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2 18:26:21

생폴드레옹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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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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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년전쟁 시기인 1346년 6월 9일, 브르타뉴 공국의 블루아 가문 지휘관 샤를 드 블루아가 이끄는 프랑스군과 토머스 다그워스가 이끄는 몽포르군이 맞붙은 전투.

2. 상세

1341년에 발발한 브르타뉴 내전은 1340년대 중반에 이르러 블루아 가문이 이끄는 친프랑스 세력이 몽포르 가문을 압도하면서 곧 종결되는 듯했다. 전쟁 초반 샹토소 전투에서 생포된 남편 장 드 몽포르를 대신해 몽포르 가문의 지도자로서 엔봉 공방전에서 맹활약했던 잔 드 플란데런은 정신병에 걸리는 바람에 잉글랜드로 호송되었고, 지도자를 잃은 몽포르 파벌은 차츰 지리멸렬해졌다.

1343년 1월 19일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와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는 레스트로이트 휴전 협약을 맺었다. 그들은 3년간 휴전을 준수하기로 했고, 반은 클레멘스 6세의 추기경이 임시로 관리하기로 했다. 또한 루브르 감옥에 갇혀 있던 장 드 몽포르는 프랑스를 떠나거나 브르타뉴로 돌아가지는 못하는 조건으로 석방되었다. 한편 브르타뉴 공작위는 전임 공작 장 3세의 유언에 따라 그의 딸 잔이 물려받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반 주민과 지역 성직자들은 장 드 몽포르에게 충성했기에 이 합의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조약이 체결된 지 몇 달 후인 1343년 9월 추기경을 몰아낸 뒤 잉글랜드군을 도시로 불러들였다.

브르타뉴 여백작 잔의 남편이자 필리프 6세의 조카인 샤를 드 블루아는 이를 빌미 삼아 공세를 개시해 몽포르 파벌에 가담했던 도시들을 하나둘씩 제압했다. 1344년 3월, 샤를은 캉페르를 포위해 5월 1일에 함락시킨 뒤 1,400 ~ 2,000명 가량의 민간인을 학살했다. 몽포르 세력을 지원하기 위해 파견되었다가 생포된 잉글랜드 포로들은 몸값을 받기 위해 따로 구금되었지만, 파리로 이송된 뒤 반역죄가 적용되어 처형되었다. 장 드 몽포르는 브르타뉴로 비밀리에 이동해 세력을 일으켜보려 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하자 1345년 3월 잉글랜드로 망명했다.

이리하여 브르타뉴 내전이 종결되는 듯했지만, 1346년 여름 에드워드 3세가 노샘프턴 백작 윌리엄 드 보훈에게 정예병 수백 명을 맡겨 장 드 몽포르와 함께 브르타뉴로 파견하면서 재개되었다. 잉글랜드군은 브르타뉴 해안지대의 몇 개 마을과 요새를 공략했다. 샤를 드 블루아는 이들을 격퇴하기 위해 병사 1,000여 명을 이끌고 북상했다. 1346년 6월 9일, 노샘프턴 백작의 부관 토머스 다그워스가 이끄는 잉글랜드 분견대 180명은 생폴드레옹에서 샤를의 군대와 조우했다.

다그워스는 근처 언덕을 향해 빠르게 이동한 뒤 그곳에 참호를 파고 농성을 준비했다. 샤를은 지금까지의 전투를 통해 기병대를 언덕 경사면을 통해 진군시켰다가는 적 장궁병들의 화살 세례로 인해 제압당할 거라고 보고, 이들을 제압할 유일한 방법은 보병대를 투입해 정면 공격을 가하는 것이라 판단했다. 그는 모든 기병들에게 말에서 내린 뒤 잉글랜드군을 향해 3개 방향에서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이들은 화살비를 뚫고 언덕 위로 올라오는 데 성공했지만 잉글랜드군의 결사 항전과 서로 간의 협력 부족으로 인해 적을 압도하지 못하고 후퇴했다. 샤를은 마지막 공세를 몸소 이끌었지만 이마저도 격퇴되자 공격을 포기하고 브르타뉴 동부로 철수했다.

잉글랜드군은 이날 전투에서 경미한 피해를 입었다. 당대 연대기에 따르면, 많은 잉글랜드인이 심각한 부상을 입었지만 한 명도 죽지 않았다고 한다. 샤를이 이끄는 프랑스군의 손실은 정확한 내용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잉글랜드군보다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리하여 샤를을 격파한 잉글랜드군은 여세를 몰아 7월 캉페르 탈환에 착수했다가 샤를에게 격퇴된 뒤 엔봉으로 철수했고, 장 드 몽포르는 그곳에서 병에 걸려 9월 16일에 사망했다. 이후 몽포르 파벌의 지도자는 그의 다섯살 아들 장이 되었지만, 브르타뉴의 대다수 지역은 잔 여백작과 샤를 드 블루아를 섬겼다. 그러나 1346년 8월 26일 크레시 전투에서 필리프 6세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완패하자. 민심은 또다시 요동쳤다. 샤를은 민심을 수습하고 잉글랜드군을 압도하기 위해 1347년 라 로슈데리앙을 침공했다가 도리어 잉글랜드군에 사로잡혔다.(라 로슈데리앙 전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