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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Henri Honoré Giraud 앙리 오노레 지로 |
출생 | 1879년 1월 18일 |
사망 | 1949년 3월 11일 (향년 70세) |
복무 | 프랑스 육군 · 제4 주아브연대 3대대 · 메츠 제6 군관구 사령관 · 7군 사령관 · 9군 사령관 자유 프랑스 · 국민해방 프랑스 위원회 의장 · 프랑스군 총사령관 |
최종계급 | 대장(Général d'armée) |
주요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 말메종 전투 제2차 세계 대전 |
서훈 | 레지옹 도뇌르 훈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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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양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프랑스의 장군. 프랑스 전투에서 포로가 되었으나 프랑스 항복 이후 탈출하여 자유 프랑스에 합류, 연합군 일원으로써 참전한다. 샤를 드골과 더불어 자유 프랑스를 이끌었던 인물이다.2. 생애
2.1. 세계대전기
앙리 지로는 알자스계 출신으로 1879년 파리에서 출생하였다. 생시르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900년에 임관하여 프랑스령 북아프리카의 제4 주아브(알제리 프랑스 보병대)의 지휘관으로 근무하였다.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북아프리카에서 주아브 연대와 복귀해 지휘관으로 참전하였다. 1914년 생 캉텡 전투에서 총검 돌격 도중 심각한 부상을 입었고 전투 종결 후 독일 제국군의 포로가 되었다. 벨기에의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으나 수감 2개월 뒤 유랑 서커스 단원으로 위장하여 탈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포로수용소에서 탈출한 뒤 에디스 카벨[1]과 벨기에 공주의 도움을 받아 네덜란드를 거쳐 프랑스로 돌아갈 수 있었다.
1917년 가을, 프랑스 군에 복귀한 지로는 필리프 페탱이 주도한 말메종 공세에서 제4주아브 연대의 제3대대를 이끌고 말메종 요새를 점령하는 전공을 거두었다.
종전 후 지로는 루이 프랑셰 데스페레 장군 휘하의 이스탄불 프랑스군에서 근무하였다. 1926년에는 당시 스페인 점령지역이었던 모로코를 리프 공화국을 위시한 원주민 커바일족 저항군이 점령하게 되면서 이에 위협을 느낀 프랑스는 전쟁을 선포하게 된다. 페탱이 이끄는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이 결성되어 저항군과의 전쟁에 돌입하였고 앙리 지로 또한 연합군이 커바일족 저항군 사령관 아브드 엘 크림을 생포하는 데 일조하게 된다. 이 때의 공로로 지로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받았다. 또 파리에서 에꼴 데 게흐(École de Guerre)[2]에서 군사전략 등에 대한 강의를 맡게 되었고 이 때 샤를 드골이 교육생으로 그의 강의를 듣기도 하였다.
이후 메스 군관구 사령관으로 부임하게 되면서 중령이었던 샤를 드골과 재회하기도 하게 된다. 1936년에는 장군으로 진급하여 7군 사령관이 되었고 전쟁최고의회의 주요 멤버가 되었다. 이때 지로는 기갑 전력의 효과를 미미하다고 보았는데 휘하의 소장파였던 드골 중령과 마찰을 빚기도 하였고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더욱 심화되었다. 샤를 드골 문서에서도 나와 있듯이 기갑전력의 활용과 효과에 대한 견해 차이 때문에 대령 진급이 몇 차례 누락되기도 하였고 부대가 해체되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
2차 대전이 발발하면서 1940년, 프랑스 전투에서 7군 사령관으로써 네덜란드 방면의 동부전선으로 배치되었고 독일군의 진격을 늦추는 전공을 거두기도 하였다. 하지만 7군의 소모가 컸기 때문에 7군은 9군과 병합되었고 최전선에서 아르덴을 돌파한 독일군의 진격을 막는 임무를 지휘하게 되었다. 하지만 오드프랑스 지방의 와시니 지역에서 직접 정찰에 나섰다가 독일 국방군에게 생포되어 또 다시 독일군의 포로가 된다. 나치 독일의 군사 법원은 지로에게 독일 민간인에 대한 사형을 지시한 혐의로 기소하였으나 무죄를 선고 받고 드레스덴 인근의 쾨니히슈타인 요새에 수감되는 신세가 되었다.
지로는 인근의 지형 및 지리를 숙달하고 독일어를 배웠고 밀반입받은 로프와 와이어, 모포 등으로 준비하여 2년간 꾸준히 탈출계획을 세웠다. 1942년 4월 17일, 준비한 도구를 바탕으로 성벽을 타고 내려와 길렀던 수염을 밀고 현지인으로 위장하는 데 성공하였다. 탈출 후 영국의 특수작전집행부에 연락을 취해 위조된 신분증 및 옷, 현금 등을 제공받을 수 있었고 스위스를 통과해 비시 프랑스로 복귀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지로는 페탱을 만나 나치 독일이 세계 대전에서 승리할 수 없으며 독일의 프랑스 점령에 대해서 항거하여야 한다고 설득하였으나 페탱은 이를 거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탱은 지로를 독일로 다시 송환하라는 독일의 요구를 거절하였다. 하지만 지로가 프랑스에 복귀하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하인리히 힘러는 게슈타포를 동원해 그를 수배하였다.
아이젠하워가 횃불 작전에 임하여 비밀리에 연락해 북아프리카의 프랑스군을 지휘해줄 것을 요청하였고, 그는 이를 받아들여 연합군의 일원이 되었다. 프랑수아 다를랑이 암살되고 나서야 그 연락을 받을 수 있었고 드골, 처칠, 루즈벨트와 함께 카사블랑카 회담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이후 1944년에 직에서 물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