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3 13:37:37

조프루아 드 샤르니

성명 조프루아 드 샤르니
Geoffroi de Charny
생몰년도 미상 ~ 1356년 9월 19일
출생지 프랑스 왕국 샤르니
사망지 프랑스 왕국 푸아티에
아버지 장 드 샤르니
어머니 마르그리트 드 조인빌
배우자 투시의 잔, 베르지의 잔
자녀 조프루아 2세 드 샤르니
직위 리레이 영주, 왕실 고문, 붉은 왕기 소지자, 별 기사단장

1. 개요2. 생애3. 문학 활동4. 동시대인들의 평가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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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기사. 백년전쟁에서 잉글랜드군을 상대로 맞서 싸웠으나 푸아티에 전투에서 전사했다. 기사도와 관련된 서적을 집필한 것으로 유명하다.

2. 생애

프랑스 동부 코트도르 주의 샤르니 지방의 소영주인 장 드 샤르니와 루이 9세에 관한 유명한 전기 작가인 장 드 조인빌의 딸인 마르그리트 드 조인빌의 막내 아들이다. 생년월일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어머니가 1306년에 사망했다고 전해지고 1336년부터 기록에서 왕성하게 활약한 것을 볼 때 1300년대 초반에 출생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는 막내 아들이었기에 토지를 상속받지 못했고, 먹고 살기 위해 마상창시합에 참여해 생계를 꾸렸고, 곧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되었다고 한다. 1336년 잔 드 투시와 결혼했으며, 그가 백년전쟁 초창기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언급한 소집 목록에는 투시 가문의 영지인 피에르페르튀스의 기사로 언급되었다.

1337년 5명의 종자로 구성된 소규모 부대를 이끌고 가스코뉴에서 잉글랜드군의 보급물자를 운송하던 수송부대를 공격해 물자를 탈취한 것이 조프루아의 첫번째 군사 활동이었다. 이후 플란데런 백국에노 백국에서 프랑스측 기사로서 원정을 벌였으며, 1340년 투르네 공방전에 참여했다. 1341년 브르타뉴 공작위 계승 전쟁에 참여해 전임 브르타뉴 공작 장 3세의 조카인 잔 드 팡티에브르의 계승을 이루기 위해 잉글랜드를 등에 업은 장 드 몽포르와 대적했다. 1342년 모를레 전투에서 기병 공격을 담당했다가 함정에 빠져 생포된 뒤 잉글랜드 해리퍼드셔 주의 굿리치 성에 수감되었다.

이후 몸값을 마련하겠다고 약조하고 프랑스로 귀환한 그는 프랑스 남동부 지역에 속한 알봉 백작령의 계승권자인 움베르토 2세의 가신이 되었고, 그를 위해 몇 가지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다. 훔베르토 2세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생마르셀랭 마을의 수익을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사치와 향락에 젖어 있다보니 파산을 만성적으로 반복해 몸값을 어서 마련해야 했던 조프루아의 지급 요청을 번번이 따르지 못했다.

그러다가 보주와 몽펜시에의 영주이자 프랑스 원수였던 에두아르 드 보주의 십자군에 가담하는 조건으로 교황청으로부터 몸값을 지불할 의무를 면제받았다. 그는 이 십자군에 참여해 1344년 10월 28일 오스만 술탄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스미르나 항구 요새 공략에 큰 공을 세웠다.[1]

조프루아는 십자군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프랑스로 귀환한 뒤 1346년 노르망디 공작이자 왕위 계승자인 장 왕자의 군대에 배속되어 에기용 공방전에 참여했으며, 그 해 8월 플란데런 반란군이 전략적 요충지인 베쑨느를 공략하는 걸 막아내는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1347년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에 의해 왕실 고문이자 붉은 왕기 소지자로 선임되어 프랑스 북동부 국경을 지키는 임무를 맡았다.

조프루아는 1347년 1차 칼레 공방전으로 상실한 칼레를 기필코 되찾고 싶었다. 하지만 병력 모집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고 잉글랜드 약탈자들의 침략으로 피폐해진 프랑스군이 칼레를 무력으로 되찾는 건 힘들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 대신 기책으로 칼레를 탈환하기로 마음먹고, 칼레 성문 한 곳의 열쇠를 소지하고 있던 파비아 출신의 랑고르바르드인 용병대장인 아이머리(Aimery)에게 접근했다. 이 사람은 잉글랜드인이 아니며 각지를 떠돌아다니며 매일 급료를 받으며 전투를 치르는 용병이기 때문에 잘만 하면 매수할 수 있을 듯 보였다. 일부 연대기에 따르면, 아이머리는 이전에 프랑스 왕실에 고용된 제노바 갤리선에서 복무했다고 한다.

영국 국립 문서 보관소에 보관된 행정 기록에 따르면, 에드워드 3세는 아이머리를 왕의 갤리선 선장으로 선임했다. 또한 그가 이끄는 배에 탑승한 선원들은 줄무늬 천으로 제작된 망토를 특별히 착용했다. 이로 볼 때, 에드워드는 그를 상당히 총애하고 자신을 배신하지 않을 인물로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조프루아는 그에게 막대한 금을 보여주면 넘어갈 거라 확신하고 요원을 비밀리에 보내 2만 에퀴(약 3500파운드)[2]를 제공할 테니 프랑스군이 칼레 시에 진입하도록 협조해달라고 요구했다.

아이머리는 흔쾌히 수락했고, 조프루아는 5,000명의 병력을 비밀리에 모아서 칼레 공략 준비에 착수했다. 그러나 아이머리는 에드워드 3세를 배신할 생각이 없었다. 1349년 12월 말 그로부터 이야기를 전해들은 에드워드는 12월 30일 장남인 흑태자 에드워드와 근위병을 포함한 900명의 장병들을 이끌고 일반인으로 변장한 채 칼레로 향했다. 에드워드는 칼레에 도착한 뒤 성 안의 지하실, 금고 등 여러 방에 병사들을 매복시켰다.

1350년 1월 1일 밤, 조프루아의 부관인 우다르 드 렌티(Oudart de Renti)가 이끄는 100명의 프랑스 병사들이 2만 에퀴가 든 자루를 짊어지고 칼레 성벽을 기어올라갔다. 아이머리는 그들로부터 금을 수령한 뒤 프랑스인들을 성채로 이끌었다. 잠시 후 숨어있던 잉글랜드군이 튀어나와 그들을 덮쳤고, 우다르와 프랑스 장병 100명은 즉시 항복했다.한편, 조프루아는 칼레 남쪽 문 근처에 주력군을 이끌고 문이 열릴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다 해가 떠오르면서 트럼펫 소리와 함께 쇠창살이 들어올려진 뒤 성문이 열리자, 잉글랜드 기사와 궁수들이 "에드워드! 성 조지!"를 외치며 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조프루아의 군대 절반은 갑작스러운 급습에 "배신당했다!"라고 외치며 달아났지만, 그는 남은 병력을 모아 적의 돌격을 막아낸 뒤 반격을 가했다. 이로 인해 잉글랜드군은 압살될 뻔했지만, 북쪽 성문에서 출격한 흑태자 에드워드의 또다른 군대가 프랑스군의 좌측면을 요격하면서 프랑스군이 전의를 상실하고 후퇴했다. 이 전투에서 200명 이상의 군인이 사망하고 30명의 프랑스 기사가 생포되었다. 생포된 이들 중에는 조프루아도 있었다.(칼레 전투)

에드워드 3세는 조프루아를 포함한 많은 수감자들을 자신의 소유물이라고 주장하고 조프루아를 사로잡은 자에게 100 파운드(2021년 기준 70,000 파운드)의 보상금을 지급했다. 그날 저녁, 에드워드는 고위층 포로들을 식사에 초대한 뒤 그들과 즐겁게 식사했다. 장 르 벨의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조프루아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조프루아 경! 내가 싸워서 손에 넣은 것, 지금까지 많은 돈을 쏟은 것을 그대가 밤을 틈타 내게서 빼앗으려 했으니 내가 경에게 애정을 느끼지 못하는 건 당연하오. 그러니 경을 이리 한가하게 만든 것이 몹시 기쁘오. 경은 이곳을 나보다 훨씬 적은 금액으로, 그러니까 2만 에퀴로 손에 넣으려고 했소. 그러나 주님께서 나를 도우셔서 경이 실패하고 말았군. 주님께서는 앞으로도 마음이 내키신다면 나의 더 커다란 사업을 도와주실 거요."

그 후 대부분의 수감자들은 잉글랜드 왕과 싸우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가석방되었지만, 조프루아는 잉글랜드로 끌려간 뒤 몸값을 전액 지불할 때까지 18개월간 런던에 억류되었다. 프랑스로 돌아온 후인 1352년 1월 6일 생투앵에서 프랑스 국왕 장 2세의 명령으로 창설된 별 기사단의 단장이 되었다. 그해 5월, 장 2세로부터 긴 요새를 탈환하라는 지시를 받은 조프루아는 1,500명의 맨앳암즈와 많은 이탈리아 석궁병을 포함한 4,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토마스 호그쇼가 지휘하는 잉글랜드 수비대 115명이 지키는 긴 성을 포위 공격했다.(긴 공방전) 그러나 긴 성은 공략하기가 까다로운 곳이었다. 습지대가 성 주변에 깔려 있고 많은 수로가 있어서 대부분의 방향에서 접근하기 어려우면서도 수비대가 물을 공급받기 용이했다. 조프루아는 지형을 꼼꼼히 살펴본 끝에 요새 정문을 똑바로 공격하는 것만이 요새에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보고, 정문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수녀원을 요새로 개조하고 투석기와 대포를 배치했다.

이후 프랑스군은 5월부터 7월까지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지만 쉽사리 정문을 돌파하지 못했다. 그러던 7월 중순에 수천 명의 잉글랜드군이 긴 인근에 도착했다. 이들은 야간에 프랑스 진영을 기습 공격했고, 이를 대비하지 않았던 프랑스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고 수녀원 주변에 쳤던 방어벽의 상당 부분이 파괴되었다. 결국 조프루아는 요새를 공략할 가망이 없다고 여기고 철수했다. 그러던 중 지난날 자신을 속여 칼레에서 생포되어 잉글랜드에 18개월 동안 억류되게 했던 아이머리가 칼레에서 남서쪽으로 4.8km 떨어진 프레툰에 새로 건설된 잉글랜드 탑을 지키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조프루아는 즉시 그곳을 기습 공격해 점거하고 아이머리를 체포한 뒤 생오메르로 끌고 가 도끼로 쳐 죽였다.

당대 기록에 따르면, 조프루아는 1354년에 베르지의 잔이라는 여인과 재혼했다고 한다. 첫 부인인 투시의 잔은 중세 흑사병에 걸려 자식을 낳지 못한 채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녀는 조프루아의 사이에서 아들을 하나 낳았고, 아버지의 이름을 따 조프루아라고 지었다. 1356년, 흑태자 에드워드를 쳐부수기 위한 장 2세의 원정에 동행한 조프루아는 그 해 9월 중순에 푸아티에 근처에서 잉글랜드군과 대치한 뒤 예비 교섭에 참석했다. <흑태자의 삶>을 집필한 챈더스 해럴드에 따르면, 최종 협상이 결렬되자, 조프루아가 에드워드 왕자에게 이렇게 제안했다고 한다.
"영주님, 왕의 제안이 더 이상 당신을 만족시키지 못한다면, 나는 우리가 자신의 편에서 각자를 선택해 백 대 백으로 싸울 것을 제안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결판이 나면, 다른 모든 사람이 싸움을 그만두게 될 것입니다. 나는 그렇게 하는 것이 최선일 것이라 생각하며, 그렇게 많은 용맹한 사람들이 죽임을 당할 전투를 피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의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어진 푸아티에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완패했다. 프루아사르의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숨이 끊어질 때까지 붉은 왕기를 붙들며 끝까지 항전했다가 전사했다고 한다. 그의 유해는 푸아티에 인근 프란체스코 수도원에 임시 매장되었다가 1370년 파리로 옮겨진 뒤 셀레스틴 교회에 재매장되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 와중에 흔적도 없이 파괴되었다.

3. 문학 활동

  • 『기사도의 서』(Livre de l'Ordre de Chevalerie): 1350년경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는 기사도에 관한 산문. 후대 학자들로부터 기사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가치를 우선시하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역사 기록으로서 레이 룰레가 쓴 기사도의 서와 트루아의 크레티앙이 쓴 기사도에 관한 저서와 함께 최고의 가치를 지닌다는 평을 받는다. 다만 최근에는 조프루아의 아들인 조프루아 2세가 집필했다는 설이 대두되고 있다. 옥스퍼드와 마드리드에 각각 1개의 사본이 현존하고 있다.
  • 『샤르니의 서』(Livre Charny): 총 1,800개의 구절로 이루어진 운문 작품. 기사의 삶과 훌륭한 기사가 갖추어야 할 자질을 나열했다. 그의 저서 중 중세에 가장 널리 배포된 작품으로, 현존하는 사본은 8개이다.
  • 『마상창시합, 토너먼트, 그리고 전쟁에 대한 질문들』(Demandes pour la joute, les tournois et la guerre): 1352년 별 기사단장으로 선임된 조프루아가 장 2세의 의뢰에 따라 집필한 것으로 추정되는 저서. 기사가 가장 선호하는 세 가지 분야에 관한 까다로운 문제를 대루는 일련의 질문을 모았다. 비록 답변이 본문과 함께 제공되지는 않았지만, 연구자들은 질문이 공식화되는 방식을 통해 조프루아 등 당시 기사들의 기사도와 전쟁 개념에 대한 생각을 파악할 수 있다고 본다.

4. 동시대인들의 평가

조프루아는 당대 사람들에게 최고의 기사로 추앙받았다. 프랑스 대연대기의 저자들은 그를 "대담하고 기사도로 무장한 부르고뉴의 기사"라고 칭송했으며, 리에주 연대기 장가 장 르 벨은 "용감하고 자랑스러운 기사"라고 호평했다. 장 프루아사르는 "다른 모든 기사 중에서 가장 용감한 기사"라고 극찬했다. 동시대 기사인 조프루아 드 라 투르 란드리는 1371년에서 1373년 사이에 집필한 <딸의 가르침을 위한 책>에서 조프루아를 장 1세 르 맹그르, 장 드 생트레와 함께 가장 유명한 기사로 지목했다. 잉글랜드 측 역시 그를 호의적으로 평했다. 제프리 르 베이커는 조프루아에 대해 "다른 어떤 프랑스인보다 군사 문제에 더 능숙한 기사로 명성이 높았다. 오랜 무술 수련과 역동적이고 현명한 기질로 인해, 그는 죽을 때까지 프랑스의 젊은 기사들의 주요 고문이 되었다."라고 밝혔다.

5. 여담

1353년, 조프루아는 자신이 소유한 영지인 리레이의 성당에서 토리노의 수의를 공개했다. 그는 자신이 순례 도중에 이 수의를 획득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수의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에게 들어갔는지는 분명히 밝혀지지 않았다. 이후 그의 가문은 대대로 토리노의 수의를 소유하다가 1453년 사보이아 공작 루도비코가 마르그리트 드 샤르니로부터 수의를 넘겨받으면서 사보이아 가문에 넘어갔다.


[1] 과거에는 조프루아의 주군이었던 훔베르토 2세의 실패로 끝난 십자군 원정에 가담했다는 가설이 제기되었지만, 프랑스 기사이자 연대기 작가인 필리프 드 메지에르는 1344년 스미르나 십자군에서 큰 공을 세운 용감한 기사 목록에 조프루아의 이름을 기재했다.[2] 프랑스의 에퀴 금화는 1337년 처음 주조되었을 때는 약 4/5투르리브르이자 잉글랜드 페니 은화 48개, 즉 1/5스털링파운드 가치였으나 점차 가치가 하락했고 장 왕 치세에는 34페니, 즉 1/7파운드까지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