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03 22:02:13

세르비아 공국(중세 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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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2E2F2F> 세르비아 공국
Кнежевина Србија
Српска кнежевина
파일:Seal_of_Strojimir.gif
국장[1]
파일:세르비아 공국(중세 초기) 최대 영역.png
7세기 ~ 960년
<colbgcolor=#EAEAEA> 위치 세르비아
수도 데스티니콘(Destinikon) 외 7개 도시
정치체제 군주제
국가원수 크냐지(Knyaz)
주요 대공 비셰슬라프(780년경)
블라스티미르(830 ~ 850)
무티미르(850 ~ 891)
차슬라프(933 ~ 950년에서 960년 사이)
언어 고대 세르비아어
종교 슬라브 신화정교회
종족 세르비아인

1. 개요2. 역사3. 역대 통치자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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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7세기에서 960년까지 존속한 세르비아 중세 초기 공국. 슬라브족의 이동이 한창 진행될 때 수립된 뒤 불가리아 제1제국동로마 제국 사이를 오가며 주권을 유지했으며, 본래 슬라브 신화를 신봉했다가 동로마 제국 선교단의 전도를 받아들여 정교회로 개종했다. 950년에서 960년 사이에 기록상에 등장하는 마지막 공작 차슬라프가 마자르족의 침략에 맞서다 전사한 뒤 붕괴되었고, 동로마 제국의 통치를 받다가 요반 블라디미르가 이끄는 두클랴가 대두되었다.

2. 역사

슬라브인은 6~7세기 경 아바르 칸국의 산하에 놓인 뒤 아바르족과 함께 다뉴브 강을 건너 동로마 제국의 영토인 발칸 반도로 진입했다. 그 후 아바르 칸국이 동로마 제국과 전쟁을 치르는 동안, 슬라브인은 아바르 칸의 지휘하에 동로마군과 싸우는 한편 발칸 반도에 정착했다.(슬라브족의 이동) 이중엔 세르비아로 향한 무리도 있었다.

동로마 제국 황제 콘스탄티노스 7세(재위 913년 ~ 959년)가 편찬한 저서 <제국의 통치에 관하여>(De Administrando Imperio, 이하 DAI)에 따르면, 세르비아인은 본래 '보이키'[2]라고 불리는 지역에 거주했다. 그들의 지도자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사망한 뒤 세력을 둘로 나눠 가졌고, 그 중 한 명이 이라클리오스 통치 기간(610년 ~ 641년)에 절반의 인구를 데리고 남하해 현재의 세르비아에 이르렀고, 이라클리오스로부터 세르비아의 아르콘이라는 칭호를 받았다고 한다. DAI는 이 통치자가 아들에 의해 계승되었고, 그 뒤를 이어 손자가 계승했다고 밝혔지만, 이름 및 전반적인 통치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이후 별다른 역사가 전해지지 않던 세르비아는 780년경에 다시 거론되었다. DAI에 따르면, 비셰슬라프라는 인물이 자다르 인근의 항구 도시인 닌을 수도로 삼고, 아드리아 해 해안부터 브르바 강까지, 그리고 리예카부터 체티나까지 이어지는 지역을 통치했다. DAI는 비셰슬라프의 통치를 받는 세르비아인들이 동로마 제국과 동맹을 맺고, 이웃한 불가리아 제1제국과 평화를 이루었다고 언급했다. 당시 세르비아인들은 여러 주파(župa: 마을 공동체 연합)로 나뉘었으며, 주판(župan)이 이들을 통솔했다. 주판 직은 세습되었고, 이중에서 세력이 가장 강한 자가 크냐지(Knyaz)로 군림해, 이들에게 공물을 받고 전쟁시 소환하는 대가로 폭넓은 자치권을 보장했다.

DAI에 따르면, 데스티니콘(Δεστινικον), 체르나부스케이(Τζερναβουσκέeta), 메기레토스(Μεγυρέτους), 드레스네이크(Kαστρα/kastra), 레스니크(Λεσνήκ)와 살리네스(Σαληνές)가 있었으며, 세르비아의 일부인 보스니아의 '작은 땅'(χοριον/chorion)에는 카타라(Κατερα)와 데스니크(Δέσντκ)라는 도시가 있었다고 한다. DAI가 거론한 도시들의 위치는 불명이나, 학자들은 대체로 파비, 타라, 림 강 유역과 드리나 상류 지역일 거라 추정한다. 현대의 많은 학자들은 비셰슬라프가 이끄는 세르비아인들이 이미 정착한 다른 슬라브인을 조직하고 동화시키는 데 성공한 소규모 군사 엘리트였을 거라 추정한다.

세르비아 고고학자 도르제 얀코비치(Ђорђе Јанковић, 1947 ~ 2016)는 카롤루스 대제가 800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추대된 뒤 802년 동로마 제국과 전쟁을 벌였을 때, 비셰슬라프가 이끄는 세르비아인들은 동로마 제국의 편에 서서 전쟁에 참여했을 거라고 추정했다. 812년 아헨에서 평화 협약이 체결되었을 때, 동로마 제국은 이스트리아 반도를 제외한 달마티아 해안지대를 돌려받았다. 이때 세르비아는 국경을 디나라 산과 포운제 강까지 확장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닌(Nin)에서 발견된 세례반에서 "비셰슬라프 공작 시대에 사람들에게 세례를 준" 이반이라는 사제를 기리는 내용이 기술된 라틴어 비문에서 언급된 크로아트족 지도자 비셰슬라프가 세르비아 크냐지 비셰슬라프와 동일인물이라는 설이 있으나 불분명하다.

DAI에 따르면, 비셰슬라프의 뒤를 이어 라도슬라프, 프로시고이가 대를 이어 세르비아인들을 통치했으며, 동로마 제국의 충실한 신민이었고 동쪽 이웃인 불가리아 제1제국과 평화를 유지했다고 한다. 819~821년, 오보트리테스 족, 티모치아니족, 하부 판노니아 슬라브 공작이자 프리올리 변경백인 류데비트가 동프랑크 왕국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류테비트는 동프랑크군의 공세에 밀려 근거지를 상실하고 822년에 세르비아로 도주해 그곳에서 한동안 망명 생활을 했다. <프랑스 왕실 연대기>는 세르비아인들이 달마티아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이때 류데비트의 망명을 받아준 지도자가 라도슬라프인지, 프로시고이인지는 불분명하다.

830년경, 프로시고이의 아들로 추정되는 블라스티미르가 세르비아의 크냐지가 되었다. 당시 불가리아 제1제국은 오무르타그 통치 기간(814 ~ 831) 동안 판노니아에 거주하는 슬라브족을 공격하고 정복한 뒤 드라바 강 위로 배를 보냈고, 828년에는 드라바 북쪽에 있는 상부 판노니아를 황폐화시키는 등, 주변의 슬라브족을 잇따라 공략하며 영토를 확장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세르비아인들은 자기들의 주권을 지키기 위해 단결하고 그를 우두머리로 삼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DAI에 따르면, 세르비아인들은 비셰슬라프, 라도슬라프, 프로시고이 통치 기간 동안 불기리아와 평화롭게 지냈다. 하지만 불가리아인들은 서쪽을오 정복을 계속하고 세르비아인들을 강제로 복종시키고 싶어했다고 한다. 현대의 여러 학자는 당시 불가리아와 전쟁을 벌이던 동로마 황제 테오필로스가 세르비아인들에게 자기들과 손잡고 불가리아를 견제하는 대가로 독립국을 세우는 걸 인정했을 것이며, 불가리아 측은 이에 위협을 느끼고 세르비아를 치기로 결의했을 거라 추정한다.

839년, 불가리아 칸 프레시안 1세는 세르비아를 침공했다. 그 후 3년간 전쟁을 치렀지만 블라스티미르의 유격전에 휘말려 많은 병력을 잃고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퇴각했다. 그 후 842년, 양자는 별다른 영토 변경 없이 평화 협약을 맺기로 합의했다. 불가리아군의 침공을 물리친 뒤, 블라스티미르는 현재의 보스니아와 자후믈례를 점거하고, 847/848년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딸을 트레비네의 벨로예 지방 주판(župan)의 아들인 크라이나에게 시집 보냈고, 크라이나의 지위를 아르콘으로 격상했다. 크라이나는 블라스티미르의 딸과의 사이에서 아들 흐발리미르를 두었고, 흐발리미르는 트라부니야의 주판 직을 계승했다. 그 후 흐발리미르의 후손은 '벨로예비치 가문'이라 칭해졌고, 대대로 트라부니야의 통치권을 이어갔다. 일부 학자들은 트라부니야의 지배층이 세르비아로부터 독립할 움직임을 보이자, 블라스티미르가 이들을 달래기 위해 이 결혼을 단행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850년경 블라스티미르가 사망한 후, 세 아들 무티미르, 스트로지미르, 고이니크가 공동 크냐지를 맡았고 영역을 셋으로 분할했다. 다만 무티미르가 주권자로서 활동했고, 두 형제는 가신이 되었다. 무티미르 치세 초기, 불가리아군이 세르비아를 침공했다. DAI는 불가리아 칸 보리스 1세가 아버지 프레시안 1세의 패배를 복수하기 위해 세르비아를 침공했다고 밝혔다. 무티미르는 두 형제 스트로지미르, 고이니크와 함께 힘을 합쳐 침략군을 격퇴했고, 보리스의 장남 블라디미르와 12명의 보야르들을 생포했다. 이후 양자간의 평화 협상 끝에, 세르비아 동부 국경의 라사에서 포로들을 보리스 1세에게 넘겨주고 선물을 교환했다. 기록에 따르면, 보리스 1세는 노예 2명, 사냥개 2마리, 매 2마리, 모피 코트 80벌 등의 여러 귀중품을 선물로 줬다고 한다.

불가리아와 평화를 맺은 직후, 세 형제간에 갈등이 벌어졌다. DAI는 갈등의 원인이 무티미르가 모든 권력과 영지를 독차지하려는 열망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세르비아 역사학자 타보르 지브코비치(Tibor Živković, 1966 ~ 2013)는 가신을 맡은 왕자들이 반란을 꾀하는 게 일반적이지, 최고 권력을 짊어진 그가 그렇게 한 사례는 매우 드물다며, 동로마 제국과 불가리아가 세르비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가운데 벌어진 갈등일 거라고 추정한다. 그는 불가리아와 평화 협약을 맺었을 때, 무티미르가 불가리아와 협력하기로 했을 것이며, 동로마 제국은 이에 불만을 품고 그의 동생들을 통해 세르비아의 국가 정책을 바꾸려 했을 거라고 본다. 아무튼 무티미르는 860년 무렵에 두 형제를 제압한 뒤 불가리아로 넘겼고, 고이니크의 아들 페타르를 인질로 잡았다. 하지만 페타르는 나중에 탈출해 크로아티아로 피신했다.

870년대, 세르비아인들은 정교회로 개종했다. 콘스탄티노스 7세는 바실리오스 1세가 파견한 선교사들에 의해 세례를 받았다고 밝혔지만, 현대의 여러 학자는 콘스탄티노스 7세가 세르비아의 개종을 조부의 공적으로 윤색했을 뿐, 실제로는 7세기부터 시작된 세르비아인들의 기독교화가 이즈음에 완료되었을 거라고 본다. 무티미르는 873년 5월 교황 요한 8세로부터 세르비아 교구를 시르미움 주교단의 관할권으로 돌아가는 데 협력해달라고 요청하는 서신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이를 따르지 않고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구의 관할에 그대로 남기로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891년경 무티미르가 사망한 뒤 장남 프리비슬라프가 크냐지에 선임되었다. 892년, 고이니크의 아들 페타르가 크로아티아인들의 도움을 받으며 조국으로 돌아와 프리비슬라프를 크로아티아로 몰아낸 뒤 크냐지가 되었다. 하지만 페타르는 크로아티아인들이 자기를 복위하는 걸 도운 것에 별다른 보상을 해주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894년, 프리비슬라프의 동생인 브란이 왕위를 되찾으려고 크로아티아인들의 지원을 받으며 쳐들어왔지만 패배하고 체포된 뒤 실명형에 처해졌다. 896년, 스트로지미르의 아들인 클로니미르가 불가리아 제1제국의 지원을 받으며 세르비아를 침공해 세르비아 요새 중 하나인 도스티니카를 점령했다. 이에 페타르는 군대를 이끌고 반격에 나서 클로니미르를 전투 도중 처단한 뒤 도스티니카를 탈환했다.

그 후 페타르는 발칸 반도의 강대국인 동로마 제국, 불가리아와 동시에 좋은 관계를 맺고자 노력했으며, 세력을 확장해 자후믈레, 파가니아, 트라부니아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특히 자후믈레 주판 미하일로 비셰비치는 그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아드리아 해의 어느 섬으로 피신했다. 그러던 10세기 초, 불가리아와 동로마 제국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동로마 제국 소속 디라키움의 스트라테고스인 레온 랍도초스 페타르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 노력했고, 그는 이에 긍정적인 입장을 내비쳤다. 그에게 이를 갈고 있던 미하일로는 이 사실을 불가리아 통치자 시메온 1세에게 알렸다.

917년 8월 20일 앙키알로스 전투에서 동로마 제국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뒤, 시메온 1세는 세르비아로 눈길을 돌렸다. 테오도르 시그리차와 마르마이스가 이끄는 불가리아군은 시메온 1세의 지시에 따라 세르비아를 침공했다. 불가리아인들은 페타르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테니 협상하자고 제안했다. 페타르는 이에 응해 협상하려고 찾아왔다가 체포된 뒤 불가리아로 끌려갔다. 이후 브란의 아들인 파블레가 새 크냐지가 되었다. 920년, 프리비슬라프의 아들 자하리야가 동로마 황제 로마노스 1세의 지원을 받고 세르비아로 진군했다. 파블레는 이를 물리치고 자하리야를 생포한 뒤 시메온에게 넘겼다. 하지만 시메온은 훗날을 대비해 자하리야를 살려뒀다.

921년 파블레가 동로마 제국과 손잡으려 하자, 시메온은 군대를 파견해 그를 몰아낸 후 자하리야를 새 크냐지로 세우기로 했다. 하지만 922년 봄 세르비아를 장악하고 크냐지가 된 자하리야는 시메온 1세의 예상과는 정반대로 행동했다. 그는 오래도록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거주하면서 동로마 제국에 경도되었고, 자기를 가뒀던 불가리아를 질시했다. 또한 동로마 제국은 멀리 떨어져 있지만 불가리아는 이웃이니, 불가리아에 예속되는 것보다는 동로마 제국의 가신이 되는 편이 주권을 유지하는 데 유리할 거라 여겼다. 이에 자하리야는 동로마 제국과 동맹을 맺었다.

이 소식을 접한 시메온은 배신자 자하리야를 토벌하기 위해 테오도로스 시그릿사와 마르마이스에게 군대를 맡겨 세르비아로 출진했다. 그러나 자하리야는 불가리아군을 격파했고, 테오도로스와 마르마이스 외 여러 불가리아 장군을 척살한 뒤 그들의 수급과 무기를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선물로 보냈다. 이에 시메온은 924년 9월 9일 로마노스 1세와 평화 협상을 벌인 끝에, 동로마 제국은 매년 최고급의 공물을 불가리아에게 보내주는 대신 시메온은 제국의 영토에서 철수하고 그동안 점령한 흑해 연안의 요새들을 반환하며, 동로마 황제는 시메온이 "불가리아의 차르"를 칭하는 걸 받아들이는 내용의 협정을 맺었다.

동로마 제국과 평화 협정을 체결한 뒤, 시메온은 자하리야의 사촌인 차슬라프를 앞세워 세르비아로 진격했다. 불가리아군은 세르비아 전역을 파괴했고, 자하리야는 크로아티아로 망명해 토미슬라브의 보호를 받았다. 시메온은 차슬라프를 새 크냐지로 세울 테니 모든 세르비아 귀족들에게 경의를 표하러 오라고 명령했지만, 그들이 모이자 전부 사로잡은 뒤 불가리아로 압송했으며, 세르비아 전역을 불가리아의 영역으로 삼았다. <두클랴 사제 연대기>에 따르면, 불가리아 가신으로 통치하던 류토미르가 세르비아에서 시메온의 대리인으로 통치하다가 림과 이바르 인근의 전투에서 파블리미르라는 인물에게 패배했다고 한다. 일부 역사가들은 이 인물이 차슬라프이며, 차슬라프가 불가리아에서 도망친 뒤 동로마 제국의 후원을 받고 류토미르를 물리쳤을 거라고 추정한다. 하지만 이 기록은 오직 두클랴 대공 연대기에서만 나오며, 이 역사서의 초기 기록은 신빙성이 매우 부족하다는 평을 받기 때문에,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

927년, 시메온 1세가 사망했다. 그 후 차슬라프는 세르비아로 귀환했다. DAI에 따르면, 차슬라프는 동료 4명과 함께 프레슬라프에서 세르비아로 도망친 뒤 동로마 제국의 도움으로 세르비아 공국을 회복했다고 한다. 대다수 세르비아 역사가들은 이 기록을 사실로 인정하지만, 일각에서는 동로마 제국과 불가가리아 제국이 판노니아에서 떠오르는 강자 헝가리 대공국이 세르비아에 침투하는 걸 저지하기 위해 차슬라프를 세르비아 크냐지로 세웠을 거라고 추정한다. 차슬라프가 세르비아에 돌아온 연도도 불분명하다. 일부 학자들은 927년에 돌아왔을 거라고 추정하고, 일각에서는 931년이라고 추정하며, 다른 학자들은 933년일 거라고 본다.

DAI는 차슬라프가 세르비아에 돌아왔을 때 조국이 불가리아군에게 완전히 파괴된 걸 확인했고, 아내와 자녀가 없는 남자 약 50명만 발견했다고 설명했다. 이후 불가리아, 크로아티아 등 주변 국가에서 온 세르비아 난민들이 차슬라프가 돌아온 걸 알게 되자 조국으로 돌아왔는데, 특히 동로마 제국에서 가장 많은 난민이 돌아왔다고 한다. 또한 동로마 황제는 차슬라프에게 재정적 지원을 제공하여 세르비아를 복원하고 강화하는 것을 더 쉽게 했으며, 차슬라프는 이에 힘입어 모든 세르비아 땅을 통합했다고 한다.

945년 크로아트 왕국 3대 국왕 크레시미르 1세가 사망한 뒤, 장남 미로슬라브가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그 직후 또다른 아들인 미하일로 크레시미르 2세가 프리브나 반의 지지를 받으며 반란을 일으키면서 크로아티아 전역이 내란에 휘말렸다. 이로 인해 군대는 크게 약해졌고, 해군은 절반으로 줄어들었으며, 변경 지역들은 잇따라 이탈했다. DAI에 따르면, 이때 차슬라프는 보스니아 동부(현재 사라예보 주변 지역) 및 크로아티아의 일부 공국을 접수했다고 한다.

<두클랴 사제 연대기>에 따르면, 차슬라프[3]는 드리나 강둑에서 마자르족 분견대를 격파하고 마자르족 군 사령관 키쉬(Kiš)를 사살했다. 이에 키쉬의 미망인은 복수를 다짐하고, 세르비아에 맞서 더 큰 군대를 소집했다. 이후 사바 강변의 스렘에 주둔하던 세르비아군은 한밤중에 세르비아군의 기습 공격으로 궤멸되었고, 차슬라프는 친적들과 함게 사로잡힌 뒤 사바 강에 던져져 익사했다고 한다. 일부 학자들은 차슬라프가 마자르족과의 전쟁에서 전사한 게 사실이라고 보며, 950년에서 960년 사이에 이 일이 벌어졌을 거라고 본다. 하지만 다른 학자들은 두클랴 사제 연대기의 초기 기록은 신빙성이 매우 부족하므로 믿을 수 없다고 간주한다.

차슬라프 사후, 세르비아는 사분오열된 뒤 동로마 제국에 합병되었고, 971년경 동로마 제국의 속주인 카테파니키온 아르시스(Κατεπανίκιον Ἄρσης)에 편입되었다. 그러다가 976년 사무일이 세르비아 일대를 석권하고 세르비아 귀족들을 봉신으로 삼았다. 이후 세르비아는 동로마 제국과 불가리아간의 각축장이 되었다. 그러다가 1000년경, 두클랴의 지도자 요반 블라디미르가 세력을 떨치기 시작하면서, 두클랴가 세르비아의 새로운 중심지로 떠올랐다.

3. 역대 통치자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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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06년 세르비아 정부가 뮌헨에서 열린 경매에서 구입한 동로마 제국 양식의 인장. 그리스어 비문(KE BOIΘ CTPOHMIP, "신이여, 스트로지미르를 도우소서")으로 볼 때 스트로지미르 치세 때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2] 보헤미아로 추정된다.[3] 두클랴 사제 연대기에서는 키아슬라부스(Ciaslavus)로 명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