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7 15:05:51

크리스티안 1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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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 글뤽스부르크 왕조 제3대 국왕
크리스티안 10세
Christian 10.
파일:1280px-Christian_X_-_Peter_Elfelt.jpg
출생 1870년 9월 26일
덴마크 코펜하겐 샬로텐룬 궁전
사망 1947년 4월 20일 (향년 76세)
덴마크 코펜하겐
재위기간 덴마크 국왕
1912년 5월 14일 ~ 1947년 4월 20일
아이슬란드 국왕
1918년 12월 1일 ~ 1944년 6월 17일
서명 파일:크리스티안 10세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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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c0013><colcolor=#fff> 가문 글뤽스부르크 가문
이름 크리스티안 칼 프레데리크 알베르트 알렉산데르 빌헬름
(Christian Carl Frederik Albert Alexander Vilhelm)
아버지 프레데리크 8세
어머니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로비사 공주
형제자매 호콘 7세, 루이제, 하랄, 잉에보르, 티라, 구스타프, 다우마
배우자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알렉산드리네 여공작 (1898년 결혼)
자녀 장남 프레데리크 9세, 차남 크누드
신체 201cm[1], O형(Rh-)
종교 루터교회 }}}}}}}}}
1. 개요2. 생애
2.1. 부활절 위기2.2. 제2차 세계대전과 사망
3. 여담4. 가족관계
4.1. 조상4.2. 자녀
5.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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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덴마크 왕국의 국왕[2]아이슬란드 왕국의 유일한 국왕. 프레데리크 8세의 장남으로, 전 덴마크 여왕 마르그레테 2세의 친할아버지이자 현재 노르웨이의 국왕 하랄 5세큰할아버지이다.

2. 생애

1870년 9월 26일 프레데리크 8세스웨덴과 노르웨이의 로비사 공주의 4남 4녀 중 맏이이자 장남으로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 크리스티안 9세가 덴마크의 국왕으로 재위하는 중에 태어나서 1906년까지 왕세손으로 있다가 1906년에 아버지 프레데리크 8세가 즉위하면서 왕세자가 되었고, 1912년 프레데리크 8세가 죽자 덴마크 국왕으로 즉위했다.

아버지 프레데리크 8세처럼 본인이 왕세자가 되기도 전에 첫째 남동생이 먼저 노르웨이의 국왕이 되었다.[3] 다만 아버지 프레데리크 8세가 재위 6년 만에 사망함으로써 왕세자가 된지 6년 만에 즉위했다.

2.1. 부활절 위기

당시 슐레스비히 지방은 덴마크로 회귀하느냐 신생 바이마르 공화국에 남느냐로 19세기부터 이어져 온 뿌리깊은 분쟁에 휩싸여 있었다. 일단 이 지역은 두 번의 슐레스비히 전쟁으로 프로이센 왕국, 이후 독일 제국의 영토로 남아 있었는데, 그냥 국민투표로 결정하자는 이야기가 오래 전부터 있었지만 전쟁에서 덴마크가 발려버리는 바람에 흐지부지되어서 독일 영토가 되어버린 상태였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 제국이 패망하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들어서자 분쟁이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다. 덴마크 의회에서는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주창한 14개조 원칙, 즉 민족자결주의에 따라서 슐레스비히의 국민투표를 개최할 것을 요구했고 협상국이 이를 수용하여 마침내 1920년 슐레스비히 국민투표[4]가 열리게 되었다.

투표 지역은 슐레스비히 북부와 중부[5]로 나뉘어 각각 2월 10일, 3월 14일에 개시되었고 결과는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문서에도 있듯이 북부는 덴마크 회귀 74%, 중부는 독일 잔류 80%로 결정되면서 오늘날의 덴마크-독일 국경이 형성되었다.

하지만 덴마크의 강성 민족주의자, 보수파들은 이 투표 결과에 불만족스러워하며 투표와 상관없이 중부 슐레스비히도 차지하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역시 투표 결과가 못마땅했던 크리스티안 10세는 이에 동조하며 총리 칼 테오도르 잘레에게 중부 슐레스비히로 군대를 보내 병합하라고 명령했으나, 잘레는 왕의 명령에 불복하고 투표 결과에 따라 북부 슐레스비히만 병합한 뒤 총리직에서 사임했다.

이에 크리스티안 10세는 격노하여 내각을 멋대로 해산해버리고 칼 율리우스 오토 리베(Carl Julius Otto Liebe)를 중심으로 강성 민족주의자, 보수파 인물들로 구성된 새 내각을 구성해 전제군주제 정부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왕의 독선은 덴마크 민중들의 시위와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크리스티안 10세는 일주일만에 총선거를 실시하여 미샤일 페테르센 프리스(M.P. Friis)의 정상적인 내각을 출범시켰다.

이 사건은 덴마크 국왕이 의회 없이 독자적으로 정치를 한 마지막 사건이었으며, 이 일주일간의 해프닝이 3월 말, 4월 초의 부활절 기간에 이루어졌기에 부활절 위기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후 크리스티안 10세 역시 다른 국가의 군주들처럼 실질적인 권력을 잃고 완전히 상징적인 국가원수가 되면서 덴마크에도 완전한 입헌군주정이 자리잡게 되었다.

2.2. 제2차 세계대전과 사망

1939년 나치 독일의 폴란드에 대한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이후에는 나치 독일덴마크를 침공하여 덴마크를 덴마크 보호령으로 만들어 버렸을 때 크리스티안 10세는 덴마크가 독일의 보호령이 되는 것을 승인했지만,[6] 덴마크가 나치 독일에 점령되어 있던 기간에 크리스티안 10세는 나치 독일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기도 했다.

왕궁인 크리스티안보르 궁전에 나치 독일의 국기가 게양되어 있자 크리스티안 10세는 독일 측에 나치 독일 국기인 하켄크로이츠를 내리라고 요구했고, 나치가 당연히 거절하자 내일 당장 군인 1명을 시켜 기를 강제로 내릴 거라고 말했다. 나치는 그 군인을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했으나 크리스티안 10세는 그 기를 내리는 군인은 바로 짐이 될 것이다![7]이라고 받아쳐서 나치 국기를 왕궁에서 내려버린 일화가 있다. 당시 나치 독일은 덴마크에 이어 노르웨이까지 점령해버렸고 그 당시 나치 독일의 살벌한 위세를 생각하면 아무리 국왕이라고 해도 대단한 패기와 권위이다.[8] 이건 덴마크 국왕의 자존심 상 감히 덴마크 궁정에다 침략자 놈들이 국기를 달다니! 라는 심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9]

크리스티안 10세는 늘 애마 쥬빌리를 타고 코펜하겐 시내를 돌아다니곤 했는데 당시 덴마크에 주둔 중이던 독일 국방군 보병이 조롱하는 투로 왕이라면서 왜 경호원이 없는 거냐고 말하자 한 소년이 '모든 코펜하겐 시민이 그 분의 경호원'이라고 답했다. 당시 덴마크인들은 크리스티안 10세와 마찬가지로 나치를 매우 싫어했다.

그 외에 독일군이 덴마크 거주 유대인을 체포해 절멸수용소로 보내려는 준비 단계로 유대인들에게 노란색 다윗의 별 배지를 달게 하자 국왕 본인이 같은 배지를 달고 무언의 시위를 벌여 유대인 체포 계획을 최대한 지연시켰다는 일화가 아이들용 동화책에까지 실렸을 정도로 유명하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덴마크가 나치 독일의 위협에도 유대인들을 보호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일화는 야사로 사실이 아니다. 실제로는, 덴마크의 유대인들은 다른 국가의 유대인과 달리 다윗의 별 배지를 달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실제 독일이 덴마크 내 유대인들에게 뱃지를 달게 했더라도 정말 왕이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었을지는 의문인데 반유대주의를 반대한다는 것과 현실적으로 기독교에 경원시당하던 유대교 상징을 ‘왕’이라는 신분에 있는 사람이 착용할 수 있었겠냐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이야기이다.[10]

또 당시 크리스티안 10세가 72번째 생일을 맞이하자 독일에선 아돌프 히틀러의 명의로 긴 축하 전문을 보내왔는데 이에 대한 크리스티안 10세의 답장은 'Spreche Meinen besten Dank aus. Chr. Rex[11]'가 전부였다. 직역하면 '매우 고맙소. 크리스티안 10세'란 뜻이다. 한마디로 'ㅇㅇ ㄱㅅ~’수준의 성의없는 답장을 보내어 덴마크를 점령한 나치 독일에 대한 반감을 드러낸 것.

이후 1945년 나치 독일이 연합국에게 패망하면서 나치 독일군에게 점령당했던 덴마크는 해방되었고, 이후 크리스티안 10세는 나치의 패망과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지 2년이 지난 1947년 76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치며 세상을 떠났다.

3. 여담

왕세자 시절 벨기에 왕국레오폴드 2세콩고 자유국에서 저지른 만행에 대해 아버지 프레데리크 8세와 마찬가지로 "그딴 작자가 인간이라면 나는 예수 그리스도다!"라고 극대노하며 디스했을 정도로 레오폴드 2세를 경멸했다. 당시 레오폴드의 만행을 가장 비난한 사람이 이 부자였으며, 이 영향인지 평생 노예제를 혐오했다.[12] 다만 이 부자가 가장 레오폴드 2세를 강하게 비판했지 레오폴드 2세가 한 행적이 워낙 막장이라 그 당시에 제국주의 열강이였던 영국,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제국주의 열강이 레오폴드 2세를 비판했다. 심지어 현재는 명군으로까지 재평가하려는 헛소리가 나오는 벨기에 국민조차 이 때는 레오폴드 2세를 비판했다.[13]

아돌프 히틀러의 생일에 사망했는데 나치 점령 기간에 나치에 저항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다소 아이러니하다. 다만 히틀러보다 2년 늦게 죽었기 때문에 당시 히틀러는 이미 패망한 후 사망했고 전 세계적으로 히틀러의 생일이 불과 몇 년 전처럼 국경일로 하는 곳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14]

키가 무려 201cm로 세계의 군주들 중에서 가장 큰 축에 속한다.

특유의 수염과 이목구비 뚜렷한 훈훈한 외모가 프레디 머큐리와 닮았다.

1953년의 덴마크 헌법 개정으로 왕위계승법이 변경되어 덴마크 왕위는 크리스티안 10세의 직계 후손에게만 계승권을 부여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4. 가족관계

파일:294429-1340798138.jpg
할아버지 크리스티안 9세, 아버지 프레데리크 8세, 장남 프레데리크 9세와 함께 4대가 함께 찍은 사진

4.1. 조상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크리스티안 10세
(Christian X)
<colbgcolor=#fff3e4,#331c00> 프레데리크 8세
(Fredrick VIII)
<colbgcolor=#ffffe4,#323300> 크리스티안 9세
(Christian IX)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글뤽스부르크 공작 프리드리히 빌헬름
(Friedrich Wilhelm, Duke of Schleswig-Holstein-Sonderburg-Glücksburg)
헤센카셀의 루이제 카롤리네 공녀
(Princess Louise Caroline of Hesse-Kassel)
헤센카셀의 루이제 공녀
(Princess Louise of Hesse-Kassel)
헤센카셀의 빌헬름 공자
(Prince William of Hesse-Kassel)
덴마크의 샤를로테 공주
(Princess Charlotte of Denmark)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로비사 공주
(Princess Louise of Sweden)
칼 15세
(Karl XV)
오스카르 1세
(Oscar I)
로이히텐베르크의 조제핀 공녀
(Princess Josephine of Leuchtenberg)
네덜란드의 루이세 공주
(Princess Louise of the Netherlands)
네덜란드의 프레데리크 왕자
(Prince Frederick of the Netherlands)
프로이센의 루이제 공주
(Princess Louise of Prussia)

4.2. 자녀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알렉산드리네 여공작과 결혼해서 아들 프레데리크 9세와 크누드 세습 왕자를 낳았다.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 / 자녀
1남 프레데리크 9세
(Frederik IX)
1899년 3월 11일 1972년 1월 14일 스웨덴의 잉리드 공주
슬하 3녀[15]
2남 크누드 세습 왕자
(Hereditary Prince Knud)
1900년 7월 27일 1976년 6월 14일 덴마크의 카롤리네 마틸데 공주[16]
슬하 2남 1녀

5. 대중매체

Hearts of Iron IV의 모드인 The Road to 56카이저라이히에서 등장한다. 본인에게 전제군주적 성향이 있었음을 반영해 두 모드에서도 전제군주정을 수립하는 루트를 탈 수 있으며, 바닐라에서도 Arms Against Tyranny DLC가 추가되면서 왕정 루트를 탈 수 있다.

히틀러가 되었다에서는 독일이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침공하지 않았고 오히려 영국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면서 히틀러와 우호적인 관계가 되었다. 다만 영국에게 자국민들이 무고하게 공격받았다는 사실에 워낙 충격을 받았는지 복수귀로 각성해서는 자국이 다 굴릴 수 있을지 모를 양의 무기를 요청해 히틀러를 곤란하게 만들기도 한다.


[1] 역대 덴마크 지도자 중 최장신.[2] 덴마크 보호령 시절도 겸임.[3] 아버지 프레데리크 8세도 왕은 커녕 왕세자가 되기도 전에 첫째 남동생 요르요스 1세가 먼저 그리스의 국왕이 되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42년이나 더 왕세자 자리에 있다가 차남 호콘 7세가 본인보다도 먼저 노르웨이의 국왕이 되었다.[4] 독일어: Volksabstimmung in Schleswig, 덴마크어: Genforeningen i 1920[5] 북부와 남부가 아니다. 남부는 애초부터 영유권 분쟁에서 배제되어 있었다. 슐레스비히 지역의 경계를 간단히 하자면, 현재 덴마크의 영토가 북부, 덴마크-독일 국경부터 까지가 중부, 킬부터 뤼베크까지가 남부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6] 당시의 독일 국방군은 백만 명을 돌파한지 오래고, 덴마크보다 더 크고 군인도 많고 기갑과 공군까지 있던 폴란드도 탈탈 털린 상태라 꼴랑 1만 5천 정도밖에 안 되는 약소국인 덴마크군 따위가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덴마크 입장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아예 없었다.[7] 이게 또 거짓말도 아닌 게, 군주국과 공화국을 막론하고 국가원수는 자국의 군 통수권자인 데다가, 특히 유럽 군주국에서 국왕이나 황제가 자국의 군인이기도 했던 것은 십자군 전쟁으로 군주들이 원정 나가던 중세 때부터 역사가 깊은 일이다.[8] 막말로 히틀러가 이 소식을 듣고 열 받아서 해를 가할 수도 있는 것이다.[9] 사실 동생 일가족의 나라에 나치 독일이 저지른 만행을 생각해도, 공공연히 표출하기는 어려워도 사적으로는 나치에 대해 큰 반감을 갖는 것이 당연할 수도 있다.[10] 이와 별개로 덴마크 유대인들의 탈출은 타 점령국들에 비해 비교적 용이한 편이었는데, 일단 덴마크의 유대인 인구 비중이 원체 적은 점과, 그 인구들이 대부분 코펜하겐 일대에 있던 만큼 비교적 큰 노력을 들이지 않고서 5~10km만의 거리를 이동하면 스웨덴으로의 탈출이 가능했던 데다, 이미 1년 전 노르웨이에서 유대인 추방령이 시행되었던 만큼 덴마크 유대인 사회에서의 경각심 또한 비교적 높아졌던 편이다. 여기에 포함외교와 2차 슐레스비히 전쟁에서 패한 여파로 인해 덴마크 사회가 낭만적 내셔널리즘이 주류가 되면서 공격적인 민족주의 성향도 억제되어 국민들의 반유대주의 성향 또한 낮았고, 결정적으로 당시 덴마크 보호령 전권대사로 부임한 독일 관료 베르너 베스트는 덴마크 유대인들의 체포에 별 노력을 들이지 않고 방관하였다. 그 결과 덴마크에서의 홀로코스트 피해자는 이 당시 탈출에 실패하여 테레지엔슈타트 수용소로 수감된 460명 정도로 추산되며, 그 중에서도 사망자는 약 100명 정도로 확인되는 등 전유럽에서 가장 낮은 비중을 보인다.[11] 라틴어로 '왕'이라는 뜻[12] 근데 사실 당대의 식민제국들이 저지른 노골적인 수탈이나 학살같은 범죄까진 아니었지만, 덴마크 식민제국그린란드 원주민들을 닭장같이 비좁은 소련식 아파트에 몰아넣고 원주민의 전통적인 풍습들을 탄압하며 어느 정도 제국주의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그래도 덴마크 식민제국은 당대에 이름 좀 들어봤다 하는 식민제국들(대영제국, 프랑스 제국, 네덜란드 제국,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 제국, 러시아 제국 등)에 비하면 매우 원만하고, 신사적이고 공정한 통치를 한 것도 사실이며, 현재 피식민국들과의 관계도 꽤 괜찮은 편이다. 현재는 그나마 남아있는 속령(이래봤자 고도의 자치권을 누리는 사실상 독립국인) 그린란드를 2021년까지 독립시키려고 노력하는 중인데, 그린란드 독립의 원천인 석유가 최근 저유가로 힘을 못쓰는 중이라 난항을 겪고 있다고 한다. 절대 다수의 식민제국은 독립전쟁과 같은 유혈사태를 겪지 않고는 식민지를 그냥 보내주지 않았다. 심지어 독립을 허용해준 나라 중엔 프랑스 식민제국같은 국가는 피식민국으로부터 ‘독립세’까지 걷었다. 독립을 시켜준 이후에는 (훗날 식민지 보상의 명목으로 차관을 제공한 것을 제외하면)어떤 보상도 없이 그냥 무책임하게 자국민들 데리고 떠나버려 피식민국에 빈곤, 내전과 같은 불행을 겪게 했다. 아무런 유혈사태도, 대가도 없이 피식민국의 경제적 전망까지 신중히 고려해 독립을 지원해준 식민제국은 덴마크가 유일하다.[13] 물론 이는 콩고인들을 착취했기 때문이 아니라 레오폴드 2세의 사생활이 워낙 더러웠고, 자기 정부를 위해 도로를 깔거나 건물을 짓고 그 비용과 관리 책임은 맡기 싫어서 해당 건축물들을 국가 소유로 돌려 버리는 등의 사치 행각, 식민지 만행을 덮기 위해 국가 재산을 미국 언론사들에 뇌물로 뿌려댄 부정부패 행각 때문이었다.[14] 히틀러는 공산국가 독재자 못지않게 우상화가 되어 있어 북쪽누구누구처럼 생일이 국가적 기념일이었다.[15] 마르그레테 2세, 베네딕테 공주, 그리스의 왕비 안나마리아[16] 프레데리크 8세의 3남 하랄의 차녀이다. 즉, 친사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