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05 11:20:38

위안부 문제

'''[[대한민국|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과 관련된 위안부 문제'''
일본군 위안부 한국군 위안부 한국정부의 위안부 양공주


1. 개요2. 일본의 '위안부'
2.1. 유녀마리아 루스 호 사건2.2. 가라유키상2.3. 일본군 위안부2.4. 기업 위안부
2.4.1. 명칭2.4.2. 유래2.4.3. 인원 수2.4.4. 내용2.4.5. 연구가 지지부진한 이유
2.5. 특수위안시설협회
3. 한국의 위안부4. 다른 나라의 위안부5. 관련 문서

1. 개요

일본 제국을 비롯한 타국의 성노예 범죄에 대한 역사 인식에 관한 문서.

일단 읽기 전에 위안부가 왜 문제가 되는지 알아야 한다. 원래 합당한 대가와 선택의 자율이 보장된다는 조건 하에서 군인을 상대로 매춘을 하는 것은 고대부터 꾸준히 해 오던 일이다. 문제는 아래 나올 위안부들은 취업사기, 인신매매 등의 비자발적 방법으로 모집되었고 해외의 전선에서 인신이 구속된채 강제노동을 해야되었다. [1] 이 또한 고대부터 개인, 아동, 부녀자를 노예로 팔아먹는데 써먹던 유서깊은 수법인데[2] 빚으로 옭아매 인신을 구속하거나 가장이 딸을 파는 것 부터 강제노동, 노예의 일종으로 해석되며 이러한 사람들을 포주에게 넘기는 성소개업 또한 당시 국제연맹에서도 금기시되던 사항이었다.

그럼에도 일본 제국 정부는 전시하 위안부 제도를 창출 및 운용하였으며 업자들뿐만 아니라 군대에게 위안소 관련 각종 편의(이송 등)를 고의로 방조했다.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하여 이후 고노 담화에서는 일본군의 '관여'라는 표현으로 일본의 책임을 인정했다. 물론 모집의 주체는 민간인 업자라고 책임을 돌리는 경우도 있는데 당시 일본은 국제연맹 여성ㆍ아동 매매 실지조사단 방문으로 인신매매가 공공연히 일어나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망신을 당했었다. 이로인해 일본 내에는 공창제 폐지 운동이 일어나 공창제가 폐지 되었고 꿩대신 닭으로 식민지 위안부를 대폭 늘리기 시작한다. 결국 문제가 된다는 것을 일본정부가 이미 인지하고 있었다는 뜻으로 민간업자와 연계해 위안부를 관리한 일본 군부에 책임을 안물을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 또한 이 문제에 자유로울 수 없는 게 한국군 위안부한국정부의 위안부 문제도 명백히 존재했던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일본군 위안부에 비하면 그 존재를 아는 사람조차 거의 없으며 피해자에 대한 보상은커녕 논의조차 되고 있지 않다. 그렇기에 이것이 왜 문제가 되는지 다수의 보편적인 이해가 필요하며, 더 나아가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회적 노력 또한 수반되어야 하는 것이다.

2. 일본의 '위안부'

2.1. 유녀마리아 루스 호 사건

문제의 공창제가 시작된 원인으로 위안부 문제의 문화적, 역사적 배경으로 소개되곤 한다.

2.2. 가라유키상

19세기에 해외로 나가서 성매매를 하던 일본 여성들을 가리키는 표현. ##

일부 학자들은 과거 일본에서 운영했던 가라유키상이 운영 주체가 국가로 바뀌며 위안부가 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2.3. 일본군 위안부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일본군 위안부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2.4. 기업 위안부

현재 위안부 문제는 일본군 위안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며 더 나아가 위안부는 일본군 위안부라는 인식이 강하게 자리잡혔지만 위안부 피해자들 중에는 일본군 위안부가 아닌 피해자들이 존재하는데 이들은 기업에 의해 위안부 생활을 강압적으로 했던 여성들이었다.

2.4.1. 명칭

기업 탄광 등으로 강제 연행된 노동자들의 노동 의욕을 고취하기 위해 그들 노동자에 대한 '위안'을 목적으로 연행되어 온 위안부의 공식 명칭은 없었다. 단지 창부, 작부, 위안부 등의 용어로 표기되어 있었다.

1990년대 이후 위안부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여러 학자들이 이들 피해자들의 명칭을 다양하게 명명하기 시작하였는데 산업 위안부, 사업장 위안부, 탄광 위안부, 노무 위안부, 기업 위안부 등의 다양한 명칭이 등장하였으나 별다른 이유가 없었다.

이들 피해자들을 직접적인 주제로 다룬 연구지인 「일제 말 강제 동원기의 기업 위안부에 관한 연구」[3]에서 기업이 위안소 설립 및 경영과 위안부 동원의 책임을 근거로 '기업 위안부' 명칭의 타당성을 처음 제시하였으나 일각에선 '산업 위안부' 가 쓰이는 등 현재까지 명칭이 통일되지 않고 있다.

나무위키의 본(r825 이후) 문서에선 「일제 말 강제 동원기의 기업 위안부에 관한 연구」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으므로 이를 따라 기업 위안부라고 명명하였다.

2.4.2. 유래

기업 탄광에서 운영된 위안소는 1920년대에 일본에서 유행한 '조선 요리점'과 유사점이 있다. 물론 일본 정부의 개입 및 강제 동원 등의 요소가 근본적으로 성격을 다르게 함을 유념해야 한다.

1920년대 이후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인이 급증하였고 덩달아 이들을 위한 유흥 시설의 수요도 늘어났다. 그런데 원 공급원인 일본 공창에서 조선인을 차별하여 받아주지 않았으므로 조선인을 위한 유흥 시설로써 '조선 요리점'이 등장하였다. '조선 요리점'은 기본적으로 한국 음식을 제공하였지만 주 목적은 매춘이었다.

이후 조선 요리점은 성행하여 삿포로의 경우 1935년경에는 100개 이상 늘어나 일본인들도 출입하였다. 탄광지역인 ][후쿠오카현]] 치쿠호(筑豊) 지방에는 강제 동원기 이전에도 유곽가에 조선 요리점이 있었으며 이후 강제 동원기에 탄광에서 유곽가에 위안소를 위탁 경영했을 가능성이 있다.

강제 동원기 이전의 조선 요리점의 관행이 기업 위안소에 많이 남아 있었던 데다 조선 요리점의 폐전업 인력이 기업 위안소로 이동한 경우, 직접적으로 조선 요리점이 기업 위안소로 지정된 경우 등이 발견되고 있다.

그러나 기업 위안부 피해자들은 강제 징용 노동자와 함께 강제 연행의 형태로 일본에 넘어갔을 가능성이 높다.

2.4.3. 인원 수

「일제 말 강제 동원기의 기업 위안부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조선인 강제 연행 노무자 수를 줄잡아 80만으로 보았을 때 기업 위안부 수를 적어도 3만 명, 많으면 40만 명까지 추산하였다.

2.4.4. 내용

1939년 10월 13일 오타루 신문[4] 조간에는 '입도의 반도 노무자들에게 동향 여성의 위로를' 이라는 제목으로 유바리(夕張)와 비바이(美唄) 등 18개의 탄광에 26개의 조선 요리점을 설립할 것을 업계가 홋카이도청에 요망했으며 곧 허가가 나올 것으로 보인다는 기사가 실렸다. 이를 통해 기업 위안부는 처음부터 강제 징용되어 탄광에서 노예처럼 일을 했던 탄광 노동자를 대상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애초에 '타코베야'(문어방)에 기숙하며 혹독한 매질, 저급한 식사,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며 부상과 사망 사고가 잇달을 정도로 노동 조건이 극히 열악했다. 때문에 노동 효율의 저하, 집단 도주 등의 문제가 발생했는데 일본 정부는 근본적인 원인을 고치지 않고 노동자의 성욕을 채워준다면 해결될 것으로 판단했다. 탄광 기업들은 성병에 의한 노동 상실을 두려워하여 위안소를 통해 성병을 방지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목적으로 지어진 위안소이기 때문에 위안소는 기업이 운영하였고 노동자들을 지역별로 나눠 지역별 출신의 위안부를 이용하기를 유도하였다. 따라서 일본인 노동자는 일본인 출신의 위안부를, 조선인 노동자는 조선인 출신의 위안부를, 중국 노동자는 중국 출신의 위안부를 이용하는 것으로 처음부터 설계한 것이다. 운영 책임자는 보통 일본인이 맡았지만 조선인을 위한 위안부인 만큼 조선인이 운영 책임자[5]를 맡는 경우도 있었다.

이후 중국인 노무자 도입이 정책으로 결정되면서 기업 위안부는 중국인 노동자까지 확대되었는데 1940년 3월 육군성 전비과장이 홋카이도탄광기선주식회사 동경 본점으로 보낸 고력관리요강초안(苦力管理要綱草案)에는 '성적 목적을 고려하여 조선인 중국인 창부를 유치할 것'이 하나의 항목으로 되어 있다.

종전 시 징용 노동자들의 억눌렸던 대일 감정이 폭발하여 여러 폭력적인 사건들이 있었다. 때문에 징용 노동자들을 관리했던 탄광 기업들은 집단 폭동을 방지하기 위해서 기업 위안부를 동원했다는 주장이 있다.

한 시민 연구자의 증언에 따르면 미쓰이 타가와(三井 田川) 탄광에서는 위안소가 모여 있던 사카이마치(境町) 지역에서 여자들을 끌어다가 풍천각(豊泉閣)이라고 하는 곳에 모아 놓고 징용 노동자들을 데려와 성적 만족을 갖게 함으로써 폭동을 막았다고 한다.

2.4.5. 연구가 지지부진한 이유

기업 위안부에 대한 조사가 지지부진한 이유는 애초에 자신의 신분이 드러날까봐 기업 위안부 피해자들이 극도로 꺼렸기 때문이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도 꺼리는 부분이지만 기업 위안부 피해자는 그 정도가 훨씬 심한데 당연한 것이 기업 위안부 피해자들을 실제로 겁탈했던 사람들은 조선인이었기 때문이다. 위안부 시설을 인지한 탄광 노동자들이 위안부 증언을 할 리가 만무하므로 한국에서는 연구를 진행할 여건이 매우 좋지 못하며 일본의 문서자료나 현지 지역 주민들의 면담, 일부 일본 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인용하는 선에 그치고 있다.

일각에서는 일본군 위안부와 달리 탄광 등의 위안소는 술집 형태가 많아 일본 우익들이 '위안소'의 성격 자체를 참여자들이 돈을 벌기 위해 간 곳이라고 트집잡는 경우가 많다. 즉, 위안소라고 하지만 결국 조선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알아서 간 곳이라고 물고 늘어지기 때문에 소개해본들 한국 측에 불리하다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한다. 이런 연유인지 기업 위안부의 연구는 지지부진하다.

2.5. 특수위안시설협회

전후 미군을 대상으로 한 일본인 위안부

3. 한국의 위안부

3.1. 한국군 위안부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한국군 위안부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3.2. 한국정부의 위안부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한국정부의 위안부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4. 다른 나라의 위안부

4.1. 프랑스

여느 사건들이 다 그렇듯이 제2차 세계 대전의 승자인 연합국의 식민지 위안부 운영 사실은 매우 제한적으로 알려져 있다. 대표적으로 프랑스는 군인들의 사기진작(?), 위생, 프랑스군과 식민지인[6]으로 이루어진 부대를 위해 프랑스군 위안소(Bordel militaire de campagne, 영어: Bordels Mobiles de Campagne or Bordel Militaire de Campagne, BMC)를 운영했다. 제1차 세계 대전부터 프랑스에서 식민지였던 알제리, 인도차이나, 베트남 등에서 모집 또는 징집했으며, 식민지 여성을 이동배치 하는 방식으로 운용되었다.[7]

하술할 링크들에서는 단순히 일만 하는 줄 알고 속아서 자원했다거나, 1명의 여성이 100명의 군인을 상대해야 했다거나, 군인들의 신체 훼손과 폭력(mauvais traitement) 때문에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거나, 미성년자들까지 끌고 갔다거나 등 일본군 위안부랑 판박이인 사례들이 다수 언급된다.[8] 프랑스군 장성들이 BMC를 폐쇄하면 성병과 군인의 강간이 늘어날 거라고 믿었다는 것도 일본군과 판박이다.[9] 더 충격적인 것은 무려 2003년(!!!)까지도 지부티에서 BMC가 운영되었다는 것과[10] 한국에서 프랑스군 위안부를 '자발적인' 매춘부마냥 묘사한 적도 있다는 것이다.[11] # 심지어 프랑스군 위안부는 프랑스가 2차 대전의 승전국인지라 일본군 위안부에 비교하지 않아도 거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언급되더라도 '자발적인' 매춘부인 것마냥 언급되는 경우가 더 많은 판이니 더더욱 암울하다.

참고자료 1 2 3 4
참고논문(대도시와 식민지 사이: 20세기 식민지 모로코와 프랑스의 BMC)

4.2. 독일

독일은 제2차 세계 대전 때 폴란드, 러시아 점령 시 현지 여성들을 군인들을 위한 집창촌에 가두고 매춘을 하도록 강요했다. 참고 다만 독일 군인이 매춘 여성이 아닌 점령지의 다른 허락되지 않은 여성들을 강간할 경우 독일 군사재판에 의해 총살되도록 하였지만 현실은 시궁창. 독일도 사실 덴마크 이외 거의 전 지역에서 집창촌을 운영했으며 특히 프랑스 점령기엔 유대인의 예배당(시나고그)을 매춘소로 만드는 경우가 많았다. 이 여성들 중에는 매춘 여성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강제 연행 후 얼마간 집창촌에서 매춘한 후 풀어주는 식으로 모집됐다. 노르웨이에서는 같은 아리아인이라는 이유로 현지 여성 대신 동유럽 여성 중심으로 집창촌을 유지했으나 노르웨이의 여성은 레벤스보른이라는 아리안 아기공장에 수천명이나 강제 취업(?)됐으니 별 차이는 없었다. 자세한 내용은 독일 국방군의 전쟁 범죄 문서의 전시 강간 항목으로. 참고

4.3. 북한

북한에서는 기쁨조라고 문자 그대로 지도자 전용 위안부를 운영한 바가 있다. 빈말이 아니라 기쁨조 여성들은 위관급 계급까지 부여받았으니 사실상 위안부라고 봐도 무방하다. 일단 김일성, 김정일 시기에는 기쁨조가 확실히 운영되긴 했지만, 김정은 시기에도 운영되는지에 대한 여부는 불분명하다.

5. 관련 문서


[1] 그 중에는 윤락여성이었던 사람도 소수 있었고 돈을 벌기 위해 광고를 보고 스스로 지원한 사람도 있었지만 대다수의 여성이 속아서 왔다는 것이 문제이며 소수의 윤락여성과 다수의 피해자를 교묘하게 섞어서 문제의 본질을 호도하는 경우가 많다는게 일본 제국주의자 혹은 그 옹호자들의 역사 왜곡의 핵심이다. 그리고 자원했다는 사실 하나가 끔찍하고 잔인한 학대와 고문을 당하고 죽을 이유는 되지 않는다. 자원자도 인신이 구속된건 매한가지 였고 그 당시 기준으로도 문제되는 점이 한두개가 아니었기 때문에 위안부가 전시 성폭력의 대표주자 격으로 비난받는 것이다. 하술하듯 프랑스에서도 프랑스군 위안부를 '자발적인' 매춘부인 것마냥 왜곡해 프랑스군 위안부들의 참상을 철저히 은폐하고 있다.[2] 이러한 사례는 세계 인권 선언이 발표되고 근로기준법이 보편화된지금 거의 대다수 국가에서 금지되고 있지만 제3세계의 범죄조직을 중심으로 공공연히 자행되고 있으며 세계대전이 아닐 뿐이지 취업사기나 빚을 인질삼아 매춘을 강요하는 수법까지 위안부와 동일하다.[3] 정진성 (2003), 「일제 말 강제 동원기의 기업 위안부에 관한 연구」, 『사회와 역사』Vol.0 No.63, 한국사회사학회, pp. 196-227[4]홋카이도 신문.[5] 이들이 강제 징용 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6] 이유가 걸작인 게 "식민지 출신 군인들이 프랑스 여성들을 '건드리는' 것을 예방해야 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고 한다.[7] 일례로 모로코 여성이 베트남 BMC에서 일하고 베트남 여성들이 프랑스 본토나 유럽 등에서 일하는 방식이다.[8] 프랑스군의 학대가 오죽 심했는지 스톡홀름 증후군으로 의심되는 사례도 상당히 많이 보고되었다.[9] 물론 BMC가 있어도 프랑스군의 강간은 전혀 줄지 않았다.[10] 물론 이때는 시기가 시기인지라 민간인을 강제로 끌고 가는 사례는 없었을 것임이 확실시된다.[11] 애초에 미성년자가 BMC에서 일했다는 것부터가 프랑스가 현지 여성들을 강제로 위안부로 끌고 갔다는 것을 명약관화하게 보여주고 있다.

분류