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29 20:38:16

나르세스


파일:250px-Narses.jpg

라틴어:narses
그리스어 : Ναρσής
아르메니아어 : Նարսես

1. 개요2. 생애
2.1. 베일에 싸인 젊은 시절2.2. 대기만성의 시작 : 니카 폭동2.3. 고트 전쟁2.4. 다시 이탈리아로2.5. 타기나이 전투2.6. 고트전쟁 최후의 전투2.7. 프랑크족과의 전투2.8. 죽음
3. 벨리사리우스와의 관계4. 여담

1. 개요

6세기 중반 동로마 제국정치가, 환관, 장군 : (478년 or 480년) ~ (566년 or 573년 or 574년)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휘하에서 활동하며 벨리사리우스와 쌍벽을 이루었던 명장으로, 비록 환관이었지만 동고트 왕국을 완전히 멸망시키며 반달·고트 전쟁을 완수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2. 생애

2.1. 베일에 싸인 젊은 시절

나르세스는 파르티아의 귀족 집안인 카렌 가문의 방계 출신이며, 아르메니아에서 태어났다. 그가 어떻게 콘스탄티노플에서 출세하였는지에 대해서는 관련 기록이 없다. 참고로 사산 왕조 초기의 군주 나르세스 1세와 이름이 같다.

미리나의 아가티우스가 남긴 기록에 의하면 나르세스는 점잖은 정신의 소유자였으며 임기응변에 능하고 상황에 대한 적응력이 뛰어났다고 한다. 또한 그는 문학에 정통하지 않고 웅변술도 별로였지만 지혜가 풍부했다고 한다.

2.2. 대기만성의 시작 : 니카 폭동

프로코피우스의 저술에 의하면 530년 경, 나르세스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심복이 되어 재정 관리, 제국 금고 관리를 맡았고 근위대장까지 역임하였다고 한다. 52세의 나이로 출세 가도에 오른 그는 2년 후에 터진 니카의 반란에서 활약하며 대기만성하게 된다.

만년 대립하던 녹색당과 청색당이 힘을 합쳐 반란을 일으키자, 황후 테오도라는 당시 환관이었던 나르세스에게 보물 창고에서 보화 일부를 꺼내어 황실에 그나마 우호적이었던 청색당의 지도부에 뇌물로 바치게 하였다. 뇌물을 가지고 청색당의 지도부를 만난 나르세스는, 테오도라 황후는 공공연한 청색당 지지자이고 유스티니아누스 1세도 역시 그러하다는 점, 유스니누스와 유스니티아누스 공동 통치 시기에 청색당에 내려진 은혜를 상기시키고 반란군이 황제로 옹립하려는 히파티우스는 녹색당 출신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나르세스의 이간책으로 청색당은 녹색당과 결별, 다시 유스티니아누스에게 충성을 맹세하였다. 이에 장군 벨리사리우스가 제국군을 이끌고 히드포룸에서 잔여 녹색당을 학살하며 반란은 종결되었다. 이후 나르세스와 벨리사리우스는 제국에서 황제 다음 가는 권력을 지니게 되었다.

2.3. 고트 전쟁

538년경,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이탈리아에서 동고트족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벨리사리우스를 돕기 위해 나르세스를 대장으로 하는 육군 7000명을 파견했다. 538년 4월 안코나 인근 항구인 피케움에 상륙했다. 벨리사리우스와 나르세스는 그곳에서 만나 군사 회의를 열어 리미니에서 동고트족에게 포위된 요하네스 구원 문제에 대해 논의했다. 벨리사리우스는 자신의 지시에 불복종하기 일쑤인 요한네스를 돕는 걸 꺼리며 동고트족이 리미니를 포위하고 있는 틈을 타 라벤나를 공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나르세스는 동고트족이 리미니를 취하면 전황이 불리해진다며 속히 구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던 중 요한네스가 속히 구원해달라고 호소하는 편지가 당도하자, 동로마군은 나르세스의 의견을 따르기로 결정했다. 벨리사리우스와 나르세스는 내륙의 산악 루트를 통해 리미니로 진군했다.

리미니를 포위한 동고트군은 구원군이 오는 걸 보고 재빨리 포위를 풀고 라벤나로 철수했다. 그후 요한네스는 노골적으로 나르세스의 명령만 들었고 리미니 구원을 성사시킨 나르세스에 대한 장군들의 평가도 올라갔다. 이로 인해 벨리사리우스와 나르세스의 사이는 불편해졌다. 두 사람은 앞으로 전쟁을 어떻게 이끌어갈 지에 대해서도 대립했다. 벨리사리우스는 안코나 인근의 동고트 거점인 아욱시움을 공략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나르세스는 그보다 방비가 덜한 아에밀리아를 먼저 공격하자고 주장했다. 벨리사리우스는 타협안으로 우르바눔 공격을 제안했고 나르세스도 이에 동의해 두 장군은 538년 여름에 우르바눔으로 진군했다.

그러나 나르세스는 벨리사리우스와 따로 진영을 차리며 거리감을 드러냈다. 또한 도시의 보급 사정이 좋은 것을 파악한 나르세스는 아르미니움으로 회군한 후 요한네스가 이끄는 분견대를 파견해 기어이 아에밀리아를 공략했다. 한편 우르비눔도 우물이 말라버리자 벨리사리우스에게 항복했다. 그러나 이 일로 벨리사리우스와 나르세스는 서로 화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던 539년 초, 벨리사리우스는 1년간 동고트군에게 포위공격을 받고 있던 밀라노 구원을 위해 군대를 파견했으나, 구원군을 이끈 마르티누스와 율리아리스는 적의 규모가 워낙 많아 당해낼 수 없다고 판단하고 아에밀리아에 주둔한 요한네스와 유스티누스에게 함께 힘을 합칠 것을 제의했다. 그러나 그들은 나르세스의 명령이 있기 전까지는 출정하지 않겠다며 거부했고 결국 밀라노는 539년 3월 함락당하고 시민들 대부분이 학살당했다.

벨리사리우스는 밀라노의 참극의 원인이 나르세스를 따르는 부하들의 안일한 태도 때문이라고 비난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도 벨리사리우스의 주장에 동의해 나르세스를 콘스탄티노플로 소환했다. 하지만 나르세스는 처벌을 받지 않고 황제를 모시는 환관으로서 직임을 수행했다. 특히 그는 이교도 박해 정책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535년경 그를 이시스 성전이 있는 이집트로 보내 이단을 근절하게 했다. 나르세스는 이시스 신을 모시는 제사장들을 투옥하고 사원을 약탈했다. 얼마 후 테오도르 지역 주교는 이시스 성전을 교회로 전환했다.

2.4. 다시 이탈리아로

550년,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장기화된 고트 전쟁을 끝내기 위해 자신의 사촌인 게르마누스에게 대군을 맡겨 이탈리아로 파견했다. 그런데 게르마누스는 이탈리아로 가던 도중에 병에 걸려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나르세스가 그를 대신해 군대의 지휘관이 되었다. 그에겐 벨리사리우스에겐 없는 믿을 구석이 있었으니, 바로 황제의 재원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르세스는 황제의 승인하에 군대를 대대적으로 징발하여 2만에서 3만에 달하는 대군을 편성할 수 있었다. 또한 나르세스는 병사들에게 두둑한 봉급을 주는 등 잘 대해줬고, 병사들은 그런 지휘관에게 진심으로 충성했다.

나르세스는 군대를 이끌고 아드리아 해 연안을 따라 진군해 1년 만에 이탈리아에 도착했다. 동고트족의 국왕 토틸라는 동부 이탈리아의 해안을 통제하고 적이 건너오지 못하도록 47척의 갈리선을 배치했다. 이에 라벤나의 사령관 발레리아누스는 달마티아의 살로나에서 나르세스의 본대를 기다리고 있던 요한네스에게 구원을 청했다. 요한네스는 즉각 38척의 구원함대를 파견했다. 발레리아누스도 라벤나에 배치된 12척의 함대를 이끌고 합세, 50여 척의 연합 함대를 이루었다.

551년 가을, 50여 척의 연합 함대는 안코나에서 북쪽으로 27km 떨어진 항구인 세나 갈리카에 정박했다. 이에 동고트족 함대는 곧장 달려들었다. 이후 벌어진 전투에 대해 프로코피우스는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지상에서 벌어진 전쟁처럼, 가까운 곳에서 칼과 창이 번뜩였고 화살이 쏟아졌다."

이 세나 갈리카 해전에서, 동고트족이 이끄는 갈리선 47척 중 36척이 파괴되었고 기발 장군이 포로가 되었다. 이리하여 해상을 완벽하게 지배하는 데 성공한 나르세스는 육로를 통해 이탈리아 북부로 진군했다. 토틸라는 이를 막기 위해 분견대를 파견했으나 모조리 격퇴당했고 나르세스는 552년 6월 6일 벨리사리우스와의 갈등으로 콘스탄티노플로 소환된 지 12년 만에 이탈리아에 도착했다.

2.5. 타기나이 전투

나르세스는 라벤나에서 출정해 로마로 진군하던 중 리미니에서 농성하는 동고트족의 저항에 부딪쳤다. 하지만 538년에 리미니에서 적에게 포위된 경험이 있던 요한네스의 계책에 따라 비교적 쉽게 공략할 수 있었다. 이후 나르세스는 플리미니아 가도를 따라 남진하다가 552년 6월 말 타기나이 평원에서 토틸라와 마주쳤다. 이때 양측의 전력은 로마군 2만 8천 4백명, 동고트군 1만 3천명으로 2배 이상의 차이가 났다. 토틸라는 앞서 구원을 요청해둔 프랑크군이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끌기 위해 나르세스에게 평화협상을 제의했다. 프로코피우스에 따르면, 나르세스가 토틸라에게 항복과 전투 중 하나를 택하라고 알리자 토틸라는 "8일 후에 맞붙자"고 제의했다고 한다. 그러나 나르세스는 적의 의도를 예측하여 평화 협상을 거부하고 전투를 감행했다.

나르세스는 병력의 우위에도 불구하고 서두르다 일을 그르칠 우려가 있다고 판단해 군대를 상당히 방어적으로 배치했다. 나르세스는 게르만족 용병대가 동고트족과 토틸라에게 동질감을 느껴 배신할 것을 우려해 같은 부족끼리 묶지 않고 다른 부족끼리 섞어서 중앙에 배치했다. 그리고 양 옆에 로마 기병대가 배치되었고 양익에는 궁병 4천명을 배치했다. 전투가 개시되기 전, 토틸라는 로마 진영의 배후를 급습하기 위해 로마 진영의 왼쪽에 위치한 언덕에 기병대를 파견했다. 하지만 나르세스는 미리 언덕에 장창병과 큰 방패를 갖춘 보병대를 배치해 기병대를 성공적으로 격퇴했다.

이후 토틸라는 시간을 어떻게든 끌기 위해 평화 협상을 다시 한 번 제의하고 결투를 벌이기도 하고 호위병 하나 대동하지 않고 화려한 갑옷을 입은 채 말을 몰아 온갖 묘기를 선보이는 등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마침내 테이아가 이끈 2천의 지원 병력이 7월 초에 도착하면서 동고트군은 1만 5천명으로 늘어났다. 이후 토틸라는 점심을 먹으러 전열을 이탈하는 듯하다가 적이 방심했을 거라고 판단하고 곧장 돌격했다. 그러나 나르세스는 병사들에게 각자 위치에서 휴식을 취하게 하는 한편 궁수들에게 계속 준비하고 있을 것을 지시해놓았고, 덕분에 궁수들은 적 기병대를 향해 가차없이 쏴 전열을 흐트러놨다.

그후 나르세스의 로마군은 압도적인 병력으로 밀어붙였고 나르세스가 측면에 배치해두었던 기병대를 진격시켜 동고트 군대를 포위했다. 이후 로마군은 포위당한 동고트족을 일방적으로 학살했다. 전세가 기울자, 토틸라는 다섯기의 호위대와 함께 피신하려 했다. 그러나 추격대가 간격을 점점 좁혀오자, 토틸라는 말머리를 돌려 돌진했고 로마 게피데 용병의 우두머리인 아스바두스의 창에 찔려 전사했다. 그의 주검은 근처의 카프라에 빌라에 매장되었다가 나르세스가 동고트족 여인의 증언에 따라 매장지를 확인 한 후 시신을 양지바른 곳에 다시 묻어주었다.

2.6. 고트전쟁 최후의 전투

나르세스는 타기나이 전투에서 토틸라를 전사시킨 뒤 로마로 행진하여 도시를 포위했다. 나르세스가 수천의 기병대로 성벽의 한 귀퉁이를 공격하는 동안 요한네스는 다른 부분을 공격했고, 마침내 로마를 2년만에 되찾는 데 성공했다. 그후 552년 10월, 나르세스는 캄파니아 지방의 쿠마이를 포위했다. 토틸라의 뒤를 이어 동고트족의 왕이 된 테이아는 구원군을 이끌고 동로마군과 대치했지만 2달 가까이 접전을 벌였으나 승리를 거두지 못하자 철수를 결심했다. 나르세스는 사전에 척후병을 파견해 그들의 후퇴로를 알아냈고 베수비우스 화산 인근의 락타리우스 산에 군대를 매복시켰다가 적이 지나가는 틈을 타 측면을 요격했다. 동고트 군대는 황급히 락타리우스 산에 농성했고 나르세스는 포위망을 구축했다.

식량이 다 떨어진 동고트군은 말을 잡아먹으면서 버티다가 결국 더이상 버틸 수 없자 산에서 내려와 최후의 전투를 벌였다. 테이아는 직접 선두에서 돌격했으나 중과부적으로 전사했고 결국 동고트군은 항복했다. 이로써 동고트 왕국은 역사속으로 사라졌고 기나긴 고트 전쟁은 마침내 막을 내렸다.

2.7. 프랑크족과의 전투

동고트 왕국이 멸망한 직후, 레우타리스와 부틸리누스 형제가 이끄는 프랑크족 7만 5천여 명이 553년 초엽 알프스산맥을 넘어 북이탈리아에 진입했다. 이 소식을 접한 나르세스는 시칠리아에 주둔해 있던 아르타바네스의 군대를 소환해 아펜니노산맥의 고갯길에 주둔시켰다. 침공군은 북이탈리아의 동로마 제국 거점이었던 파르마를 함락시키고 약탈을 자행했다. 이 소식을 들은 아르타바네스는 아펜니노 고갯길로 가지 않고 파벤티아로 철수했다. 한편 나르세스는 중남부 일대의 도시들에 수비대를 분산 배치하고 자신은 나머지 병사들을 규합해 로마에 주둔하며 승부를 볼 시기를 기다렸다.

554년 초엽, 프랑크군은 이탈리아 중부 일대를 약탈하고 삼니움까지 진군했다. 이때 레우타리스는 아풀리아, 부틸리누스는 칼라브리아와 캄파니아로 진격하기로 했다. 그러다가 레우타리스가 갈리아로 돌아가려 하자, 나르세스는 아직도 파벤티아에 짱박혀 있던 아르타바네스를 독촉해 피사룸 인근에 매복하여 적의 퇴로를 차단하게 했다. 아르타바네스는 피사룸을 지나던 프랑크군을 습격해 적의 선발대를 궤멸시키고 많은 로마인 포로들을 구출한 뒤 나르세스와 합류했다. 그후 레우타리스의 군대는 알프스 산맥을 넘던 도중 전염병에 직면했고, 레우타리스는 이 병에 시달리다가 목숨을 잃었다.

한편, 부틸리누스의 군대는 아직도 동로마에 저항하고 있던 동고트족과 합세해 칼라브리아 일대를 약탈하다가 전염병에 걸려 3만명에서 2만명으로 줄어들었다. 이에 부틸리누스는 554년 여름에 캄파니아로 회군해 숙영지를 세우고 불투르누스 강의 다리를 지키기 위해 큰 탑을 지었다. 그해 9월, 나르세스는 적의 이러한 상황을 척후병을 통해 보고받고 로마에서 남하해 캄파니아 지방으로 진군했다. 그는 아르메니아인 카라난제스 휘하의 기병대를 파견해 프랑크군의 보급선을 교란하게 했다. 카라난제스는 보급선을 교란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탑을 박살내는 성과까지 거두었다. 이에 프랑크군은 다리를 건너 동로마군을 향해 나아가 전투 태세를 갖췄다.

그런데 이 중요한 시기에 악재가 터졌다. 동로마군 용병부대 중 가장 강력한 전투력을 발휘하던 헤룰리 용병의 족장이 하인을 죽이고 나르세스 앞에 소환되었는데도 끝까지 잘못을 부인하자 화가 난 나르세스가 그를 처형했고, 헤룰리 용병대는 이에 격노해 더이상 전투에 참여하지 않겠다며 파업을 선언해버린 것이다. 나르세스는 이 중대한 사태에도 동요하지 않고 충성심이 굳건한 롬바르드 족을 중심으로 한 용병대를 중앙에 밀집대형으로 배치했고 그 뒤에 궁병대, 측면에 기병대를 배치했다. 또한 기병대 일부를 아르타바네스의 지휘 하에 인근의 작은 숲에 매복했다. 또한 헤룰리 족의 장군 신두알이 부족을 설득해보겠다고 청원한 것을 받아들여 보병대 중앙부에 틈을 벌려놓아 헤룰리 족이 들어올 수 있게 했다.

554년 10월 초, 헤룰리족 일부가 프랑크군에게 달아나 헤룰리 용병대가 전투에 가담하지 않은 지금이야말로 동로마군을 섬멸할 기회라고 알렸다. 이에 프랑크군은 즉시 공세를 개시했고 동로마군은 수적인 열세로 인해 밀렸다. 그러자 나르세스는 친히 기병대를 이끌고 프랑크군의 후미를 습격하고 궁기병대로 하여금 갑옷을 제대로 입지 않은 프랑크 병사들을 향해 화살을 쏘게 했다. 이 공세로 프랑크군의 전열이 흐트러지자, 동로마군은 그들을 에워쌌다. 여기에 헤룰리 용병대가 프랑크군을 덮쳤고, 결국 사령관 부틸리누스를 비롯한 대다수 프랑크군이 몰살당했다.

프랑크군을 격파한 나르세스는 1만 5천 명에 달하는 롬바르드, 헤룰리, 아바르 용병대에게 후한 포상을 해주고 알프스 산맥 이북으로 돌려보낸 뒤 554년 11월 콘스탄티노플로 귀환해 개선식을 치렀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나르세스를 초대 이탈리아 총독으로 임명해 통치하게 했다. 나르세스는 12년간 이탈리아를 통치하면서 고트 전쟁에서 쏟아부은 전비를 회수하기 위해 가혹한 액수의 세금을 거뒀다. 로마 시에서 나르세스에게 가혹한 통치에 대해서 탄원하러 보낸 대표단이 차라리 그리스인[1] 당신들보다 동고트인을 모시는 게 낫겠다고 했다고도 한다.[2] 이렇게 불만을 사면서도 할 일은 해서, 그는 많은 교량을 수리하고 성벽을 재건해 이탈리아를 어느정도 복구시켰다.

2.8. 죽음

맨 위의 생몰년에서 보듯 매우 장수한 것은 확실하나 환관이라서?[3] 생년은 물론 몰년도 부정확하여 그에 대해 여러 의견이 존재한다. 몇몇 역사가들은 나르세스가 567년에 사망했다고 주장하지만 다른 이들은 그가 574년에 죽었다고 주장한다. 후자가 사실이고 나르세스가 478년에 태어났다면, 그는 사망 당시 95세였을 것이다.

전설에 따르면, 나르세스는 그의 규칙에 따라 로마인들을 노예로 전락시켜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내다가 새 황제 유스티누스 2세의 분노를 샀다고 한다. 그후 나르세스는 은퇴하여 나폴리로 갔고 그곳에서 북이탈리아를 침공할 기회를 노리는 랑고바르드족을 초대하는 서신을 보냈다고 한다. 이게 사실이라면 나르세스는 마지막 순간 제국을 배신하고 고트 전쟁으로 얻어낸 성과를 한 순간에 무위로 돌려보내는 결과를 초래한 셈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전설일 뿐이며 이를 부정하는 기록도 여럿 존재한다. 파울 부제는 나르세스의 시신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내졌다고 기록했고 에페소스의 요안네스는 나르세스가 그 자신이 설립한 수도원에서 황제와 황후가 지켜보는 가운데 묻혔다고 기록했다.

3. 벨리사리우스와의 관계

시오노 나나미의 저서 로마인 이야기를 접한 국내 역사매니아들은 순수한 군인이자 충성심이 지극한 명장 벨리사리우스가 간사한 환관 나르세스의 농간으로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의심을 사는 바람에 온갖 시련에 직면했다고 여기며 나르세스를 안 좋은 시각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나나미의 묘사와는 달리, 나르세스는 단순히 황제 옆에서 알랑거리며 충신을 헐뜯는 간사한 환관 따위가 아니었다. 그는 니카의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하고 제국의 행정을 완벽에 가깝게 정비했으며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던 고트 전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특히 그의 전술적 역량은 벨리사리우스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할 정도로 훌륭했다. 만약 그가 이탈리아에 없었다면, 고트 전쟁에서 동로마 제국이 승리를 거두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다만 벨리사리우스와 나르세스가 서로 반목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은 순수한 군인 벨리사리우스가 간사한 환관 나르세스의 농간에 시달렸기 때문이 아니라, 두 사람의 전쟁 수행과 관련된 견해 차, 부하들의 편 가르기,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벨리사리우스에 대한 의심 등 여러 요인이 겹쳐 비롯되었다. 사실 벨리사리우스는 최고의 명장이었지만 일부 부하들과 개인적으로 반목했는데, 개중에는 요한네스처럼 군사적 역량이 뛰어난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나르세스를 대안으로 여기고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벨리사리우스는 이에 불만을 품고 나르세스와 대립했다. 또한 벨리사리우스는 동고트족이 그를 로마의 왕으로 추대하겠다고 꼬드겼을 때 이를 수락하는 척하고 무혈 입성한 뒤 그들을 모조리 콘스탄티노플로 압송한 적이 었었다. 그는 거짓으로 받아들인 것이었지만, 의심이 많은 유스티니아누스에겐 충분히 불안하게 만들 행위었다.

그리고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나르세스를 일방적으로 아낀 것도 아니다. 황제는 벨리사리우스와 나르세스 모두 제국에 꼭 필요한 인재라고 여겼고 두 사람을 견제하면서도 중요한 순간에 반드시 기용했다. 벨리사리우스가 유스티니아누스에게 시달리는 것만 조명받지만, 나르세스도 벨리사리우스와 반목하다가 콘스탄티노플로 소환되어 12년간 이탈리아로 가지 못하고 황제 곁에 있어야 했다. 물론 나르세스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게서 벨리사리우스보다 훨씬 많은 지원을 받아낸 건 사실이지만, 이것은 당시 여건이 벨리사리우스 때보다 호전되었고 나르세스 본인의 정치적 수완이 벨리사리우스보다 뛰어났기 때문이지, 황제가 나르세스를 일방적으로 아꼈기 때문이 아니다. 그리고 나르세스는 황제에게 듬뿍 지원받은 값을 제대로 해줬다.

이 두 명장의 관계를 두고 '대신들 앞에서 임금 뒷담을 하는 이순신 vs 싸바싸바뿐만 아니라 싸움까지 잘하는 원균'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4. 여담

나르세스는 성모 신심이 두터웠다고 하며, 전투에 나서기 전에 항상 성모 마리아에게 전구를 요청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빈자에게 관대했으며, 성당 재건에 열정적이었다고 한다.
[1] 이 때부터 동로마인을 그리스인이라고 타자화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2] 'Transformations of Romanness' 35p, 원문: 'the 'Romans' complain to Narses about his harsh rule, threatening that it would suit them better to serve the Goths than the Greeks.'[3] 남성 호르몬이 실제로 수명 단축의 효과가 어느 정도 있다고 한다. 실제로 환관들은 대체로 장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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