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0 15:42:28

히다스페스 전투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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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양측의 전력
3.1. 마케도니아군3.2. 파우라바 왕국군
4. 전투 경과5. 결과

1. 개요


기원전 326년 5월 마케도니아 왕국알렉산드로스 3세가 이끄는 마케도니아군과 파우라바 왕국의 라자(왕) 포루스의 군대가 히다스페스 강(현재 파키스탄 북부 편자브 지방의 젤룸 강)변에서 맞붙은 전투. 알렉산드로스 3세 인생 최후의 대규모 회전이다.

2. 배경

기원전 334년 그리스에서 원정을 단행한 이래, 알렉산드로스 3세의 마케도니아군은 그라니코스 전투, 이소스 전투,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다리우스 3세의 페르시아군을 격멸하고 아케메네스 왕조를 정복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의 야망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고, 원정을 그만두고 싶어하는 여러 장성과 병사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인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알렉산드로스는 먼저 인더스 강 서쪽에 있던 페르시아계 지방 영주들을 소환하여 자신을 따르라고 명령했다. 많은 영주들이 이에 응해 알렉산드로스에게 나아갔으나 몇몇 영주들은 반항하며 거부하였다. 그러자 알렉산드로스는 그들을 반역자로 간주해 징벌을 감행했다. 이때 심한 부상을 입기도 했으나, 그들을 모두 공략하는데 성공하였다. 그에게 반항하고 부상을 입힌 영주들은 일족까지 처형당했을 뿐만 아니라 영주들 휘하의 도시 시민들도 모두 학살당했으며 건물 기초까지 부숴 완전히 초토화시켰다. 그제서야 지방 영주들은 알렉산드로스를 두려워하여 모두 귀순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인더스 강을 건너 인도 전역을 석권하려 했다. 그는 인도가 동쪽 대륙의 끝이라고 여겼고, 끝자리에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을 남기고 오겠다는 명예욕에 사로잡혔다. 기원전 326년 초 인더스 강을 건넌 후, 그는 탁실라 왕국과 동맹을 맺고 탁실라와 전쟁을 벌이고 있던 파우라바 왕국의 라자 포루스에게 사절을 보내 조공을 바치고 인도로 들어가는 길을 열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포루스는 전투에서 만나겠다고 말하며 조공을 거절했다. 이후 히다스페스 강 동쪽 강변에 진을 치고, 적이 강을 건너는 걸 저지하려 했다.

알렉산드로스는 히다스페스 강 서쪽 강변에 주둔지를 설치한 뒤, 탁실라를 포함한 많은 현지 라자들로부터 지지를 확보하는 한편, 탁실라가 대량의 곡물을 보낼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암시를 보였다. 하지만 그는 실제로는 기다릴 생각이 없었고, 조만간 강을 건너려 했다. 이리하여 히다스페스 전투의 막이 올랐다.

3. 양측의 전력

3.1. 마케도니아군

알렉산드로스는 인도로 진군하기 전에 자신이 정복한 페르시아 영토에서 추가 병력을 모집한 뒤 그들을 마케도니아 전투 방식으로 훈련시켰다. 그리고 인도에서는 코끼리로 전투를 치른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에 대항하기 위해 스키타이 궁기병을 추가했다. 이렇게 해서 확보된 병력은 보병 4만 명, 기병 5천 내지 7천 명에 달했다.

3.2. 파우라바 왕국군

포루스의 군대 규모에 대해서는 고대 기록이 엇갈리는데, 대체로 보병 2만~3만 명, 기병 2천~4천 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전투 코끼리 130마리가 전투에 활용되었으며, 1,000대의 전차가 배치되었다고 한다. 이 전차는 최대 6명이 탈 수 있었는데, 2명의 전차병, 2명의 방패병, 그리고 2명의 궁수로 구성되었다.

4. 전투 경과

포루스는 적이 대규모 곡물 수송을 받을 때까지 움직이지 않을 거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당분간 전투가 벌어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지만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적이 건널 가능성이 높은 건널목들을 견고하게 수비하면서, 적이 강을 도하하려 할 때 쳐부수기로 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적군이 방비를 단단히 한 걸 보고, 그라니코스 전투 때처럼 무작정 강을 건넜다가는 손실이 엄청나리라 예상했다.

알렉산드로스는 포루스를 속여서 강을 쉽게 건너기 위해 여러 행동을 했다. 그의 진영에 첩자들이 숨어 있다는 기미가 느껴지자, 그는 어떻게 하면 장마철이 끝날 때까지 편히 쉴 수 있을지에 대해 큰 소리로 말했고, 강변을 따라 수많은 모닥불을 피웠다. 이는 첩자들이 '알렉산드로스는 장마가 끝날 때까지는 강을 건너지 않겠구나.'라고 오판하도록 유도하기 위한 조치였다.

또한 그는 적절한 건널목을 찾는다는 명목으로 군대를 이끌고 강을 따라 행진했다. 포루스는 강 건너편에서 계속 따라갔으나, 나중에는 알렉산드로스가 단지 지겨운 장마철에서 기분 전환을 위해 그러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행진을 멈췄다.[1] 고대 역사가 아리아노스는 알렉산드로스의 건널목 탐색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알렉산더는 포루스가 오판하도록 그의 군대를 계속 움직였다. 그는 그의 군대를 여러 분대로 나누고, 일부를 자신의 지휘하에 여기저기로 이동시켰다. 이를 통해 적의 방어선을 뚫고 강을 건널 수 있는 장소를 찾았다.

그렇게 오래도록 이어진 수색 끝에, 마케도니아군 주둔지에서 약 18마일 떨어진 곳에 강을 건너기에 적당한 장소가 발견되었다. 그곳은 숲이 우거져 있어서 적의 감시를 피해 도하하기에 적합했다. 알렉산드로스는 포루스가 알아채지 못하게 하기 위해 크라테로스에게 상당한 병력을 맡겨서 주둔지에 그대로 있게 했다. 그 후 자신은 7,000명의 기병과 11,000명의 보병을 이끌고 폭우가 몰아치는 야밤에 소리없이 이동하여 사전에 알아본 숲에 병력을 은신시켰다.

이후 30척의 배와 뗏목을 활용하여 강을 건너기 시작했는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기껏 건넜더니 도착한 육지가 사실은 반대편 강변이 아니라 강 한 가운데에 있는 큰 섬이었던 것이다. 알렉산드로스와 부하들은 이 사실에 당황했지만, 날이 밝기 전에 어서 강을 건너야 했기에, 반대편 강변을 향해 걸어서 건너기로 했다. 많은 장병과 군마가 거센 물살에 밀려 떠내려갔지만, 알렉산드로스는 이를 무릅쓰고 밀어붙인 끝에 새벽 즈음에 강변에 도착했다.

이후 군대를 전투 대형으로 재편성하고 포루스와의 대결을 준비했다. 헤타이로이는 보병대 앞에 배치되었고, 스키타이 궁기병들은 양익에서 코끼리를 상대하는 역할을 맡았다. 얼마 후 정찰병들이 포루스에게 달려와서 적군이 강을 건넜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에 포루스는 아들에게 3,000명의 기병과 120대의 전차를 파견하여 알렉산드로스의 진군을 지연시키게 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는 기병대를 급파해 포루스의 아들을 죽이고 기병대와 전차를 박살냈다.

당초 작전에는 알렉산드로스가 강을 건넌 뒤 크라테로스의 부대가 강을 건너기로 되어 있었으나, 알렉산드로스는 추가 병력이 건너기를 기다리지 않고 크라테로스의 부대를 감시하는 파루라바 왕국군을 향해 6마일 가량 전진했다. 포루스는 이에 응전하기 위해 본군을 이끌고 맞섰다. 최전방에 코끼리 부대가 배치되었고, 기병대와 전차 부대는 좌익과 우익 측면에 배치되었다. 또한 보병대가 중앙에 배치되었고, 포루스는 진형 한 가운데에서 코끼리에 올라탄 채 전황을 살폈다.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에서 특별히 징집한 스키타이 궁기병들의 활약상이 대단했다. 그들은 코끼리를 모는 기수들을 화살로 저격해 모조리 떨어뜨렸고, 기수를 잃은 코끼리들은 미친듯이 날뛰다가 아군 장병들을 짓밟으며 전장을 이탈했다. 이렇듯 궁기병들이 코끼리 부대를 성공적으로 물리치는 동안, 헤타이로이는 포루스의 기병대를 물리치고 적군의 측면을 요격했다. 전차 부대가 이를 막기 위해 투입되었으나, 이미 페르시아의 전차 부대를 무찌른 경험이 있던 마케도니아군은 이들 역시 손쉽게 물리쳤다.

포루스는 최후의 수단으로 코끼리 부대를 중앙의 마케도니아 팔랑크스로 돌격시켰다. 그러나 팔랑크스를 구성하고 있던 장창병들은 천천히 후퇴하면서 코끼리를 장창으로 위협하는 전술을 구사했고, 이에 공포를 느낀 코끼리들은 도주하면서 포루스의 부하들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아리아노스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코끼리들은 지쳤고 그들의 돌진도 점점 약해졌다. 알렉산드로스는 기회를 잡고 코끼리들을 포위하고 보병들에게 방패를 쌓은 뒤 올라가서 기수들을 베고 코끼리를 찌르라는 신호를 보냈다. 대부분의 인도 기병대는 이어진 전투에서 사살되었고, 보병대 역시 마케도니아인들에게 강하게 압박당하여 끔찍한 손실을 입었다.

한편, 강 건너편에 있던 크라테로스는 전투가 한창인 틈을 타 강을 건너서 포루스군의 후방을 돈 뒤, 적의 좌측면을 공격했다. 이리하여 파루리바 왕국군은 사방에서 에워싸인 채 처참하게 살해되었고, 많은 이가 도주했다. 하지만 포루스는 심한 부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맞서 싸웠다. 그러다 결국 생포된 그는 알렉산드로스에게 끌려왔다. 아홉 군데의 상처에서 피가 흘려내리는데도 당당히 행동한 포루스에게, 알렉산드로스가 물었다.
"어떻게 대우받기를 원하느냐?"

포루스가 답했다.
"왕으로 예우하라"

알렉산드로스가 더 원하는 게 없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이 요청 하나에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다!"

알렉산드로스는 포루스의 당당한 태도에 경의를 표하며, 포루스에게 원래 지역과 더 많은 영토를 주어 왕으로서 통치하게 하고, 병사들에게 약탈을 금지시켰다. 이리하여 포루스와 파우라바 왕국은 알렉산드로스와 마케도니아 왕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5. 결과

파우라바 왕국군은 히다스페스 전투에서 12,000명이 죽거나 부상당했으며, 코끼리 80마리가 죽었다. 반면 마케도니아군의 사상자는 1,000명에 불과했다. 전투가 끝난 직후, 그동안 알렉산드로스의 기마로서 함께 했던 부케팔로스가 죽었다.[2] 알렉산드로스는 크게 슬퍼하며 부케팔로스를 매장한 그 땅에 알렉산드리아 부케팔라라는 도시를 건설해 추모했고,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알렉산드리아 니케아라는 도시를 또 인근에 건설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제 갠지스 강을 건너 인도 정벌에 착수하려 했다. 이 시기 갠지스 강 남쪽에는 난다 왕조가 있었는데, 이 나라는 인도 북부 전역을 장악하고 있는 대국이었다. 포루스와 인도 현지인들한테서 얻은 정보에 의하면 "난다 왕조는 갠지스 강 건너편에 20만 보병, 6만 기병, 8천 전차대, 6천 코끼리 부대를 보유하고 있다" 라고 말하였고[3], 신하들과 마케도니아군 장병들은 이미 10년간 전쟁을 지겹도록 치렀는데, 또다시 대규모 전쟁을 치러야 한다는데 질색했다.

기원전 326년 여름, 알렉산드로스 3세의 군대는 갠지스로 가기 직전 히파시스 강변에 이르렀다. 알렉산드로스는 강을 건널 준비를 하라고 지시했으나, 장병들은 더 이상 진격하고 싶지 않다며 파업을 선언했다.(히파시스 반란) 알렉산드로스는 이에 격분하여 그들과 다투다가 텐트에 틀어박혀 며칠간 밖에 나가지 않았다. 하지만 친구들이 간절히 설득하는 데다 장병들이 절규와 탄식을 쏟아내자, 그는 결국 뜻을 바꾸고 귀환하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원정을 끝낸 알렉산드로스는 바빌론으로 돌아갔지만 기원전 323년에 급사하였고, 그의 광대한 제국은 디아도코이로 인해 갈기갈기 찢겼다.


[1] 사실 비록 홈그라운드라 기후에 익숙했긴 했겠지만 장마철의 빗속을 뚫고 군대가 움직이는 건 포루스 군대에게도 상당히 고역이었을 것이다.[2] 당시 부케팔로스는 약 30살이었는데, 말의 수명이 약 25~30년 정도이고 알렉산드로스와 함께 숱한 전투를 겪은 것을 감안하면 살 만큼 산 셈이다. 기록이 명확하지 않아서 부케팔로스가 전투 도중 부상을 입고 죽은 것인지, 아니면 마침 노환이 결정적으로 작용해서 자연사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3] 실제로 난다 왕조를 기반으로 세워진 마우리아 왕조의 동원력이 딱 저정도였기에 포루스가 말한 난다 왕조의 전력도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