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02 09:08:59

스테판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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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00><colcolor=#fff> 크로아트 제9대 국왕
스테판 1세
Stjepan I.
제호 스테판 1세
(Stjepan I.)
출생 미상
사망 1058년
재위 크로아트 왕국의 국왕
1030년 ~ 1058년

1. 개요2.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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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크로아트 왕국 제9대 국왕.

2. 행적

크로아트 왕국 제8대 국왕 크레시미르 3세의 아들로, 1030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왕위에 올랐다. 그는 초기에 크로아티아 해군 재건에 전념했으며, 1032년 사라센 해적과 전쟁을 치르는 동로마 제국 해군을 도왔다. 그는 이 조치를 통해 동로마 제국과의 관계를 강화하는 한편, 베네치아 공화국의 달마티아 침탈에 대한 동로마 제국의 지원을 방지하기를 희망했다.

1035년, 케른텐 백작 아달베로는 스테판 1세와 동맹을 맺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콘라트 2세를 상대로 음모를 꾸몄다. 그러나 이 음모는 발각되었고, 1035년 5월 18일 밤베르크 제국의회는 아달베로의 모든 관직과 영지를 몰수했다. 한편, 스테판 1세는 1035년에 동로마 황제 미하일 4세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사촌인 도브로냐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냈다. 그러나 스테판이 동로마 제국의 동맹국인 베네치아 공화국과 전쟁을 벌이자, 동로마 황실은 도브로냐를 투옥했고, 결국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옥사했다.

1042년, 두클랴 대공 스테판 보이슬라프가 동로마 제국을 상대로 반기를 든 이래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면서 세르비아 전역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에 동로마 제국은 스테판 보이슬라프가 더 이상 세력 확대하는 걸 저지하기 위해, 크로아티아의 반(Ban)인 스테판 프라스카를 명예 사령관으로 선임해 달마티아 수비를 맡게 했다. 스테판은 명목상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일했고, 나중에 자다르에 정착했지만, 다른 해안 도시들이 스테판 1세의 통치를 받도록 주선했다.

1046년, 전 베네치아 도제 오토 오르세올로의 아들이자 스테판 1세의 조카인 피에트로 믈레차닌이 헝가리 국왕이었던 오르세올로 페테르 밑에서 일하다가, 오르세올로 페테르가 언드라시 1세의 반란군에 의해 폐위되자 크로아티아로 망명했다. 스테판 1세는 이때를 틈타 헝가리를 급습해 드리나 강 연안 까지 세력을 동쪽으로 확장했다. 그러나 1050년, 베네치아 도제 도미니코 콘타리니가 크로아트군이 헝가리 왕국 쪽으로 쏠린 틈을 타 달마티아 해안을 급습해 자다르를 공략했다. 한편, 스테판 1세는 라구사 공화국과 무역 협약을 맺고, 그들에게 해안가 영토 일부를 선물했다. 이에 따라 라구사는 라구사 시에서 16km 떨어진 자톤까지 확장되었고, 그 덕분에 식수 공급원을 확보할 수 있었다. 또한 스테판 1세는 오늘날 두브로브니크 시의 상업 항구인 그루즈 항구도 제공했다.

1058년, 스테판 1세가 사망했다. 당시 그에게는 장남 페타르 크레시미르 4세와 차남 고이슬라브가 있었는데, 두 사람이 공동으로 물려받기로 예정되었다. 그러나 고이슬라브는 얼마 안가 사망했는데, 이에 대해 페타르 크레시미르 4세가 형제를 살해했을 거라는 소문이 돌았다. <코르출라 코덱스(Korčula Codex)>에 따르면, 교황 알렉산데르 2세는 페타르 크레시미르 4세가 형제를 살해한 것이 사실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마이나르드(Majnard)를 교황 특사로 파견했다. 페타르 크레시미르 4세는 12명의 장관과 함께 그 소문은 사실이 아니라고 맹세했고, 교황청은 이를 받아들여 페타르 크레시미르 4세가 크로아트 국왕으로 군림하는 걸 받아들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