갈의 항해가 바스쿠 다 가마가 방문했을 당시 섬의 술탄 (지배자)은 무사 빈 비크 (알리 무사 음비키)였는데 그의 이름에 따라 섬 자체는 '모잠비크 섬'[3], 포르투갈령 동아프리카의 육지부는 '모잠비크'라 명명되었다. 1505년 포르투갈은 스와힐리 해안의 동맹 세력인 말린디와 함께 킬와, 몸바사를 복속시켰고 이때 남쪽에 있던 모잠비크 섬도 포르투갈 령이 되었다. 1507년 섬의 북쪽에 항구와 상 가브리엘 성탑이 세워졌다. 1514년 포르투갈의 항해가 두아르테 바르보사는 현지 주민들이 앙고체와 같은 스와힐리 방언을 쓴다고 기록했다. 1522년 섬의 동북쪽 끝부분에 남반구의 가장 오래된 유럽식 건물로 여겨지는 발루아르테의 성모 마리아 예배당이 세워졌고, 주변에 벽이 더해졌다.
1558년에는 오스만 제국 해군의 인도양 진출에 맞서기 위해 상 세바스탕 요새가 세워지기 시작했는데[4], 1620년에 완공되었을 무렵에는 인도양에서 가장 거대한 유럽식 요새였고 포르투갈령 동아프리카의 총독부 역할을 하게 되었다. 1607년과 1608년 네덜란드 함대가 섬에 상륙, 반쯤 철거된 상 가브리엘 성탑에 포대를 설치하고 상 세바스탕 성채를 포위했으나 동 에스테방 드 아타이데가 이끄는 수비대가 격퇴해 내었다. 포르투갈이 호르무즈와 무스카트를 상실한 후인 17-19세기 모잠비크 섬은 몸바사와 함께 인도로 향하는 포르투갈 함대의 중간 기착지였고, 노예 / 향신료 / 금이 거래되었다. 무스카트를 기반으로 한 오만 제국은 1669년 모잠비크 섬을 공격했으나 격퇴되었다. 1698년 오만 제국이 잔지바르와 몸바사를 정복하자 모잠비크 섬은 고아와 함께 포르투갈에게 마지막 남은 인도양의 주요 거점이었다.
1704년 오만 제국은 재차 섬을 공격했지만 실패했고, 1790년대에는 프랑스 군이 공격하기도 했으나 역시 실패했다. (1752년에 포르투갈령 인도에서 분리된) 포르투갈령 동아프리카의 중심지로써 모잠비크 섬은 계속해서 중시되었고, 기독교 선교 역시 활발히 이루어졌다. 1877년에는 신고전주의 양식의 병원과 정원이 세워져 수십 년간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최대의 병원 지위를 유지했다. 하지만 그 무렵 수에즈 운하의 개통으로 희망봉 항로 이용이 줄고 소팔라 (모잠비크 중부)의 금광 산업이 발달, 포르투갈 당국의 관심이 육지 쪽으로 더 쏠리게 되며 모잠비크 섬의 번영은 종식되었다. 1898년 포르투갈령 동아프리카 총독부는 육지의 로렌수마르케스 (마푸투)로 이전되었고, 모잠비크 북부의 주요 도시 지위도 20세기 중반에 나칼라 하구가 개발되며 잃은 채로 관광 및 어업만이 남은 중소 도시로 남게 되었다.
3. 볼거리
모잠비크 총독궁
성 세바스탕 요새
요새 내의 예배당
발루아르테의 성모 예배당
성 안토니오 성당
요새의 대포들
3.1. 상 세바스탕 요새
포르투갈어: Fortaleza de São Sebastião
대항해시대에 남반구에 세워진 가장 강력한 식민 성채로, 16-18세기에 걸쳐 여러 공격을 받았음에도 단 한번도 함락되지 않는 난공불락의 성채였다. 성문도 해변의 단 한 개 뿐이고, 성벽도 높고 두터워 포격에도 잘 견디는 구조이다.
1538년 디우 공방전 이후 오스만 제국 해군의 인도양 진출에 맞서기 위해 요새 건설이 추진되었으나 먼저 호르무즈를 보강하느라 지연되어 1558년에야 건설이 시작되었다. 1607년과 1608년 네덜란드 함대가 섬에 상륙, 반쯤 철거된 상 가브리엘 성탑에 포대를 설치하고 상 세바스탕 성채를 포위했으나 동 에스테방 드 아타이데가 이끄는 수비대가 격퇴해 내었다.
1620년에 완공되었을 무렵에는 인도양에서 가장 거대한 유럽식 요새였고 포르투갈령 동아프리카의 총독부 역할을 하게 되었다. 1669년과 1704년 오만 제국이 두 차례 공격했지만 실패했고, 1790년대에는 프랑스 군이 공격하기도 했으나 역시 실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