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efd88f> 니콜라이 고골 Николай Гоголь | Nikolai Gogol | |
본명 | 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고골야놉스키 (러시아어) Николай Васильевич Гоголь-Яновский |
미콜라 바실료비치 호홀야노우스키 (우크라이나어) Микола Васильович Гоголь-Яновський | |
출생 | 1809년 3월 20일 |
러시아 제국 폴타바현 미르고로드군 소로친치 (現 우크라이나 폴타바주 미르호로드구 벨리키소로친치) | |
사망 | 1852년 2월 21일 (향년 42세) |
러시아 제국 모스크바 (現 러시아 모스크바 노보데비치 묘지) | |
직업 | 저술가, 극작가, 산문작가, 교육자 |
장르 | 드라마, 산문 |
활동 | 1840년 ~ 1851년 |
가족 | 아버지 바실 파나소비치 호홀야노우스키 어머니 마리야 이바니우나 코샤로우스카 남동생 이반 여동생 안나 여동생 올하 여동생 마리야 여동생 옐리자베타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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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크라이나 출신 러시아 작가. 알렉산드르 푸시킨, 미하일 레르몬토프와 함께 러시아 근대문학의 시작을 알린 문호이자 사실주의 문학의 선구자다. 너무나 신비하고 환상적인 이야기 속에, 부조리한 사회와 그 속에 스러진 개인의 현실을 너무나 현실적이고 적나라하게 그려냈기 때문이다. 고골 특유의 유머와 환상성으로 주인공들의 삶과 고난은 현실에 생생하게 존재하게 된다.2. 생애
러시아를 대표하는 작가이긴 한데 출신지는 동부 우크라이나 출신이다. 정확히는 폴란드계와 우크라이나(거기에 카자크계 조상을 두었다)계 혼혈. 일단 고골 본인은 러시아어는 제2 외국어로, 우크라이나어를 모어로 생각한 모양이며, 고골의 원래 성 역시 호홀야노우스키로 폴란드계 느낌이 강했다.고골이라는 성씨는 부유한 카자크인 오스타프 호홀(Остап Гоголь)의 딸과 결혼하여 얼마간의 토지와 130여명의 농노를 소유하게 된 오파나스 데미야노비치 호홀야노우스키(Опанас Дем'янович Гоголь-Яновський, 고골의 친할아버지)에 의해서 붙여졌기에 그의 핏줄을 보면 꽤 복잡하다. 이 때문인지 카자크계로도 대접받아서 카자크 이웃들과 친하게 지내며 그들의 민담과 여러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작품에 영향을 받았다. 타라스 불바에서 카자크 사람들이 멋지게 나오는 게 다 이유가 있다. 자신의 조상 이야기이기도 하다만.
엄청난 부자는 아니지만 제법 잘 살던 시골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전원 생활을 겪으며 자라났다. 엄격한 아버지와 달리 어머니는 광신적인 정교회 신자라서 젊은 시절 종교에 대한 허무함(아무리 기도해도 결국 신은 외면한다)을 담게되는 토대가 된다. 또한 자신에게는 엄격하지만 부인에게는 한없이 약한 모습만을 보이는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에게 항상 고함과 잔소리를 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그에게 여성공포증을 심어준다.
16세 때인 1825년 아버지를 여의고, 1828년 네진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떠난다. 그는 커가면서 정치인으로 나서고자 했으나. 인맥과 돈이 없으면 불가능한 현실에 좌절하고 1829년 처녀작인 시집 <간츠 큐헬가르텐(Ганц Кюхельгартен)>을 스스로 돈들여 내지만, 겨우 250부가 팔렸으며 악평을 호되게 당하자, 시집을 죄다 회수하여 직접 불태워버리고 만다.
1830년에는 <비사브륙>(=이반 쿠팔라 전야)과 미완성 소설 <게트만>중 한 장(章)을 출판하고, 황실 극단 오디션을 봤으나 실패한다. 다른 관공서에서 역시 낮은 직급으로 근무하고, 예술아카데미에서 회화 공부를 한다.
그나마, 우크라이나 및 카자크 민담을 섞어서 만든 마녀와 정령들의 이야기를 다룬 단편 호러 소설 모음집인 <디칸카 지역의 밤 이야기(Вечера на хуторе близ Диканьки)>를 1831~32년에 2권으로 걸쳐 냈는데 꽤 호평을 받으며 어느 정도 잘 팔리면서 이름을 알리게 된다. 곧이어 발표한 단편 모음집인 미르고로드도 성공하면서[1] 이름을 더 알리게 되는데 당시 대작가인 알렉산드르 푸시킨이 칭찬하면서 그는 유명해졌고 생활도 나아진다.
이 시절 하급공무원으로 1년동안 일하면서 겪은 부조리는 나중에 작품에 큰 영향을 끼친다. 공무원을 그만두고 사립 여학교에서 중세역사 전문 선생으로 일하면서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 조교수까지 일했으나 작품에 전념하고자 3년만에 교육자로서의 활동을 그만둔다.[2]
1835년까지는 소설, 희곡, 역사, 에세이 등을 왕성하게 창작하지만 대부분 완성하지 못한다. 역사 희곡 <알프레드>(먼 훗날인 1889년 출판됨)를 위한 스케치와 '우크라이나 역사에서 기초한 드라마 스케치'가 남아 있다. 그나마 출판된 작품으로는 소설 <광인일기>, <넵스키 거리>, <초상화>, 소설집 <미르고로드>, 그리고 논문 세 편이 있다.
뒤를 이어 1836년 부조리와 부정을 풍자한 희곡 <감찰관>이 연극으로 상영되어 큰 인기를 얻는다. 그러나 이 연극에 대하여 니콜라이 1세가 불쾌하게 여기면서 연극은 상영중단되고 그도 위협을 느끼고 이탈리아 로마로 몸을 피해야 했다. 그리고 여기서 존경하던 선배 푸시킨이 아내의 불륜 때문에 총싸움을 벌이다가 허무하게 죽은 소식을 뒤늦게 듣고 슬퍼하며 그를 기리는 시도 썼다.
로마에 정착해 6년동안 이탈리아에서 있다가 러시아로 돌아온 그는 그의 최고 걸작으로 추앙받는 <죽은 혼>을 발표하며 호평을 받는다. 그러나 그는 죽은 혼 2부에서 긍정적 인물상을 그리려는 시도가 계속 실패하게 되자 결국 스스로도 작가로서 죽었다고 절규할 정도로 슬럼프에 빠진다. 이어 찾아온 우울증과 여러가지 병세까지 겹쳐서 작품활동은 더더욱 부진에 빠졌고 1847년에 쓴 <친구들과 주고받은 편지를 간추린 글>이라는 책을 내놓았다가 그 전까지 그를 찬양하던 평론가 벨린스키 등 진보주의자들에게 분노어린 비난을 받게 된다. 왜냐하면 이 서간집에서 고골은 그동안 그리도 혐오하며 비꼬던 사회 부조리, 지배 권력, 종교에 순응하게 된 태도를 적나라하게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반응을 보고 더더욱 절망감이 깊어진 고골은 기분을 풀고자 1848년 팔레스타인 성지순례 여행을 갔으나 달라지는 건 없었다. 이때, 고골이 얼마나 절망했으면 예수 동상 밑에서 미치도록 흐느껴 울었다고 한다.
러시아로 완전히 돌아온 고골은 이곳 저곳 떠돌아다녔고, 죽은 혼 2부를 집필했다. 1851년 말부터 알렉산드르 페트로비치 톨스토이 백작의 집에서 세 들어살았는데 1852년에 친구의 누이인 예키테리나 미하일로브나가 사망하고 나서부터 광신에 휩싸이게 되었고, 이때부터 집필을 포기하고, 화요일마다 금식을 꼬박꼬박 하기 시작했다. 거기에다가 때 마침 사순절이 다가오고 있었는데 고골은 2월 5일부터 단식을 시작하였고, 그날부터 평소에도 절식을 하였다.
당시 고골은 완성한 죽은 혼 2부 원고를 톨스토이 백작을 통해 대주교에게 전달하려고 했지만 톨스토이 백작은 그 원고를 넘기는 것을 거부했다. 결국 광신적인 정교회 사제로부터 사탄의 유혹인 글을 포기하라는 권고에 가차없이 그동안 심기일전하여 쓰던 죽은 혼 2부를 스스로 불태워 버린다. 다만 다 불태우진 않고 하인이 일부를 수습해서 죽은 혼 2부 일부분이 남아있지만, 줄거리가 어떠한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게 되었다. 고골은 원고를 불태운 뒤에 톨스토이 백작에게 원래는 원고의 일부만 불태우려고 했지만, 악령에게 벗어나기 위해 전부 불태웠다고 말하고, 친구들의 만류에도 단식을 고수했으며 18일부터는 모든 음식물의 섭취를 중단했다. 결국 친구들과 지인들은 2월 20일에 의사를 불러서 정신과 치료를 받게 하려고 했지만, 그날 밤 고골은 의식을 잃었고, 그 다음날인 2월 21일 아침에 유언도 못 남기고 생을 마감하였다.
3. 작품
3.1. 시
- 이탈리아(1829)
- 간츠 큐헬가르텐(1829)
3.2. 소설
- 디칸카 근교 마을의 야회(1831~32)
1부
- 소로친치 정기시장
- 성 요한제 전야
- 오월의 밤 또는 물에 빠져 죽은 처녀
- 잃어버린 편지
2부
- 성탄절 전야
- 무서운 복수
- 이반 표도로비치 시폰카와 그의 이모
- 저주받은 땅
- 아라베스키(1835)
- 광인일기
- 초상화(1842년 개정판 발표)
- 넵스키거리
3.3. 희곡
- 검찰관(1836)
- 결혼(1842)
- 도박꾼(1842)
4. 평가
러시아 문학사에서 절대로 빼 놓을 수 없는 인물로 현재까지도 알렉산드르 푸시킨,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레프 톨스토이 등과 함께 높은 인지도를 유지하며 대문호로서 많은 찬사를 받고 있다. 특히 러시아에서는 국민 작가의 반열에 오른 인물 중 하나이며 고골 센터라는 이름의 극단도 있을 정도다. 고골의 후배 격인 도스토옙스키는 고골의 작품인 '외투'에 빗대어 "우리 모두는 고골의 '외투'에서 나왔다"라고 표현하며 고골을 칭송하였다.당연히 러시아 문학 전공자들에게 인기가 많으며 이반 투르게네프와 더불어 러시아 문학 입문 희망자에게 많이 추천되는 작가다. 중증 도박중독 증세를 보였던 수구꼴통 노인이나 농민이기를 희망하던 귀족 출신 노인이 쓴 글보다 쉽게 읽히고 분량이 길지 않으며 유머러스한 재미도 있다.
언어 감각이 대단히 뛰어났는데, 그는 러시아 제국 시절 우크라이나 출신의 작가로서 우크라이나어를 사투리 취급하던 러시아 제국의 관념에 따라 표준어인 러시아어로만 창작활동을 했지만, 우크라이나어 구사자의 감각을 통해 러시아어에서 잘 쓰이지 않던 옛스러운 표현들을 아주 맛깔나게 살려내며 그 언어적 감각의 천재성으로 칭송받는 경지를 구현했다. 때문에 고골의 작품은 번역으로 특유의 스타일을 제대로 전하기 어렵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개인적으로 푸시킨의 추종자이기도 했고, 푸시킨이라는 천재를 낳은 문학어로서 러시아어의 위대함을 여러차례 예찬하며 우크라이나는 물론이요 체코까지도 러시아어가 널리 쓰여야 된다는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따라서 고골 자신은 우크라이나어를 쓰고 자신의 카자크 혈통을 강하게 인식하였으나 그를 우크라이나 작가로 알아줄 수만은 없다. 그는 스스로 '야노우스키'를 버리며 고골(우크라이나어로는 '호홀')을 썼고, 고골 자신이 드러낸 국가관에 따르면 같은 종교와 혈통,언어를 공유하는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은 같은 민족이었고, 우크라이나어는 러시아어와 다른 언어가 아니라 중세 러시아어의 특징을 간직한 사투리지만 폴란드어가 유입되면서 러시아어와 이질성을 보이며 민족의 단결을 저해하는 분파주의적 요소였다.
물론 고골은 작품 속에서 우크라이나와 우크라이나인에 대한 애향심과 애정을 지속적으로 드러내긴 했지만, 이는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이 별개의 민족이라는 인식보다는 서구화와 도시의 성장이라는 근대화의 과정 속에 나타났던 전통적 가치체계의 붕괴에 대한 냉소적 시선 속에 러시아 제국의 수도이자 유럽화 지향의 상징이었던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기계적이고 속물적이며 허영에 찌든 위선적이고 타락한 도시로 상정하면서 부정적으로 인식함과 동시에 우크라이나를 정교적 미덕과 순수가 남아있는 낭만주의적 이상향으로 상정하는 방식으로 나타날 뿐 우크라이나인과 러시아인이 다른 민족이라는 인식과는 거리가 멀었으며[4], 오히려 훗날의 우크라이나 독립 문제는 고골의 관점으로는 조국을 약화시키려는 독일인(=갈리치아 등 우크라이나 서부를 장악한 오스트리아)을 위시한 서구의 분열책동과 다름없었다.
그 때문에 그는 유럽을 선망하여 러시아어를 쓰지 않고 프랑스어를 쓰던 당대 러시아 제국의 귀족들을 비판하는 한편, 우크라이나어로 창작활동을 하는 우크라이나 출신 작가들 역시 비판하며 우크라이나어는 사용되지 말아야 한다는 등 현대 우크라이나인들의 공분을 자아낼 발언을 하기도 했으며, 작품세계가 원숙기에 접어들수록 러시아 민족주의적 지향성을 더욱 뚜렷하게 드러내며 근대적 러시아 국민의식의 형성에 직간접적으로 기여했고[5][6], 1842년 발표된 대표작 타라스 불바의 개정도 이런 변화를 반영한 것이다.
이런 성향 탓에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적 시각에서 고골은 심하면 민족의 배신자로 취급되기도 했으나, 최근 우크라이나의 학자들은 고골의 언어에서 나타나는 우크라이나적 특성을 부각시키며 그가 러시아어로 집필했던 소설들을 우크라이나어로 재편찬하는 움직임이 보인다. 당연히 러시아인들과 관련 학계에선 영 좋게 보지 않는다.
타라스 불바를 원작으로 율 브리너가 불바로 분한 1962년 영화는 원작 내용과 많이 다르긴 해도 명작이었는데, 원작 자체가 반 폴란드, 친 러시아적 성향을 강하게 드러내는 범러시아 민족주의의 아이콘 취급 받는 작품이다 보니 원작 반영 비율을 높인 2009년 리메이크 영화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공정을 연상시켜 관련국들 사이에서 논란을 일으켰다.
5. 기타
-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고골이 아닌 '고골리'라는 이름이 더 일반적으로 통용되었다. 이는 이름의 맨 마지막 ль이 연자음(구개음화된 자음)이라서 그런 것. 하지만 실제로는 그나마 고골 쪽이 더 가깝다.
- 러시아에서는 독특한 삶과 맞물려 전해오는 괴담이 많다. 죽은 줄 알고 관에 묻었는데 사실 살아있어 관 속에 갇혀 있다가 나중에 파보니 관 안쪽이 손톱자국으로 남아나지 않았다거나, 유령기차인 '나는 이탈리아인(Mying Italian)'에 그의 유골이 있다는 도시전설이 널리 알려져있다. 해당 도시전설은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271회에 방영되었다.# 도시전설의 내용은 바크후투신이란 해골수집가에 고용된 사람들이 그의 무덤을 도굴하였고, 그걸 당시 지중해에서 활동 중이던 야브노스키란 장교가 입수하나 임무 때문에 모스크바행 여객기차인 나는 이탈리아인에 타던 보르게세라는 이탈리안 장교에게 유골을 주며 부탁했다고 한다. 그러나 열차가 갑자기 멈춘 걸 이용해 보르게세 형제가 유골을 가지고 장난을 쳤고, 그러자 그 유골이 목이 잘린 남자의 머리로 변했는데 이들이 도망치자마자 열차가 사라져 100여명의 승객과 함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떠돌고 있다는 것. 출처는 둘다 괴물딴지 번역이다. 그리고 이 기차가 진짜 무서운 점은 바로 다른 유령기차들과는 달리 직접적으로 사람을 치어 죽인다는 점이다.
그리고 최근에 이탈리아에서도 이에 대한 이야기들이 존재했으며 진짜 열차 이름은 'Treno La zanetti'였다.
https://storieinspiegabili.odisseaquotidiana.com/2020/10/il-treno-fantasma-zanetti.html
- 문명 5에 그의 희곡 "검사관"(감찰관, Ревизор)의 한 문장이 걸작 문학으로 언급된다. "만일 얼굴이 엉망이라면, 거울을 탓해봤자 부질없는 일이다"(На зеркало неча пенять, коли рожа крива)
[1] 여기에 유명한 비이나 대장 불리바로 알려진 타라스 불바가 실려있다.[2] 일설에 의하면 자신의 강의방식에 대해 학생들이 비판적이었기에 자신감을 잃어 퇴직했다고 한다. 당시 고골의 제자였던 사람이 남긴 기록에 의하면 고골은 자신의 키 높이만한 자료를 가지고 와서 혼자 작은 목소리로 읽다가 가끔 혼자 키득거렸다고 한다. 이런 탓에 당시 학생들은 그의 강의가 매우 재미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강의를 듣는 학생도 몇 없었다고 한다.[3] 우리나라에서는 '대장 불리바'로 알려진 소설. 민음사가 35년 원본을, 지만지가 42년 개정판을 번역했다.[4] 어리숙하지만 순수하고 착한 우크라이나인과 대비되는 영악하고 속물적인 러시아인 상이 자주 나타나긴 하는데, 이 또한 러시아와 구분되는 우크라이나인의 각성을 촉구하는 방향은 아니고 타락한 서구적 가치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며 정교적 미덕을 기만하는 중심부 도시민의 풍조를 신심깊고 선량한 시골 사람의 관점에서 비판하는 측면으로 나타난다.[5] 그리고 이런 성향이 말년에는 본인이 그렇게도 비판하던 정교회와 차르 체제에 대한 순응으로 이어졌다. 차리즘과 정교회야말로 러시아 민족주의의 알파이자 오메가였으므로.[6] 다만 고골이 옹호하던 차리즘과 정교회는 현실의 차리즘과 정교회가 아니라 고골 식으로 이상화된 것이었기에, 당대 보수층의 시각에서도 맹렬히 비난당했다. 어찌보면 미시마 유키오와도 비슷한 흑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