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위그 키에레 Hugues Quieret | |
생몰년도 | 1290년 ~ 1340년 6월 24일 | |
출생지 | 프랑스 왕국 피카르디 | |
사망지 | 플란데런 백국 슬로이스 항구 앞바다 | |
아버지 | 위그 키에레 | |
배우자 | 블랑슈 다르쿠르 | |
직위 | 프랑스 제독, 보케르와 님의 세네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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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의 귀족, 프랑스 해군 제독. 백년전쟁 시기 잉글랜드 해안지대를 연이어 습격했으나 슬로이스 해전에서 패사했다.2. 생애
1290년경 프랑스 왕국 피카르디에서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 위그 키에레는 피카르디에 있는 두리에와 프란슈의 영주이자 기사였다. 1312년 블랑슈 다르쿠르와 결혼했다. 블랑슈의 조부인 장 2세 드 다르쿠르는 1283년 프랑스 원수에 선임되었고, 1295년 프랑스 최초의 해군 제독 중 한 명으로 발탁되었다. 그는 블랑슈와의 사이에서 여러 자녀를 두었는데, 이들 모두 궁정과 전장에서 프랑스 국왕을 섬겼다고 전해진다.1324년 가스코뉴 전쟁에 참전해 프랑스 국왕 샤를 4세 휘하에서 잉글랜드 수비대와 현지 주민들의 짧은 저항을 분쇄하고 가스코뉴를 복종시키는 데 일조했으며, 1325년 보케르와 님의 세네샬로 선임되어 블루아 백작부인을 몽펠리에에서 코르베유 성까지 호위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1326년 국왕의 시종장으로 발탁된 뒤 수년간 궁정에서 왕을 모셨던 그는 1335년 12월 7일 프랑스 해군 제독에 선임되어 프랑스 무관장이자 해군 대장인 라울 2세의 드 브리엔의 부관이 되었다. 그는 루앙 인근의 클로 데 갈레 항만에서 선박 제조소와 무기고를 대폭 개선하고 강력한 함대를 조직했다.
1338년 2월,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는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가 1337년 11월에 월터 매니가 이끄는 3,500명의 병사를 프랑스에 예속된 플란데런 백국의 카잔트 섬에 파견해 카잔트 전투에서 현지군을 격파한 것에 보복하고자 잉글랜드 상륙 작전을 준비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는 이 명령에 따라 아르플뢰르와 루앙 항구에서 함대를 집결시켜, 장차 4,000명의 무장병을 잉글랜드로 수송하기로 했다. 그 해 9월 23일, 그는 또다른 프랑스 제독 니콜라 바후셰와 함께 전함 48척을 이끌고 양모를 팔기 위해 플란데런의 아르네뮤이덴 항구에 접근하던 잉글랜드 상선 5척을 습격했다.(아르네뮤이덴 해전) 잉글랜드인들이 대포를 처음으로 해전에서 사용하는 등 결사적으로 항전했지만 끝내 버티지 못하고 항복했다. 니콜라 바후셰는 이 해전에서 900명 이상 잃은 것에 단단히 화가 나 존 킹스턴 선장을 비롯한 잉글랜드 선원 전원을 몰살하고 상선 5척과 대포 및 화물을 포획했다.
1338년 10월 5일, 위그 키에레와 니콜라 바후셰가 이끄는 프랑스 함대는 수천 명의 프랑스, 노르만, 제노바, 카스티야 수병들을 사우스햄튼 항구 인근에 상륙시킨 뒤 육지와 해상에서 동시에 사우샘프턴을 공격했다. 대부분의 마을 민병대와 시민들은 공포에 질려 시골로 도망쳤고, 일부 수비대는 끝까지 싸우다가 모두 전사했다. 사우샘프턴 전역이 파괴되고 수천 파운드 상당의 물품과 선박, 포로들이 프랑스로 끌려갔다. 다음날 뒤늦게 조직된 민병대가 마을 외곽에서 프랑스군을 상대로 유격전을 벌이자, 프랑스군은 함대에 몸을 싣고 프랑스로 귀환했다. 이 공격으로 인해 사우샘프턴의 상업은 1년간 마비되었다. 이후에도 두 사람이 이끄는 프랑스 함대는 영국해협을 수시로 들락거리면서 영국과 보르도 사이의 해상 보급을 수행하고자 식량을 수송하던 영국 선박들을 나포했다. 이로 인해 필리프 6세를 상대로 반기를 일으켰던 가스코뉴 주민들의 저항 의지는 갈수록 약해졌고, 1339년 7월 보르도를 제외한 대다수 지역이 프랑스군에 넘어갔다.
에드워드 3세는 잉글랜드 남부 해안 지대를 다스리는 백작들에게 민병대를 대폭 강화해 프랑스 함대가 또다시 쳐들어오는 것을 막게 하고, 이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처벌하겠다고 위협했다. 이에 백작들은 최선을 다해 수비에 임했고, 프랑스 함대의 사우샘프턴과 플리머스, 저지 섬에 대한 재침은 격퇴되었다. 다만 헤이스팅스가 급습당해 파괴되고 그곳에 살던 어선 몇 척이 나포되고 살해당한 어민들의 시신이 칼레 거리에서 전시되었다. 1339년 여름, 몰리 남작 로버트 몰리가 이끄는 잉글랜드와 플란데런 함대가 반격에 착수했다. 그들은 프랑스 해안에 상륙한 뒤 올트와 르 트레포르 마을을 파괴하고 내륙으로 좀더 들어가면서 여러 마을을 황폐화했다. 뒤이어 볼로뉴 항구에 있는 프랑스 함대를 기습해 파괴했다. 한편 필리프 6세에게 반기를 든 플란데런 함대도 독자적으로 움직였다. 그들은 그 해 9월에 디에프 시를 파괴하고 약탈을 자행했다.
1340년, 필리프 6세는 에드워드 3세가 플란데런 백국의 주요 항구인 슬로이스를 공략한 뒤 플란데런 백국에 들어가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위그 키에레와 니콜라 바후셰에게 이를 중도에서 가로막아 궤멸시킨 뒤 잉글랜드에 상륙하여 끝장을 내라는 명령을 내렸다. 두 사람은 프랑스 전함 213척과 2만에 달하는 병력을 슬로이스 항구에 집결해, 장차 에드워드 3세의 해군을 분쇄하고 잉글랜드에 상륙할 준비를 갖췄다. 에드워드는 이 소식을 전해듣자 이들이 잉글랜드로 쳐들어오기 전에 자신이 선제공격을 가해야겠다고 판단하고, 1340년 6월 22일 120~150척 가량의 함대를 이끌고 슬로이스 항구로 진격했다.
위그 키에레와 니콜라 바후셰는 에드워드 왕이 생각보다 훨씬 많은 함대를 끌고 왔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화들짝 놀랐다. 그들은 머리를 맞대고 논의한 끝에 함대를 3개 대열로 나란히 배치하고 작은 나무 발코니인 브레타슈(bretasches)로 배들을 묶어놓은 채 3마일 너비의 항구 입구를 틀어막고 버티기로 했다. 이에 일찍이 지중해에서 무슬림을 상대로 해적 행위를 오래도록 벌였으며, 당시 프랑스 해군에 용병으로 고용되었던 피에트로 바르바네로가 만류했다.
"영주님들, 부디 제 말을 믿으십시오. 함대 전체가 바다로 이동해야 합니다. 여기에 가만히 있는다면 바람, 태양, 그리고 물의 흐름을 너무 많이 받게 되어 배를 최소한으로만 움직일 수 있게 되어 적에게 고스란히 갇히고 말 겁니다."
그러나 바후셰와 키에레는 그를 단순한 평민이자 해적이라며 무시하고 자신들의 생각대로 밀어붙였다. 바르바네로는 자신을 무시한 이들에게 격분해 전투 전날에 휘하 함대와 함께 이탈했다. 이후 1340년 6월 24일에 벌어진 슬로이스 해전에서 프항스 해군은 처참한 패배를 당했다. 위그 키에레는 중상을 입고 체포된 뒤 에드워드 3세에게 끌려가기 전에 목이 베어져 배 밖으로 던져졌고, 니콜라 바후셰는 에드워드 3세 앞으로 끌려간 뒤 교수형에 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