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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우가멜라 전투 | |||
가우가멜라 전투 상상화. 샤를 르 브룅 作, 1669년 | |||
시기 | |||
기원전 331년 10월 1일 | |||
장소 | |||
메소포타미아 아르벨라 (아르빌) 근교의 가우가멜라 평원 | |||
원인 | |||
알렉산드로스 3세의 페르시아 침공 | |||
교전국 | 마케도니아 왕국 코린토스 동맹 |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 |
지휘관 | 알렉산드로스 3세 파르메니온 크라테로스 헤파이스티온 클레이토스 페르디카스 안티고노스 셀레우코스 | 다리우스 3세 베소스 마자에오스[1] 오론테스 2세 †[2] 아트로파테스[3] | |
병력 | 고대 사료 주장 | ||
47,000 명[4] | 250,000 명 ~ 1,000,000 명[5] | ||
현대 사가(史家) 추정 | |||
47,000 명 | 50,000 ~ 120,000 명 | ||
피해 | 고대 사료 주장 | ||
300 ~1,100 명 | 궤멸수준 | ||
결과 | |||
마케도니아군의 완벽한 승리 | |||
영향 | |||
다리우스 3세 사망, 아케메네스 왕조의 멸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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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BC 331년, 현대 이라크 북동부의 가우가멜라 평원에서 벌어진 마케도니아 왕국과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사이의 결전이다. 마케도니아군이 압승을 거둠으로써 사실상 아케메네스 왕조의 숨통을 끊은 전투이다.
2. 전투 배경
BC 333년 이수스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알렉산드로스 3세는 2년에 걸쳐 지중해 동부 해안 전체와 이집트를 정복했고, 곧이어 페르시아의 심장부 메소포타미아를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다리우스 3세는 남아 있는 제국 영토에서 열심히 병력을 긁어모았고, 양군의 군대는 가우가멜라 평원에서 격돌했다.3. 전투
3.1. 양군의 전력
페르시아군의 병종(左)과 사리사를 쓰는 마케도니아의 팔랑크스(右) |
마케도니아의 경우 중장보병은 31,000명으로 세부적으로는 마케도니아 페제타이로이 12,000명, 히파스피스타이 3,000명, 그리스 동맹군 7,000명, 그리스 용병 9,000명이었다.
경무장병은 총 9,000명으로써 트라키아 6,000명에 일리리아, 아그리아니아, 크레타가 각각 1,000명이었다. 기병은 대략 7,000명으로, 중기병은 헤타이로이(Companion Cavalry) 2,100명을 포함해 5,000명, 경기병은 2,000명 정도였다. 따라서 총 인원은 4만 7천 명 정도가 된다.
페르시아의 경우 고대 역사가들은 100만 명에 달했다고 기록했지만, 현대에 이런 수치를 믿을 학자들은 극히 드물다. 영문 위키피디아에 기재된 현대 학자들의 추산을 보면 한스 델브뤽은 5만 2천 명, 존 워리는 9만 명, 토마스 하버틀은 12만 명이라 추산했으며 엥겔스와 그린은 10만 명이 넘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다.
보병 중 갑옷과 무기를 제대로 갖춘 이들은 그리스 용병들과 근위대인 이모탈이 전부였다. 원래 그리스 용병은 대략 6~8,000명, 이모탈은 10,000명이지만 그들 모두 이수스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었으므로 가우가멜라 전투에서는 훨씬 적은 숫자가 나왔을 것이다. 궁병들도 있었는데, 페르시아 하면 궁병으로 유명하지만 정작 가우가멜라 전투에서는 2~3,000 명 정도로 비교적 소수였다.
여기에 대량의 징집병들이 있었는데 말이 병(兵)이지 그냥 농민들 마구잡이로 긁어모아서 창이랑 방패 쥐어준 수준이었다. 이들이 바로 페르시아 백만대군 신화의 주범인데, 현대 학자들도 대략 수만에서 많게는 10만 이상으로 추정한다.
보병라인은 이처럼 부실했지만 페르시아의 주요 전력은 기병이었다. 다만 중세 기사처럼 강력한 돌격기병이 아니라, 대부분 투창이나 활 같은 원거리 무기를 활용했다. 심지어 돌격전이 가능한 페르시아 중기병들조차 주 무기는 투창이었다.
다리우스 3세는 대규모 기병전을 위해 아르메니아에서 박트리아까지 제국의 동방 영토 전역에서 기병을 끌어모았는데, 적게는 12,000명 선에서 많게는 4만 명까지 추정한다. 사카족의 카타프락토이도 처음 동원되었는데, 이들은 페르시아나 마케도니아의 중장기병들보다도 중무장했다고 한다. 위 그림의 중앙에 있는 낫전차 200대와 전투 코끼리 15마리도 있었다.[6] 다리우스 3세는 전차가 상당히 활약할 것으로 기대했는지 가우가멜라 평원의 땅을 평평하게 고르고 다져서 전차를 쓰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했다.
▲ 페르시아의 기병과 낫전차
요약하면 마케도니아: 4만 7천 vs 페르시아: 최대 12만 이하
3.2. 배치 및 진행 과정
마케도니아(청색)과 페르시아군(적색)의 초기 배치도 |
이에 맞선 알렉산드로스는 예전 방식대로 중장보병들을 중앙에, 기병들을 양 옆에 배치했지만, 기병 전력이 워낙 압도적이었으므로 흔히 알려진 망치와 모루 전술로는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기병들을 양익에 묶어놓으면서, 중앙을 직접 공격해 다리우스를 노리기로 했다.[7] 팔랑크스는 사선진 형태로 진군하였고, 그리스 중장보병 중 일부를 떼내서 팔랑크스 뒤에 배치했다. 이처럼 보병을 2중으로 배치한 것은 사선진으로 전진하다가 측면이나 후면을 공격당하는 것을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알렉산드로스 본인은 우익을 총지휘하는 동시에 헤타이로이를 이끌고 전면에 나섰고, 좌익은 백전노장 파르메니온에게 맡겼다.
마케도니아군이 숫적 열세에도 진군해오는 것을 보자 페르시아군은 전차들을 출격시켰지만, 마케도니아군은 직진밖에 하지 못하는 전차의 특성을 이용해 이들을 간단히 무력화시켰다.
한편 전차 돌격과 동시에 페르시아 좌, 우익의 모든 기병들이 전진하기 시작했고, 특히 베수스가 이끄는 박트리아 기병들은 알렉산드로스의 헤타이로이들을 추적하는 특수 임무를 받았다. 그 결과 마케도니아군의 좌익과 우익은 모두 페르시아 군 기병대의 맹공을 받게 되었지만, 중앙의 팔랑크스는 이에 개의치 않고 페르시아 전열을 향해 계속 전진하였다. 페르시아 궁병대가 팔랑크스를 향해 사격을 가하고, 그리스 용병대와 이모탈들이 막아섰지만 역부족이었다.
이때 마케도니아군 중앙이 계속 진격해 들어오면서 좌익과의 연결이 끊어진 것을 확인한 마자에우스의 페르시아 기병대가 그 틈을 돌파했다.[8] 파르메니온의 좌익은 이미 전면에서 페르시아 우익의 맹공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페르시아 기병들이 후위를 강타한다면 붕괴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가 배치해 놓은 후위의 예비대가 이를 발견하여 반격에 나섰고, 페르시아 기병 일부가 곧바로 마케도니아 캠프로 이동하면서 마케도니아 좌익은 구사일생의 위기를 넘겼다. 파르메니온은 좌익이 붕괴될지도 모른다고 염려하여 알렉산드로스에게 구원 전령을 급파했다.
마케도니아군(청색)과 페르시아군(적색) 전열에 생긴 틈과 알렉산드로스의 기동(중앙의 청색 굵은 화살표). |
한편 페르시아군 전열에도 틈이 생겼다. 알렉산드로스를 그림자처럼 따라오며 술래잡기를 하던 베수스의 기병들이 낚여 페르시아군 좌익과 마케도니아군 우익의 싸움에 휘말린 것이다. 페르시아군 중앙은 이미 마케도니아군 중앙의 맹공을 받고 있었던 데다 페르시아 좌익의 기병들은 모두 마케도니아 우익을 공격하고 있었으므로, 알렉산드로스와 다리우스 사이를 가로막는 장벽이 모두 없어진 것이다. 물론 다리우스 뒤에는 수만에 달하는 저질 징집병들이 있었지만, 일선 지휘관들이 모두 기병대를 이끌고 공격에 나선 상황이라 그들은 그저 멀뚱히 서서 구경만 하고 있었다.
이에 알렉산드로스는 헤타이로이를 비롯한 대다수의 기병을 이끌고 다리우스를 향해 쇄도해 들어갔다. 페르시아 좌익의 기병들 중 일부가 뒤늦게 이를 발견하고 중앙을 구원하려 했지만, 아그리아니아 경보병들이 알렉산드로스의 후방을 지키며 맹렬히 저항했으므로 신속한 구원이 불가능했다. 이미 중앙을 거침없이 밀어붙이는 마케도니아의 팔랑크스들에게 질려있던 다리우스는 알렉산드로스가 자신을 씹어먹을 기세로 바로 근처까지 달려오는 것을 보고 크게 놀라 달아나기 시작했다.
뒤에서 지휘관 명령도 없이 마케도니아군이 육박해 오는 모습을 보며 우물쭈물하고 있던 징집병들은 위대한 왕중왕이 도주하는 모습을 보자 충격과 공포에 빠져 정신없이 달아나기 시작했고, 중앙의 전면 패주를 확인한 베수스 역시 좌익 기병대를 불러들여 퇴각하기 시작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 틈에 다리우스를 붙잡겠노라고 전면 추격을 명했지만, 바로 그때 좌익의 파르메니온 장군이 보낸 전령이 달려와 구원을 요청했다. 다리우스의 목과 자기 군대 사이에서 갈등하던 알렉산드로스는 결국 자기 군대가 없으면 세계정복이고 뭐고 불가능하다 사실을 깨닫고 급히 말머리를 돌려 좌익을 구원하러 나섰다.
다리우스의 패배를 확인한 좌익의 베수스가 곧바로 병력을 모아 퇴각한 것과는 달리 페르시아 군 우익은 곧바로 퇴각하지 못했다. 파르티아와 히르카니아, 페르시아와 인도 기병 등이 남아서 아군을 구원하러 온 알렉산드로스의 기병대와 맞붙었다. 이 싸움이 그날의 가장 처절한 싸움이라고 할 정도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지만, 테살리아 기병들이 측면 공격을 성공시키면서 마자에우스는 항복하고[9] 남은 페르시아 군 기병들 역시 대부분 패주했다. 알렉산드로스는 뒤늦게나마 다리우스를 추격하려 했지만 이미 그는 멀리 달아난 후였다.
한국어 자막이 지원된다. 굳이 해석하려고 고생하지 않아도 된다.
4. 전투 이후의 경과 및 평가
이수스 전투와 함께 알렉산드로스를 대표하는 전투이자, 전쟁 역사상 승자가 가장 빛나는 승리를 거둔 사례 중 하나로 뽑힌다. 이 전투의 승리로 알렉산드로스는 전설이 되었다.
결과만 본다면 알렉산드로스의 마케도니아군은 자신들의 병력의 현대 추정치 최대 3배 가량의 페르시아군을 말그대로 개박살내버렸다. 페르시아군이 마케도니아군에 비해 양적으로 우월한 전력을 가졌던 것은 사실이고 일반적인 포위 섬멸전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과감한 공격으로 적을 셋으로 쪼개 고립시켜 각개격파한 알렉산드로스의 군사적 천재성과 담력이[10] 유독 돋보이는 전투였다.
다만 이수스 전투와 마찬가지로 가우가멜라 전투도 다리우스의 도주로 승패가 판가름났기 때문에, 이후 다리우스 3세는 천하의 찌질이 취급을 받았고 백성들과 귀족들의 지지를 완전히 잃고 말았다. 특히 페르시아 군 우익은 마케도니아 군 좌익을 붕괴 직전까지 밀어붙이고 있었고, 페르시아 군 좌익 역시 최소한 호각지세를 보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왕중왕의 위엄으로 후방의 징집병들을 전부 우라돌격시켜서 쇄도해 오는 알렉산드로스와 마케도니아 중앙의 공격을 충분히 지연시켰다면 마케도니아 좌익 붕괴 → 좌익의 균형이 깨지면서 중앙 붕괴 → 우익은 전면과 측면이 포위당해 섬멸이라는 전형적인 사선대형에 패배당하는 코스로 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는 결과론이고, 다리우스의 입장에선 내 목과 상대 보병 중에 누가 먼저 뚫리나의 내기였기 때문에, 직접 잡졸을 베어가며 자기에게 돌진하는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적어도 다리우스가 배짱으로 버텼다면 페르시아가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승리했을 가능성이 높았던 것은 사실이다. 라피아 전투의 예를 보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군 중앙의 이집트 토착 보병들은 셀레우코스 군에게 전 전열에서 숫적, 질적으로 압도 당했음에도 후퇴하지 않고 진두 지휘하는 파라오의 독려를 받아서 거세게 셀레우코스의 정예 팔랑크스를 밀어붙이며 수준 이상으로 선전했고 그 결과 라피아 전투에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승리할 수 있었다. 전투에서 사기는 장비나 훈련도 만큼이나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이는 결과론적 해석이고, 일반적으로는 최고 사령관 그것도 제국의 황제가 적의 기병대에 노출되어 돌격을 받아내야 하는 상황이면 지휘관이 피신하는게 상식적인 판단이 맞다. 예를 들어 임진왜란에서도 선조가 군주란 인간이 나라를 버리고 제 살자고 명나라로 도주하려 했던게 문제지, 사실 선조가 도망 안가고 어디 산성에 기어 들어가 결사항전 하다 왜군에 붙잡혔으면 이순신이고 권율이고 뭐고 활약하기도 전에 그걸로 전쟁 끝이다. 고려 때 통주 전투에서 고려 중앙군이 전멸했어도 현종이 거란군에 붙잡히지 않고 나주로 잘 도망갔기 때문에 양규와 김숙흥이 활약할 수 있었다. 고로 다리우스의 실책은 알렉산더가 헤타이로이 끌고 돌격해 온다고 쫄아서 도망간 게 아니라 애초에 자신에게 알렉산더가 돌격하는 상황을 허용한 것 그 자체가 실책이다. 즉, 그냥 전술 싸움에서 진 게 문제다. 알렉산더가 왕임에도 스스로 최선두에 싸우는 기행도 철저히 계산된 것으로, 당시 마케도니아군은 3배나 되는 적을 상대하는 상황이니 많이 위축되었으니 어떤 조치가 필요했다. 이에 왕이 직접 선두에 싸우는 모습을 보여줘서 병사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몇 배가 되는 적에게 달려들 수 있게 하고, 직접 왕이 함께하는 헤타이로이는 그 어떤 적에게라도 달려들 수 있었을 거다.
반대로 알렉산더에 대한 평가 역시 그가 살아서 승리했으니 가능한 결과론적 이야기로 볼 수도 있다. 전장에서는 온갖 변수가 생기는 법이고, 직접 최선두에서 싸우던 알렉산더를 다리우스가 발견하고 집중공격을 명하거나, 눈 먼 화살이나 표창에 알렉산더가 전사했을 수도 있다. 그럼 알렉산더 덕에 용기내어 싸우던 마케도니아군은 사기가 폭락해서 패주할 것이고, 알렉산더는 그저 객기를 부리다가 죽은 왕으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5. 여담
- 올리버 스톤의 영화 알렉산더는 이 전투를 상당히 훌륭하게 재현하고 있다. 몇 가지 어색한 부분이 보이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 정도 수준으로 전투를 재현해 놓은 영화는 드물다. 물론 알렉산더가 흥행에 실패하고 욕도 꽤 먹은 영화이긴 하지만, 오로지 이 가우가멜라 전투 하나만으로도 볼 가치가 있다. 특히 알렉산더가 얼굴에 피칠갑을 한 채 다리우스 3세에게 덤벼드려는 미친 모습을 잘 보여줬다. 왜 다리우스 3세가 도망쳐는지 이해가 될 정도.
사실 그것 말고는 볼 게 없다다만 실제 가우가멜라 전투와는 달리, 대왕의 다른 전투들도 섞였다. 예를 들면 클레이토스가 페르시아군 병사에게 살해당할 뻔한 알렉산드로스를 구하는 장면은 그라니코스 전투에서 벌어진 일이다. 이는 알렉산더의 페르시아 원정 초기 전투들을 모조리 생략했기 때문.
[1] 바빌론 태수.[2] 아르메니아 태수.[3] 메디아 태수. 후에 아트로파테네의 초대 군주.[4] 실제로도 4만 명 이상은 확실하다.[5] 알렉산더(영화)는 이 주장을 따랐는지, 수십만명의 야만족들(hundreds of thousands of barbarian races)이 다리우스 밑에 집결했다는 대사가 나온다.[6] 다만 코끼리들은 페르시아군도 처음 동원해 보는 것인지라 아무 것도 안 하고 있다가 모두 생포되었다.[7] 다리우스는 이미 이수스 전투에서 승패가 결정나지 않은 팽팽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위험해지자 냅다 달아나는 바람에 전투를 말아먹은 전례가 있다. 게다가 왕중왕인 그를 붙잡거나 죽이면 페르시아에게는 결정적인 타격이 된다.[8] 이것이 마케도니아군 후방의 캠프를 약탈하기 위해서라는 주장도 있고, 그 캠프에 갇혀 있는 다리우스의 가족들을 구하려 했다는 주장도 있다. 다만 이유가 어찌됐든 페르시아 기병들이 마케도니아 좌익의 후방으로 기동한 것은 틀림없다.[9] 마자에우스는 항복한 후에 알렉산드로스의 편을 들어 바빌론 지역을 포섭하는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 바빌론의 사트라프가 되었고 기원전 328년에 노환으로 죽을 때까지 알렉산드로스를 충실하게 섬겼다.[10] 지휘관이 최전방 선두에서 적의 본진으로 치고 들어가는 것 자체가 상식을 초월하는 기행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