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08 19:38:27

윌리엄 드 보훈

파일:윌리엄 드 보훈.jpg
성명 윌리엄 드 보훈
William de Bohun
생몰년도 1312년 ~ 1360년 9월 16일
출생지 잉글랜드 왕국 노샘프턴 칼데콧
사망지 잉글랜드 왕국 런던
아버지 험프리 드 보훈
어머니 루들란의 엘리자베스
형제 엘레오노르, 존, 험프리, 마가렛, 에드워드, 아그네스, 이네아스, 이사벨
아내 베들즈미어의 엘리자베스
자녀 험프리, 엘리자베스
직위 노샘프턴 백작, 가터 기사, 종신 잉글랜드 무관장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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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장군. 백년전쟁에서 프랑스군을 상대로 활약했다.

2. 생애

1312년경 잉글랜드 왕국 노샘프턴 칼데콧에서 해리퍼드, 에식스 백작인 험프리 드 보훈과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와 카스티야의 레오노르 사이의 딸인 루들란의 엘리자베스의 아들로 출생했다. 형제자매로 엘레오노르[1], 존[2], 험프리[3], 아그네스[4], 이네아스[5], 이사벨[6]이 있었다. 아버지 험프리는 웨일스에서 강력한 위세를 떨친 대귀족이자 뛰어난 군인으로,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의 신임을 받고 스코틀랜드 왕국 정복 전쟁에서 활약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1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에드워드 2세와 반목한 끝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1322년 3월 12일 버러브리지 전투에서 전사했다.

1326년, 윌리엄은 형제들과 함께 에드워드 2세를 타도하고 에드워드 2세의 아들 에드워드 3세를 잉글랜드 왕위에 올리는 데 기여했다. 1330년에는 에드워드 3세의 어머니 프랑스의 이자벨의 연인이자 권신인 로저 모티머를 타도하는 데 일조했다. 이후 에드워드 3세와 두터운 친분을 맺었고, 1332년 그로부터 버크셔의 힌튼, 옥스포드셔의 그렛 헤이즐리, 에스콧, 데딩턴, 퍼턴, 커틀링턴, 버킹엄셔의 윈컴, 링컨셔의 롱베닝턴, 노팅엄셔의 니솔, 글로스터셔의 뉴샴, 에섹스의 윅스, 서섹스의 보스햄 등지를 영지로 수여받았다.

1336년 에드워드 3세의 스코틀랜드 원정에 동행해 전공을 세웠고, 1337년 노샘프턴 공작위를 부활시킨 에드워드 3세에 의해 제1대 노샘프턴 백작에 선임되었다. 1337년 잉글랜드 총리이자 링컨 주교 핸리 버거스가 이끄는 사절단에 가담해 프랑스로 가서 에드워드 3세의 프랑스 왕위 계승 권리를 주장했다. 이후 스코틀랜드 국왕 데이비드 2세와 평화 협상을 했다. 1338년 3월 16일 형 험프리의 뒤를 이어 종신 잉글랜드 무관장에 선임되었다. 1339년 에드워드 3세의 플란데런 원정에 참여했으며, 1340년 슬로이스 해전에도 참여했다.

1342년 8월, 브르타뉴 공작위 계승 전쟁에서 친 잉글랜드 정파인 몽포르 파벌이 샤를 드 블루아가 이끄는 친 프랑스 정파에게 수세에 몰려 구원을 간절히 요청하자, 에드워드 3세는 윌리엄에게 브르타뉴로 가라고 명령했다. 윌리엄은 1,350명의 장병을 소집해 포츠머스에서 출항해 260척의 소형 선박들을 타고 이동했다. 적군이 출항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프랑스 함대가 포츠머스로 달려왔지만 항구가 비어있자 포츠머스에 상륙해 마을을 불태우고 떠났다. 잉글랜드 함대는 포츠머스를 떠난 지 사흘 만에 브레스트에 도착했다.

윌리엄은 적 갤리선들이 펜펠트 강 어귀에 닻을 내린 채 정박하고 있는 광경을 보고, 여유롭게 상륙해서 전투를 준비한다면 당해낼 수 없다고 여겼다. 그는 적 갤리선이 바다로 항해하기 전에 승부를 보기로 하고 병사들에게 적선으로 돌진하라고 명령했다. 당시 브레스트 항구를 지키고 있던 14척의 제노바 갤리선 지휘관이자 모나코 공작인 카를로 그리말디는 제노바 선원들에게 배에 올라타서 적을 물리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잉글랜드 해군이 바짝 다가왔을 때 승선이 완료된 배는 단 3척이었고, 그나마도 잉글랜드군을 상대하는 대신 넓은 바다로 탈출했다. 나머지 11척의 갤리선은 빠르게 포위되어 잉글랜드군의 맹공을 받았다. 결국 모든 배가 화염에 휩싸였고, 제노바 선원들은 바다에 불길을 피하기 위해 바다에 몸을 던졌다. 이리하여 적선들을 모조리 물리치는 데 성공한 잉글랜드군은 브레스트 항구로 진입했다.

샤를 드 블루아는 브레스트 해전에서 제노바 선박들이 무력화된 것에 큰 충격을 받았고, 260척의 선박들이 몰려온 것을 보고 적군이 적어도 5천 명이 넘을 거라고 오판했다. 그는 즉시 브레스트 포위를 풀고 브르타뉴 북쪽으로 철수했다. 그러나 철수 과정에서 병력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제노바와 카스티야 용병들이 더 이상의 복무를 거부하고 부르뉴프로 이동한 뒤 배를 타고 스페인으로 돌아가버렸다. 윌리엄은 그 틈을 타 브르타뉴 서부 일대를 공략했다. 뒤이어 아르투아 백작을 자처하며 에드워드 3세의 부관을 맡고 있던 로베르 3세 다르투아가 파견한 800명의 장병과 합세한 뒤 브르타뉴 북부로 진격했다. 그 해 9월 모를레 요새에 도착한 윌리엄은 이곳을 빠르게 공략하기 위해 기습 공격을 가했지만 수비대의 항전으로 실패하자 포위전을 준비했다.

한편, 브르타뉴 북부로 달아나면서 제노바와 카스티야 용병들이 이탈하는 바람에 병력이 크게 줄어들어 버린 샤를 드 블루아는 여전히 프랑스를 지지하는 브르타뉴인들을 끌어모아 병력을 소집했다. 그는 첩보원들이 적의 규모가 2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려주자 그제야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깨닫고 3,500명 가량의 병력을 이끌고 모를레 구원에 착수했다. 윌리엄은 정찰병들을 통해 적이 접근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소규모 병력을 남겨둬서 모를레 요새를 계속 포위하게 한 뒤 대부분의 병력을 이끌고 프랑스군을 막으러 이동했다.

9월 30일, 잉글랜드군은 렁뮤흐(Lanmeur) 마을에서 모를레로 이어지는 길이 가로지르는 숲에 도착했다. 그들은 길을 가로질러 전투 대형을 결성했다. 기사들과 중장병들은 중앙을 차지했고, 양 측면에 장궁병들이 배치되었다. 또한 대열 앞에 참호를 파고 그 위에 나뭇가지와 풀을 깔았다. 그날 오후 3시경, 현장에 도착한 프랑스군은 렁뮤흐 마을을 통과한 뒤 적진을 향해 진군했다. 샤를은 군대를 3개 부대로 나누었다. 첫번째 부대는 도로를 따라 서쪽으로 진격했는데, 브르타뉴 농민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숨겨진 참호에 도착하기도 전에 잉글랜드군의 화살 세례에 겁을 먹고 후퇴했다. 두번째 부대는 기사들과 기마병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적을 향해 기세좋게 달려들었지만 참겨진 참호에 잇따라 빠졌고 장궁병들의 화살 세례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다. 그 중 200명 정도가 참호를 넘어 돌격을 계속했지만, 말에서 내린 잉글랜드 기사들에게 압도되었고, 지휘관 조프루아 드 샤르니는 포로로 잡혔다.

얼마 후, 역시 기사와 기마병으로 구성된 세번째 부대가 잉글랜드군을 향해 전진했다. 이제는 대부분 막힌 참호를 넘어 잉글랜드군을 압박했다. 이에 잉글랜드군은 숲으로 물러선 뒤 추격해오는 적들을 숲의 지형을 활용해 요격했다. 이로 인해 피해가 커진데다 많은 이들이 전투를 포기하고 도주하자, 샤를은 적진을 공략할 가망이 없다고 보고 남아있는 장병들에게 철수 명령을 내렸다. 이날 전투에서 프랑스 기사 50명이 전사하고 조프루아 드 샤르니를 포함한 150명이 생포되었다. 잉글랜드군의 사상자는 알려진 바 없다. 모를레 전투 이후 프랑스군은 모를레 구원을 포기하고 물러났지만, 윌리엄은 병력 및 공성무기 부족으로 인해 모를레 공략에 실패하고 물러났다.

1343년, 윌리엄은 더비 백작 그로스몬트의 헨리가 지휘하는 스코틀랜드 원정군에 가담했다. 그는 로크마벤 성 공방전을 지휘해 성을 함락시키고 그곳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브르타뉴로 귀환한 그는 기병대를 이끌고 푸아시라 가서 센 강 인근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군 전초 기지를 파괴해, 에드워드 3세의 군대가 강을 건널 수 있게 했다. 1346년 에드워드 3세의 파리 원정에 참여했으며, 그해 8월 26일 크레시 전투에서 좌측에 배치된 중기병 부대를 지휘해 대승에 일조했다. 이후 1346년 9월부터 1347년 8월까지 이어진 1차 칼레 공방전에 참여해 칼레 공략에 일조했다. 에드워드 3세는 요크 대주교 윌리엄 라 주쉬(William La Zouche) 에게 보낸 편지에서 윌리엄이 포위 공격 중에 영웅적으로 행동했다고 언급했다.

1347년 엘탐에서 열린 기사 토너먼트에 참여해 좋은 성적을 거뒀고, 1349년 에드워드 3세에게 가터 기사단의 기사 작위를 수여받았다. 이후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외교 활동에 몇 차례 참여했던 그는 1360년 9월 16일 런던에서 사망했고, 엑세스의 새프런 윌든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3. 가족

  • 베들즈미어의 엘리자베스(1313 ~ 1355): 베들르미어 남작 바르톨로뮤 배들즈미어의 딸.


[1] 1304 ~ 1363, 오몬드 백작 제임스 버틀러와 초혼, 에섹스의 남작이자 기사 토머스 다그워스와 재혼[2] 1306 ~ 1336, 해리퍼드 백작[3] 1312 ~ 1360, 노샘프턴 백작. 윌리엄과 쌍둥이 형제였다.[4] 1313 ~ ?, 차틀리의 1대 패러스 남작 존 드 페러스의 부인[5] ? ~ 1322년 이후, 1322년 험프리 드 보훈의 유언장이 공개되었을 때만 언급됨[6] 1316년 5월, 출산 직후 어머니 엘리자베스와 함께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