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28 12:18:23

랭커스터 공작의 슈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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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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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년전쟁 시기인 1346년 9월 12일 ~ 1346년 10월 31일, 랭커스터 공작 그로스몬트의 헨리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남부 프랑스 일대에서 벌인 슈보시(Chevauchée: 약탈 행진).

2. 상세

1345년 베르주라크 전투오베르슈 전투에서 가스코뉴로 접근한 프랑스군을 잇따라 격파한 그로스몬트의 헨리는 1346년 4월 1일부터 에기용 요새를 포위한 노르망디 공작 장의 프랑스군 15,000 ~ 20,000명의 보급로를 급습하고 에기용 요새에 병력과 물자를 꾸준히 지원해준 끝에 격퇴했다. 그 후 장이 프랑스 국왕이자 아버지인 필리프 6세로부터 "에드워드가 노르망디에서 파리로 쳐들어오고 있으니 즉시 합류하라"는 명령에 따라 북상하면서 남부 프랑스가 사실상 무방비 상태가 되자, 헨리는 슈보시에 착수했다.

먼저 가이야르 1세 드 듀퐁이 이끄는 앙주의 친잉글랜드 군대는 앙주와 포르생트마리(Port-Sainte-Marie)의 봉쇄를 시작하고 쿼리를 침공했다. 셍뜨-바제이으의 영주인 알렉상드르 드 코몽이 이끄는 가스코뉴 부대는 가론 강 남쪽과 서쪽의 가스코뉴 일대에 여전히 남아있는 프랑스군을 모조리 몰아내는 역할을 맡았다. 그리고 헨리 본인은 1,000명의 멘앳암즈와 비슷한 숫자의 기병을 이끌고 북상하기로 했다. 가이야르가 이끄는 400명의 기병은 쿼리까지 80km 이상 침투하며 진군로 주변의 여러 마을을 약탈했고, 오베르뉴 지방 전역의 주민들은 침략자들을 피해 각지로 달아났다. 한편 코몽의 군대는 바자스를 가로지르며 큰 손실 없이 수많은 프랑스 도시와 요새를 공략했다. 바자스 자체는 한동안 버텼지만 결국 항복했다. 이리하여 가스코뉴 전역에서 프랑스군의 존재는 사실상 사라졌다.

헨리는 가스코뉴에서 북쪽으로 260km 떨어져 있으며 프랑스 왕국의 중심부에 위치한 부유한 지방 수도인 푸아티에를 목표로 삼았다. 그의 군대는 강행군을 이어간 끝에 8일 만에 130km를 행진하여 샤토네프-쉬르-샤랑트에 도착해 그곳을 단숨에 점령했다. 이후 북서쪽으로 65km 떨어진 생장달젤리에 억류된 잉글랜드 포로를 구출하기 위해 진군하여 시장 기욤 드 리옹의 항복을 받아낸 뒤 8일간 그곳에 머물렀다. 그 후 일부 수비대를 남겨둔 뒤 하루에 32km를 이동하면서 생메상, 멜레, 뤼지냥 등 여러 도시를 별다른 저항 없이 점령했다. 니오르 시는 입성을 거부했지만, 그가 그곳을 지나쳐서 북상했을 때 후미를 공격하거나 보급로를 노리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10월 3일 저녁 푸아티에에 도착한 헨리는 즉각 공격했지만 지역 귀족들이 조직한 민병대에 격퇴되었다. 그는 도시의 방어 상태를 살펴보다가 마을 주민들이 인근 물레방아로 쉽게 접근하기 위해 성벽 일부를 의도적으로 허물었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그는 일부 병사들에게 물레방아로 접근해서 숨어있게 했다. 이들은 10월 4일 아침 허물어진 성벽을 넘어 도시로 진입해 저항하는 자들을 모조리 살육했다. 결국 푸아티에 귀족과 시민들은 백기를 들었고, 도시는 8일 동안 약탈되었다. 이후 대다수 주민들은 추방되었고, 몸값을 지불할 만큼 부유해 보이는 이들은 가스코뉴로 끌려갔다. 헨리는 뒤이어 푸아티에에서 북쪽으로 8km 떨어진 몽트뢰유보냉을 습격해 프랑스 왕실이 관할하는 화폐 주조소를 약탈하고 모든 수비대를 사살했다.

당시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칼레를 포위한 것에 대응하기 위해 군대를 모으고 있던 필리프 6세는 푸아티에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헨리가 파리로 쳐들어올 것을 우려해 그를 먼저 격퇴하려 했다. 하지만 헨리는 더 이상 북상하지 않기로 하고, 방어 상태가 형편없는 푸아티에를 방치하고 성벽 상태가 양호한 푸아투에 소규모 병력을 남겨둔 뒤 가스코뉴로 귀환했다. 이후 로슈포르의 주요 항구와 올레롱 섬의 요새를 포함한 해안 일대를 장악하고, 가스코뉴 인근의 주변 마을과 요새들을 추가로 점거하고 약탈을 자행했다. 10월 31일 가스코뉴의 주도인 보르도에 입성하여 작전을 마무리 한 뒤 1347년 1월 14일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몇 달 전에 질서를 유지했던 남부 프랑스 일대는 랭커스터 공작의 슈보시 이후 약탈자, 탈영병, 용병의 먹잇감으로 전락했다. 그러나 프랑스 왕실은 칼레를 공략하고 파리를 위협하는 에드워드 3세의 잉글랜드 본대를 저지하는 데 사활을 거느라 남부 쪽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 못했다. 이후 가스코뉴는 에드워드 3세의 장남인 흑태자 에드워드의 본거지로 자리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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