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28 05:03:58

이소스 전투(기원전 33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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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원정 일부
이소스 전투
نبرد ایسوس(FAS)
Μάχη της Ισσού(GRE)
Battle of Issus(ENG)
파일:Alexander-the-Great-army-forces-Persian-Battle-333-bce.webp
시기 기원전 333년 11월 5일
장소 아케메네스 제국 아나톨리아 이소스[현재]
교전국 파일:베르기나의 태양.svg마케도니아 왕국
파일:베르기나의 태양.svg코린토스 동맹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25px-Standard_of_Cyrus_the_Great_%28Achaemenid_Empire%29.svg.png아케메네스 제국
지휘관 알렉산드로스 대왕
파르메니온
크라테로스
헤파이스티온
프톨레마이오스
판토르다누스
다리우스 3세
아르사메스
레오미더스
아티지스
부바체스
사바체스
병력 37,000명 600,000명(고대자료)
100,000명(현대추정)
피해 5,452명 2만~4만명 사망
결과 마케도니아 왕국의 승리
이집트, 히타이트, 아시리아 완전 상실
영향 가우가멜라 전투 고조

1. 개요2. 배경3. 다리우스에 대한 논란4. 병력5. 조우6. 배치7. 전투8. 전후9.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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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BazBattles - 이수스 전투(자막이 있다.)
알렉산드로스의 페르시아 전쟁 기간, 기원전 333년에 마케도니아 왕국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시아의 왕 다리우스 3세와 싸워 승리한 전투. 이소스 평원의 전투 중 가장 유명하다.

2. 배경

알렉산드로스 3세는 기원전 334년에 군대를 이끌고 헬레스폰트를 건넌다. 이곳에서 로도스의 멤논과 페르시아 태수들의 병력을 그라니코스 전투에서 격파한다. 그 뒤 페르시아 해군을 견제하기 위해 아나톨리아 지역 항구 도시를 점령하면서 남하하였고 그해 겨울엔 4개월에 걸친 포위 끝에 할리카르나소스를 점령한다.(할리카르나소스 공방전)

이때 다리우스는 해상 교란을 해야한다는 멤논의 주장을 받아들여 그를 페르시아 해군의 총독으로 임명한다. 멤논은 해군을 이끌고 알렉산드로스의 통치를 받고 있던 여러 해안가의 그리스 도시들을 설득하며 후방을 교란토록 시도한다. 이는 해군이 없었던 알렉산드로스에게 있어 위협적인 움직임이었고 멤논은 실제로 여러 도시들을 설득 시키는 데 성공하나 그해에 멤논은 말라리아에 걸려 죽어버린다. 멤논이 죽지 않고 그 계획이 계속 진행되었다면 제 아무리 천하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라도 난관에 부딪혔을 것이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보급이고, 당시 마케도니아군 보급에 필수적이었던 수단이 바로 해상 운송이었기 때문이다.

멤논의 뒤를 이어 페르시아 함대를 이끌게 된 다리우스의 사촌인 파르나바즈스는 멤논과 맞먹는 능력도 없었으며 또한 그리스인들을 움직일 만한 인맥도 없었다. 멤논은 로도스의 그리스인이었고 그리스 세계에서 유명한 용병이었다. 하지만 파르나바즈스는 페르시아 왕가 혈통으로 그리스인들과 완전히 동떨어진 인물이었다. 때문에 멤논의 작전을 똑같이 수행하였으나 별다른 결실을 얻어내지 못했다. 게다가 다리우스가 대군을 편성하면서 페르시아 해군에서 많은 병력을 빼냈기 때문에 멤논의 계획은 사실상 폐기된다.

기원전 333년 여름, 다리우스는 대군을 편성하느라 시간을 보낸다. 이때 그의 장군인 폴레마크가 다리우스에게 알렉산드로스를 상대할 계획이 있으며 지휘권을 달라고 청한다. 이에 전쟁을 직접 지휘하고자 하였던 다리우스는 폴레마크가 자신을 겁쟁이로 여긴다고 생각하여 분개했고 그를 처형한다. 폴레마크는 죽기 전 다리우스가 지휘를 하면 이는 곧 페르시아의 멸망을 초래할 것이라는 유언을 남겼다.

파일:attachment/이소스 전투(기원전 333년)/issmove.gif
(마케도니아군과 페르시아군의 기동)
마침내 군대 소집을 마친 다리우스는 9월 군을 이끌고 소코이(Sochoi: 아래 지도 참고)로 진입한다.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군보다 먼저 이소스 만을 손에 넣고자 했다. 이소스 만을 통한 페르시아의 해상 보급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이 때 알렉산드로스는 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부하장수인 파르메니온을 보내 이소스 만의 해안가를 점령하도록 했다.

파르메니온은 훌륭하게 임무를 수행했고 시리아 관문(Syrian Gate) 북쪽 만을 점령했다. 이 소식을 들은 다리우스는 소코이를 떠나 군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병에서 회복된 알렉산드로스는 이 소식을 듣고 자신의 주력군을 이끌고 파르메니온과 합류하기 위해 남하한다.

파르메니온과 합류한 알렉산드로스는 마케도니아 해군이 페르시아 해군을 할리카르나소스에서 저지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알렉산드로스는 서둘러 남하하여 시리아 관문 쪽으로 이동한다. 그는 다리우스가 남하할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에 재빨리 남쪽의 시리아 관문을 통과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다리우스는 아마누스 산을(Amanus Range) 우회하여 이소스에 당도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런 뜻 밖의 움직임을 예상하지 못했었기에 부상병들을 이소스에 남겨 두었는데 이들은 페르시아군의 포로가 된다. 다리우스는 많은 이들을 처형하고 어떤 이들은 사지를 절단한다. 그리고 손을 자른 부상병들 몇몇에겐 페르시아군의 규모를 구경시켜준 뒤 알렉산드로스에게 보낸다. 그는 페르시아 대군의 규모에 놀란 이 부상병들의 말에 마케도니아군이 겁먹기를 기대한 것이었다.

부상병들을 맞이한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의 신속한 움직임에 상당히 놀란다. 다리우스의 이소스 점령으로 알렉산드로스가 전해에 점령한 아나톨리아 지역과 마케도니아 본군 사이의 보급로는 차단되었다. 이는 알렉산드로스에게 남은 선택지가 북상하여 다리우스를 공격하는 것 뿐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3. 다리우스에 대한 논란

다리우스가 소코이를 떠나 이소스로 군을 움직인 동기에 대해선 논란이 있다. 원래 다리우스는 소코이에서 알렉산드로스에 맞서 싸우려고 했으며 소코이는 사방이 탁 트인 평야 지대이므로 기병 전력이 우세한 다리우스에게 유리한 전장터였다. 이에 비해 이소스 평야는 한면이 바다로 막히고 다른 한면이 산으로 막힌 비교적 좁은 평야였으며 따라서 이곳은 오히려 알렉산드로스에게 유리한 지형이었다.

위의 지도에서 볼 수 있듯 소코이는 아나톨리아 지역을 노리며 알렉산드로스의 배후를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따라서 알렉산드로스가 점령한 이소스 만 해안가에서 남하하여 시리아로 진입할 경우 페르시아군은 알렉산드로스의 배후지인 아나톨리아를 공격하여 보급을 차단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다리우스가 소코이에 그대로 머물고 있는 한 알렉산드로스가 시리아를 향해 남하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에 아마도 소코이나 그 근방의 평야지대가 전장터가 될 확률이 높았다.[2] 하지만 다리우스는 이러한 전략적으로 우세한 지역을 점거하고도 스스로 군을 이끌고 알렉산드로스에게 유리한 지역인 이소스로 이동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로마의 역사가인 퀸투스 쿠르티우스 루푸스가 설명하길, 당시 페니키아의 도시들(시리아 해안가의 도시들. 이들은 알렉산드로스의 남하에 무방비로 노출된 상태였다) 알렉산드로스의 진격에 상당히 동요하고 있었으며 다리우스가 아나톨리아 지역 방위를 태수들에게 위임하였고 또한 그들이 격파된 지 2년이 다 지나서야 나타난 점 때문에 페니키아 도시들의 신뢰를 잃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나톨리아 서부의 이오니아 도시들처럼 페니키아인들도 알렉산드로스에게 붙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다리우스가 전투를 서둘렀다는 것이다.

또한 다리우스가 적의 전력을 얕보았을 가능성도 있는데 페르시아군이 마케도니아군에 비해 수적으로 매우 우세했기 때문이다.

4. 병력

로마 시대의 역사가 아리아노스는 페르시아군이 60만 대군이라고 하였으나 현대 학자들은 이를 과장된 숫자로 생각한다. 현대의 추정으론 페르시아군은 10만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하며 이들의 구성은 10,000명의 그리스 호플리테스 용병과 10,000명의 이모탈이 중보병을 형성하고 기병은 11,000명, 그리고 나머지 69,000명은 페르시아 경보병으로 편성된 것으로 추정한다.

알렉산드로스는 22,000명의 마케도니아 팔랑기타이와 13,000명의 경보병과 5,800여 명의 기병을 동원한 것으로 추정한다. 총병력은 대략 40,000여 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5. 조우

알렉산드로스는 그날 새벽 군대와 함께 페르시아를 향해 북상하기 시작하였다. 이동은 신속하고 신중하게 이루어졌으며 그날 오후 4시경 마케도니아군은 페르시아군이 주둔하는 곳까지 접근하게 되었다.

페르시아군은 알렉산드로스가 이토록 과감하게 움직일 줄 몰랐고 때문에 전투 대형과는 거리가 먼 상태로 쉬고 있었다. 이들의 짐과 막사는 강의 사방에 흩어져 있었는데 마케도니아군의 접근했다는 소식을 들은 이들은 황급히 짐과 막사를 거두고 전투 대형으로 갖추기 시작한다. 다리우스는 막연히 알렉산드로스가 겁먹고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이런 과감한 움직임은 전혀 예상 밖의 일이었다. 그는 재빨리 궁병과 투창병을 선두에 일렬로 세운 뒤 비 전투원을 뒤로 물러나게 하여 전투 대형을 짜기 시작하였다. 그는 자신의 병력 전부를 평야를 가로지르는 강 북쪽으로 철수시켰고 경보병 일부를 동쪽 산 정상에 배치시켜 마케도니아군의 우익을 바라보게 하였다. 이 배치는 알렉산드로스의 움직임을 둔화시켜 시간을 벌고자 하는 의도와 마케도니아군이 빈틈을 보이면 배후를 공격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마케도니아군은 천천히 전진하였고 지대가 넓어지는 것에 맞춰 그들의 전열을 늘리기 시작하였고 알렉산드로스는 군의 일부를 쪼개 언덕 위에서 마케도니아군의 배후를 바라보는 페르시아군을 견제케 하였다. 4시 30분경에 접어들어 알렉산드로스는 그의 전투 배치를 마쳤으며 이는 페르시아의 왕 다리우스도 마찬가지었다. 두 군대는 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마주보게 되었다. 따라서 먼저 공격하는 쪽은 강을 건너야 하고 이는 먼저 공격해야 하는 알렉산드로스에게 있어 불리한 상황인 것이었다.

6. 배치

다리우스는 압도적인 수의 기병과 마케도니아군과 비슷한 수의 중보병이 있었다. 그는 그리스 중보병이 가장 강력한 병력이라 판단하였고 이들을 중앙에 배치한다. 또한 그리스 용병의 배치를 마친 뒤 이모탈을 둘로 나누어 그리스 중보병의 양익에 위치토록 하고 그 뒤 기병을 둘로 나누어 가장 바깥쪽에 배치하였다. 그 기병 중 가장 무장의 수준이 높고 강력했던 페르시아 중기병은 우익의 가장 바깥쪽에 포진시켰고 페르시아 중기병에 비해 무장의 수준이 낮은 메디아 중기병은 좌익의 가장 바깥쪽에 포진하였다. 이 포진에서 보여주는 다리우스의 의도는 분명하였다. 그는 그의 중앙과 좌익이 마케도니아군의 맹공을 견디는 동안 페르시아 중기병으로 마케도니아군의 좌익을 집중 공격하여 무너뜨려는 것이었다.

이때 페르시아에 비해 기병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였고 또 중보병의 수도 엇비슷했던 데다 강을 건너 공격해야 한다는 불리함을 안고 있었던 알렉산드로스는 다음과 같이 포진한다.

그는 우선 최정예 보병이었던 마케도니아 팔랑크스를 6개 부대로 나누어 중앙에 일렬로 포진하였다. 그 뒤 정예 호플리테스인 히파스피스타이를 팔랑크스의 좌우에 포진시켰다. 이렇게 중앙의 배치를 끝낸 알렉산드로스는 파르마니온에게 마케도니아 중기병 모두를 맡겨 좌익에 포진케 하였다. 그렇게 한 뒤 그는 용병 페니키아 장창병과 그리스에서 고용한 중기병을 하나로 묶어 우익의 가장 바깥쪽에 배치한다. 그리고 알렉산드로스 본인은 최고 정예 기병이었던 3천의 헤타이로이 기병과 함께 우익과 중앙 사이에 포진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마케도니아군의 우익은 기병에 강력한 혼성 부대와 당시 기병 중 가장 훈련도가 높았던 헤타이로이 기병이 포진되었고 이는 다소 약한 메디아 기병으로 구성된 페르시아군의 좌익을 무너뜨리려는 의도였다.

또한 그리스 시민들로 구성된 호플리테스를 3개 부대로 나누어 최후방에 포진하였는데 이는 좌익을 노리는 페르시아 기병이 파르메니온의 마케도니아 기병을 무시하고 후방으로 돌진하게 될 것을 막는 역할을 하기 위해서였다. 이 호플리테스들은 페르시아군의 중앙에 포진한 그리스 용병들과 접촉하기를 원치 않았고 알렉산드로스는 이것을 참작한 것이다.

파일:attachment/이소스 전투(기원전 333년)/is1.jpg

페르시아군은 사기가 낮고 무장의 질이 떨어지는 많은 수의 징집병이 있었고 이들은 페르시아군의 가장 최후방에 포진한다. 이들이 일선에 배치되지 않은 이유는 이들이 무너지게 되면 전체 페르시아군의 사기를 저하뜨리고 적병의 기세를 올려주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동원된 이유는 이들은 비전투원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하였고 또 전투가 무르익어 페르시아군이 승기를 잡게되면 곧바로 투입되어 전세를 굳히는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7. 전투

양측이 배치를 마친 뒤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군과 싸우기 위해 강으로 접근하였다. 아리아노스는 이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자신의 병사를 소집한 알렉산드로스는 그들에게 잠깐의 휴식시간을 주었다. 그 뒤 그는 자신의 병사를 느린 속도로 전진시키기 시작하였고 다리우스는 더 이상 그리스 용병들을 이끌지 않고 그들을 그의 앞에 배치한다. 그 뒤 그는 강 뒤에 있는 후방으로 숨었는데 그곳엔 크고 작은 높은 둔덕들이 있었다. 이곳을 빙둘러 그는 방책을 세워놓은 바 있다.
이때 마케도니아군은 다리우스가 겁먹었다고 생각하였다. 어느덧 두 군대가 마침내 충분히 접근하게 되었다. 그러자 알렉산드로스는 잠시 군대를 멈춘 뒤 말을 타고 자신의 군대 사방을 돌아다니며 외치기 시작하였다. 그는 지금이야말로 마케도니아군의 용기를 보여줄 때이며 이것이 그들 군대의 전설적인 무용을 헛되이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또한 그는 자신의 장군들과 기병과 보병의 지휘관들, 그리고 그리스 용병의 지휘관들의 이름을 일일이 언급하면서 그들이 여지껏 보여주었던 용기를 헛되이 하지 말라고 외쳤다. 알렉산드로스가 이렇게 말할 때마다 마케도니아군 전원이 큰 소리로 함성을 질렀는데 이들은 알렉산드로스에게 더 이상 지체하지 말고 빨리 공격 명령을 내려달라고 소리질렀다.

가장 선두에 선 알렉산드로스와 그의 헤타이로이 기병이 페르시아군의 사정거리에 들어오자 페르시아군은 일제히 화살을 쏜다. 화살로 인해 말들이 놀라고 동요하자 알렉산드로스는 즉시 직속부대와 함께 궁병을 향해 돌진하였다. 알렉산드로스의 갑작스러운 돌격에 대비하지 못한 좌익 최전방의 경보병은 이 돌격에 그대로 강타당하고 뿔뿔히 흩어진다.

아리아노스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마케도니아군이 페르시아 궁병의 사격을 받았을 때 우익에 포진했던 알렉산드로스와 그를 둘러싼 병사들은 가장 먼저 강을 향해 돌진하였다. 이 빠른 속도의 돌격은 페르시아군을 놀라게 만들었다. 곧바로 전투가 벌어졌으며 그 결과 마케도니아군은 더 이상 궁병의 공격을 받지 않아도 되었다. 알렉산드로스가 예상한 바와 같이 이 전투는 양익의 주력간의 교전으로 번졌다.

알렉산드로스가 돌격했을 때 그의 뒤에 포진한 마케도니아군의 우익이 일제히 강을 건넜다. 이들은 최대한 빠른 속도로 달려 이미 전투에 돌입한 알렉산드로스 기병과 함께 페르시아 경보병을 완전히 무너뜨린다. 그 뒤 이들은 곧바로 경보병 뒤에 있던 메디아 기병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우익이 이렇게 치열하게 싸울 때 중앙에 있던 마케도니아 팔랑크스가 강을 건너기 시작하였다. 팔랑크스는 강을 건너면서 전열이 흩어지고 그 때문에 사리사의 고슴도치 형태가 일그러진다. 이것을 본 페르시아군의 그리스 용병은 이들이 대열을 갖추기 전에 공격하였고 이 두 정예보병은 곧 치열한 전투에 돌입한다.

마케도니아군의 좌익에선 페르시아 중기병이 한 덩어리가 되어 강을 건너 돌진하였다. 이들은 다리우스의 계획대로 마케도니아군의 좌익을 신속히 무너뜨리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들을 견제하며 최대한 시간을 끌라는 엄격한 지시를 받은 바 있는 파르메니온은 소수의 마케도니아 기병의 선두에 직접 위치하며 이들을 지휘하였다. 페르시아 기병은 파르메니온의 부대를 포위하고자 하였으나 파르메니온은 곧바로 자신의 기병을 뒤로 후퇴시켰고 다시 포위하고자 접근하면 다시 후퇴하였다. 하지만 완전히 멀어지면 마케도니아군의 후방이 노출될 가능성이 있었으므로 이들은 일정 거리를 유지하였는데 이는 엄청나게 세심하고 정교한 지휘능력이 아니면 불가능한 움직임이었다. 파르메니온은 알렉산드로스의 부왕인 필리포스 휘하에서부터 군사적 전공을 쌓은 노련한 군인이었고 또한 알렉산드로스의 부장 중 가장 유능하며 신임을 받고 있던 장군이었는데 이 싸움에서 그의 명성에 걸맞은 활약을 보인 것이었다.

하지만 파르메니온의 기병이 계속 후퇴하자 자연스럽게 마케도니아군의 후방이 페르시아 중기병에게 노출된다. 그러자 그리스 호플리테스가 즉시 기동하여 일렬로 늘어서서 페르시아 중기병을 견제하기 시작하였다. 그리스 호플리테스는 방패를 높게 들고 장창을 어깨 위로 들고 포진하였고 이러한 전열의 정면에 돌진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때문에 좌익을 붕괴하는 역할을 맡은 페르시아 중기병은 공격할 대상을 잃고 무력화 되었다.

파일:attachment/이소스 전투(기원전 333년)/is2.jpg

한편 페르시아군 좌익에 포진한 메디아 기병은 알렉산드로스가 직접 이끄는 1천의 헤타이로이 기병과 페니키아와 그리스 용병, 그리스 기병의 맹공을 받아 고전하였고 이들의 사기는 점점 떨어지고 있었다. 초기의 갑작스러운 알렉산드로스의 돌격은 이들의 허를 완전히 찔렀고 뒤이어 쇄도해온 마케도니아 우익의 맹공은 이들이 대비할 타이밍을 완전히 뺏은 것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전투 시작 전에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

게다가 최전방에서 싸우는 알렉산드로스의 활약은 마케도니아 우익의 사기를 크게 붙돋았다. 알렉산드로스는 번쩍이는 황금 갑옷을 입고 있었는데 따라서 그의 존재는 눈에 확실히 띄었다. 이는 알렉산드로스가 집중 공격을 받을 확률을 높였으나 그의 바로 곁에서 호위하고 있던 병사들은 마케도니아군에서 가장 용맹하고 힘이 좋은 자들이었고 이들은 알렉산드로스에 대한 접근을 쉽게 허용치 않았다. 따라서 알렉산드로스는 전방에서 종횡무진 활약하였고 메디아 기병은 점점 뒤로 밀리게 된다.

이러는 동안 중앙에 포진한 마케도니아의 팔랑크스는 페르시아의 그리스 용병대의 맹공을 받고 있었다. 팔랑크스는 강을 건너느라 전열이 무너진 상태였고 따라서 사리사의 긴 창을 효과적으로 쓰지 못했다. 그리스 용병은 페르시아의 최고 정예 취급을 받던 명성과 걸맞게 팔랑크스의 사리사 사이사이에 용감히 돌진하여 상당한 피해를 입힌다.

고대 역사가 아리아누스는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다리우스 휘하의 그리스 용병들은 마케도니아군의 흐트러진 틈을 파고들었다. 이들이 이렇게 흐트러진 이유는 알렉산드로스가 급작스럽게 적을 향해 돌진하였기 때문이었고 또한 마케도니아 보병대는 알렉산드로스와 비슷한 기세로 공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마케도니아군이 중앙에 놓인 강을 건너면서 울퉁불퉁한 돌투성이를 지나야했고 따라서 이들은 선두를 일렬로 늘어뜨릴 수 없었다. 뒤이어 벌어진 전투에서 마케도니아군은 불리한 가운데 필사적으로 맞섰으나 그리스 용병은 이들을 강으로 밀어붙일 수 있었다. 하지만 마케도니아군은 알렉산드로스의 계획이 거의 성공했음을 눈치챘고 또한 그때까지 그리스군을 상대로 무적을 자랑했던 마케도니아 팔랑크스의 영광을 헛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마케도니아인과 그리스인들은 서로에 대한 라이벌 의식이 강했고 따라서 마케도니아인들은 그리스인에게 지지 않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버틴 것이었다. 여기서 셀레우코스의 아들인 프톨레마이오스와 120명의 용맹한 마케도니아인이 전사하였다.

중앙이 이렇게 버티고 알렉산드로스의 우익이 메디아 기병을 밀어붙이는 동안 우익의 후방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나머지 2천의 헤타이로이 기병이[3] 강을 건너 우익에 합류한다. 이 2천여 기병은 밀리고 있던 메디아 기병의 왼쪽으로 기동하여 배후를 협공하려 하였다.

메디아 기병은 치열히 싸우면서도 이러한 헤타이로이 기병의 움직임을 눈치챈다. 이렇게 되자 후방에 있던 메디아 기병들이 협공을 피하기 위해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이 공포는 전체 우익 부대에 전염되었고 메디아 기병 전체가 전장터를 떠나 달아나고자 하였다. 메디아 기병은 후퇴를 개시하였고 이와 동시에 알렉산드로스는 1천의 헤타이로이 기병과 함께 전열에서 이탈한 뒤 중앙의 다리우스를 향해 돌진하였다.

알렉산드로스의 돌격과 메디아 기병의 철수는 동시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다리우스는 알렉산드로스가 방향을 틀은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따라서 알렉산드로스를 선두로한 헤타이로이가 엄청난 기세로 달려오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을 땐 이미 손쓸 수가 없었던 상황이었다. 다리우스 주위에 있었던 그의 친위대 몇몇이 알렉산드로스를 육탄으로 저지하기 위해 몸을 던졌으나 알렉산드로스와 그의 기병은 이들을 그대로 밟고 지나갔다. 그 와중에 알렉산드로스의 허벅지가 창에 찔렸으나 그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리우스의 바로 앞까지 쇄도하였고 그의 코앞에서 창을 겨눈다.

파일:attachment/이소스 전투(기원전 333년)/alex.jpg
(창을 겨누는 알렉산드로스와 놀라는 다리우스)

파일:battle_of_isos.jpg

이러한 급습에 완전히 놀란 다리우스는 바로 말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한다. 다리우스뿐 아니라 그의 뒤에서 이 광경을 목격한 페르시아 징집병들도 왕이 달아나기 시작하자 겁에 질려 뿔뿔이 흩어졌다. 다리우스의 호위군만이 그 자리에 서서 알렉산드로스가 왕을 추격하는 것을 막기 위해 싸웠다. 하지만 뒤이어 나머지 2천 명의 헤타이로이가 도착하여 이들을 향해 돌진하였고 이 공격에 호위군은 무너지고 페르시아군의 중앙은 완전히 궤멸된다.

파일:attachment/이소스 전투(기원전 333년)/is3.jpg

중앙에서 우세하게 싸우던 그리스 용병들은 그들의 배후에 있던 다리우스와 그의 호위군이 궤멸되고 알렉산드로스가 그들의 배후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심하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특히 알렉산드로스의 황금 갑옷은 눈에 잘 띄었고 때문에 이 상황을 마케도니아군의 중앙과 우익도 눈치챘다. 그리스 용병들은 알렉산드로스가 그들의 뒤를 급습할까봐 두려워하였고 따라서 무기를 버리고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또한 마케도니아군의 좌익에서 고립되었던 페르시아 중기병은 그대로 전진하여 전장터를 떠난다. 이를 마케도니아군이 추격하기 시작하였고 밤이 되어 중단할 때까지 수많은 페르시아군을 죽였다.

8. 전후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의 막사에서 다리우스의 딸과 어머니 그리고 부인을 포로로 잡는다.[4] 다음 날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의 병사들에게 상당한 양의 전리품을 나누어주었고[5][6] 몸소 부상병들에게 가서 그들을 위문한다.

한편 다리우스는 4,000명의 병사와 함께 동쪽으로 달아나 다마스쿠스에서 간신히 병력을 수습한다. 그 뒤 알렉산드로스에게 자신의 가족의 몸값으로 3,000 탈렌트의 금을 제시하며 알렉산드로스가 점령한 땅의 소유를 인정하겠다고 말하나 알렉산드로스는 이를 거부하고 계속 전쟁을 할 의지를 보인다.

이소스의 패배로 인해 시리아 전역이 알렉산드로스에게 무방비로 노출되며 알렉산드로스는 신속히 남하하여 시리아, 유다, 이집트를 모두 점령한다. 다리우스는 패잔병을 중심으로 다시 자신의 모든 재산을 짜내어 병력을 재건한 뒤 알렉산드로스와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맞붙는다.

9. 평가

이 전투는 이전의 전투들과 뚜렷한 차이점을 보인다. 다른 전투와는 달리 이 전투에서는 승리한 쪽이 지형과 병력에서 모두 불리한 상태였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을 오직 최고 사령관의 우수한 전술 능력으로 극복하여 승리하였다.

알렉산드로스가 우세한 기병전력으로 물리쳤다는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마케도니아군은 기병전력에서도 크게 뒤쳐진 상태였다. 또한 이소스 평야가 비교적 좁아 미케도니아군에게 유리한 지형이긴 하나 이미 페르시아군이 강 건너 포진을 한 뒤 보급로를 차단하였고 마케도니아군의 공격을 기다리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전투에서 가장 꺼리는 강을 건너 공격해야 하는 것을 마케도니아군은 감행하였다. 따라서 이 전투는 병력으로 열세한 마케도니아군이 지형적으로도 상당히 불리하였으므로 승리를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다리우스는 전술적으로 무능한 인물이 아니었고 포진도 지극히 상식적이었다. 위의 포진에서 다리우스는 강건너 포진한 뒤 강력한 정예 기병으로 구성된 우익을 전진시켜 마케도니아군의 좌익을 무너뜨릴 계획이었다. 이는 당시 장군들이 보여주는 지극히 당연한 방법이었고 전략이었다. 다리우스는 알려진 바와는 달리 군사에 무능한 인물이 전혀 아니었다. 그는 46세 때 황위를 계승하기 전까지 황위 계승 후보에 거리가 먼 상태였고 그의 생애를 전쟁터에서 보내왔다. 그는 카두시 족[7]과의 전투에서는 '영웅적 활약'을 하였다는 기록을 남길 정도로 활약한다. 다리우스가 이런 인물인 데다 전술을 짤 때 그와 동행한 페르시아의 수뇌부 장교들과 의논을 거쳤으므로 그는 당시의 상식에 크게 벗어나지 않은 전술을 내놓을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보통의 경우 마케도니아군이 패배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았으나 다리우스에겐 알렉산드로스가 당대의 평범한 장수와 비교할 수 없는 군사적 재능을 갖춘 인물이었다는 것이 불행이었다.

그의 부대에서 페르시아군을 뛰어넘는 전력은 오직 3천의 헤타이로이뿐이었다. 양측이 동원한 병력이 합쳐서 10만이 넘는 상황에서 3천 명의 헤타이로이의 활약으로 승패가 결정될 수 있다고는 예상할 수 없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는 이 병력으로 다리우스를 직접 타격하여 지휘체계를 붕괴시킨다면 승산이 있다고 판단하였다.

하지만 이는 여러모로 무모한 작전인 듯 하였는데, 다리우스가 최후방에 포진하고 있을 뿐 아니라 다리우스의 호위 병력들은 모두 정예 부대였고 뒤에 수많은 징집병이 포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아무리 헤타이로이가 공격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이 호위 병력의 뒤에 버티고 있던 징집병이 가세한다면 헤타이로이는 포위당해 끔살당할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다리우스가 낌새를 채고 병사를 방패로 삼은 뒤 후방으로 깊숙히 숨어버려도 이 작전은 실패하게 된다.

따라서 알렉산드로스가 성공하려면 오직 다리우스가 눈치채지 못하는 상태에서 중앙을 불시에 기습해야했고 이로써 다리우스가 죽거나 생포당하거나 또는 놀라 달아나 지휘계통이 완전히 붕괴되어야 했었다. 이를 위해선 기병으로 돌진해 다리우스를 불시에 습격하는 것이 필요하였다. 하지만 이를 위해선 헤타이로이의 돌격력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하는 공간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때문에 알렉산드로스는 우익에 맹공을 퍼부어 이들을 뒤로 물리게 하였고 중앙군을 불리한 지형에서 공격하여 페르시아군의 중앙이 앞으로 전진하게 유도한다. 이로써 헤타이로이와 다리우스의 위치 사이에 돌격로가 생기게 되었고 알렉산드로스는 이 길을 따라 다리우스를 불시에 급습할 수 있었다. 이러한 불시의 공격은 다리우스의 허를 완전히 찔렀고 이에 당황한 다리우스가 전장터를 떠나 달아남으로써 알렉산드로스의 의도대로 페르시아군의 지휘부가 붕괴된 것이었다.

즉 이렇듯 알렉산드로스의 기습이 성공한 이유는 알렉산드로스가 이렇게 전투가 전개되리라고 정확히 예측하였기 때문이었던 것이었다. 이는 그에게 천재적인 군사적 재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위의 전투를 결정 짓는 요소는 전술뿐 아니라 '기세의 활용'도 포함된다. 마케도니아군의 우익은 페르시아군의 좌익에 비해 숫적인 열세였으므로 평범하게 싸웠다면 저렇게까지 페르시아군을 뒤로 밀어붙일 수 없었다.

때문에 알렉산드로스는 적이 예기치 못하게 빠른 타이밍에 돌격을 감행하였고 이로써 페르시아군의 좌익이 순간적으로 당황하게 만들었다. 이 틈을 타 기세를 올린 마케도니아군이 페르시아군에 돌진하였고 이로써 소수로 다수를 밀어붙이는 상황을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다수의 포진한 적을 향해 소수의 병력으로 강을 건너 돌진하는 것은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한다. 이를 온전한 정신으로 감행하기 어렵기에 마케도니아군이 돌격하는 과정에서 조금만 위축된다면 실전과 같은 돌격의 효과를 낼 수 없었고 그러면 알렉산드로스의 계획은 실패하게 된다.

이를 감안한 알렉산드로스는 일국의 왕이자 최고 사령관이었던 그 자신이 꼭지점에 서서 가장 먼저 적을 향해 돌진하는, 정신이 나간듯한 무모한 짓을 감행하였다. 이러한 행동은 매우 무모하며 역사를 통틀어서도 서양에서는 리처드 1세, 동양에서는 항우를 제외하면 찾아보기 힘들다.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비슷한 것을 하긴 했고 여러번 승리를 거두기도 했지만 결국 그러다 뤼첸 전투에서 전사했다. 하지만 일국의 왕이 선두에 서서 돌진한 것은 그의 병사들의 용기와 사기를 크게 북돋는 결과를 낼 수 있었다. 그로써 마케도니아군의 우익은 상당한 기세로 페르시아군의 좌익이었던 메디아 기병을 공격하였고 이로써 그들을 뒤로 밀어붙일 수 있었다.

다리우스의 지휘부를 급습했을 때도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이 가장 선두에 서서 돌격하였다. 이 때문에 헤타이로이는 매우 맹렬한 기세로 다리우스를 향해 쇄도하였고 이것으로 다리우스를 급습하는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의 이탈을 이끌어 낼 수 있었으며 지형과 병력 모두 열세였던 전황을 멋지게 타개한다. 이렇듯 알렉산드로스가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천재적인 전술능력과 불굴의 용기를 겸비한 장군이었기 때문이며, 이 전투는 지극히 알렉산드로스다운 방법으로 승리했다고 볼 수 있다.


[현재] 튀르키예 이스켄데룬 북쪽[2] 다리우스의 부하 장군인 아민타스도 다리우스의 움직임에 반대하며 평야에서 싸워야 한다고 조언하였다.[3] 전체 3천의 헤타이로이 중 알렉산드로스는 1천을 직접 이끌었고 남은 기병대는 두 부대로 나뉘어 지휘를 받고 있었다.[4] 알렉산드로스는 이들을 왕족의 예로 정중히 대했다 하나, 다리우스의 왕비는 1년 후에 아이를 낳다가 죽는다. 이 때문에 알렉산드로스에게 겁탈당해 그의 아이를 임신했다가 사산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다리우스의 어머니는 알렉산드로스에게 인질로 잡혀 아들 다리우스의 죽음과 페르시아의 멸망, 알렉산드로스의 죽음까지 다 지켜본 후 알렉산드로스가 죽자 이제 효용가치가 없어진 자기도 무사하지 못할 것을 알고 독약을 마시고 죽는다.[5] 훗날 전리품을 나누어 주는 것에 인색했던 루쿨루스가 결국 자신의 군단병들의 반란을 초래하여 군사적 성취를 이루기 일보직전에 좌절하게 되었다. 또 술라와 맞섰던 킨나도 전리품 문제 때문에 목숨을 잃는다. 당시엔 전리품을 충분히 나누어 주는 것이 사기진작에 있어 상당히 중요하였다. 카이사르 역시 적당한 기회를 보아 자신의 병사들에게 도시에 대한 약탈을 허용하였다.[6] 사실 약탈은 흔히 생각하듯 재산을 강탈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상상 이상으로 잔혹하였다. 가급적 온화한 성격을 지녔던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 휘하의 군단병들이 스페인의 도시를 약탈할 때의 묘사가 고대 사료에 나오는데 그 도시의 남자를 포함한 걸어다니는 생명체를 죽인 뒤 사지를 찢어 내걸거나 여자를 강간하는 등을 하였다는 식의 묘사를 구체적으로 하고 있다. 또한 카이사르도 갈리아 전쟁의 막바지 때 도시를 점령한 뒤 자신의 병사들에게 학살을 명령해 12만에 이르는 거주민을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몽땅 학살한 바 있다. 학살을 전적으로 병사들에게 재량껏 하게 하였으므로 이 학살의 과정엔 온갖 잔혹한 방식을 썼을 것을 예상할 수 있다. 따라서 역사가들은 '약탈'이라는 단어를 가볍게 쓰나 이 단어엔 이러한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7] 지금의 이란인들의 조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