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원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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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원전 335년 12월, 알렉산드로스 3세가 이끄는 마케도니아군이 반란을 일으킨 테베를 철저하게 파괴한 공방전.
2. 상세
기원전 335년, 알렉산드로스 3세는 자신에게 반기를 든 트라키아인과 일리리아인을 상대로 하이모스 산 전투, 페우체 섬 공방전, 펠리움 공방전에서 연전연승했다. 그러나 그가 1년 가까이 일리리아에서 군사 활동을 하는 동안 그리스와의 연락이 끊겼고, 세간에는 알렉산드로스가 전사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이에 카이로네이아 전투 후 마케도니아에게 굴복했던 테베는 반란을 일으킬 호기라고 여기고 반란을 꾀했다.그들은 망명자들을 불러들인 뒤 카드메이아 요새를 지키고 있던 친마케도니아 인사 아민타스와 티몰리오를 죽이고 마케도니아군이 주둔하고 있던 요새를 봉쇄했다. 그 후 집회를 열어 자유와 자치를 외치며 마케도니아의 굴레에서 벗어나자고 선동하여 시민들의 전폭적인 호응을 이끌었다. 이후 아테네 역시 데모스테네스가 데려온 병사가 "알렉산드로스는 일리리아에서 전사했다"라고 주장한 걸 믿고 테베와 손을 잡기로 하고 무기를 보냈다. 다만 다른 폴리스들은 테베의 취지에 동의한다고 하면서도 선뜻 지원하지 않았다.
한편, 알렉산드로스는 펠리움 공방전을 마치고 산속으로 달아난 반란군 토벌에 매진하고 있었다. 그러던 기원전 335년 12월 테베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3만 보병과 3천 기병을 이끌고 테베로 곧장 진군했다. 그의 군대는 에오르다이아와 엘리미오티스를 거쳐 스팀파이아 산맥과 파라바이아 산맥을 넘었다. 그리하여 일주일 만에 테살리아의 펠리나에 도착했고, 다시 엿새 뒤에 보이오티아에 도착하여 테베에서 북서쪽으로 10km 떨어진 코파이스 호숫가에 위치한 웅게스토스에 이르렀다. 펠리움에서 테베까지는 최소한 400km에 달했으며 무척 험준한 산악지대를 진군해야 했는데도, 그는 불과 14일도 안 되어 주파한 것이다.
테베의 반란 주도자들은 이를 선뜻 믿지 못했다. 그들은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게 분명하다며, 마케도니아 본토에 머물고 있던 안티파트로스가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만약 지휘관 이름이 알렉산드로스라고 해도, 그는 아에로포스의 아들 알렉산드로스일 거라는 주장도 있었다. 그러는 사이, 알렉산드로스는 테베 주변의 보이오티아 소도시들의 연합군과 합세한 뒤 테베로 진군했다. 테베는 7,000명의 호플리테스와 1,000명의 기병을 소집하여 농성했다. 알렉산드로스는 동방 원정을 치르기 전에 그리스를 평화롭게 떠나고 싶었기에 성을 당장 공격하지 않고 이올라우스의 영내에서 잠시 머물렀다.
그러나 테베는 협상에 임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들은 기병대와 경보병대를 신속히 파견하여 적의 전초 기지를 원거리용 무기로 공격했다. 알렉산드로스는 경보병대와 궁수들에게 반격하라고 명했고, 마케도니아군은 적을 어렵지 않게 물리쳤다. 이튿날, 알렉산드로스는 전군을 이끌고 엘레우테라이와 아티카로 향하는 관문에 이르렀다. 그는 이번에도 도시 수비대를 공격하지 않고 카드메이아 요새에서 멀지 않은 곳에 진지를 구축했다. 이는 카드메이아 요새에 갇힌 마케도니아 장병들을 도우려는 것이었다. 당시 테베인들은 카드메이아 요새 주위에 이중 목책을 세워서 포위된 적군이 외부에서 도움을 받지 못하도록 철저히 감시하고 있었다.
알렉산드로스는 테베에 전령을 보내 반란의 주동자 포이닉스와 프로티테스를 넘긴다면 물러가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테베 측은 이를 거부하고, 안티파트로스와 필로타스를 자기들에게 넘기라고 요구했다. 알렉산드로스는 말로 해서는 안 된다는 걸 깨닫고, 사흘간 공격 준비를 했다. 그는 군대를 3부대로 나누었다. 첫 번째 부대는 성벽을 공격하고, 두 번째 부대는 테베의 보병대를 상대로 방어선을 형성했다. 그리고 세 번째 부대는 예비대로서 후방에 남았다.
마케도니아군이 쳐들어오자, 테베는 노예들을 해방시키면서까지 전력을 최대한 끌어모으고 성벽 위에서 항전했다. 기병대는 성벽 내부에 배치되어 긴급한 상황이 벌어질 경우 출격하도록 했고, 여자와 아이들을 신전 안에 피신시켰다. 이후 페르디카스와 아민타스가 목책을 향해 돌격하자, 알렉산드로스는 그들이 고립되어 테베인들에게 붙잡히지 않도록 전체 병력을 전진시킨 뒤 궁수들과 아그리아니아군을 목책 안으로 들여보냈다.
페르디카스는 두 번째 목책을 뚫으려던 중 중상을 입고 후방으로 이송되었다. 그의 부하들은 궁수들과 함께 헤라클레스 신전으로 이어지는 나지막한 길로 적군을 몰아넣으면서 후퇴하는 적을 압박했다. 그러나 테베인들이 분노의 함성을 내지르며 등을 돌려 추격자들에 대항하자, 마케도니아군은 퇴각했다. 이 과정에서 크레타의 에우리보타스를 비롯한 70명 이상의 궁수들이 목숨을 잃었지만, 나머지는 후방에 대기하고 있는 예비대와 합세했다. 테베군이 그들의 뒤를 쫓자, 알렉산드로스는 곧바로 반격을 가했다. 그는 보병대를 밀집 대형으로 출격시켜 적을 성문 안으로 몰아넣었고, 혼비백산하여 패주하던 테베군은 제때 성문을 닫아걸지 못했다. 마케도니아 병사들은 뒤따라 붙어서 적병과 엎치락뒤치락하며 요새 안으로 몰려들었다. 카드메이아 수비대는 아군이 목책을 돌파하여 밀어붙이자 즉시 출격하여 아군과 합세했다.
그 후 마케도니아군 일부는 암피온 신전을 지나 도심까지 진격했고, 일부는 앞서 도주한 테베군이 점령하고 있던 성벽을 기어오른 뒤 시장 광장 쪽으로 돌격했다. 테베군은 암피온 신전 근처에서 잠시 완강하게 저항했지만, 알렉산드로스가 친히 돌격해오는 걸 보고 기세가 꺾여버렸다. 테베 기병대는 여러 갈림길을 통해 들판으로 달아났고, 보병대는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가 모조리 도륙되었다. 마케도니아 장병과 보이오티아 연합군은 민가로 쳐들어가 시민들을 학살했다. 아리아노스에 따르면, 마케도니아인보다는 오래 전부터 테베의 억압에 원한을 품고 있던 보이오티아인들이 훨씬 많은 살육을 저질렀다고 한다. 시민들은 맞서 싸우다가 목숨을 잃기도 했고, 사원 제단에 매달려 애원하다가 최후를 맞기도 했으며, 여자와 아이들 역시 화를 피하지 못했다.
이 공방전에서 죽은 테베 시민은 6,000명에 달했고, 노예로 팔려간 이들은 3만 명에 달했다. 한편 마케도니아 병사 500명이 이 공방전에서 전사했다. 전투가 끝난 뒤, 알렉산드로스는 전투에 참여한 동맹군에게 테베의 최종 운명을 맡겼다. 이에 동맹군은 카드메이아에 수비대를 주둔시키고, 도시를 완전히 파괴하기로 했다. 성지를 제외한 모든 영토는 동맹군끼리 나눠 가졌고, 포로로 잡힌 여성과 아이들, 그리고 살아남은 모든 남성은 노예로 팔기로 했다. 사제나 여사제, 알렉산드로스나 필리포스 2세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거나 마케도니아와 공식적인 관계에 있는 사람들은 제외되었다. 또한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이 존경하는 시인 핀다로스의 집을 보존하고 후손들도 모두 살려줬다. 고대 기록에 따르면, 알렉산드로스는 테베 시민들을 모두 노예로 판매해 440달란트를 벌어들였다고 한다.
아테네를 포함한 그리스 폴리스들은 테베의 최후를 전해듣고 심한 충격을 받았다. 아르카디아는 테베를 돕자고 주장했던 자들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엘레아는 알렉산드로스와 우호적인 관계였던 정치적 망명자들을 불러들였다. 아이톨리아의 여러 도시는 알렉산드로스에게 사절단을 보내 반란을 지원한 것에 용서를 빌었고, 아테네도 뒤이어 알렉산드로스가 일리리아인과 트리발리인의 땅에서 무사히 돌아온 것을 기쁘게 생각하며, 테베인의 반란을 응징한 데 전적으로 찬성한다는 뜻을 전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아테네에 서한을 보내 전쟁을 선동한 데모스테네스를 비롯한 여러 반마케도니아 인사들을 넘기라고 요구했다. 이에 데모스테네스 등은 망명을 택했고, 알렉산드로스는 아테네가 완전히 굴복한 걸 확인한 뒤 마케도니아로 돌아갔다. 이듬해인 기원전 334년, 그는 아버지 필리포스 2세 대부터 추진했던 동방원정을 단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