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구성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word-break:keep-all"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min-width:25%; min-height:2em" {{{#!folding [ 구약성경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구약성경 | ||||||
오경 (모세오경) | 창세기 · 출애굽기 (탈출기) · 레위기 · 민수기 · 신명기 | ||||||
역사서 | 여호수아 · 판관기 (사사기) · 룻 · 사무엘 (상 + 하) · 열왕기 (상 + 하) · 역대기 (상 + 하) · 에즈라 (에스라) · 느헤미야 · 에스델 (에스더/에스테르) | ||||||
시가서 | 욥 · 시편 · 잠언 · 전도서 (코헬렛) · 아가 | ||||||
예 언 서 (선지서) | 대예언서 (대선지서) | 이사야 · 예레미야 · 애가 (에레미야애가) · 에제키엘 (에스겔) · 다니엘 | |||||
소예언서 (소선지서/열두 예언서) | 호세아 · 요엘 · 아모스 · 오바디야 (오바댜/오바드야) · 요나 · 미가 (미카) · 나훔 · 하바꾹 (하바쿡/하박국) · 스바니야 (스바냐) · 하깨 (하까이/학개) · 즈가리야 (스가랴/즈카르야) · 말라기 (말라키)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구약의 제2경전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7f7f7f><colcolor=#fff> 제2경전 | ||||||
가톨릭 · 정교회 | 토비트 (토빗) · 유딧 · 마카베오기 (상 + 하) · 지혜서 · 집회서 · 바룩 · 다니엘 일부 · 에스델 (에스더/에스테르) 일부 | ||||||
정교회 | 에스드라스 1서 · 송시 · 마카베오기 3서 · 므나쎄의 기도 · 시편 151편 | ||||||
테와히도 | 에녹 1서 · 희년서 · 메카비안 1서·2서·3서 · 바룩의 나머지 말 · 요시폰 | ||||||
그 외 | 에스드라스 2서(Ge)(aM)(SY)(eT) · 마카베오기 4서(조지아) · 바룩의 편지(시리아) | }}}}}}}}} |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min-width:25%; min-height:2em" {{{#!folding [ 신약성경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신약성경 | |||
복음서 | 마태오 (마태) · 마르코 (마가) · 루가 (누가/루카) · 요한 | ||||||
역사서 | 사도행전 | ||||||
바울로 서간 (바울서신) | 로마 · 고린토 첫째 (고린도전/코린토 첫째) · 고린토 둘째 (고린도후/코린토 둘째) · 갈라디아 (갈라티아) · 에페소 (에베소) · 필립비 (빌립보/필리피) · 골로사이 (골로새/콜로새) · 데살로니카 첫째 (데살로니가전/테살로니카 첫째) · 데살로니카 둘째 (데살로니가후/테살로니카 둘째) · 디모테오 첫째 (디모데전/티모테오 첫째) · 디모테오 둘째 (디모데후/티모테오 둘째) · 디도 (티토) · 필레몬 (빌레몬) · 히브리 | ||||||
보편서간 (공동서신) | 야고보 · 베드로 첫째 (베드로전) · 베드로 둘째 (베드로후) · 요한 첫째 (요한1) · 요한 둘째 (요한2) · 요한 셋째 (요한3) · 유다 | ||||||
예언서 | 묵시록 (계시록)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테와히도 정교회의 확장된 정경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7f7f7f><colcolor=#fff> 에리트레아·에티오피아 테와히도 정교회 | Sinodos (Sirate Tsion · Tizaz · Gitsew · Abtilis) · I Dominos · II Dominos · Clement · Didesqelya | }}}}}}}}} |
성경의 목차 | 위경 및 제안된 문서 |
<rowcolor=#ffffff> ◀ 이전 | 이사야서/이사야 이사 / 사 | 다음 ▶ |
집회서(가톨릭) | 예레미야 | |
아가(개신교) | ||
열왕기(유대교) | ||
언어별 명칭 | ||
<colbgcolor=#808080><colcolor=#ffffff> 히브리어 | ספר ישעיה (sefer yesha'yáhu) | |
그리스어 | Ἠσαΐας (Ēsaḯas, 고대)·Ησαΐας (Isaḯas, 현대) | |
라틴어 | Liber Isaiae[1] | |
영어 | Book of Isaiah | |
한자(한국어) | 이사야書 | |
중국어 | 依撒意亞 | |
일본어 | イザヤ書 (イザヤしょ) | |
기본 정보 | ||
전승되는 저자 | 이사야 | |
기록 연대 | B.C. 8세기(전통적 견해, 제1이사야) B.C. 6세기(제2이사야) B.C. 5세기(제3이사야) | |
분량 | 66장 | |
주요 인물 | 이사야 |
[clearfix]
1. 개요
"이제 나의 종은 할 일을 다 하였으니, 높이높이 솟아오르리라.
무리가 그를 보고 기막혀 했었지. 그의 몰골은 망가져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었고 인간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제 만방은 그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고 제왕들조차 그 앞에서 입을 가리리라. 이런 일은 일찍이 눈으로 본 사람도 없고 귀로 들어본 사람도 없다."
그러니 우리에게 들려주신 이 소식을 누가 곧이들으랴? 야훼께서 팔을 휘둘러 이루신 일을 누가 깨달으랴?
그는 메마른 땅에 뿌리를 박고 가까스로 돋아난 햇순이라고나 할까? 늠름한 풍채도, 멋진 모습도 그에게는 없었다. 눈길을 끌 만한 볼품도 없었다.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퇴박을 맞았다. 그는 고통을 겪고 병고를 아는 사람, 사람들이 얼굴을 가리고 피해 갈 만큼 멸시만 당하였으므로 우리도 덩달아 그를 업신여겼다.
그런데 실상 그는 우리가 앓을 병을 앓아주었으며, 우리가 받을 고통을 겪어주었구나. 우리는 그가 천벌을 받은 줄로만 알았고 하느님께 매를 맞아 학대받는 줄로만 여겼다.
그를 찌른 것은 우리의 반역죄요, 그를 으스러뜨린 것은 우리의 악행이었다. 그 몸에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를 성하게 해주었고 그 몸에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의 병을 고쳐주었구나.
우리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헤매며 제멋대로들 놀아났지만, 야훼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구나.
그는 온갖 굴욕을 받으면서도 입 한번 열지 않고 참았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가만히 서서 털을 깎이는 어미 양처럼 결코 입을 열지 않았다.
그가 억울한 재판을 받고 처형당하는데 그 신세를 걱정해 주는 자가 어디 있었느냐? 그렇다, 그는 인간 사회에서 끊기었다. 우리의 반역죄를 쓰고 사형을 당하였다.
폭행을 저지른 일도 없었고 입에 거짓을 담은 적도 없었지만 그는 죄인들과 함께 처형당하고, 불의한 자들과 함께 묻혔다.
야훼께서 그를 때리고 찌르신 것은 뜻이 있어 하신 일이었다. 그 뜻을 따라 그는 자기의 생명을 속죄의 제물로 내놓았다. 그리하여 그는 후손을 보며 오래오래 살리라. 그의 손에서 야훼의 뜻이 이루어지리라.
그 극심하던 고통이 말끔히 가시고 떠오르는 빛을 보리라. 나의 종은 많은 사람의 죄악을 스스로 짊어짐으로써 그들이 떳떳한 시민으로 살게 될 줄을 알고 마음 흐뭇해 하리라.
나는 그로 하여금 민중을 자기 백성으로 삼고 대중을 전리품처럼 차지하게 하리라. 이는 그가 자기 목숨을 내던져 죽었기 때문이다. 반역자의 하나처럼 그 속에 끼여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고 그 반역자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기 때문이다.
이사야 52장 13절~53장 12절 (공동번역 성서)
일명 야훼의 종의 넷째 노래로 불리는 구절로, 예수의 생애를 가장 직접적으로 예언한 문구로 꼽힌다. [2]
무리가 그를 보고 기막혀 했었지. 그의 몰골은 망가져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었고 인간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제 만방은 그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고 제왕들조차 그 앞에서 입을 가리리라. 이런 일은 일찍이 눈으로 본 사람도 없고 귀로 들어본 사람도 없다."
그러니 우리에게 들려주신 이 소식을 누가 곧이들으랴? 야훼께서 팔을 휘둘러 이루신 일을 누가 깨달으랴?
그는 메마른 땅에 뿌리를 박고 가까스로 돋아난 햇순이라고나 할까? 늠름한 풍채도, 멋진 모습도 그에게는 없었다. 눈길을 끌 만한 볼품도 없었다.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퇴박을 맞았다. 그는 고통을 겪고 병고를 아는 사람, 사람들이 얼굴을 가리고 피해 갈 만큼 멸시만 당하였으므로 우리도 덩달아 그를 업신여겼다.
그런데 실상 그는 우리가 앓을 병을 앓아주었으며, 우리가 받을 고통을 겪어주었구나. 우리는 그가 천벌을 받은 줄로만 알았고 하느님께 매를 맞아 학대받는 줄로만 여겼다.
그를 찌른 것은 우리의 반역죄요, 그를 으스러뜨린 것은 우리의 악행이었다. 그 몸에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를 성하게 해주었고 그 몸에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의 병을 고쳐주었구나.
우리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헤매며 제멋대로들 놀아났지만, 야훼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구나.
그는 온갖 굴욕을 받으면서도 입 한번 열지 않고 참았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가만히 서서 털을 깎이는 어미 양처럼 결코 입을 열지 않았다.
그가 억울한 재판을 받고 처형당하는데 그 신세를 걱정해 주는 자가 어디 있었느냐? 그렇다, 그는 인간 사회에서 끊기었다. 우리의 반역죄를 쓰고 사형을 당하였다.
폭행을 저지른 일도 없었고 입에 거짓을 담은 적도 없었지만 그는 죄인들과 함께 처형당하고, 불의한 자들과 함께 묻혔다.
야훼께서 그를 때리고 찌르신 것은 뜻이 있어 하신 일이었다. 그 뜻을 따라 그는 자기의 생명을 속죄의 제물로 내놓았다. 그리하여 그는 후손을 보며 오래오래 살리라. 그의 손에서 야훼의 뜻이 이루어지리라.
그 극심하던 고통이 말끔히 가시고 떠오르는 빛을 보리라. 나의 종은 많은 사람의 죄악을 스스로 짊어짐으로써 그들이 떳떳한 시민으로 살게 될 줄을 알고 마음 흐뭇해 하리라.
나는 그로 하여금 민중을 자기 백성으로 삼고 대중을 전리품처럼 차지하게 하리라. 이는 그가 자기 목숨을 내던져 죽었기 때문이다. 반역자의 하나처럼 그 속에 끼여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고 그 반역자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기 때문이다.
이사야 52장 13절~53장 12절 (공동번역 성서)
일명 야훼의 종의 넷째 노래로 불리는 구절로, 예수의 생애를 가장 직접적으로 예언한 문구로 꼽힌다. [2]
성경의 29번째/23번째 권, 혹은 유다 왕국의 유명한 선지자.
기원전 8세기 남유다 왕국에서 활동한 예언자 이사야가 저술했다. 이름의 의미는 '야훼는 구원이시다'로, 여호수아, 호세아, 예수와 유래가 같다. 히브리어 표기는 '예샤야후(יְשַׁעְיָהוּ / yesha'yáhu)'에 가깝고 이 인물이 당대에 실제로 불렸던 호칭은 '여사야후'지만, 70인역 성경에서 그리스어 '에사이아스(Ἠσαΐας / Ēsaïās)'로 음역하고 라틴어로 다시 '에사야스(Esaias)'와 '이사야스(Isaias)'로 다시 옮기면서 '이사야'라는 표기로 전래되었다.
2. 특징
이사야 선지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남유다 임금 요아스의 손자이자 아모쓰(אָמוֹץ)[3]의 아들이다. 그러므로 남유다 왕족이며 요담 임금에겐 당숙, 아하즈에겐 종조부가 된다.[4] 그는 아시리아의 침략으로 북이스라엘 왕국이 망해가고, 남유다 왕국 내에서는 종교적 관용주의가 팽배하면서 흉흉해진 시기를 살았다. 이 당시 종교적 관용주의가 왜 흉흉한 거냐면, 유대 민족이 위기에 빠지면서 야훼 근본주의가 강해지고, 다른 신을 인정하는 것은 외세에 굴복하는 것과 다름없는 상태였기 때문이다.이사야서에 나타난 메시지는 암울하고 절망적이며, 정의와 평화가 사멸해 가는 상황을 바라보며 강력하게 규탄하고 심판을 경고하면서, 동시에 미래에 열리게 될 새로운 세상, 곧 '공평과 정의의 기초 위에 세워진 생명과 평화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전과 희망을 말하고 있다.
작성자로 알려진 예언자 이사야는 히즈키야의 뒤를 이은 므나쎄왕이 친아시리아 정책과 이교에 대한 관용 정책을 펴자 여기에 대항하다가 톱으로 허리를 잘려 죽는 처형을 당했다고 탈무드 전승 등으로 전해진다. 그런데 이사야가 무턱대고 반아시리아 민족주의 극우냐면 그건 애매한 게 임마누엘 예언에서는 반아시리아 정책을 편 북이스라엘의 베가 왕과 그를 두려워하는 아하스 왕, 둘 다에게 경고하면서 아시리아의 힘 앞에 둘 다 멸망당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기 때문. 이 예언은 히스기야 왕의 대 아시리아 반란을 막기 위해 히스기야 시절 적힌 것으로 보인다.
비록 1차적으로는 이사야서의 수신자가 유대인이고, 당시 남북 왕국 및 유배자들의 역사적, 정치적 배경을 깔고 있지만, 기독교에서는 이를 유대인뿐만 아니라 전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이야기로 받아들인다. 예를 들어 전반부에서 사회적, 경제적 정의가 무너진 현실을 강력하게 규탄하는 것은 어떤 사회에서든 그대로 적용되며, 전반부에서부터 끝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등장하는, 미래에 열리게 될 새로운 세상, 곧 하나님 나라에 대한 희망과 비전도 전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해당되는 것이라고 기독교에서는 해석한다.
결과적으로 이사야서 전체의 주제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암울하고 불의한 현실에 대한 고발과 규탄 및 심판에 대한 경고.
2. 꿈이고 희망이고 없는 암울한 상황 속에 나타날 메시아에 대한 예언.
3. 메시아에 의해 구현될 새로운 세상, 즉 천국에 대한 비전.
3. 구분
- 유다와 예루살렘으로부터 열방으로 이르는 공의의 심판의 말씀(1~35장)[5]
- 아시리아의 예루살렘 침공에 대한 회상과 히즈키야왕에 대한 이야기, 그의 자만으로 인한 바빌론의 침공에 대한 예언(36~39장)[6]
- 이스라엘의 회복과 소망의 밝은 내용, 메시야의 도래, 메시야에 대한 믿음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희망의 선포(40~66장)
39장까지의 내용과 40장 이후의 내용이 확연하게 갈린다. 39장까지는 이스라엘에 닥칠 위험에 대해 엄숙히 경고하는 내용인데 비해, 40장부터는 바빌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에 대한 구원과 위로를 말하고 있다. 시대적으로 보면 39장까지의 내용과 40장 이후의 내용은 200년의 차이가 난다.
이 때문에 신학계에서는 1~39장을 제1이사야로 보고, 40~55장과 56~66장은 후세인이 이사야의 이름을 빌려 쓴 제2이사야, 제3이사야로 구분한다. 제2이사야와 제3이사야는 각각 바빌론 치하의 포로 시대(6세기 초)와 페르시아 키루스왕 치하(6세기 말)를 다루고 있다. 한국 가톨릭에서 쓰는 성경에서는 이 시각을 따라서 아예 1~3부로 구분을 해놓았다.
일부 근본주의 개신교 목사, 신학자들은 이사야서 구분을 '가톨릭 이단'의 물이 들은 것이라고 완강히 비난하면서 40장부터 문체와 내용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을 개신교 성서가 구약 39권, 신약 27권으로 나눠지는 것을 예언한 것이라고 주장하나, 가톨릭 신학자들뿐만 아니라 다수 개신교 신학자들 역시 이사야를 1~39장, 40~55장, 56~66장의 3부분으로 구분한다. 최초로 이사야서를 이런 방식으로 구분한 사람이 독일의 개신교 신학자인 베른하르트 둠(Bernhard Duhm)이었다. 이사야를 이사야 혼자서 다 썼는지에 대해서는 신학자들 사이에서 단일 저작권 견해와 다중 저작권 견해 사이에 논란이 있다. 그러나 '적어도 현재의 이사야는 서로 다른 세 역사적, 신학적 정황을 다루고 있다는 점'[7]에 대해서는 동의한다. 이는 이사야는 크게 1~39장과 40~66장, 혹은 1~39장/40~55장/56~66장의 2파트 혹은 3파트로 나누어 볼 수 있으며, 각 파트는 서로 다른 배경을 깔고 집필이 되었지만 그 모두를 아우르는 하나의 단일 주제 때문에 한 권으로 묶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목회자인 마틴 로이드 존스는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필시 이사야는 각각 다른 때에 설교한 예언들을 모아 놓은 것이지만 하나의 완전한 책이 되었습니다.[8]
다만 이 세 파트를 이사야 혼자서 썼는지, 아니면 2명 또는 3명이 나눠서 썼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있다. 어쨌든 확실한 것은 이사야를 몇 명이서 쓴 것이든 최소한 이사야는 서로 완전히 다른 책이라 볼 수 있을 정도로 주제와 표현 면에서 확연한 차이가 나는 둘 또는 세 파트로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거기에 대한 근거는 많다.
우선 제1이사야는 아시리아를 언급하는데, 제2와 제3에서는 아시리아가 전혀 등장 안 한다. 그리고 제2와 제3에만 구속자(Redeemer)라는 표현이 나온다. 그리고 제1은 산문체로 장엄한 심판을 말하지만, 제2와 제3은 운문체로 위로와 희망을 주로 말한다.
역사적인 근거에서 이 책이 제시하려는 논리를 간파하려는 시도를 통해 한 권의 이사야서는 독립된 별도의 세 권의 책으로 분리되었으며(1~39장, 40~55장, 56~66장), 이 책들은 그 이상의 시대까지는 아닐지 몰라도 바로 기독교 시대까지 수백 년을 거쳐오는 동안에 각각 별도로 영감을 받은 3명의 개인들이나 세 학파들에 의해 공적으로 선포된 말씀에서 기원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중략) 현재 해석가들은 우리가 1~39장 안에서 제2이사야에 있는 내용과 예루살렘 멸망 및 포로 생활을 폭 넓게 경험한 데서 영향을 받은 편집자들에 의해서 문학적인 첨가-때로는 산발적이며 또 다른 경우에는 더 포괄적인-가 이루어졌다는 증거를 볼 수 있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중략) 제 1이사야의 해석과 제2이사야의 해석을 선명하게 구별되게 한 것은 본문 40~55장들은 바벨론 포로생활이라는 특정한 상황에서 나타났고, 따라서 그 명백한 지리적, 사회적, 양식 비평적(form-critical)인 정체성(identity)은 물론이고, 역사적으로 이사야의 예언으로부터 대략 150년 정도 떨어져 있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크리스토퍼 사이쯔, 한미 공동 주석편집, 현대성서주석-이사야 1~39, 한국장로교출판사, 2003, pp. 31-35
-크리스토퍼 사이쯔, 한미 공동 주석편집, 현대성서주석-이사야 1~39, 한국장로교출판사, 2003, pp. 31-35
이 책은 이사야가 살았던 수십 년으로 시작하여, 약 3세기에 걸친 야훼의 계획 그리고 그의 백성과 대화를 증거한다. (중략) 이사야의 이상의 의도는 역사적인 것이 아니다. 즉, 이사야의 이상은 주전 8세기와 6세기의 문제들을 정의하고 제시하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사야의 이상은 주전 8세기, 6세기 그리고 5세기의 정황으로부터 자료들을 제출함으로써 주전 5세기의 문제들을 정의하고 제시한다. (중략) 이사야의 이상은 약 두 시대-전시대와 후시대-에 걸쳐 이루어진 책이다. 이 점에서 제1이사야와 제2이사야의 구분은 적절하다. 그러나 이 구분이 두 가지의 다른 작품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제2이사야는 제1이사야를 전제하고, 제1이사야는 제2이사야를 예상한다. 문학적 형태와 구조는 한 작품이다.
-존 와츠, 강철성 옮김, World Bible Commentary-이사야 (상), 도서출판 솔로몬, 2006, pp.35-57
-존 와츠, 강철성 옮김, World Bible Commentary-이사야 (상), 도서출판 솔로몬, 2006, pp.35-57
이사야의 저자가 한 사람인지 혹은 두 사람, 세 사람인지는 19세기 말 베른하르트 둠(Bernhard Duhm) 이래로 학자들의 활발한 논의의 대상이 되어 왔다.
1~39장은 대체로 아시리아 제국의 위세를 경험하던 청중에게 선포된 예언들이고, 40~66장은 바빌론 제국과 페르시아 제국의 위세를 경험하던 청중에게 선포된 예언처럼 읽힌다. 과연 주전 8세기 예언자가 당대의 회중에게 약 200년 뒤의 일에 관하여 예언했겠는가 하는 이유 때문에 역사비평적인 학자들은 40~66장을 제2이사야(40~55장)와 제3이사야(56~66장)로 구분한다.
그들은 이사야 40~66장은 포로기가 끝날 무렵에 자신을 주전 8세기 예언자 이사야의 신학적 후예라고 자처하는 한두 예언자(집단)에 의하여 선포되었거나 저작되었다고 판단한다. 이 경우 40~66장에 기록된 예언적 설교의 청중은 바빌론으로 끌려간 바벨론 포로들이거나 그들의 후예였다(에제키엘 37장 11절). 이런 역사적 정황상의 차이(바빌론 포로 전 상황과 바빌론 포로 후 상황) 외에도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들이 1~39장과 40~66장(40~55/56~66장)을 구분하는 것을 지지한다.
첫째, 언어적 어휘상의 차이로서 40~66장에는 '아시리아'라는 단어가 거의 나타나지 않고, '이사야'라는 단어는 결코 나타나지 않는다. 둘째, 신학적, 이데올로기적 차이로서 1~39장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라는 표현이 주로 사용되고, 40~66장에서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 구속자'라는 표현이 주로 사용된다. 셋째, 문체상의 차이로서 1~39장에는 부분적인 전기적 이야기체 문체와 장엄한 심판 문체가 주로 사용되고, 40~66장은 대부분이 운문체 예언이며 위로와 희망을 선포하는 시문들이 주를 이룬다. 후자는 예언 선포의 역사적 맥락이 거의 누락되어 있는 반면에, 전자에서는 상당 부분에서 명시되어 있다.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1~66장을 하나의 이사야로 묶은 것은 신학적, 이데올로기적 연속성이다. 시온에 대한 야훼 주님의 계약적 투신과 사랑(hesed=covenantal devotion), 즉 '시온을 향한 여호와의 계획'이 이사야를 응집시킨다. 이 큰 공통점 외에도 크고 작은 신학적 연속성이 있다.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 공평과 정의의 문제). (중략) 얼마나 많은 저자가 현재 이사야의 마지막 저작 과정에 참여했는지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적어도 현재의 이사야는 서로 다른 세 역사적, 신학적 정황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1~66장의 저자가 한 사람이든 두 사람이든 현재 이사야가 가지고 있는 심오하고 광대한 신학적 가치는 조금도 손상되지 않는다. (중략)
베른하르트 둠 이래 계속된 자료 비평적, 양식 비평적 그리고 편집사적 연구들이 이사야 1~66장을 1~39장, 40~55장, 56~66장으로 나누어 읽음으로써, 그렇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도저히 포착할 수 없었을 신학적 자산을 발굴하는 데 상당히 기여했다고 본다. 1~39장이 주전 8세기 역사적, 신학적 맥락과 조응하고, 40~55장이 고레스 칙령 전후 시기의 포로살이 공동체의 역사적, 신학적 맥락과 조응하고, 56~66장은 포로귀환 공동체의 시온 재건을 위한 분투와 좌절을 그리고 있다고 본 역사적, 비평적 읽기는 특히 이사야 40~66장의 메시지를 거의 원음(原音)으로 재생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만일 40~66장이 주전 6~5세기의 예언자가 선포한 동시대적 메시지가 아니라, 주전 8세기 이사야의 미래예언(fore-telling/혹은 fortune-telling)이라면, 40~66장의 원음 메시지를 생생하게 복구하지 못할 것이다. (중략)
제 2, 3 이사야가 있었느니 혹은 40~55장, 56~66장이 한때 독립적으로 존재하였는지의 여부를 완전히 논증할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다만 40~55장, 56~66장이 각각 주전 6세기, 5세기를 반영하거나 전망한다고 읽을 때에, 주전 8세기 예언자가 200~300년 전에 주전 6~5세기 상황에 대해 미리 예언하였다고 믿고 읽을 때보다, 역사 창조와 주님의 말씀 사이의 역동적 관계를 훨씬 더 강력하게 포착할 수 있다고 본다. 만일 40~66장도 주전 8세기 이사야가 직접 발설한 예언들이라고 믿으면, (중략) 말씀과 당대 역사 사이에 작용하는 역동적인 조응 관계를 파악하는 데는 별로 도움이 안 된다. 바빌론 포로살이도 시작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바빌론 포로살이가 끝났으니까 위로를 받으라'고 외치는 이사야 40장이 어떤 역동적인 반향사역(反響事役)을 일으킬 수 있었을까? 도대체 주전 8세기에 그 위로의 말씀들과 고레스 출현의 세계사적인 의의를 설명하는 역사 신학적 강화(講話)들이 무슨 목회적, 신학적 동력을 낼 수 있었을까? 이사야 40장 이하도 주전 8세기 이사야의 진정성 있는 예언이라고 주장한다면, 40~66장은 거의 200~300년 후에 올 청중, 즉 이사야 당시 기준으로 볼 때 유령 같은 청중에게 외친 비의(秘義)에 가득 찬 미래 예견으로 평가절하될 것이다.[9]
반면에 이사야 40~66장이 주전 8세기 예언자의 예언을 자신의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믿었던 주전 6~5세기의 예언자적 인물 혹은 신앙공동체의 파생적 예언이라고 본다고 해서, 이사야 40~66장의 권위가 추락하는가? 오히려 주전 8세기 예언자 이사야의 말씀이 시대를 넘어 역사를 해석하고 창조하는 권능을 발휘하는 과정을 친히 목격한 사람들이 이사야의 원메시지를 창조적으로 재해석하는 과정에서 40~66장이 형성된 것이라고 하더라도, 이 27장들의 신언성(神言性)과 계시성이 약화된다고는 보지 않는다.
-김회권, op. cit. pp. 37-39; 81-82[10]
1~39장은 대체로 아시리아 제국의 위세를 경험하던 청중에게 선포된 예언들이고, 40~66장은 바빌론 제국과 페르시아 제국의 위세를 경험하던 청중에게 선포된 예언처럼 읽힌다. 과연 주전 8세기 예언자가 당대의 회중에게 약 200년 뒤의 일에 관하여 예언했겠는가 하는 이유 때문에 역사비평적인 학자들은 40~66장을 제2이사야(40~55장)와 제3이사야(56~66장)로 구분한다.
그들은 이사야 40~66장은 포로기가 끝날 무렵에 자신을 주전 8세기 예언자 이사야의 신학적 후예라고 자처하는 한두 예언자(집단)에 의하여 선포되었거나 저작되었다고 판단한다. 이 경우 40~66장에 기록된 예언적 설교의 청중은 바빌론으로 끌려간 바벨론 포로들이거나 그들의 후예였다(에제키엘 37장 11절). 이런 역사적 정황상의 차이(바빌론 포로 전 상황과 바빌론 포로 후 상황) 외에도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들이 1~39장과 40~66장(40~55/56~66장)을 구분하는 것을 지지한다.
첫째, 언어적 어휘상의 차이로서 40~66장에는 '아시리아'라는 단어가 거의 나타나지 않고, '이사야'라는 단어는 결코 나타나지 않는다. 둘째, 신학적, 이데올로기적 차이로서 1~39장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라는 표현이 주로 사용되고, 40~66장에서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 구속자'라는 표현이 주로 사용된다. 셋째, 문체상의 차이로서 1~39장에는 부분적인 전기적 이야기체 문체와 장엄한 심판 문체가 주로 사용되고, 40~66장은 대부분이 운문체 예언이며 위로와 희망을 선포하는 시문들이 주를 이룬다. 후자는 예언 선포의 역사적 맥락이 거의 누락되어 있는 반면에, 전자에서는 상당 부분에서 명시되어 있다.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1~66장을 하나의 이사야로 묶은 것은 신학적, 이데올로기적 연속성이다. 시온에 대한 야훼 주님의 계약적 투신과 사랑(hesed=covenantal devotion), 즉 '시온을 향한 여호와의 계획'이 이사야를 응집시킨다. 이 큰 공통점 외에도 크고 작은 신학적 연속성이 있다.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 공평과 정의의 문제). (중략) 얼마나 많은 저자가 현재 이사야의 마지막 저작 과정에 참여했는지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적어도 현재의 이사야는 서로 다른 세 역사적, 신학적 정황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1~66장의 저자가 한 사람이든 두 사람이든 현재 이사야가 가지고 있는 심오하고 광대한 신학적 가치는 조금도 손상되지 않는다. (중략)
베른하르트 둠 이래 계속된 자료 비평적, 양식 비평적 그리고 편집사적 연구들이 이사야 1~66장을 1~39장, 40~55장, 56~66장으로 나누어 읽음으로써, 그렇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도저히 포착할 수 없었을 신학적 자산을 발굴하는 데 상당히 기여했다고 본다. 1~39장이 주전 8세기 역사적, 신학적 맥락과 조응하고, 40~55장이 고레스 칙령 전후 시기의 포로살이 공동체의 역사적, 신학적 맥락과 조응하고, 56~66장은 포로귀환 공동체의 시온 재건을 위한 분투와 좌절을 그리고 있다고 본 역사적, 비평적 읽기는 특히 이사야 40~66장의 메시지를 거의 원음(原音)으로 재생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만일 40~66장이 주전 6~5세기의 예언자가 선포한 동시대적 메시지가 아니라, 주전 8세기 이사야의 미래예언(fore-telling/혹은 fortune-telling)이라면, 40~66장의 원음 메시지를 생생하게 복구하지 못할 것이다. (중략)
제 2, 3 이사야가 있었느니 혹은 40~55장, 56~66장이 한때 독립적으로 존재하였는지의 여부를 완전히 논증할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다만 40~55장, 56~66장이 각각 주전 6세기, 5세기를 반영하거나 전망한다고 읽을 때에, 주전 8세기 예언자가 200~300년 전에 주전 6~5세기 상황에 대해 미리 예언하였다고 믿고 읽을 때보다, 역사 창조와 주님의 말씀 사이의 역동적 관계를 훨씬 더 강력하게 포착할 수 있다고 본다. 만일 40~66장도 주전 8세기 이사야가 직접 발설한 예언들이라고 믿으면, (중략) 말씀과 당대 역사 사이에 작용하는 역동적인 조응 관계를 파악하는 데는 별로 도움이 안 된다. 바빌론 포로살이도 시작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바빌론 포로살이가 끝났으니까 위로를 받으라'고 외치는 이사야 40장이 어떤 역동적인 반향사역(反響事役)을 일으킬 수 있었을까? 도대체 주전 8세기에 그 위로의 말씀들과 고레스 출현의 세계사적인 의의를 설명하는 역사 신학적 강화(講話)들이 무슨 목회적, 신학적 동력을 낼 수 있었을까? 이사야 40장 이하도 주전 8세기 이사야의 진정성 있는 예언이라고 주장한다면, 40~66장은 거의 200~300년 후에 올 청중, 즉 이사야 당시 기준으로 볼 때 유령 같은 청중에게 외친 비의(秘義)에 가득 찬 미래 예견으로 평가절하될 것이다.[9]
반면에 이사야 40~66장이 주전 8세기 예언자의 예언을 자신의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믿었던 주전 6~5세기의 예언자적 인물 혹은 신앙공동체의 파생적 예언이라고 본다고 해서, 이사야 40~66장의 권위가 추락하는가? 오히려 주전 8세기 예언자 이사야의 말씀이 시대를 넘어 역사를 해석하고 창조하는 권능을 발휘하는 과정을 친히 목격한 사람들이 이사야의 원메시지를 창조적으로 재해석하는 과정에서 40~66장이 형성된 것이라고 하더라도, 이 27장들의 신언성(神言性)과 계시성이 약화된다고는 보지 않는다.
-김회권, op. cit. pp. 37-39; 81-82[10]
4. 이스라엘의 회복
이스라엘의 회복 문서 참조.5. 신약과의 연관성
나중에 신약이 이사야 7장 14절의 "젊은 여인(혹은 처녀)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라는 예언 등 이사야서의 예언들을[11] 예수에게 적용시켰기에 신약과의 연관성에서 특히 관심을 많이 받는 예언서이다. 예수 또한 자신이 메시아임을 선언하기 위해 이사야 61장 1~2절을 낭독했다. 성서주석학의 훈련을 받지 않은 문외한이라 하더라도, 신약을 주의 깊게 읽었다면 거의 누구나 이사야서가 '뭔가 중요하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그러나 오늘날에는 이사야서가, 더 나아가 구약 성경이 1차적으로는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했다는데 폭넓은 합의가 이루어져있다. 가령 이사야 7장 14절 번역을 보자. 여기서 쓰인 히브리어 단어인 '알마'는 그 자체로만 보자면 '젊은 여인'이라는 뜻이다. 비록 많은 경우 이 단어가 '처녀'의 의미로 쓰이지만, 또한 칠십인역에서 '파르테노스(처녀)'로 번역했기에 처녀라는 번역의 설득력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더군다나 신약에서 '파르테노스'라는 번역을 인용하기에 그 번역의 설득력을 더욱 높여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그리스도교 내부에서도 이사야서를 번역할 때 '젊은 여인'이라는 번역을 드물지 않게 취한다.[12] 다만 애초에 처녀라는 단어도 젊은 여인이라는 뜻만으로도 사용할 수 있다. 근래 들어서는 처녀가 숫처녀라는 의미로만 사용되는 감이 없잖아 있지만.
그리스도인 독자가 구약의 내적 역동성의 종착점이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인식할 때, 이것은 소급적인 인식이며 그 출발점은 본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도들의 설교를 통해 선포된 신약의 사건들에 있다. 그러므로 유다인들이 본문 안에서 선포된 내용을 보지 못한다고 말해서는 안 되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에 비추어, 그리고 성령 안에서 본문 안에 숨겨져 있던 잉여 의미(surplus de sens)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교황청 성서위원회(위원장: 요제프 라칭거), 《그리스도교 성경 안의 유다 민족과 그 성서》Le peuple juif et ses Saintes Écritures dans la Bible chrétienne, 제2부 가.6.[13]
-교황청 성서위원회(위원장: 요제프 라칭거), 《그리스도교 성경 안의 유다 민족과 그 성서》Le peuple juif et ses Saintes Écritures dans la Bible chrétienne, 제2부 가.6.[13]
물론 그리스도교 신앙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당연히 이사야서를 비롯한 구약의 수신자를 1차적으로 유대인으로 생각하겠지만, 그리스도교 신학의 틀에서 생각하더라도 1차적 수신자를 유대인으로 생각하는 것이 신앙과 모순되는 것은 아니며, 이사야서의 예언을 예수에 적용하는 것을 막지도 않는다. 이는 일부 극단적인 소수 신학자들의 일탈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성서학의 폭넓은 합의이다.
따라서 이사 7,10-17의 단락에서도 일차적으로는 아하즈 시대를 배경으로 이 말씀이 그 당시 사람들에게 갖는 의미를 읽어내야 한다. 그다음에 비로소 마태오 복음서가 이 본문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고려할 수 있는 것이다. 이때 피해야 할 가장 큰 오류는, 이 예언을 아하즈를 대상으로 한 것이라고 해석한다면 같은 본문을 예수님께는 적용할 수 없게 된다는 생각이다. 이것은 잘못된 이해다. 구약의 예언서들에서도 어떤 시대의 예언이 다른 시대에 새롭게 해석되는 것을 볼 수 있듯이, 살아있는 말씀인 성경의 본문은 어느 한 시대에 매이지 않고 계속적인 재해석 과정을 거치면서 처음에 지녔던 의미를 보존하면서도 그와 다른 의미를 더 지니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안소근 수녀, 《거룩한 독서를 위한 구약성경 주해 29-1: 이사야서 1-39장》, 바오로딸, 2016, 137쪽
-안소근 수녀, 《거룩한 독서를 위한 구약성경 주해 29-1: 이사야서 1-39장》, 바오로딸, 2016, 137쪽
5.1. 내용 요약 및 기독교적 해석
개신교 용어로 적힌 요약에 대한 내용은 히브리 성경/요약 문서
의 이사야 부분을
참고하십시오.이사야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은데, 구약의 예언서에 대한 기독교적 해석은 일반적으로 역사적인 해석과 영적인 해석을 적절히 혼합하여 해석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 1장 1-23절: 실제 삶에서 정의를 행하지 않으며 제사 등의 종교의식만 하는 유대인들을 질책하면서, 회개하는 자에게는 복이 있을 것이고 악을 계속 행하는 자에게는 심판이 있을 것을 약속하시는 하느님
- 1장 24-31절: 하느님의 유대인들에 대한 심판 선언 및 이후의 남유다의 회복에 대한 약속
-기독교적 해석: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인해 세상은 심판받을 것이고, 그 이후 새 하늘과 새 땅이 펼쳐질 것이다. - 2장 1-5절: 마지막 날에 모든 민족들이 하느님의 성전이 있는 산으로 몰려올 것이며, 그 이후로는 하느님이 다스리시는 전쟁이 없는 세상이 오게 된다.
-기독교적 해석: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모든 민족들에게서 구원받는 자들이 나올 것이며, 그들은 영원히 평화로운 천국에 가게 된다. - 2장 6-22절: 남유다 땅에 가득한 우상들에 대해 하느님이 땅을 흔들며 심판하실 날이 올 것이고, 그 이후로 모든 우상들은 사라지며 하느님만이 홀로 높임을 받으실 것이다.
-기독교적 해석: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인해 세상이 심판받게 되면, 세상에서 죄가 사라지고 하느님만 홀로 높임을 받으실 것이다. - 3장-4장 1절: 하느님이 예루살렘과 남유다 땅을 심판하실 것이고, 유대인들은 갖가지 환난들을 겪게 된다.
-기독교적 해석: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인해 세상이 멸망하게 되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심판받아 지옥에서 고통당할 것이다. - 4장 2-6절: 환난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더러움을 씻김 받고 거룩하다고 불릴 것이며, 하느님의 보호 아래에 있는 예루살렘에 남을 것이다.
-기독교적 해석: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인해 세상이 심판 받을 때에, 구원받은 성도들은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 5장 1-7절: 하느님은 유대인들이 하느님의 뜻대로 순종하기를 바랬지만, 그렇게 되지 않아 하느님이 유대인들을 심판하게 되었다는 것을 빗대는 포도원의 노래
- 5장 8-30절: 악을 행하는 유대인들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
- 6장: 하느님에게 성읍들이 황폐해질 때까지 사람들에게 깨닫지 못할 말씀을 선포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둔하게 하라는 사명을 받은 이사야
- 7장 1-17절: 아람의 르신 왕과 북이스라엘의 베가 왕이 예루살렘을 정복하려 하자, 하느님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고, 젊은 여인(원어 상으로 처녀라는 의미도 존재함)이 잉태하여 ‘임마누엘’[14]이라는 아기를 낳고 그 아기가 어느정도 자라기 전에 아람과 북이스라엘이 황폐해질 것이라고, 남유다 왕 아하스에게 예언을 하심
-기독교적 해석: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실 것임 - 7장 18-25절: 앗시리아가 남유다를 공격할 것에 대한 예언
- 8장 1-18절: 앗시리아가 곧 남유다를 공격할 것에 대한 징표로, 이사야가 하느님의 명령대로 자신의 아들의 이름을 '노략이 속히 임하고 희생이 임박했다'는 뜻을 가진 ‘마헬살랄하스바스’라고 지음
- 8장 19절-22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상숭배를 하는 자들은 고통을 겪고 하느님을 저주하다가 마침내 어둠 속으로 내쫓길 것이다.
- 8장 23절-9장 6절(9장 1-7절)[15]: 그러나 전에 고통을 겪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어둠이 사라질 것이고, 이전에는 멸시받던 스불론과 납달리 땅이 영화롭게 될 것이다. 또한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느님, 영원하신 아버지, 평강의 왕이라고 불릴 한 아기가 태어났으며, 그의 주권과 평강은 그의 왕국에 끝없이 펼쳐질 것이다.
-기독교적 해석: 성육신 하신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자로 태어나실 것이고, 그는 공생애 기간 동안 잠시 스불론과 납달리 지역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사실 것이며, 그의 나라인 천국은 영원할 것이다. - 9장 7절-10장 4절(9장 8절-10장 4절)[16]: 하느님이 교만한 북이스라엘을 아람과 블레셋에게 공격당하게 했음에도 북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을 찾지 않고 계속 악을 행하여, 하느님이 분노를 풀지 않으시고 계속 북이스라엘에게 벌을 내리심
- 10장 5-34절: 하느님이 북이스라엘을 심판하는 도구로 쓰셨을 뿐인 교만한 앗시리아에게 심판이 있을 것이다. 그 날에 환난에서 살아남은 유대인들은 하느님께로 돌아가 다시는 자신들을 친 자를 의지하지 않고 하느님을 진실되게 의지할 것이며, 하느님은 유대인들에 대한 분노를 앗시리아에게 돌려 앗시리아를 심판하실 것이다.
-기독교적 해석: 하느님의 도구로 쓰임받아 형통했을 뿐인 죄로 가득한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에 심판을 받을 것이고, 구원 받은 성도들은 천국으로 들어가 다시는 세상을 의지하지 않고 하느님만을 의지할 것이다. - 11장: 이새(다윗의 아버지)의 후손 중 공의로운 심판을 할 메시아가 일어나게 되는데, 심판의 날에 그는 각국에 흩어진 유대인들을 지상낙원이 된 이스라엘로 모으고, 이방 나라들을 굴복시킬 것이며, 회복된 이스라엘에는 하느님을 아는 지식이 가득할 것이다.
-기독교적 해석: 다윗의 자손이고 장차 세상을 심판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의 날 모든 성도들을 하느님의 영광으로 가득 찬 천국으로 인도할 것이고, 나머지 세상은 심판받을 것이다. - 12장: 그 날에는 사람들이 한 때는 우리에게 진노하셨지만 이제는 우리를 구원하신 하느님에 대한 찬송을 부를 것이다.
-기독교적 해석: 천국에 간 사람들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던 자신들을 구원하신 하느님을 찬양할 것이다. - 13장-14장 24절: 바벨론은 심판을 받을 것이고 포로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족속들은 회복된 이스라엘로 돌아와 자신들을 압제하던 자들을 주관할 것이다. 또한 가장 높은 자가 되려고 했던 바벨론의 왕 역시 심판받아 수치를 당할 것이다.
-기독교적 해석: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인해 세상은 심판을 받을 것이고, 구원받은 성도들은 천국으로 들어갈 것이며, 세상의 왕 노릇 했던 사탄은 심판을 받아 지옥에서 고통당할 것이다. - 14장 25절-19장: 하느님이 앗시리아, 블레셋, 모압, 다마스쿠스, 에티오피아, 이집트를 심판하실 것이고, 이방인들 중에서도 하느님께 경배하여 복을 받을 자들이 있을 것이다.
-기독교적 해석: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에 세상은 심판을 받게 되지만, 이방인들 중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받아 천국에 들어갈 자들이 있을 것이다. - 20장: 하느님이 이사야에게 3년간 옷을 벗고 맨발로 다니라고 명령하시며, 이집트의 포로들과 에티오피아의 망명자들이 이렇게 앗시리아 왕에게 끌려갈 것이라고 예언하심
- 21장-22장 14절: 바다 광야, 두마, 아라비아, 환상의 골짜기에 대한 경고
- 22장 15-25절: 하느님은 왕궁 관리 총책임자 셉나를 광활한 땅에 내던져 그곳에서 죽게 하실 것이다. 그 날에 하느님은 힐기야의 아들 엘리아김을 불러 그에게 셉나가 가지고 있던 관복과 권력을 주실 것이고, 다윗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어 그가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그가 닫으면 열 사람이 없게 하실 것이며, 그를 견고하게 하여 그의 가문의 영광이 그에게 걸릴 것이다. 그 날이 오면 단단하게 잘 박힌 못이 삭아서 부러져 떨어질 것인데, 그 못에 걸어 둔 것들이 산산조각 날 것이다.
-기독교적 해석: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에 세상과 세상의 왕 노릇 하던 사탄은 심판을 받을 것이고, 그 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국을 통치하시며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 23장: 두로에 대한 경고
- 24장: 하느님이 죄악으로 가득한 땅을 황폐하게 하실 것이고, 그 이후 하느님을 찬양하는 사람들과 엄청난 자연재해에 놀라 도망치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는데, 그 날에 하늘의 권세들과 세상의 왕들이 심판을 받을 것이며, 심판받은 세상의 왕들은 옥에 갇혔다가 여러 날 후에 형벌을 받을 것이고, 그 때에 하느님이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영광을 나타내실 것이다.
-기독교적 해석: 마귀들과 세상의 권세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을 받게 되고, 심판 받은 권세자들은 음부에 갔다가 마지막 날에 부활하여 불못에 던져질 것이며, 그 후에 하느님의 영광으로 가득한 천국이 펼쳐질 것이다. - 25장 1-5절: 공의로우신 하느님에 대한 찬양
- 25장 6절-26장 19절: 하느님이 온 민족을 시온 산으로 불러 잔치를 베푸시고, 그들이 입은 수의를 없애실 것이며, 사망을 멸하시고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실 것이다. 그 날에 그들은 하느님이 장차 모압을 철저하게 심판하실 것이라고 하며 구원의 하느님을 찬양한다. 또한 그 날에 유다 땅에서는 하느님의 공의를 찬양하며 하느님의 죽었던 백성들이 장차 부활할 것을 예언하는 노래가 불려진다.
-기독교적 해석: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천국에 간 사람들은 마지막 날에 있을 심판과 부활을 예언하는 노래를 부를 것이다. - 26장 20절-27장: 하느님이 진노로 땅을 심판하실 것이며, 그 날에 레비아탄이 심판을 받을 것이다. 또한 그 날에 큰 나팔이 울리게 되는데, 앗시리아와 이집트 땅에 있던 유대인들이 돌아와 시온산에서 하느님을 경배할 것이다.
-기독교적 해석: 나팔 소리가 들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일어나는 날, 사탄은 심판을 받게 되고, 성도들은 구원을 받아 천국으로 들어가서 하느님을 경배할 것이다. - 28장: 술에 취해 제대로 판결을 내리지 않고, 환상을 잘못 풀이하며, 말씀을 선포하는 이사야 선지자를 조롱하는 부패한 이스라엘 지도자들에게 하느님이 이사야를 통해 ‘차브 라차브 차브 라차브 카브 라카브 카브 라카브 제에르 샴 제에르 샴’이라는 알 수 없는 말을 하시며, 그들이 하느님이 보내시는 강한 한 사람에게 짓밟힐 것이라는 재앙이 선포된다. 하느님이 시온에 단단한 기초를 세우기 위하여 시험을 거친 모퉁잇돌을 놓을 것이며, 이것을 믿는 자는 결코 조급하지 않을 것이나, 자신들에게 재앙이 닥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부패한 이스라엘 지도자들에게는 재앙이 닥칠 것이다. 하느님이 이스라엘 땅을 멸하기로 작정하셨다.
-기독교적 해석: 교회의 모퉁잇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심판 받지 않을 것이나, 믿지 않는 자들은 심판을 받을 것이다. - 29장 1-12절: 아리엘(예루살렘)이 공격당할 것이나, 하느님이 강림하셔서 원수들을 심판하실 것이다. 하느님이 선지자들에게 깊이 잠들게 하는 영을 부으셨고, 이 모든 계시는 사람들에게 봉인된 책과 같을 것이다.
-기독교적 해석: 믿는 자들은 세상으로부터 핍박당하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다. - 29장 13-16절: 실제 마음은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졌지만, 겉으로만 거룩한 척 하는 사람들에 대한 재앙 선포
- 29장 17-24절: 이스라엘이 포악한 사람들이 없는 살기 좋은 곳으로 회복될 것이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분별력을 얻을 것이며, 그들은 그곳에서 하느님을 경외하며 살 것이다.
-기독교적 해석: 천국에는 죄가 없을 것이고, 그곳에서 사람들은 하느님을 경외하며 살 것이다. - 30-31장: 앗시리아의 위협으로 하느님이 아닌 이집트를 의지하려는 유대인들이게는 재앙이 있을 것이지만,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가는 자들에게는 복이 있을 것이며, 하느님이 앗시리아를 심판하실 것이다.
-기독교적 해석: 세상의 문제 앞에서 세상의 방법을 의지하는 자들에게는 재앙이 있을 것이지만, 하느님을 의지하는 자들에게는 복이 있을 것이며, 하느님은 결국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다. - 32장 1-8절: 한 왕이 정의로 통치하는 공의로운 왕국이 있을 것이고, 그곳에는 악인이 형통한 일이 없을 것이다.
-기독교적 해석: 예수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시는 천국에는 죄가 없을 것이다. - 32장 9-20절: 이스라엘이 곧 흉작이 들고 동물들이나 사는 폐허의 땅이 될 것이나, 어느 날 영원히 평화롭고 정의로운 안전한 거주지로 변할 것이라는 태평한 여인들을 향한 예언
-기독교적 해석: 믿는 자들이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하나, 결국 천국으로 들어가 영원히 행복하게 살 것이다. - 33장: 악한 자들에게는 하느님의 공의로운 심판과 재앙이 있을 것이고, 시온의 죄인들은 영원히 타는 불꽃을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선한 자들은 회복된 이스라엘에 살게 될 것인데, 그곳에는 병든 자들, 악한 자들이 없고, 영원히 평화가 있을 것이다.
-기독교적 해석: 죄인들은 심판을 받아 영원한 불지옥에 던져지지만, 거룩한 성도들은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 34장: 하느님이 모든 민족들에게 분노하여 그들을 심판하실 것이고, 에돔은 심판받아 황무지가 될 것이며, 그곳은 동물들이나 사는 곳이 될 것이다.[17]
-기독교적 해석: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에 죄로 가득한 세상은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 35장: 병든 사람도 없고 사나운 짐승도 없는 지상낙원이 열릴 것이고, 속량함을 받은 사람들만 그곳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적 해석: 천국에 대한 예언 - 36-37장: 히스기야 왕 시대에 앗시리아가 예루살렘을 침공했으나, 한 천사가 앗시리아 군대 185,000명을 죽여 남유다가 승리함
- 38장: 히스기야 왕이 죽을 병에 들어 기도를 했고, 하느님은 히스기야의 수명은 15년 더 연장될 것이고 예루살렘은 앗시리아의 공격으로부터 보호될 것이라는 약속을 하신다. 그리고 하느님은 해시계 그림자를 뒤로 10도 물러가게 함으로써, 하느님의 약속이 진짜라는 것에 대한 증거를 보여주신다. 그 후에 히스기야는 병석에서 일어나 하느님을 찬양하는 글을 쓴다.
- 39장: 히스기야 왕이 바벨론에서 온 사절단에게 자신의 나라의 재물들을 보여준 이후, 이사야는 히스기야 왕에게 훗날 바벨론이 그 재물들을 가져갈 것이고 유대인들을 포로로 끌고 갈 것이라고 예언함
- 40장 1-11절: 한 소리가 “하느님이 영광이 드러나고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게 될 것이니, 광야에 하느님의 오실 길을 닦아라. 모든 육체는 시들게 되어있는 풀에 불과하지만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설 것이다.”라고 말하라고 명령한다. 하느님이 능력으로 오셔서 자신의 양 떼를 돌보실 것이다.
-기독교적 해석: 세례자 요한이 성육신 하신 하느님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길을 닦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양 떼를 돌보실 것에 대한 예언 - 40장 12-31절: 천지를 창조하신 하느님은 독보적으로 전능하시고, 하느님을 찾는 자들에게 힘을 주신다.
- 41장: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도와 그들이 원수들을 무찌르게 하실 것이다.
-기독교적 해석: 하느님이 성도들을 도와 그들이 마귀들을 무찌르게 하실 것이다. - 42장 1-9절: 모든 민족들에게 공의를 가져다 줄 하느님의 종이 일어날 것이고, 세상 곳곳의 사람들이 그의 가르침을 기다릴 것이다.
-기독교적 해석: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 - 42장 10-17절: 하느님에 대한 찬송
- 42장 18-25절: 유대인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귀담아듣지 않고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에게 하느님의 심판이 임했다.
- 43장-44장 5절: 전능하신 하느님이 이스라엘의 유일한 구원자이시고, 이스라엘을 도우실 것이며, 이스라엘 자손들을 곳곳에서 모으실 것이다. 유대인들이 하느님을 찾지 않고 패역하여 하느님이 그들에게 심판을 내렸으나, 이제는 하느님께서 광야에서 물을 내는 새 일을 행하시어 택한 자들로 하여금 물을 마시게 하실 것이고, 그들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실 것이며, 이스라엘의 후손들에게 하느님의 영과 복을 주실 것이다.
-기독교적 해석: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자이시고, 새 언약으로 말미암아 세계 곳곳에 있는 성도들이 죄를 용서받고 구원을 받을 것이며, 그들은 성령을 받게 될 것이다. - 44장 6-23절: 처음이자 마지막이신 하느님 이외에 다른 신은 없고 우상숭배는 헛된 짓이니, 죄를 용서하시는 하느님께로 돌아오라.
- 44장 24절-45장: 하느님이 고레스 왕이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고, 여러 민족들을 정복하도록 만들 것이다.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느님 외에는 신이 없고,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가 창조주와 더불어 다툰다면 그에게 화가 있을 것이며, 우상을 만드는 자들은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것이고, 하느님께로 돌아가면 구원을 받을 것이다.
-기독교적 해석: 유일한 구원자이자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모퉁잇돌이 되실 것이고, 만민에게 복음이 전파되어 그들이 모퉁잇돌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를 이루어 갈 것이다. - 46-47장: 바벨론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
- 48장 1-11절: 하느님께 순종하지 않는 고집스러운 이스라엘과,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이스라엘에 대한 진노를 참고 계시는 하느님
- 48장 12-22절: 처음이자 마지막이신 하느님은 자신의 도움으로 바벨론으로부터 해방된 이스라엘에게, 그들이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했더라면 그들이 평화로웠을 것이고 악인들에게는 평강이 없다고 말씀하신다.
- 49장: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통해 온 세상에 하느님의 구원이 이르게 할 것이고, 이스라엘이 살기 좋은 곳으로 회복될 것이며, 사람들이 그리로 모일 것이다.
-기독교적 해석: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될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 50장: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선지자는, 온갖 수모를 겪으면서도 하느님에 대한 믿음으로 꿋꿋함을 잃지 않으며, 흑암 중에 행하고 있는 자라고 할지라도 하느님을 의지해야 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고통을 겪게 될 것이라고 선포한다.
- 51장-52장 12절: 하느님의 이스라엘을 향한 구원의 약속과, 이스라엘의 원수들이 받을 심판
-기독교적 해석: 거룩한 성도들을 향한 천국에 대한 약속과, 세상에 임하게 될 심판 - 52장 13절-53장: 하느님의 뜻대로 우리의 죄를 위하여 대신 고통받은 죄 없는 하느님의 종
-기독교적 해석: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 54장: 회복된 이스라엘에는 평화가 가득할 것이고, 하느님이 흩어진 유대인들을 그곳으로 모을 것이며, 이스라엘과 다투려는 자들은 무릎을 꿇을 것이다.
-기독교적 해석: 천국에 대한 약속과,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들에 대한 심판 - 55장: 만민의 인도자인 다윗에게 허락한 영원한 언약대로, 누구든지 회개하고 하느님께로 돌아오면 그 영혼이 살아나 좋은 것을 누릴 것이다.
-기독교적 해석: 예수 그리스도의 새 언약대로 회개하고 하느님께로 돌아가면 구원을 받을 것이다. - 56장 1-8절: 이방인들도 하느님을 사랑하고 안식일을 지키면 하느님의 거룩한 산으로 가서 기쁨을 누릴 것이다.
-기독교적 해석: 이방인들에게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이 전파될 것이다. - 56장 9절-57장 13절: 행악하는 사람들에 대한 하느님의 고발
- 57장 14-21절: 회개하는 자들은 하느님의 위로를 받지만, 악인들에게는 평강이 없다.
- 58장: 금식을 하면서도 정작 실제 삶에서는 행악하는 자들에 대한 하느님의 고발과, 선을 행하는 자들에 대한 축복의 약속
- 59장 1-19절: 사람의 죄악이 사람과 하느님 사이의 관계를 갈라놓았으며, 공의로우신 하느님은 각 사람이 행한대로 갚으신다.
- 59장 20-21절: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실 것이고, 야곱의 자손 중 회개한 자들에게 오실 것이며, 이 언약은 영원토록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기독교적 해석: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고 자신을 믿는 유대인들을 구원하실 것이다.[18]/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고 자신을 믿는 모든 성도들을 구원하실 것이다. - 60장: 회복된 이스라엘에는 하느님의 영광이 가득하여 해와 달이 필요 없게 될 것이고, 어떠한 죄악도 없을 것이며, 각국에서 온갖 재물들을 가지고 이스라엘로 몰려올 것이다.
-기독교적 해석: 각국의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아 상급을 가지고 천국에 가게 될 것이다. - 61장 1-2절: 하느님의 영이 임한 자가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며 하느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함
-기독교적 해석: 공생애 시기에 성령의 충만함으로 사람들에게 복음과 재림 때에 심판이 있을 것임을 전하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 - 61장 3-11절: 시온에서 슬퍼하는 사람들이 장차 누리게 될 영원한 기쁨
-기독교적 해석: 세상에서 고통받던 사람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누리게 될 영원한 기쁨 - 62장: 시온이 ‘쁄라(결혼한 여인)’, ‘헵시바(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여인)'라는 새 이름을 가지게 될 것이고, 하느님이 신랑이 신부를 맞듯이 시온을 기뻐하실 것이다.
-기독교적 해석: 하느님이 천국에 들어간 성도들을 신랑이 신부를 맞듯이 기뻐하실 것이다. - 63장 1-6절: 하느님이 포도주 틀을 밟듯이 하느님께 반역한 민족들을 심판하심
-기독교적 해석: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인해 세상은 심판을 받을 것이다. - 63장 7절-64장: 구원과 공의의 하느님에 대한 찬송과, 예루살렘이 폐허가 됐는데도 왜 유대인들이 죄악 가운데에서 마음이 굳어져 하느님을 찾지 않는지, 하느님은 왜 잠잠히 계시는지에 대한 질문
- 65장 1-16절: ‘하느님이 기회를 계속 줬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이 계속 우상숭배를 했고, 그것에 대하여 심판이 있을 것이지만, 유대인들이 전부 멸망하지는 않고 그들의 후손 중에 하느님의 거룩한 산에서 평안을 누릴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라는 하느님의 답변
-기독교적 해석: 유대인들의 후손 중에서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갈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 65장 17-25절: 하느님이 창조하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어떠한 고통도 없고 평화와 기쁨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기독교적 해석: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이후 하느님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셔서, 사람들이 그곳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 것이다. - 66장 1-14절: 하느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하느님의 돌보심을 받을 것이지만, 악을 행하는 사람들에게는 심판이 있을 것이고,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예루살렘에서 기쁨을 누릴 것이다.
-기독교적 해석: 악을 행하는 사람들에게는 심판이 임할 것이고,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은 성도들은 천국에서 기쁨을 누릴 것이다. - 66장 15-17절: 하느님이 불에 둘러싸여 강림하셔서 악을 행하는 모든 사람들을 심판하실 것인데, 하느님께 죽임 당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기독교적 해석: 예수 그리스도께서 불꽃 가운데에서 재림하셔서 모든 죄인들을 심판하실 것이다. - 66장 18-22절: 이방인들에게도 하느님의 영광이 전파되어 그들이 하느님의 거룩한 산으로 오게 될 것이고, 하느님이 그들 중 몇몇을 뽑아 제사장과 레위인으로 삼으실 것이다.
-기독교적 해석: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어 많은 이방인들이 천국에 가게 될 것이고, 이방인들 중에서도 사역자들이 생겨날 것이다. - 66장 23-24절: 매달 초하루와 안식일에 모든 사람이 하느님께 경배하러 나갈 것인데, 그곳에서 하느님을 거역하던 사람들의 시체가 꺼지지 않는 불과 죽지 않는 벌레와 함께 있는 것을 볼 것이다.
-기독교적 해석: 천국에 간 사람들이 하느님께 경배하러 나갈 때 지옥에 있는 사람들을 보게 될 것이다.
5.2.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다
9. 주께서 이르셨다. "너는 가서 이 백성에게 일러라. '듣기는 들어라. 그러나 깨닫지는 마라. 보기는 보아라. 그러나 알지는 마라.'
10. 너는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고 귀를 어둡게 하며 눈을 뜨지 못하게 하여라.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서 성해지면 어찌 하겠느냐?"
11. 나는 "주여, 어느 때까지입니까?" 하고 여쭈었다. 주께서 대답하셨다. "도시들은 헐려 주민이 없고 집에는 사람의 그림자도 없고 농토는 짓밟혀 황무지가 될 때까지다.
12. 야훼께서 사람을 멀리 쫓아내시고 나면 이 곳엔 버려진 땅이 많으리라.
이사야 6:9-12 (공동번역성서)
10. 너는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고 귀를 어둡게 하며 눈을 뜨지 못하게 하여라.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서 성해지면 어찌 하겠느냐?"
11. 나는 "주여, 어느 때까지입니까?" 하고 여쭈었다. 주께서 대답하셨다. "도시들은 헐려 주민이 없고 집에는 사람의 그림자도 없고 농토는 짓밟혀 황무지가 될 때까지다.
12. 야훼께서 사람을 멀리 쫓아내시고 나면 이 곳엔 버려진 땅이 많으리라.
이사야 6:9-12 (공동번역성서)
이사야에는 하느님이 선지자를 통하여 사람들에게 말씀을 선포하면서도 일부러 그 사람들이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게 하는 특이한 장면이 나오는데, 이 대목은 신약성경에서도 여러번 인용되며 하느님이 일부러 사람들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게 하는 경우가 있음을 알려준다. 그러나 그것에 기한이 있고 하느님이 나중에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긍휼히 여긴 것을 볼 때,[19] 이 말은 지금 어설프게 회개해서 곧바로 다시 죄 가운데로 빠지는 것보다 나중에 회개하기에 더욱 적절한 환경에서 이전에 깨닫지 못했던 말씀을 깨닫고 회개하는 것이 낫다는 판단에서 나온 말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6. 여담
- 이 글을 쓴 이사야는 므낫세 왕의 우상숭배 정책을 반대하다 톱형을 당하여 몸이 둘로 나뉘어 숨졌다. 그 후 로겔의 떡갈나무 아래에 묻혔는데 그곳은 히스기야가 그 근원을 막은 수로(aqueduct)를 가로지르는 길에 가까웠다.
- 이 서의 20장 부분에 이 내용이 나온다. 히즈키야 임금 시절, 에티오피아[20]와 이집트가 팔리스티나의 아스돗을 아시리아로 부터 지키기위해 지원군을 보냈으나 이게 처참히 깨지고 살아남은 포로들은 발가벗겨진 채 포로로 끌려가게 된다. 이 일 이후 이사야는 이집트만 신뢰하는 건 위험하다고 여겼는지 남유다 왕국의 안전을 이집트나 에티오피아만 믿고 방치하는 건 안 된다며 다시금 야훼 아래 진실되게 뭉쳐야 한다며 3년이나 왕국 곳곳에서 벌거벗은 채 외친 적이 있다. 이 부분이 개신교 이단이자 사이비 종교 여호와새일교에게 곡해되어 2003년 2월 7일 두 목사들이 알몸으로 트럭 위에서 "2월 20일 오후 6시 북괴 김정일은 남침한다"고 외치다가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상술했듯이 자세하게 보면 '외세를 주의하자며 벌거벗고 외친다'는 부분을 빼면 상당히 다른데 이사야는 어디까지나 외세만 믿으면 망한다고 외쳤고 실제로 정확한 기간은 말하지 않았으며[21] 이사야의 말은 외국 군대에 의존하지 말고 신의 이름 하에 자국민들끼리 뭉쳐서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것으로 근거없는 선동과 날조를 시전하며 돌아다니기만 한 저들과는 명백히 다르다.
- 이 서의 53장 5절이 가스펠 락 밴드 Stryper의 소개에 있다.
- 이 구절은 동물은 영혼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근거로 쓰인다. 다만 엄밀히 말해 애굽(이집트)에 대한 비판을 의도한 내용이긴 하다.
애굽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며, 그들의 말들은 육체요 영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펴시면 돕는 자도 넘어지며, 도움을 받는 자도 엎드러져서 다 함께 멸망하리라.
이사야 31장 3절
* 지구 구형론을 언급할 때 꼭 나오는 성경이다.이사야 31장 3절
세찬 발길로 너를 공처럼 넓은 땅으로 걷어차 버리리라. 너는 거기에서 죽고 네 영광의 마차들도 거기에 버려지리라, 네 상전 집안에 치욕인 자야!
이사야서 22장 18절
이사야서 22장 18절
הַיֹּשֵׁב֙ עַל־ח֣וּג הָאָ֔רֶץ וְיֹשְׁבֶ֖יהָ כַּחֲגָבִ֑ים הַנֹּוטֶ֤ה כַדֹּק֙ שָׁמַ֔יִם וַיִּמְתָּחֵ֥ם כָּאֹ֖הֶל לָשָֽׁבֶת׃
그는 땅 위 궁창에 앉으시나니 땅의 거민들은 메뚜기 같으니라 그가 하늘을 차일 같이 펴셨으며 거할 천막 같이 베푸셨고
It is he that sitteth upon the circle of the earth, and the inhabitants thereof are as grasshoppers; that stretcheth out the heavens as a curtain, and spreadeth them out as a tent to dwell in:
이사야서 40장 22절
그는 땅 위 궁창에 앉으시나니 땅의 거민들은 메뚜기 같으니라 그가 하늘을 차일 같이 펴셨으며 거할 천막 같이 베푸셨고
It is he that sitteth upon the circle of the earth, and the inhabitants thereof are as grasshoppers; that stretcheth out the heavens as a curtain, and spreadeth them out as a tent to dwell in:
이사야서 40장 22절
- CCM 곡들 중 나의 안에 거하라가 이사야 43장 1~7절을 모티브로 했다.
- 개신교에서는 다음 구절을 들어 성경에는 없지만 전통에 따라 가톨릭 신자들이 의무적으로 지켜야 하는 금육재 및 사순절을 비판하기도 한다. 가톨릭의 어두운 역사들을 봤을 때 권위에 의해 신자들에게 강요되는 육체적 고행은 인간의 죄성을 죽이는 데에 별 효과가 없고, 순수하고 자발적인 동기로 하지 않는 금식 등은 오히려 외식(外飾)을 부추기어 정작 가장 중요한 이웃 사랑에는 집중하지 못하게 하며, 꼭 금식 같은 것을 안하더라도 1년 365일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일상 속의 작은 것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삶이라는 의견이다.[22]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사야 58:6-7)
7. 이 이름을 가진 인물
- 아이제아 토마스(1961) - 미국 농구선수
- 아이제아 토마스(1989) - 미국 농구선수
- 아이제아 힉스 - 미국 농구선수
- 아이제아 워싱턴 - 미국 배우
- 아이재이아 스캇 - 미국 프로레슬러
- 아이재아 카이너-팔레파 - 미국 야구선수
- 아이재아 시몬스 - 미국 미식축구선수
- 이사야 벌린 - 라트비계 영국인 정치철학자
- 이자이아 하르텐슈타인 - 독일 농구선수
-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 - 에리트레아의 대통령, 독재자
[1] 약칭은 이사야스(Isaias).[2] 이 부분이 하도 예수와 관련하여 중요하게 다뤄지다보니, 예수를 인정하지 않는 유대교에서 이 부분을 읽는 것을 금지했다는(일명 '금지된 장') 소문도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3] 아모스(עָמוֹס)와는 다른 인물이다.[4] 고로 아이러니하게도 이사야는 다름아닌 그 오므리, 아합, 이세벨, 아달리야의 후손이기도 하다. 아달리야가 요아스의 친할머니기 때문[5] 제1이사야 중에서 이사야의 대묵시록이라고 불리는 24~27장, 이사야의 소묵시록이라고 불리는 34~35장 등은 유배 이후에 집필되었다.[6] 36~39장은 열왕기하의 히즈키야왕 부분(열왕기하 18~20장)을 거의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다.[7] 김회권, 성서주석-이사야 I, 대한기독교서회, 2006, p. 38[8] 마틴 로이드 존스, 이운연 옮김, 이사야 1장 강해, 기독교문서선교회, p.9[9] 물론 성경의 다른 여타 묵시록처럼 이사야가 심판과 회복의 메세지를 동시에 전했다는 견해도 여전히 존재한다. 비록 당대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었겠지만.[10] 즉, 이사야를 추종하는 학파 내지 집단 내에서 기록되지 않은 예언자가 시대를 거쳐 지속적으로 나와서 이사야서를 완성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11] 다른 예로는 제2이사야서에 나타나는 주님의 종 예언[12] 예: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성경, New Revised Standard Version, New American Bible Revised Edition[13] 다음 링크에서 각 언어 번역을 볼 수 있다: # 원문은 프랑스어이다.[14]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이라는 뜻[15] 개신교 성경 기준[16] 개신교 성경 기준[17] 이단 단체에서는 '여호와의 책'과 '짝'이 나오는 16절만 가지고 특별한 성령의 영감과 계시를 받은 목자가 풀어주어야 '말씀의 짝'이 풀린다고 말한다. 그러나 앞뒤 문맥만 보더라도 이것은 말씀 짝이 아니라 짐승의 암수 짝이다. 에돔의 궁궐이 황폐하게 되어 짐승들이 거주하는 야생으로 전락한다는 이야기다.[18] 로마서 11장 26절은 이런 의미로 해석했다.[19] 내가 잠깐 너를 내버려두었었지만, 큰 자비를 기울여 너를 다시 거두어들이리라. (이사야 54:7)[20] 개역개정식 표현으론 '구스'로 칭해진다.[21] 남유다 왕국이 망한 건 이사야가 죽고 난 뒤 수십년 뒤의 일이었다. 정확히는 이후 왕국 말기에 한번 부흥을 이끌었던 군주가 있었으나 이 왕을 죽이고 한번 나라를 헤집었던 게 하필 그 이집트였고 얼마 안 가 신 바빌로니아에게 남유다 왕국은 개털리고 이집트가 이걸 방관하면서 멸망하게 된 것. 이집트를 믿어선 안 된다는 말 자체는 틀린게 없던 셈. 사실 저 때 다시 뭉친다 해도 국력 차이가 이미 어마무시하게 벌려졌기 때문에 그 당시 남유다 왕국이 커 봤자 얼마나 컸겠냐만은...[22] 마찬가지로 번영신학과 성장제일주의, 정치 유착, 사회적 발언권과 권력추구 등의 부패한 모습들을 보이면서 금식등을 하며 경건한 척 하는 한국 개신교에 대한 내부비판에도 곧잘 인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