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노버 국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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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7cefa><colcolor=#000000> 하노버 왕국 제4대 국왕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1세 Ernst August I | ||
이름 | 독일어 |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Ernst August) |
영어 | 어니스트 어거스터스 (Ernest Augustus) | |
출생 | 1771년 6월 5일 | |
영국 잉글랜드 런던 버킹엄 하우스 | ||
사망 | 1851년 11월 18일 (향년 80세) | |
하노버 왕국 하노버 | ||
재위 | 하노버 왕국의 국왕 | |
1837년 6월 20일 ~ 1851년 11월 18일 | ||
배우자 |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프리데리케 여공작 (1815년 결혼 / 1841년 사망) | |
자녀 | 장남 게오르크 5세[1] | |
아버지 | 조지 3세 | |
어머니 |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샤를로테 | |
형제 | 큰형 조지 4세, 작은형 프레더릭, 셋째형 윌리엄 4세, 누나 샬럿, 넷째형 에드워드, 첫째 여동생 어거스타, 둘째 여동생 엘리자베스, 첫째 남동생 어거스터스 프레더릭, 둘째 남동생 아돌푸스, 둘째 여동생 메리, 셋째 여동생 소피아, 셋째 남동생 옥타비우스, 셋째 남동생 알프레드, 막내 남동생 아멜리아 | |
종교 | 개신교 |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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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노버 왕국의 제4대 국왕.조지 3세와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샤를로테의 9남 6녀 중 5남으로 조지 4세, 윌리엄 4세, 에드워드 어거스터스의 동생이다. 참고로 하노버 국왕으로 즉위하기 전 영국의 왕자로서 받은 작위는 컴벌랜드와 테비엇데일 공작.
윌리엄 4세가 적자녀 없이 사망하자 영국의 왕위는 바로 위의 형 에드워드의 적장녀이자 외동딸인 빅토리아 여왕에게로 돌아갔다. 영국은 반 살리카법으로 여자가 왕위에 즉위할 수는 있지만 형제자매 중에 남자형제들이 없을 때에만 즉위가 가능한 형태다. 하지만 하노버 왕국은 완전한 살리카법이기 때문에 여왕이 즉위할 수 없어 에드워드 어거스터스의 동생인 어니스트 어거스터스(에른스트 아우구스트)가 왕이 되었다.
이로서 영국과 하노버 왕국의 동군연합은 해체되었다.
2. 생애
2.1. 하노버 국왕 즉위 이전
자신의 윗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영국에서 태어났으나 자신의 두 동생과 함께 어린 시절 독일로 보내진다. 여기서 독일어를 배우게 된다. 그리고 1791년에는 하노버에서 군사 훈련을 받게 되면서 군인으로서의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나 얼마 못 가 눈을 다치게 되었고 귀국하게 된다.그리고 1799년 영국으로 복귀하면서 상원의원이 되었고, 토리당에 입당하게 된다. 극단적인 보수주의 입장을 지니고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토리당의 당수가 되었고, 1801년에는 아버지 조지 3세의 명에 따라 헨리 애딩턴 내각을 구성하게 만든다.
1805년에는 더블린 대학교의 총장으로 선출되었고, 이후에는 지속적으로 나폴레옹 전쟁에 관여하긴 했으나 크게 두각을 보이지는 못했다. 그러면서도 여러차례 스캔들에 휘말리기도 하면서도 군대 내 계급에서는 승승장구하여 최종적으로 원수에 오른다.
1815년 고종사촌인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프리데리케와 혼인하게 된다. 이후에는 꾸준히 베를린에 주로 머물렀으나 여전히 상원의원직을 지니고 있었기에 여러모로 정치적인 영향력을 꾸준히 행사하고 있었다. 형들인 조지 4세 때나 윌리엄 4세 재위기 때는 상원의원으로서의 활동을 상당히 열심히 한 것으로 유명한 편이다.
이후 1837년 그의 형인 윌리엄 4세가 죽은 이후 그의 조카인 빅토리아 여왕이 영국의 국왕으로 즉위하게 되면서 살리카법에 의해 여성의 즉위가 금지된 동군연합 지역인 하노버 왕국을 상속받으면서 하노버 국왕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1세로서의 인생이 시작되게 된다.
2.2. 하노버 국왕 즉위 이후
그의 하노버 국왕 즉위 이후 행보는 확실히 그가 영국 상원에서 보여주던 행보와 비슷하게 상당히 보수주의적이고 권위주의적으로 연결되었다. 그동안 영국의 분위기로 인해 자유주의적 면모가 강했던 하노버 왕국은 그의 즉위 이후 확실하게 전제군주국으로서의 움직임을 보여주게 된다.그래도 하노버 왕국을 잘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아무래도 하노버 왕국 자체가 동군연합 시절에는 조지 1세 시절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국왕이 영국에 머무르고 하노버는 사실상 버려진 땅 취급을 받아 발전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기에 동군연합이 깨지고 새로이 국왕이 머무르는 왕국 시절에는 그야말로 하노버를 다시 살린 사람이 되었다. 물론 그의 아들 대에 괜히 줄을 잘못 섰다가 왕국이 통째로 날라가버리고 생고생 하게 되는 상황이 되지만 말이다.
3. 가족관계
자세한 내용은 하노버 왕조 문서 참고하십시오.외사촌인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프리데리케 여공작[2]와 결혼해서 게오르크 5세를 두었다. 프레데리케는 남편 2명과 사별한 뒤에 한 3번째 결혼이였다.
아들 게오르크 5세를 제외하면 손자 대부터는 당주 이름이 모두 에른스트 아우구스트다.
3.1.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1세 (Ernst August I) | <colbgcolor=#fff3e4,#331c00> 조지 3세 (George III) | <colbgcolor=#ffffe4,#323300> 웨일스 공 프레더릭 (Frederick Louis, Prince of Wales) | |
조지 2세 (George II) | |||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의 카롤리네 공녀 (Princess Caroline of Brandenburg-Ansbach) | |||
작센고타의 아우구스타 (Princess Augusta of Saxe-Gotha-Altenburg) | |||
작센고타알텐부르크 공작 프리드리히 2세 (Frederick II, Duke of Saxe-Gotha-Altenburg) | |||
안할트체르프스트의 막달레나 아우구스타 공녀 (Princess Magdalena Augusta of Anhalt-Zerbst) | |||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샤를로테 (Princess Charlotte of Mecklenburg-Strelitz) | |||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카를 루트비히 프리드리히 공작 (Duke Charles Louis Frederick of Mecklenburg-Strelitz) | |||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공작 아돌프 프리드리히 2세 (Adolphus Frederick II, Duke of Mecklenburg-Strelitz) | |||
슈바르츠부르크존더스하우젠의 크리스티아네 에밀리 공녀 (Princess Christiane Emilie of Schwarzburg-Sondershausen) | |||
작센힐트부르크하우젠의 엘리자베트 알베르티네 공녀 (Princess Elisabeth Albertine of Saxe-Hildburghausen) | |||
작센힐트부르크하우젠 공작 에른스트 프리드리히 1세 (Ernest Frederick I, Duke of Saxe-Hildburghausen) | |||
에어바흐에어바흐의 조피아 알베르티네 여백작 (Countess Sophia Albertine of Erbach-Erbach) |
3.2.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자녀 |
1녀 | 컴벌랜드의 프레데리카 공녀 (Princess Frederica of Cumberland) | 1817년 1월 27일 | 1817년 1월 27일 | |
1남 | 게오르크 5세 (Georg V) | 1819년 5월 27일 | 1878년 6월 12일 | 작센알텐부르크의 마리 슬하 1남 2녀[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