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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d800><colcolor=#000000> 로렌 여공작 로렌의 이자벨 Isabelle de Lorraine | |||
이름 | 로렌의 이자벨 (Isabelle de Lorraine) | ||
출생 | 1400년에서 1410년 사이 | ||
로렌 공국 | |||
사망 | 1453년 2월 28일 | ||
앙주 공국 앙제 | |||
재위기간 | 로렌 공국 여공작 | ||
1431년 ~ 1453년 | |||
앙주 공작부인과 프로방스 백작부인 | |||
1434년 ~ 1453년 | |||
나폴리 왕국 왕비 | |||
1435년 ~ 1442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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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앙주의 르네 (1420년 결혼) | ||
자녀 | 장, 루이, 니콜라, 욜랑드, 마르그리트, 샤를, 루이, 안 | ||
형제 | 카트린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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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렌 공국의 여공작, 앙주 공국 공작부인, 프로방스 백작부인, 나폴리 왕국 왕비, 시칠리아 왕국, 예루살렘 왕국, 아라곤 왕국의 명목상 왕비. 아름다운 용모와 뛰어난 지성, 탁월한 용기, 그리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명민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결단력을 갖춘 여인으로 평가받았다.2. 생애
1400년에서 1410년 사이에 로렌 공작 샤를 2세 드 로렌과 팔츠의 마르가레테[1]의 딸로 출생했다. 여자 형제로 카트린[2]이 있었다. 그녀는 일찍부터 장차 로렌 공국을 이을 인물로서 세심한 교육을 받았다. 당대 연대기 작가들은 그녀가 아름다운 용모를 갖췄고, 용기 있고 신중하며, 신앙심이 투철했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명민한 판단력을 내릴 수 있는 결단력을 갖췄다고 평가했다.1419년 3월 20일 앙주 공작이자 명목상 나폴리 국왕 루이 2세의 아들인 앙주의 르네와 약혼했고, 1420년 10월 24일 낭시에서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이때 맺어진 결혼 계약서에 따르면, 로렌 가문은 장차 바르와 퐁타무손을 상속받고, 두 사람의 자식이 그들의 모든 영토를 상속받는다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었다. 1431년 1월 25일 아버지가 사망한 뒤 로렌 여공작이 되어 남편과 공동으로 통치했다. 그러나 샤를 2세의 조카인 보데몽 백작 앙투안 드 보데몽이 이에 이의를 제기했고, 저지대 국가와 부르고뉴 본토 사이를 연결하기 위해 로렌을 공략하길 희망했던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의 지원을 받으며 공세를 개시했다.
1431년 7월, 앙주의 르레는 앙투안 드 보데몽을 상대로 볼뉴빌 전투를 치렀으나 참패하고 생포된 뒤 프랑슈콩테의 돌(Dole) 성채에 감금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이자벨은 남편을 구하기 위해 군대를 일으켜 선량공 필리프와 앙투안을 상대로 분전해 로렌을 지켜냈다. 1432년 2월 16일, 선량공 필리프는 르네가 갇힌 성채를 찾아와서 5월 1일에 석방시켜주겠지만 그 대신 르네의 아들 장과 루이를 인질로 넘기고 거액의 배상금을 지불하라고 요구했다. 르네는 이를 받아들이고 가석방되었다.
1434년 4월 24일, 이자벨과 르네 부부는 바젤 대성당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명목상 로렌 공국의 주권자인 지기스문트로부터 로렌 공작으로서의 지위를 인정받았다. 로렌을 자기 것으로 삼을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필리프는 이 소식을 듣고 분노해 르네의 가석방을 취소하고 소환령을 내렸다. 르네는 강력한 권세를 누리는 부르고뉴 공작의 명령을 어길 수 없어서 돌 성채로 돌아가 2년간 장남 장과 함께 재감금되었다.[3]
1434년 11월, 앙주 공작이자 칼라브리아 공작으로서 장차 나폴리 여왕 조반나 2세의 뒤를 이어 나폴리 국왕이 될 예정이었던 루이 3세가 사망했다. 르네는 옥중에서 형의 지위를 상속받았고, 이자벨은 앙주 공작부인이자 프로방스 백작부인이 되었다. 이후 조반나 2세는 르네를 후계자로 지명했고, 1535년 2월 2월 조반나 2세가 사망한 뒤 나폴리 국왕 직위를 상속받았다. 그러나 선량공 필리프가 석방을 완강하게 거부하는 바람에 돌 성채에 여전히 갇혀지냈다.
이자벨은 돌 성채에 갇힌 르네를 대신해 둘째 아들 루이와 함꼐 나폴리로 간 뒤 남편을 대신해 왕국을 이끌었다. 그러나 지난날 나폴리 왕위를 노렸다가 실패했던 아라곤 국왕 알리폰소 5세가 동생 후안, 엔리케, 페드로와 함께 남부 이탈리아로 진군해 카푸아를 공략한 후 가에타를 포위했다. 이자벨은 이에 맞서 앙주와 로렌에서 데려온 병사들과 이탈리아에서 고용한 용병대와 함께 알리폰소 5세에 맞서 싸웠고, 바리 공작 자코포 칼도라도 이자벨의 편에 서서 아라곤 왕국에 대항했다. 1435년 8월 4일, 나폴리 왕국과 동맹을 맺은 제노바 함대가 폰차 해전에서 아라곤 함대를 격파했고, 알리폰소 5세는 후안, 엔리케와 함께 생포되어 밀라노 공작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에게 넘겨졌다.
알리폰소 5세는 밀라노에서 교양있는 태도를 보여 비스콘티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으며, 아라곤 세력이 나폴리를 공략하는 것을 막는 것은 밀라노에 어떠한 이득도 안 된다고 설득했다. 때마침 아라곤에서 남편을 대신해 통치를 행사하던 마리아 왕비도 막대한 몸값을 지불하며 남편을 석방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비스콘티 공작은 1436년 알폰소 5세와 형제들을 풀어주고 앞으로는 아라곤 왕국과 적대하지 않기로 했다. 1436년 2월, 알리폰소 5세는 시칠리아 함대의 지원을 받으며 남부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그는 카푸아를 탈환하고 가에타에 군사 기지를 세웠다.
전황이 갈수록 좋지 않게 돌아가자, 이자벨은 1437년 2월 7일 여러 영지를 선량공 필리프에게 넘겨주고 배상금 납부를 지속하며, 자기 아들 장과 필리프의 조카인 부르봉의 마리를 결혼시키겠다고 약속한 후 석방된 남편 르네에게 한시바삐 나폴리로 와서 알폰소 5세를 막아달라고 호소했다. 하지만 르네는 병력이 충분히 모일 때까지 출발을 미뤘다. 1438년 4월 15일, 르네는 제노바로부터 7척의 함선을 고용한 뒤 그곳에 자기가 모집한 병력을 싣고 나폴리로 항해했다. 1438년 5월 19일 나폴리에 도착한 르네는 나폴리의 레나토로서 즉위식을 거행했다.
알리폰소 5세는 1439년 9월 나폴리를 포위 공격했으나 공략에 실패했고, 동생 페드로가 전사했다. 그 후 르네가 이끄는 앙주 용병들이 맹공을 가하자 아라곤군은 점점 밀려났다. 그러나 1439년 11월 콜레 산니타 시를 포위 공격하던 자코모 칼도라가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칼도라의 아들 안토니오가 알리폰소 5세의 편으로 돌아서면서 르네의 군세는 급격히 약해졌다. 알폰소 5세는 이 때를 틈타 반격을 개시해 아베르사, 살레르노, 베네벤토, 만프레도니아, 비톤토를 공략했다. 르네는 교황으로부터 1만 병력을 지원받았으나, 알폰소 5세는 교황군 지휘관인 조반니 비텔레스 추기경을 매수해 교황령으로 돌아가게 했다.
결국 이자벨은 1440년 8월 차남 루이와 함께 로렌으로 돌아갔고, 르네는 이후에도 항전을 이어갔지만 1442년 6월 2일 나폴리가 아라곤군에 함락되자 앙주로 도피했다. 이자벨은 로렌으로 돌아간 뒤 앙투안 드 보데몽과 화해하고 1441년 3월 27일 앙투안의 아들 페리 2세와 자기 딸 욜랑드를 결혼시켰다. 이 무렵 처남인 프랑스 국왕 샤를 7세가 낭시에 머물렀다. 이때 그는 이자벨의 시녀 중 한 명인 아녜스 소렐에게 반했고, 그녀는 곧 왕의 매우 영향력 있는 정부가 되었다.
이자벨은 낭시에서 생에프르 교회를 재건했고, 두 개의 커다란 둥근 탑 옆에 크라페 성문을 설칳팼다. 1445년 7월 아들 장을 로렌 총독으로 지명한 뒤 소뮈르 인근에 있는 로네이 별장에서 여생을 보냈다. 1453년 앙제에서 남편과 합류한 뒤 그해 2월 28일 사망했고, 앙제의 생모리스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사후 아들 장이 그녀를 대신해 로렌 공작이 되었다.
3. 가족
- 앙주의 르네(1409 ~ 1480): 앙주 공작, 로렌 공작, 나폴리 국왕. 이자벨 사후인 1454년 라발 백작 기 14세 드 라발의 딸 잔과 재혼했지만 자녀를 낳지 못했다.
[1]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프레히트와 뉘른베르크 영주 프리드리히 5세의 딸 엘리자베트의 딸.[2] 1407 ~ 1439, 바덴 변경백 자코브 1세의 부인.[3] 다만 차남 루이는 석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