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16 19:55:27

히즈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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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히즈키야.jpg
이름 히스기야 Hezekiah
출생 기원전 741년경
예루살렘
사망 기원전 687년경
예루살렘
소속 유다 지파 소속
재위년도 기원전 716년~기원전 687년
약 29년
국적 남유다 왕국
아버지 아하스
자녀 므낫세
이전 국왕 아하스
다음 국왕 므낫세

1. 개요2. 생애
2.1. 앗수르(아시리아)의 침공
2.1.1. 현대의 고고학적 조사2.1.2. 반론
2.2. 이후
3.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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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히스기야의_기도.jpg
아하즈의 아들 히즈키야가 유다 왕이 된 것은 이스라엘의 왕 엘라의 아들 호세아 제 3년의 일이었다.
그는 25세에 즉위하여 예루살렘에서 29년 간 다스렸다. 그의 어머니는 즈가리야의 딸로서 이름을 아비라 하였다.
공동번역 성서, 열왕기 하권 18장 1~2절

기원전 716년 ~ 기원전 687년

남유다 왕국의 13대 국왕. 아하스의 아들이다. 25세에 왕위에 올랐으며 재위 기간은 기원전 716-687년[1]이다. 히스기야라고도 부른다.

2. 생애

선지자 이사야를 기용하며 종교개혁을 통해 유대교를 부흥시키고, 북이스라엘이 신아시리아 제국에 의해 멸망한 이후 그 유민들이 아시리아군을 피해 남유다로 이주하여 혼란이 발생하였을 때, 이를 안정시키고 아시리아로부터 남유다를 지키기 위해 성읍을 쌓으며 내실을 다졌던 국왕이었다. 말년에 아들 므나쎄와 왕국을 공동 통치했다.

가장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 문서는 역시 성경이다. 친 아시리아파로 우상 숭배자였던 아버지 아하스와는 정반대로 즉위 원년부터 제1차 종교개혁을 통해 남유다 왕국 내에서 우상 숭배신앙을 타파하려고 노력했다.[2] 그 후 그동안 우상 숭배 때문에 방치되고 망가져 있던 성전의 대규모 보수공사를 단행하고, 레위 지파를 모아 성전 체제를 재편했으며 그때까지도 적국이었던 북이스라엘의 지파들을 초청해 유월절을 지켰다.

2.1. 앗수르(아시리아)의 침공

하지만 시련이 시작되었으니, 즉위 14년, 아시리아의 센나헤립[3]이 침공해와 성을 점령해가기 시작한 것이다. 달래기 작전으로 나간 히스기야는 은 300 달란트, 금 30 달란트를 요구대로 내주었고, 애써 수리한 성전과 왕궁 기둥에서 금박 등을 벗겨서 센나헤립에게 보내야 했다. 하지만 센나헤립은 물건만 낼름 받고 침공을 계속했으며, 히스기야는 결국 대항에 나서 즉시 군비 증강을 개시했고, 예루살렘 성의 가장 큰 약점인 성 내에 수원지가 없다는 점[4]을 극복하기 위해 성 밖 기혼 샘으로부터 총 길이 533미터의 지하수로를 만들어 성 안으로 물줄기를 돌려 실로암 연못을 만들어 수원을 확보하는 등 포위전에 대비했다.

센나헤립이 보낸 야전 사령관[5]이 성문 앞에 와서 왕의 명령을 전하겠다며 소리지르는데, 요약하자면,
히스기야! 할 줄 아는 건 말 밖에 없는 네가 대체 뭘 믿고 나한테 개기냐?
잡으면 되려 가시에 찔릴 썩은 갈대 지팡이같은 이집트를 지원군이랍시고 믿는 거냐?
나랑 내기 한 판 하자! 너희 중에 말 탈 줄 아는 놈 하나 있으면 내가 말 2천 마리 줄게.
네가 내 군사들 말단 지휘관 하나라도 물리칠 수나 있겠냐?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했지? 그럼 이것도 하나님이 예루살렘 박살내라고 하신 거라고 생각하고 항복해라.
…였는데, 이 말을 대신 나서서 들은 왕궁 관리관 엘리야킴과 서기관 셉나, 사관 요아가 "나리, 알겠으니까 그냥 아시리아 말로 하세요. 왜 괜히 백성들까지 알아듣고 무섭게 만드십니까." 라고 했는데, 사령관은 오히려 비웃으며 "백성들 들으라고 하는 말 맞아. 너희들이야 당연히 고관들이니 우리 말을 알지, 무식한 백성들까지 우리 말을 알겠냐?" 라더니 또 소리를 지르는데,
예루살렘 안의 백성들아! 하느님이 너희를 구해주신다고 히스기야가 그러더냐?
속지 마라! 항복하고 나한테 오면 잘 살게 해주마!
세상 어느 신이라 한들 나한테는 못 이긴다! 야훼라고 다르겠느냐?
…라고 하였다. 이 말을 전달받은 히스기야도 크게 노하여 굵은 베옷을 입고 성전에 들어가 기도하며 앞의 세 관리를 선지자 이사야에게 파견해 도움을 요청했는데, 이사야는 놀랍게도 내일 그가 자기 본국으로 돌아갈 것이고, 거기서 칼에 맞아 죽을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셨다는 믿기 힘든 말을 했다.

과연 예언대로 되어 센나헤립은 라기스 왕국과 공동전선을 펼쳐 에티오피아와 싸우기 위해 히스기야에게 편지만 하나 남기고 철수하게 되었는데, 편지의 내용은 위의 두번째 고함소리와 똑같은 내용이었다. 히스기야는 아예 그 편지를 들고 성전으로 들어가 제단 앞에 펼쳐놓고 '센나헤립이 이렇게 당신을 비난하는데 가만히 계시겠습니까?' 하고 기도한다. 이 때 선지자 이사야가 사람을 보내 히스기야에게 "야훼께서 센나헤립에게 '네가 감히 나한테 헛소리를 하는 걸 보고 온 세계가 널 비웃고 있다. 이제 내가 네 산들의 모든 아름다운 나무를 다 베어버리고 너한테 가겠다'하셨다"라는 전갈을 보냈고, 그날 밤, 하룻밤 사이에 갑자기 아시리아의 병사 18만 5천 명이 돌연사하는 대참사가 벌어진다.[6] 대손해를 입은 결국 센나헤립은 그냥 본국으로 철군하고 마는데, 얼마 후 니네베 니스록 신전에서 아들 아드람멜레크와 사레제르의 칼을 맞아 최후를 맞았다. 이사야의 예언대로 이루어진 것. 이 사실은 헤로도토스의 <역사>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헤로도토스는 이를 아시리아와 이집트의 전쟁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썼다. 헤로도토스는 아시리아군이 급히 떠난 이유에 대해 추측했는데 화살통, 방패, 가죽띠를 갉아 먹은 수 많은 쥐떼 때문이라고 보았다.

2.1.1. 현대의 고고학적 조사

현대에 산헤립의 업적을 자랑하는 당대 아시리아측의 역사기록이 발굴되었는데, 이 기록에는 아시리아의 패배가 적혀있지 않고 이스라엘로부터 조공을 받아서 철군 했다고 적혀 있다는 점에서, 실제로는 유다 왕국이 쑥대밭이 된 이후 히스기야가 왕위를 유지하는 조건으로 엄청난 공물과 영토를 할양했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발굴된 아시리아의 기록을 보면 센나헤립의 철군도 성서에 나온 것처럼 궤멸적인 피해가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아시리아 왕들의 비문들은 전반적으로 과시하는 조로 기록되어 있는 경우가 흔하기에, 산헤립이 그러한 패배에 대해 기록했을 것으로 기대하기는 어렵다. 또한 예루살렘을 함락하여 전리품을 취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선심쓴 듯한 표현과, 이후에도 예루살렘을 침공하지 않았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사료

아시리아군이 피해를 많이 봤다고 하더라도 유다 왕국이 초토화되었다는 사실 하나는 변함이 없다. 심지어 성경 내부의 기록을 봤을 때에도 말이다. 열왕기하 18장의 침략 파트를 보면 판본에 따라 다르지만 요새화된 성 혹은 요새와 마을들을 점령하고 예루살렘을 포위했다고 나와있다. 싸우지 않고 항복했다면 모르겠으나 그게 아니라면 전투가 뒤따를 것이고, 잔혹한 아시리아 제국의 특성상 점령 후 파괴, 살육, 약탈 등의 추가 행각이 빠질 수 없었기 때문에 초토화를 피할 수 없었을 확률이 매우 높다. 애초에 거의 모든 성읍을 빼앗기고 수도가 포위된 상태에서 이긴 것은 말 그대로 왕국 멸망은 간신히 면한 상처뿐인 승리라 봐도 과언이 아니다.

2.1.2. 반론

단, 이 부분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걸러 들어야할 필요성이 있다. 위 링크의 논문에서도 나오듯, 그 당시 세계의 열강이었던 이집트나 아시리아나 히타이트 등 고대 근동의 대부분의 국가들은 본인들의 수치스러운 패배를 축소시켜서 적어두거나 심지어 승리로 바꿔놓기까지 했다. 이는 고대 사본학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징으로 아시리아 측에서 의도적으로 기록을 바꿨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애초에 저렇게 18만 5천명의 대군이 전염병으로 죽었을 정도라면 과연 센나헤립이 무사할지가 의문이었으며, 그렇게 대패를 당하고 살아 돌아왔다 셈쳐도 왕위를 길게 이어갈 수 있을지 의문이었을 것이다.[7] 하지만 현실은 센나헤립은 유다 침공 이후로도 반란 진압과 원정도 여러번 했으며, 니네베를 중건하는 등의 업적을 남겼다. 훗날 후계자 분쟁에 휘말려 두 아들에게 살해당한 건 사실이지만 사실을 하나 더하자면 센나헤립이 살해당하고 에사르핫돈이 차기 왕이 된 시점은 히즈키야 사후였다.[8] 구약에서는 히즈키야 파트에서 이 사건을 설명하지만 실제로 그게 발생한 시기는 히즈키야의 아들 므나쎄 시기였다는 것.

2.2. 이후

어찌됐든 간에 히스기야는 종전 직후 종기에 걸려 앓아눕고 마는데, 이사야는 확인사살이라도 하듯 "야훼께서 네가 곧 죽게 될 테니 집을 정리해라 하셨습니다"라는 선고를 했다. 그러자 히스기야는 자리에서 일어나 벽에다 머리를 대고 엎드려 울면서 간곡히 기도했는데, 이사야가 성을 나와 성문까지 반도 채 가기 전에 도로 돌아와 "야훼께서 기도를 들으시고 수명을 15년 늘려준다 하셨습니다"라는 낭보를 전한다. 그리고 무화과를 으깨어 종기에 묻히자 종기가 곧 낫고, 히스기야는 다시 일어나게 되었다.

이 때 마침 바빌론의 왕 므로다크 발라단(마르두크-아플라-잇디나 2세)이 보낸 위문 사절단이 왔는데, 히스기야는 순간 우월감이라도 들었는지 온갖 자랑을 하며 왕궁 구석구석, 창고에 있는 것들까지 다 사절단에게 보여주는 실수를 하고 말았다. 현대로 생각하면 죽을 병에 걸려서 기적적으로 완쾌한 대통령에게 북한이 위로 파견단을 보냈더니 거기에 들떠서 나라 기밀을 다 까발리는 행위이다. 당연히 선지자 이사야는 무슨 짓을 한 거냐고 노발대발했고, 이제 그 사신단이 본 왕궁의 모든 것들이 모두 바빌론으로 옮겨질 것이고, 왕의 왕자가 바빌론에 끌려가 환관이 될 것이라며 야단쳤다. 하지만 히스기야는 야훼께서 그렇게 하시겠다면 그게 옳은 일이니 그렇게 될 것이라며 태연자약했고, 예언대로 15년 뒤에 평화롭게 생을 마감했지만, 이사야의 이 예언도 사실이 되어 아들 므나쎄가 악정을 펼치다가 바빌론으로 끌려가는 일이 생기게 된다.[9]

3. 평가

성서에서는 종교개혁을 실행하며 수많은 우상들을 철거했으며, 아시리아 왕 센나헤립이 친정한 아시리아의 1차 침공을 막아내 왕국을 지키는데 성공한 위대한 왕으로 평가한다. 하지만 말년에 바빌론 대사에게 왕국의 창고를 보여주는 실책을 범하여 훗날 신바빌로니아가 침략하게 만드는 빌미를 만들었다. 물론 그 후대에도 바빌론 측을 잘 달래는 등 외교로 줄타기를 했더라면 문제는 없었겠지만 히즈키야와 이름이 비슷한 후대 왕 치드키야가 되도 않는 국력으로 무리한 선제공격을 하는 바람에 남유다는 멸망했으며 치드키야 본인도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10]

반면 고고학적 성과를 바탕으로 한 현대 역사학계에서는 부왕 아하스가 아시리아 신을 섬기는 굴욕까지 감수하며 맺었던 초강대국 아시리아와의 우호관계를 과도한 국수주의, 종교 원리주의 정책으로 파탄내고 아시리아를 적대시함으로써 피할 수 있었던 전쟁을 자초해 나라를 멸망 직전까지 몰고 간 암군으로 본다. 오히려 성서에서 우상숭배자 폭군으로 묘사한 아들 므나쎄가 다시 현실주의적 정책으로 아시리아에게 스스로 굽히고[11] 들어가 평화를 회복하고 아시리아 주도 하의 국제 무역질서에 다시 끼어들어 이웃나라 북이스라엘의 멸망에 오히려 어부지리를 챙기는 등 므나쎄야말로 명군으로 평가한다.[12]

[1] 공교롭게도 히즈키야가 사망한 지 정확하게 100년 후 남유다는 멸망했다.[2]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도 이 때 파괴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놋뱀을 우상으로 썼기 때문.[3] 아카드어로는 신-아히-에리바(Sîn-ahhī-erība). 성경에는 판본에 관계없이 '산헤립'이라고 나온다.[4] 히즈키야의 조상 다윗이 이 약점을 노려 예루살렘 공략에 성공했었다.[5] 공동번역에서는 '시종장관', 개역개정판에서는 '랍사게(Rabshakeh)', 영문에서는 '야전 사령관(Field commander)'이라 기록한다.[6] 이 믿기 힘든 현상에 대해 성경은 '야훼께서 천사를 보내 18만 5천명을 치셨다'라고 기록하는데, 학자들은 과거 다윗의 교만에 대한 벌로 7일 간의 전염병이 퍼질 때 천사를 보내 전염병을 퍼뜨렸다는 구절을 근거로 악성 전염병이 퍼진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제시하고 있다. 전염병이라면 많은 병력이 빠른 시간 내에 증발하는 것도 불가능한건 아닌데 그 이순신 장군조차 뛰어난 전술, 전략으로 전사자의 숫자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전염병 만큼은 어쩌질 못해서 전염병으로 죽은 병사들은 많았기 때문. 그런데 그것보다 2천년 전인 이 시대라면 전염병 한번 잘못 돌아 패퇴했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다만 아시리아군 내부에서 한정적으로 전염병이 퍼졌다면 모를까, 유다 왕국 내부에서 퍼진 전염병이 아시리아군에 옮은 것이라면 유다 왕국도 피똥 좀 쌌을 것이다.[7] 센나헤립의 재위기간은 기원전 705~681년으로 총 24년이었다. 남유다 침공은 재위 4년차인 기원전 701년.[8] 히즈키야는 기원전 687년에 병사했고, 센나헤립이 살해당한 년도는 기원전 681년이다.[9] 다만 므나쎄의 악정이나 바빌론으로 끌려갔다는 것은 현대의 역사학적 연구 결과에서는 부정되고 있다. 므나쎄 문서 참조.[10] 자신이 보는 눈 앞에서 자신의 아들들이 처형됐으며 본인도 그 후 두 눈이 뽑히고 포로가 됐다.[11] 수나라와 대규모 전쟁을 몇차례 벌이고 난 뒤에 즉위한 고구려의 영류왕이 현실적인 노선으로 돌아섰다는 점을 생각해보자. 수나라를 성공적으로 막아냈던 고구려가 이럴진대 고구려보다 규모도 작고 심지어 성공적으로 막아내지도 못한 유다 왕국의 차기 왕 므나쎄가 취할 길은 이 길이 아니면 재침략밖에 없었을 것이다.[12] 신학자 에른스트 크나우프(Ernst Knauf)는 아예 대놓고 "좋은 왕이 그의 시대에 백성들에게 평화의 안전, 번영을 가져오는 왕이라면, 므나쎄는 유다의 가장 훌륭한 왕 두 사람 중 하나이다."라고 말하였다. 다른 한 명은 다윗도 솔로몬도 아닌 헤롯 대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