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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로테르(Lothaire) |
출생 | 941년 9월 |
사망 | 986년 3월 (향년 44세) |
재위기간 | 954년 ~ 986년 3월 |
아버지 | 루이 4세 |
어머니 | 동프랑크의 게르베르가 |
1. 개요
프랑스어: Lothaire (로테르)라틴어: Lotharius (로타리우스)
로테르(Lothaire) 또는 로타르(Lothar)는 941년에 태어났으며, 954년부터 986년 3월 2일까지 서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왕조 출신 제11대 국왕으로 재위했다.
아버지는 '해외왕' 루이 4세였고, 어머니는 독일 왕국의 국왕 하인리히 1세[1]의 딸 게르베르가였다. '경건왕' 루도비쿠스 1세 황제의 장남이었던 로타리우스 1세(로타르, 로테르)[2]를 서프랑크의 왕으로 인정하면 넘버링이 '로테르 2세'가 되지만 루도비쿠스 1세의 아들인 로타리우스 1세는 보통 프랑스의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2. 생애
941년 9월 루이 4세와 독일 왕 하인리히 1세의 딸 게르베르가 사이에서 태어났다. 큰 외숙부가 유명한 오토 1세였고, 이종사촌이 오토 2세와 위그 카페였다.954년 부왕 루이 4세가 갑작스러운 낙마 사고로 승하하자 뒤를 이어 즉위했다. 애초 서프랑크의 귀족들은 루이 4세의 숙적이었던 로베르 가문의 파리 백작 위그 르 그랑(대 위그)을 왕위에 올리려 했으나 로테르의 모후였던 게르베르가의 요청으로 큰 외숙부인 독일 왕국의 국왕 오토 1세가 개입함으로써 로테르가 서프랑크의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또 작은 외숙부인 쾰른의 대주교 브루노가 위그 르 그랑에 맞서 로테르의 후견인 역할을 수행했다. 955년 위그 르 그랑이 죽고, 그의 아들 위그 카페가 파리 백작이 되었다. 위그 카페는 스스로 프랑크 대장군(dux francorum)[3]이 되어 내정에 간섭했는데 이에 위협을 느낀 로테르는 외숙부 브루노를 프랑크 공작으로 임명하여 위그 카페를 견제했다.
작은 외숙부 브루노와 모후 게르베르가가 연달아 죽고, 973년엔 큰 외숙부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1세가 붕어하자 로테르는 숙원인 로트링겐을 되찾을 꿈을 꾸게 되었다. 마침 976년에 동생인 샤를이 하로렌 공작으로 임명되자, 결국 978년 로테르는 권신이었던 위그 카페와 함께 독일의 새로운 국왕이 된 이종사촌 오토 2세를 공격했다. 이 전쟁에서 로테르는 프랑크 왕국의 고도 아헨을 공략하여 점령한 후 돌아갈 때는 아헨의 궁성을 약탈하고 방화했다. 패배한 오토 2세는 절치부심하여 다시 군사를 일으킨 후 파리로 진격했다. 여기서 로테르는 크게 패배해 도주했고, 오토 2세는 로테르의 친동생인 하로렌 공작 샤를을 서프랑크의 왕으로 세운 후 돌아갔다. 하지만 로테르는 정적인 위그 카페의 도움으로 겨우 왕위를 지킬 수 있었다. 이후 로테르는 오토 2세와 980년에 평화협정을 맺었다.#
보조네 왕가 출신의 이탈리아 왕 로타리오 2세[4]와 이탈리아의 아델라이드[5] 사이에서 태어난 엠마와 결혼한 로테르는 루이 5세를 낳았다. 아들 루이 5세를 지켜주려는 목적으로 로테르는 979년 6월 8일 루이 5세를 축성하고 공동 통치자로 선언했다.[6] 983년 오토 2세가 붕어하고, 어린 오토 3세가 즉위하자 권신으로서 독일의 왕위를 노리고 있었던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의 부추김을 받고, 곧바로 독일을 침공해 오토 3세를 사로잡았다. 그러나 로테르 본인만의 군사력으로는 로트링겐(로렌) 지역을 완전히 집어삼키기 어려워, 동생인 하로렌 공작 샤를에게 도움을 청했으나 서프랑크의 왕위와 상로렌 공작령까지 노린 샤를이 이를 거부하면서 결국 로트링겐 합병에 살패했다.
986년 2월 랑에서 병에 걸린 로테르는 1개월 뒤에 승하했다. 그의 뒤는 어린 아들인 루이 5세가 이었다.
[1] 오토 왕조(작센 왕조 혹은 리우돌핑 왕조)의 창건자였다.[2] 실질적인 프랑스 왕국의 시조였던 '대머리왕' 샤를 2세의 이복형이다.[3] 여기서의 공작은 공•후•백•자•남의 공작이 아니라 군사령관이라는 관직명에 가깝다. 자세한건 위그 카페 문서 참조.[4] 또는 이탈리아의 로타르 2세. 이탈리아의 왕(947년~950년 재위)이었다. 중프랑크 왕국의 왕 로타르 2세의 외손자이자 이탈리아의 왕이었던 우고(위그)의 아들이었다. 로타리오 2세의 외조부였던 로타르 2세를 이탈리아의 왕으로 간주할 경우, 로타르 3세(Lothar III)가 된다. 또한 아를 출신이었으므로 아를의 로테르(Lothair de Arles)라고도 부른다. 그의 조모를 통해서 카롤루스 왕가의 외손이 되었다. 947년 부르고뉴 왕 루돌프 2세의 딸이었던 15세의 아델라이드와 정략결혼했다. 948년경 딸 엠마가 태어났고, 그들의 딸 엠마는 서프랑크의 제11대 왕 로테르와 결혼했다. 그후 부왕인 우고(위그)가 이브레아의 베렝가리오 2세에 의해 강제로 축출되었고, 로타리오 2세도 950년에 갑작스럽게 승하했다.[5] 우고(위그)의 아들로, 보조네 왕가 출신의 이탈리아 왕이었던 로타리오 2세는 밀라노에 체류하면서 자신의 지위를 강화하기 위해 독립 왕국화된 부르고뉴 왕국과 동맹을 맺었다. 947년 6월 17일경 부르고뉴 왕 루돌프 2세의 15세된 딸 아델라이드(또는 아델하이트)와 결혼했으나 로타리오 2세는 계속 명목상의 통치자였고, 이탈리아에서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한 사람은 베렝가리오였다. 948년경 아델라이드가 로타리오 2세의 딸 엠마를 낳았고, 엠마는 서프랑크 왕국의 제11대 왕 로테르와 결혼했다. 로타리오 2세는 950년 11월 22일에 토리노에서 갑자기 죽었는데 베렝가리오에게 독살당한 것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베렝가리오 2세는 로타리오 2세의 왕비로 과부가 된 아델라이드를 자신의 아들인 아달베르토와 강제로 결혼시키려 했으나, 아델라이드는 오토 1세에게 몸을 의탁했다. 이후 아델라이드는 962년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즉위한 오토 1세와 재혼하여 오토 2세를 낳았다.[6] 이 공동왕 제도는 카페 왕조로 이어져 프랑스 국왕의 왕권 확립에 크게 공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