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일리야 레핀 Илья́ Ре́пин | |
본명 | 일리야 예피모비치 레핀 Илья́ Ефи́мович Ре́пин, Ilya Yefimovich Repin |
출생 | 1844년 7월 24일 |
러시아 제국 하리코프현 추구예프 (現 우크라이나 하르키우주 추후이우군 추후이우) | |
사망 | 1930년 9월 29일 (향년 86세) |
핀란드 비푸리주 쿠오칼라 (現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연방시 쿠로르트니구 레피노) | |
직업 | 화가, 조각가, 수필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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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세기 러시아 사실주의 예술을 대표하는 화가이자 인물화의 거장.러시아 역사상 최고의 미술가로 꼽히며, 훗날 안톤 체호프는 "러시아 역사에서 예술가 딱 3명만 꼽는다면 러시아 문학의 톨스토이, 러시아 음악의 차이콥스키, 러시아 미술의 레핀."이라는 말을 남겼다.
2. 생애
1844년 러시아 제국의 소도시인 추구예프에서 한 하급군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미술에 재능을 보여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아카데미[1]에서 이반 크람스코이에게 교육을 받았다. 1871년 성서를 주제로 한 <야이로 딸의 부활>로 바실리 플레노프와 공동으로 아카데미 졸업작품전에서 금상을 받았다. 그는 이것으로 일급 공식화가 자격을 취득했고 우수 연수생으로 6년간 해외 유학의 기회를 잡았다.1873년 5월 유럽여행을 떠났다가 1876년 예정보다 일찍 귀국하여 <볼가강의 배 끄는 인부들>, <성직자>, <황녀 소피야 알렉세예브나>, <쿠르스크 현의 십자가 행렬> 등을 발표하였다. 19세기 후반 러시아 미술은 로맨틱, 네오클래식적 접근을 털어내고 리얼리즘을 중시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 레핀은 바실리 페로프, 바실리 수리코프 등과 함께 <이동전람파>를 구성해 러시아 사회가 안고 있는 정치적, 사회적 모순들을 사실주의적인 묘사를 통하여 민중들에게 알리기 위해 러시아 전역을 순회하며 대부분 궁핍하고 고통을 받으면서도 인내하며 사는 민중들의 모습과 도시 노동자들과 민중들을 계몽하는 인텔리들의 모습을 주로 그렸다.
초상화에도 일가견이 있었는데, 레프 톨스토이, 니콜라이 고골, 이반 투르게네프 등의 저명한 러시아 문학가들은 물론이고 니콜라이 2세를 비롯하여 황족과 귀족, 우아한 상류사회 여성 등 문화계의 거의 모든 유명 인사들이 레핀의 모델이 되었다. 1894년 레핀은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 아카데미의 교수로 임명되어 1907년 교수직에서 은퇴할 때까지 학생지도에 전념했다. 1901년에는 러시아 국가 의회 100주년을 기념하여 대형 프로젝트를 의뢰받아. <1901년 5월 7일 국가의회 100주년 기념회의>를 그렸다. 그 후 오른손 관절의 통증으로 인해 왼손으로 그리려고 노력했지만 이전의 명성에 걸맞은 작품에는 미치지 못했다는 평을 받았다. 54세 나이인 1898년, 핀란드 대공국의 쿠오칼라(Kuokkala)로 이주한[2] 레핀은 이후의 생애 대부분을 쿠오칼라에서 보냈고 1930년 9월 29일 그곳에서 8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3]
레핀 본인은 사회주의 운동에는 큰 관여를 하지 않았지만 이후 소련 정권에서 레핀은 상당한 위치를 차지했다. 레핀의 화풍을 이어받은 인사들이 이미 소련 미술계의 주요 인사로 활동하였고, 무엇보다 레핀의 리얼리즘(사실주의) 화풍은 이후 소련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 잘 이어지면서 소련 미술가들 사이에서 좋은 견본이 된 것.[4]
정작 레핀 본인의 정치적 성향은 소련의 사회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는데 차르제가 무너지고 공화정이 들어선 러시아 혁명 당시 2월 혁명에는 지지를 보냈으나 볼셰비키의 10월 혁명은 회의적으로 보았고 핀란드가 독립하고 소련 정권이 수립된 이후 소비에트 당국자들이 수차례 귀국을 권유했지만 이를 거절하고 사망할 때까지 핀란드에 남있다. 다만 소련 당국이 자신에게 성의를 보여준 점을 감안해서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에 작품 전시회를 여는 것은 허용했고 작품 몇 점도 기증하기는 했다.
한국에도 영향을 줬다.#
여담으로, 러시아 아방가르드 중 러시아 미래주의의 일파인 입체미래파의 예술가로 유명한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의 헤어스타일에 영향을 준 사람이기도 한데,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의 초상화를 그려주겠다고 한 일리야 레핀은 평소에 미래주의에 별로 호의적인 사람이 아니였고, 마야콥스키는 그런 그를 엿먹일 작정으로 초상화를 그리겠다고 한 당일날 머리를 빡빡 밀어버린다. 마야콥스키가 어느 순간 스킨헤드 스타일을 고수하게 된 것도 이것이 계기가 된 것.
3. 레핀의 유명 작품들
'볼가강의 배 끄는 인부들' (Бурлаки на Волге) 1873년,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박물관 소장 |
'이반 뇌제, 아들을 죽이다. 1581년 11월 16일' (Иван Грозный и сын его Иван 16 ноября 1581 года) 1885년, 모스크바 트레챠코프 미술관 소장 |
그런데 레핀의 의도와는 다르게, 이 그림은 러시아에서 이반 4세를 재평가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전까지 이반 4세는 단순히 난폭한 폭군이란 평가만 받았었다. 그러나 이 그림에서는 이반 4세를 대단히 역동적이고 생생하게 묘사해서 '인간미'를 느끼게 할 정도였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이반 4세의 또다른 모습을 바라보게 되었고, 그가 단순한 폭군이 아닌 입체적인 면모를 가진 군주라는 재평가를 내리게 된 계기가 된 것. 작품 자체는 러시아 미술사의 한 획을 그은 명작으로 남았으나, 레핀의 의도로만 보자면 실패작이 된 셈.
하지만 신성시되던 차르 일가를 이 정도 수준으로 인간적으로 묘사한 그림에 로마노프 왕조는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했고[6] 관객들은 졸도하기까지 했으며, 급기야 1913년 아브람 발라쇼프란 자가 그림에 세 군데나 칼자국을 내는 테러를 저지르기도 했다. 당시는 레핀이 살아있었기에 직접 복원했지만, 이후 2018년 술취한 관객이 그림을 보고 또 너무 흥분하여 공격해서 파괴하는 반달리즘이 또 발생한다. 보호 유리가 처져있었지만 깨부수고 손상했다. 범인 이고르 포드포린은 징역 2년 6개월형을 받았다. 2018년부터 4년에 걸쳐 복원 작업이 시작되어 2022년 5월 모두 복원을 완료했다.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4세에게 답장을 보내는 자포로제의 카자크' (Запорожцы пишут письмо турецкому султану)''' 1891년,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박물관 소장 |
'노보데비치 수도원에 유폐된 소피야 공주' (Царевна Софья Алексеевна в Новодевичьем монастыре) 1879년 |
[1] 이후 레핀의 이름을 본떠 레핀 아카데미라 명명되었다. 흔히 말하는 레핀대.[2] 1918년 핀란드가 러시아에서 독립하여 졸지에 레핀은 핀란드인이 되었다. 러시아 내전 때 이곳에서는 러시아 적군, 백군이 치열히 싸웠으며 핀란드 통치하에도 러시아인들이 더 많았다.[3] 쿠오칼라는 제2차 세계 대전중 겨울전쟁 이후 러시아로 편입되었으며, 1948년 레핀의 업적을 기려 레피노(Репино)로 이름이 바뀌었다. 또한, 상트페테르부르크 중심지와 비교적 가까운 편이라 레닌그라드 주가 아닌 시의 일부가 되었다.[4] 마르크스주의 미학에서 레핀과 같은 부르주아적 리얼리즘을 비판적 리얼리즘이라 칭하고, 이것을 비판적으로 계승하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이전의 리얼리즘과 구분되는 다른 개념으로 취급된다.[5] 가르신도 레핀이 저 그림을 완성한 지 3년 뒤인 1888년에 33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다만 황태자 이반처럼 살해당한 것은 아니고, 이전부터 시달려왔던 정신병으로 인해 돌계단에서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6] 정작 이반 4세는 로마노프 왕조 일원이 아닌 류리크 왕조의 일원이다. 단 로마노프 왕조가 이반 4세와 전혀 무관한 건 아닌데 로마노프 왕조의 시조 미하일 1세는 이반 4세의 처남의 손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