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dddddd,#000><colcolor=#000000,#dddddd> 프랜시스 베이컨 Francis Bacon | |
사망 1년 전인 1991년 촬영된 모습 | |
본명 | 프랜시스 베이컨 |
출생 | 1909년 10월 28일 |
아일랜드 더블린 | |
사망 | 1992년 4월 28일 (향년 82세) |
스페인 마드리드 | |
국적 | 영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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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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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계 아일랜드 화가(1909년 10월 28일 - 1992년 4월 28일)로 16세기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의 배다른 형인 니컬러스 베이컨의 후손이다.
특유의 강렬하고 원초적인 화풍으로 인간의 내면을 극단적인 암울함으로 표현하였다.
2. 생애
프랜시스 베이컨은 꽤나 부유한 농장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릴 적부터 자신이 게이임을 깨달았으나[1] 엄격한 정통주의적 농장 주인인 아버지는 매번 하인을 시켜 그에게 채찍질을 하라고 명령하였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그의 마조히즘을 자극하게 되었다.바이마르 공화국 당시 베를린은 자유분방하고 개인주의적 성향의 인파들이 넘쳐났으며, 그런 분위기는 베이컨에게 있어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베이컨은 베를린에서 많은 독일 젊은이들을 만나 그들과도 관계를 가졌다.
이후 런던으로 돌아간 베이컨은 사우스켄징턴에 정착해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일했으나, 1933년 인테리어 디자인을 그만두고 본격적인 그림 그리기에 앞서 첼시로 이사한다.
스스로 늦깎이라 부른 베이컨은 1930년대에 처음 그룹전에 참가했고 개인전도 기획했다. 일부 긍정적인 반응도 기록되어 있고 수집가 마이클 새들러가 그의 그림 한 점을 구입하기도 했지만, 압도적으로 부정적인 평가에 시달렸다. '유치한 구도'와 '캔버스와 종이 위의 배설에 불과'등 거센 반발과 혹평으로 인해 깊은 좌절을 겪었고, 늘 자기 비판적이었던 그는 자신의 그림 대부분을 파기했다. 이로 인해 1929년에서 1944년 사이에 그린 작품은 약 15점만 남아 있다.
하지만 1944년, 베이컨이 화가가 되겠다는 목표가 뚜렷해지던 때에 그린 작품인 세폭화 <십자가 아래 인물들을 위한 세 습작:Three Studies for Figures at Base of Crucifixion>과 함께 모든 것이 바뀌었다. 처음 전시되었을 때는 상당한 비난을 받았지만, 베이컨은 이제 더 이상 그런 것에 신경쓰지 않았다. 더 많은 그룹전이 이어졌고 1946년에는 런던의 하노버 갤러리에서 일하던 에리카 브라우센의 관심을 끌었다. 훗날 그녀는 베이컨의 금전적 후원자이자 대리인이 되어 그를 한결같이 지지했다.[2]1954년에 베이컨은 루치안 프로이트, 벤 니컬슨과 함께 영국을 대표해 베니스 비엔날레에 참여했고 평단의 호평을 받는다. 알랭 주프르와는 베이컨에 대해 파리의《아트》지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인간 본성의 어두운 미래를 묘사한 이 작품은, 의심할 나위 없이 비엔날레를 통틀어 단 하나의 진정한 발견이다."
베이컨은 성공을 거듭했으나, 외로움에 곧 시달렸다. 연인들은 모두 죽고, 오랜 친구들과의 관계는 점점 멀어졌다. 오래 전에 절교했던 연인과도 화해하려 했지만, 그의 마지막 시도는 실패했다. 신장을 제거한 뒤로 몸이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져 작업에 한계가 있었지만 죽을 때까지 그림을 계속 그렸다.
1992년 4월, 마드리드에서 머무는 동안 베이컨은 폐렴과 심각한 천식 발작으로 병원에 입원했고 6일 후인 4월 8일, 심장마비로 82세를 일기로 사망한다.
3. 작품 세계
그의 출세작 Three Studies for Figures at Base of Crucifixion1945년 4월, 런던 르페브르(Lefevre) 갤러리. 많은 관람객들은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의 그림에 발길을 멈추고 마음을 울리는 끔찍한 이미지에 모두 침묵하였다. '십자가에 못 박히는’ 이미지는 그리스도교의 고난 이미지를 상징하는 것뿐만 아니라 보편적인 인간의 고통과 비극의 한단면을 강조한 것이다. 또한 이를 극대화하기 위하여 그리스 신화의 복수의 세여신 에우메니데스Eumenides(또는 Erinyes, 머리칼은 뱀이고 날개가 있음)를 이용한다.
각각의 그림은, 여신들의 복수와 분노 때문에 두려움에 고통받고 절규하는 보편적인 인간성의 단면을 보여준다. 그리스도교 문화의 고난 이미지, 그리스문화의 운명에 절규하는 인간상, 뭉크의 절규 그리고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러시아 혁명 영화 전함 포템킨의 총 맞은 여인의 고통스런 절규로 클로즈업된 얼굴이 혼합되어 보편성을 추구하고 있다.
서양문화의 2대 이해축, 그리스-로마 문화, 그리스도교 문화에 뭉크, 그리고 영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 및 문화가 한 그림에 녹아, 보편적인 인간상의 한 단면을 표현한 천재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출처:그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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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고 벨라스케스의 '교황 인노첸시오 10세의 초상'에서 출발한 습작 (Study after Velázquez's Portrait of Pope Innocent X)" (1953)[3] |
벨라스케스의 원본과 비교하면 기괴함이 더 확실히 느껴진다.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의 고전 무성 영화 <전함 포템킨> 중 죽어가는 유모의 확대 스틸컷은 베이컨에게 신선한 영감을 불어넣었고, 훗날 그의 작품들의 아주 결정적인 모델이 되었다
"나는 언제나 입 모양, 입과 치아의 형태에 몹시 감동받았다. 사람들은 이것들이 온갖 종류의 성적 의미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내가 입에서 나오는 빛과 색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베이컨에 영향을 준 에드바르트 뭉크의 〈절규〉나 《전함 포템킨》은 고통받는 얼굴 이미지가 강조되어 있는데 베이컨은 얼굴 이미지에 비해 입을 강조한 점이 특징적이다. 이는 인간생활 대부분은 입(Mouth)을 통해 나타난다고 보기 때문이다. 화(Anger)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를 악물게 하고, 공포와 끔찍한 고통은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게 한다. 그림 속 무섭고 끔찍하게 절규하고 있는 입은 공포(Horror)를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과 이를 아름답게 승화시키려는 것 사이의 균형을 유지했고 베이컨이 바라는 대로 진정으로 '공포보다 더 무서운 절규'를 표현해냈다. 베이컨은 이 공포의 카타르시스를 표현하기 위해 모네가 '일출'을 그리듯이, 자신도 항상 '입'을 그릴 수 있기를 원했다.
영화 배트맨에서 극중 조커(잭 니콜슨 분)가 미술관에 독가스를 뿌려 여주인공 비키를 뺀 사람들을 싸그리 죽여버리고 미술관에 있는 드가나 렘브란트, 르누아르 등등 유명 화가의 그림이나 조각들을 찢고 페인트를 뿌려 낙서하고 부숴버리는데,[4] 딱 하나 이 참상을 모면하는 그림이 바로 베이컨이 그린 "고기와 남자 형상 (Figure with Meat)"이다.[5] 부하 하나가 칼로 찢으려고 했지만 조커가 지팡이로 막고는 "이 그림은 마음에 드는 걸, 놔 둬."라고 해서 넘어간다. 이를 두고 조커 이미지랑 맞기에 베이컨이 그린 그림을 놔뒀다는 분석이 있다. 그냥 영화 제작 시점에서 살아 있는 화가의 작품이라 어른의 사정으로 넘어갔을 수도 있지만.
2008년에 다크 나이트를 찍었던 크리스토퍼 놀란이 인터뷰에서 밝히길, 베이컨의 그림들이 조커(히스 레저 분)의 찢어진 입에 영향을 줬다고 한다. 조커는 웃음 같지 않은 웃음을 짓는 캐릭터이고 베이컨의 그림은 고통을 입으로 형상화했으니, 둘 다 "입"과 "감정"이라는 공통점이 있어서 어울리는 듯하다.
4. 연인들
처음 기록된 베이컨의 첫 연인이자, 오랜 동무는 성공한 사업가이자 정치가인 에릭 홀이었다. 1929년에 만난 홀은 베이컨의 작품에 반해 크게 열광했고, 그에게 용기를 불어주고 금전적으로 많은 후원을 지불했다. 베이컨이 가난하게 살 때, 홀은 언제나 베이컨을 도와주었고, 집세를 내주었으며, 고급 레스토랑과 와인의 세계를 접하게 해주어 그를 미식가로 만들었다. 베이컨은 에릭 홀에 대해 자신에게 큰 영향을 주었으며, 홀은 감수성이 풍부하고 지적인 신사라고 말했다. 하지만 홀과 베이컨이 왜 헤어졌는지에 대해선 알 수 없다.1952년 베이컨은 홀과 이별한 후, 전직 전투기 조종사 피터 레이시를 만나 이내 정열적인 연인 관계로 발전했다. 멋 부리기를 좋아했고, 세련된 매너에 좋은 술을 음미했던 보수파 영국인 레이시는 드러내고 동성애를 하진 않았다. 베이컨은 새로운 애인의 초상화도 여러 점 그렸다. 하지만 레이시는 수려한 외모와 세련된 신사적 품격에도 술에 취하면 난폭해지는 악명 높은 술꾼이라는 습관적 사실을 감추진 못했다. 그는 몇 번이고 술에 취해 베이컨의 작품들을 부수거나 훼손시켰고, 베이컨 몰래 다른 남성들과 관계를 맺었지만, 떨어져 지낼 때면 꾸준히 편지를 주고받으며 꽤 오랫동안 깊은 애정을 유지했다. 그러나 레이시는 무서울 만큼 육체적 건강이 악화되면서부터 연락은 끊기기 시작했다. 그는 1962년, 베이컨의 첫 번째 회고전이 열리기 전날 사망했다.
베이컨은 레이시가 죽은 지 약 2년 후, 런던 빈민가인 이스트엔드 출신의 좀도둑 조지 다이어를 만나게 된다. 다이어는 잘생긴 외모에 터프한 남성스러운 분위기를 풍겼지만, 그의 내면은 수줍음이 많고 쉽게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처음부터 정렬적인 관계가 일부였던 그 둘은 육체적 폭력과 갈등은 숨기지 못했다. 베이컨은 인물화 중, 다이어를 통해 그린 그림들이 가장 많았다. 둘의 관계가 서서히 악화되면서 베이컨이 공개적으로 바람을 피우자, 다이어는 질투심에 사로잡혔다. 다이어는 평소 베이컨이 자신을 경멸하고 깔보는 것 같다고 했으며, 더 이상 베이컨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절망했다. 다이어는 심한 우울증으로 인해 변기에 앉은 채로 자살했다. 끔찍한 상황이였지만, 베이컨은 조금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작업에만 몰두했다.
1973년, 베이컨은 소호에서 이집 저집 돌아다니며 술을 마시다가 존 에드워즈를 만나게 된다. 에드워즈도 다이어처럼 이스트엔드 출신의 사내였다. 둘은 친구가 되었고 데이트를 했으며, 금세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을 정도의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젊고 교육을 받지 못한 에드워즈는 베이컨의 지적인 매력에 반했고, 베이컨은 반대로 에드워즈의 순수하고 때묻지 않은 매력에 반했다. 베이컨은 새 연인에게 리스 뮤스 근처에 살 곳을 마련해 주었고, 그때부터 에드워즈는 말과 행동으로 베이컨을 응원했다. 둘의 관계가 사랑 이야기로 시작될 순 있지만, 그건 아니었다.[6] 이내 깊은 우정과 신뢰가 가득한 아버지와 아들같은 관계가 되었다. 에드워즈는 심지어 베이컨이 작업하는 동안 계속 곁을 지킬 수 있는 영광을 누렸다. 에드워즈는 30점이 넘는 베이컨 그림의 모델이었고, 베이컨의 생활과 주변을 사진으로 남긴 기록자였다. 두 사람의 관계는 시작할 때처럼 끝날 때도 열렬하진 않았지만, 에드워즈는 다른 남자와 몇 년 동안 꾸준히 사귀었다. 베이컨은 그를 유일한 상속자로 삼았고, 베이컨이 죽은 뒤부터 2008년 8월에 방콕에서 폐암으로 죽을 때까지 상속받은 재산을 관리했다.
또한 베이컨은 말년에 호세라는 젊은 스페인 사업가와 마지막으로 열렬한 사랑을 나누었다. 하지만 이 사람의 정체는 수수께끼로 남았다. 베이컨이 애인을 만나러 스페인에 자주 갔기 때문에 런던에서 이 사람을 본 이가 거의 없었던 이유였다.
5. 관련 문서
[1] 여자와의 성관계는 어릴 적 호기심으로 맺은 이후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2] 공교롭게도 에리카는 베이컨과 한 살 차이였으며, 그가 사망한 지 단 8개월 만인 1992년 12월에 사망하였다.[3] 미국 아이오와주 소재 드모인 아트 센터 소장, 캔버스에 유채.[4] 부하 하나가 커다란 카세트 플레이어를 들고 와 프린스가 부르는 노래를 재생하는데, 이것이 그대로 배경 음악이 된다.[5] 자세히 보면 위의 인노첸시오 10세 초상 패러디의 연장선임을 알 수 있다. 교황의 옥좌가 동물(아마도 소)의 고기로 바뀌었다.[6] 에드워즈는 훗날 둘 사이에 성관계는 없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